Flash & Flesh

이승준 영상展   2005_0411 ▶︎ 2005_0429

이승준_Phone Conversation_단채널 비디오_00:08:00_2005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문신미술관 빛 갤러리 홈페이지로 갑니다.

초대일시_2005_0411_월요일05:00pm

숙명여자대학교 문신미술관 빛 갤러리 서울 용산구 효창원길 52번지 Tel. 02_710_9280 / 02_2077_7052 www.moonshin.or.kr

기억의 알레고리 ● 기억은 공포와 두려움, 사랑과 연민, 그리움과 미움 등과 같은 삶의 인간적 존재의 특성들이 복합되어있는 무의식과 잠재의식의 층위들로 구성되어 있다. 인간의 삶은 기억이 만들어내는 이미지들 속에서 삶의 질적인 특성들을 발견하고, 그런 질적인 특성들은 삶의 세속적 이미지들과 합성되어 기억에 남아있는 잔상들을 어루만지면서 우리가 삶을 바라보는 방식을 제어하고, 개인의 세계관의 구조적 형식과 정신적 장치들의 형성에 끊임없는 영향을 준다. ● 모더니즘이나 포스트모더니즘의 문화에 대한 언급이 예술의 정체성과 문화의 확산에서 찾을 수 있다면 뉴미디어 시대의 미학은 규정되지 않은 사회적 문화적 문맥들에 대한 의미의 발견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문맥들은 아직 규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우리 인간들의 의식의 차원에서 발견할 수 있는 규정된 형식(form)이 아닌 무의식의 차원에서 단지 느낄(sense) 수 있는 것일 뿐이다. 이런 상황이 이승준의 작업에서는 이미지에 물질적 구조를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상징적 형식을 주조하는 방향을 가지고 있고, 이것은 예술의 또 다른 층위이고 심급이다. 영혼이니 혹은 삶의 지리멸렬한 속성들과 같은 것들이 그의 작품에 대한 설명으로 적절하지 않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승준_Phone Conversation_단채널 비디오_00:08:00_2005

이승준의 작업은 예술적 기원에 대한 이미지화 작업이라는 맥락을 넘어 삶의 무의식적 기억에 대한 단상의 세계로 깊이 들어와 있다. 소박하게 말하면 한 작가에게 세계관은 자신의 삶의 방식을 투영시키는 그런 방향성이 여실히 드러나는 방식으로 형성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이승준의 작품에도 적용할 수 있지만 그의 작품을 약간 다른 관점에서 보아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은 작가가 상징의 세계와 대비적인 차원에서 이미지를 전이(transfer)하는 방식을 도입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상징과 예술을 어떤 하나가 다른 하나에 귀속되는 상황이 아닌 두 요소의 병치적인 연결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에게 상징은 자신의 작가로서의 존재를 넘어 존재의 분열을 구체화시킨다. 여기서 분열은 그의 작품에서 전체적으로 드러나는 현상으로 삶에 대한 일관된 인상이나 예술에 대한 의식의 작용이 가지고 있어야만 하는 통일적인 세계관이 아닌 지극히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즉 혼성(pastiche)적인 스펙타클의 세계에 비유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스펙타클에 필름 느와르(film noir)의 세계에서 자주 묘사되는 심리적인 갈등 상황을 도입하고, 그런 연결은 모더니즘적인 특성이라고 할 수 있는 존재의 속성이나 삶의 깊이감에 대한 반성적 접근도 아니고 앞에서 말한 포스트모더니즘의 분열적인 상황도 아닌 표면을 배회하는 공포영화의 분위기와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 - 뒤에서 언급하겠지만 이것은 그가 자신의 예술에 적용하는 환영(illusion)의 변형된 형식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 그의 작품에서 드러나는 표면적인 속성들은 그의 예술가로서의 훈련에서 비롯되는 경험적이고 질적인 배경과도 연결이 될 수 있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프로이드적인 의미에서 나르시즘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소박하게 말해 나르시즘은 자신의 의식적 주체에 대한 과도한 집착으로 이야기 할 수 있을 것이고, 주체에 대한 집착은 상상의 세계에 자기중심적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이것은 거의 모든 작가들에게서 발견되는 것이지만, 상징적 상황의 차원으로의 진행은 그런 분열의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시각적 상황 - 질서가 아닌 - 을 만들어준다. 그러므로 그의 작품에서 구체적인 문맥을 발견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 그 같은 상황은 표면을 떠돌거나, 모든 작품들을 일별해서 볼 때 발견할 수 있는 분위기 이상으로 정의하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그의 작품의 특성을 자기애 적이고 분열적이라고 평가할 수 있는 것이다. ●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예술작품의 형성과 관련된 상황들이 부정되는 이유는 이승준의 예술이 프로이드의 말에 의하면 "사유의 동일성"을 찾아가는 과정에 비유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이것은 우리 삶이 사물과 가지고 있는 1차적인 관계를 넘어 자신의 생각이 지향하는 바를 찾아가는 예술가의 작업에 대한 적절한 설명이기도 한데, 그러나 그에게 이런 경향은 삶의 구체적 경험들과 이어져 있지만 경험의 잔상으로 남는 기억들, 경험적으로 얻어지는 기억의 잔상들이 가지고 있는 질적인 속성들과 관련이 된다. 즉 그의 작품에서는 경험을 뛰어넘는 예술의 언어가 주조되고 있고, 그것은 그가 가상현실(virtual reality)을 작품화 시키는 것에 관련이 될 것이다.

이승준_The Prodigal Sons_2채널 비디오_00:13:00_2005
이승준_The Prodigal Sons_2채널 비디오_00:13:00_2005

이승준의 이번 작품에서 이미지의병치가 예전의 작품들에서 보다 더 두드러지게 작품 존재의 구조를 제어하고 있다. 조합과 맥락은 의미를 파악하려고 하는 것이고 그것이 부재하는 언어적 상황은 환유적 이라고 말한다. 영화 매트릭스의 몇 장면을 환유적으로 병치시키는 것은 매트릭스의 영화적 설정을 빌려 의미의 구조를 무의식의 지평으로 편입시키고자 하는 작가의 알레고리를 만들어내고자 하는 욕망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분할된 화면은 표면적으로는 이 세계에 대한 파편적 의식을 강화시켜주지만 우리의 삶이 의미 구조생산의 차원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한계를 상정하는 것이다. Phone Conversation(전화통화)과 The Prodigal Sons(돌아온 탕아)는 우리 의식의 구조가 무의식의 세계로 연장되는 것을 은유한다. "전화통화"(Phone Conversation)에서 왼쪽 면의 트리니티의 통화와 오른쪽 면의 네오의 통화는 서로 다른 사람에게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관객이 보는 화면은 마치 네오와 트리니티의 통화처럼 읽혀진다. 이것은 맥락을 제거한 환유적 상황이고 전화선은 맥루한이 말한 '인간의 확장'의 차원이 아닌 무의식 세계로의 통로이다. 그리고 이런 구도는 "돌아온 탕아"(The Prodigal Sons)에서 인간 무의식의 직접적인 표상으로 간주되는 성과 욕망의 대상이자 통로로서 - 혹은 물신숭배(fetishism)적인 집착과 강박(obsession)의 대상으로서 - 사이보그의 존재가 긍정된다. 매트릭스라는 영화는 컴퓨터 사이버 공간에서의 사건이고 사이버 공간에서 발생하는 사건들이 그들 등장인물들의 존재론적 조건들과 결투를 하는 곳이다. 그리고 이런 사이버 공간에서도 운명은 긍정된다. 그것은 영화의 주인공들에게 부여된 임무가 있기 때문이다. ● 이렇게 제시되는 이미지들을 통해 관객은 이승준이 드러내고자 하는 무의식의 세계가 어떤 질적인 속성들을 가지고 있을까에 대한 궁금증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으로, 여기서 그의 무의식은 그가 가지고 있는 경험의 유무를 떠나 예술적 의미의 세계와 직접적인 연결을 회복하고자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아마 무의식의 차원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심급의 개별적 속성들은 일상적 삶의 순환적 진행을 통해서는 드러나지는 않을 것이다. 게다가 우리가 의식적으로 관찰하지 않는다면 그런 층위들은 결국은 우리 인간들 삶의 주변으로 묻히고 말 것이다. 이런 것들은 예술작품을 통해, 특히 이승준의 영상이미지들이 가지고 있는 분위기 혹은 에너지 같은 것으로 나타난다. ● 이승준의 작품을 평가하는 중요한 개념은 아마도 재현(representation)과 상황(situation)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제3의 요소인 환영(illusion)은 재현과 상황을 매개하는 촉매로서의 역할을 한다. 그는 단순히 상황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경험들의 속성들을 재현한다. 그리고 그런 경험들은 일관된 고리를 가지고 묶을 수 있는 것들이 아닌 아주 단속적이고 파편적이다 - 물론 이것은 앞에서 말한 스펙타클과 연관되는 것으로 20세기 후반부터 목격하게 되는 이미지 일반의 특성이다. 여기서 경험들은 어떤 맥락(context)을 지닌 구조가 아니라 상황으로 드러날 뿐이다. 이런 상황들은 관객이 존재하는 실제 공간에서 관객 개인이 가지고 있는 환영적인 의지에 의해 매개되어 어떤 지향성으로 존재하기 시작한다. 그럴 때 관객은 그들 경험의 2차적인 구조를 어렴풋이나마 인지하게 되는 것이다 - 이것을 달리 말하면 상호작용성(interactivity)의 현재적인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이런 관계의 형성이 우리를 21세기적인 의미의 세계, 즉 우리가 영화나 다른 매체들을 통해 목격하고 있는 상상과 환상(fantasy)의 세계로 인도한다. 이것은 이승준이 집단무의식(collective unconscious)을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개념화 시키고 있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 - 여기서 우리는 이승준의 작품을 통해 삶의 숨겨진 의미들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숨겨진 의미라는 것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인식하지 못하거나 어렴풋이 인식하는 그렇지만 말을 통해 적극적으로 표현 될 수 없는 것을 말한다.

이승준_Three Ways to Dinner_3채널 비디오_00:03:10_2005
이승준_Three Ways to Dinner_3채널 비디오_00:03:10_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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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준의 미시세계의 인식의 틀은 몇 가지 특징적인 기억의 형식으로 드러난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범주가 기억이고, 이 범주와 동등하게 혹은 하부 상황으로 관계를 맺고 있는 것들은 행위, 반응, 관찰 등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의 작품에서는 이런 언어들이 가지고 있는 적극적인 기능들이 아니라 부정적인 역사성의 측면 - 개인적 기억의 무의식에 쌓여있는 정신적 외상(trauma)들과 관련이 있는 - 이 더 강하게 드러나고 있다. 이것은 작가의 인간으로서의 개인적 상황들이 아니라 개인이 의지하고 있는 기반인 이 세계와의 관계에 대한 기억들과 그 기억들이 끊임없이 발산하고 있는 에너지에 대한 변증법적 관계 맺음이고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작가에게 미학적 차원은 상황이 진행되는 과정이고, 지속적인 변화의 상태에 노출되어 있는 상대주의적인 패러다임으로 생각될 수 있을 것이다. "세가지 방식의 만찬"(Three Ways to Dinner)에서 고기를 썰고 있는 칼과 손의 이미지를 삼면화처럼 보여주는, 그리고 그런 이미지와 시간적으로 대비시킨 녹색의 컴퓨터 그래픽 이미지는 시간적인 병치와 공간적인 병치의 복합적 제시이다. 단순히 스테이크가 칼에 의해 쓸려지고 있는 상황만 보여졌다면 우리는 거기서 예수 혹은 구원자라는 암시를 받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적 전통회화에서 등장하는 삼면화 형식은 고기를 통해 예수의 이미지를 상상할 수 있게 해주고, 빌 비올라(Bill Viola)가 "낭트 삼면화"(Nantes Triptych)를 통해 '삶의 순환과 시간의 역사'를 보여주고자 했다면 이승준은 이 '매트릭스 트립틱'이라고 할 수 있는 "세가지 방식의 만찬"(Three Ways to Dinner)을 통해 '구원과 인간의 존재성'의 문제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21세기에는 그런 존재성의 문제에 가상현실이 개입하게 되고 - 컴퓨터 그래픽의 공간 - 이런 과정들을 통해 그의 작품은 알레고리적인 성격을 획득한다. ● 앞에서도 계속 언급한 것이지만 이승준의 예술은 사유의 과정에 대한 기록이 아니고, 삶에 대한 일관된 관찰은 더더욱 아니다. 사유가 지향하는 목적과 삶의 존재성에 개입되는 21세기적인 조건들이 하나의 알레고리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작가의 작품에 의해 지시되는 예술적 잔상들 혹은 작가가 영상을 통해 담아내는 이미지 자체에 대한 기억 - 기억의 현재화 - 들은 우리를 사색의 시간으로 인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관객들은 연민과 공포, 기억과 망각, 그리움 등과 같은 그들 존재의 의식을 구성하는 정신의 물리적 속성들을 그의 작품에 유비(analogy) 시킬 수 있는 것이고, 반대로 작가는 삶의 현상과 물리적 환경들을 그의 기억의 언어들에 유비시키고 있는 것이다. 결국 예술은 개인의 의식보다는 보편적 삶의 의지에 관련이 된다는 것을 이승준의 작품을 통해 분명히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술작품의 질적인 속성들을 통해서 볼 때, 개별 작품의 순수성에 선행하여 우리 삶이 존재와 인식이 하나로 얽혀있는 전체적인 구도를 지향한다는 것이 하나의 자명한 사실로 남는다. ■ 정용도

Vol.20050411a | 이승준 영상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