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그리기

류지선 회화展   2005_0413 ▶︎ 2005_0429

류지선_응시Ⅰ_캔버스에 지우개 가루_91×73cm_20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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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5_0413_수요일_05:00pm

갤러리 도올 서울 종로구 팔판동 27-6번지 Tel. 02_739_1405 www.gallerydoll.com

욕망, 이미지의 정치학 혹은 소비되는 이미지 ● 류지선의 그림들은 친근하면서도 낯설다. 친근한 것은 예술의 자율성과 회화의 내재율에 천착한 형식논리보다는, 재현과 서사의 논리에 바탕을 둔 내용중심의 방법론에서 기인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동물이나 사물과 같은 일상적인 소재들과, 만화와 애니메이션으로부터 현실 속으로 곧장 걸어 나온 듯한 친숙한 캐릭터들에서 기인한다. 그리고 낯선 이유는 이 친근한 소재들을 조합하는 방법론에서 기인한다. 동물과 사물, 동물과 사람, 사람과 캐릭터, 이미지와 오브제, 현실적인 풍경과 비현실적인 풍경, 구상적인 방법과 비구상적인 방법을 하나의 화면 속에 조합해냄으로써 일상을 낯설게 하고 있다. ● 주지하다시피 일상을 낯설게 하는 것은 아방가르드의 주요 전략 중 하나다. 이는 일상이 관습과 관례, 선입견과 편견, 상식과 합리의 지층으로 덧칠된 나머지 결코 그 자체를 투명하게 들여다볼 수 없다는 사실을 전제한다. 따라서 일상을 비틀음으로써 일상이 은폐하고 있는 억압의 계기들을 발견하고 주지시킨다는 실천적 행위에서 그 당위성을 찾으며, 이는 그대로 일상이라는 텍스트에 대한 행간 읽기와 이면 읽기 그리고 재독서를 요구해오는 형태로서 나타난다. 임의적이고 자의적으로 재편된 세계와 이렇게 재편되기 전의 세계를 비교해볼 수 있는 계기를 제안하고, 이를 통해서 그 차이와 거리를 주지시키는 것이다. 친근한 것과 낯선 것이 하나의 결로 만나고 있는 작가의 그림들은 이렇듯 일상을 낯설게 하기의 전략에 그 맥이 맞닿아 있다. ● 따라서 작가의 그림에서는 온갖 이질적인 현실의 편린들이 서로 만나고 있으며, 친근하고 낯선 다중적이고 양가적인 의미의 지층들이 중첩돼 있다. 이는 일련의 동물원을 소재로 한 그림들과, 동물에 빗대어 삶의 풍경을 들여다 본 그림들, 그리고 특히 토끼를 캐릭터로 불러들인 일종의 우의적인 풍경화의 형태로 나타난다. 그리고 팝아트에 대한 반응으로서 현상한다. 여기서 팝아트는 단순한 역사적 사실로서보다는 동시대적이고 당대적인 삶의 풍경의 한 형태로 보아야 한다. 리얼리즘과 마찬가지로 항상적으로 유의미한, 당대적으로 재정의되는 열려진 개념의 한 형태로 보아야 한다. 다시 말해서, 물신화된 페티시즘과 자본주의의 욕망이 결부된 상황조건 속에서 들여다본 시대적 논평의 관점으로 읽힌다. 형이상학적인 비전과 인간의 실존과 같이 정신적이고 가치론적인 것들, 애매하고 불투명한 것들, 비물질적인 것들을 물질적인 것으로 끌어내리고, 이를 계량화하고 수치화 하려는 자본주의의 욕망의 관성에 대한 비판의 한 형태로 읽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상대적으로 더 정제되고 함축적이고 암시적인 형태의 지우개 연작으로서 현상한다. 작가의 작업에 있어서 이러한 경향들이 순차적으로 나타난 것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그 이면에서 서로 긴밀하게 상호작용을 하고 있다. 일관된 주제의식의 다중적인 표현으로, 상호 내포적이고 중층화된 경우로 보인다.

류지선_응시Ⅱ_캔버스에 지우개 가루_91×73cm_2005

동물들, 타자 ● 류지선의 그림들 가운데 일련의 동물원 연작 그림은 인공환경 속에 사육되고 있는 동물들을 보여준다. 정교하게 손질된 인공자연과 콘크리트 구조물이 기묘하게 결합된 동물원의 이질적인 풍경 속을 동물들이 묵묵하게 지키고 있다. 이로부터는 괴이한 적막감을 불러일으키는 절대 고요와 함께 이질적인 인상이 동물들의 박탈당한 자연(성)을 침묵으로써 증언해주고 있다. 동물원은 이처럼 그림으로서 재현되기도 하고, 더러는 전시 공간 자체가 일종의 동물원으로 연출되기도 한다. 이는 작가에 의해서 제시된 상황 속으로 관객을 끌어들여 작업의 일부로서 참여시키려는 작가의 욕망이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 제시된 상황이란 관객들의 체험 속에서 동물원을 삶의 장으로 전이시키는 것이다. 동물원의 안쪽과 바깥쪽을 나누는 경계가 허물어지면서, 동물을 쳐다보는 사람과 그에 의해서 보여지는 동물의 정체성이 서로 연속되는 경험을 유도한 것이다. 그러니까 의미론적으로 동물원은 그대로 삶의 장의 한 형태인 셈이다. 인공적인 환경과 제도와 구조에 길들여진 인간의 현실이, 고도의 물질문명 사회와 지식문명 사회에서 비롯되는 소외를 그 자체 피할 수 없는 절대적인 현실로 받아들이는 현대인의 초상이 동물원과 오버랩 된다. ● 이처럼 동물원 연작 그림에는 동물에 빗댄 인간의 우의적 풍경이 배어져 있다. 여기서 동물원은 식물원과 함께 인간에 의해서 해석된 자연 곧 인공자연의 한 형태로 제시된 것이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자연을 자기화하려는 인간의 욕망이, 자연을 관리하려는 제도의 욕망이 놓여 있다. 여기서 자연은 단순한 물질적 지평을 넘어, 정형화된 인식과 지식의 안쪽으로는 붙잡아 들일 수 없는 모든 비합리적이고 비논리적인 것들을 아우른다. 그러므로 자연을 관리하려는 제도의 욕망은 자연의 본성을 부인하고 억압하는 전제 위에서만 가능한, 그 자체 모순율의 산물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 그런가하면 동물을 소재로 한 작가의 그림들 중에는 유독 토끼가 많이 등장한다. 소심하고 겁이 많은 만큼 외부로부터 요구되는 억압의 계기에도 순종적인 토끼가 일종의 보이지 않는 손이랄 수 있는 제도에 의해 길들여지고 훈육된 현대인의 무기력한 모습을 대변해주고 있는 것이다. 이는 무엇보다도 물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인간의 신체와 토끼의 머리가 결합된 그림에서, 그리고 어둠 속을 향해 몸을 던지고 있는 토끼 그림에서도 확인된다. 여기서 물은 삶의 바다를, 그리고 어둠은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심연과 무의식을 암시해준다. 그런가하면 화면을 온통 가득 메우고 있는 과일과, 이와는 상반되게 실루엣으로만 처리된 토끼 그림에 등장하는 토끼는 일종의 반어법을, 아이러니를 불러일으킨다. 말하자면 자본주의라는 이름의 풍요로운 제국에 초대받은 그 실체가 없는 토끼, 주체를 상실한 익명적 토끼를 말해준다. 그러므로 그 토끼는 엄밀하게 말해서 그 제국에 초대받지 않은 것이며, 단지 자기의 소외를 전제로 해서만 그 초대에 응할 수 있는 것이다. 작가는 이처럼 비교적 의미론적 성향이 뚜렷한 그림들을 그린다. 그렇다고 단순히 판에 박힌 메시지의 전달에 치중하기보다는, 그 메시지나 의미가 많은 경우에 있어서 암시적이고 다중적인, 서사적이고 문학적인, 여러 이질적인 지층들에 중첩되거나, 그 이면으로 잠수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 일련의 동물 그림들에 나타난 동물들은 레비나스(Emmanuel Levinas)의 타자를 상기시킨다. 그에 의하면 타자의 얼굴은 곧 절대자의 현현이다. 말하자면 동물들로 대리된 현대인의 초상은 그 자체가 고통과 연민을 자아내는,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공감에 호소해오는 절대자의 얼굴인 것이다. 동물들에게서 나는 너의 초상을 보고, 이와 동시에 나의 초상을 본다. 너는 곧 나인 것이다.

류지선_꽃밭에서_캔버스에 지우개 가루_91×73cm_2005

욕망, 이미지의 정치학 혹은 소비되는 이미지 ● 류지선은 동물 그림과 함께 근작에서는 '중독'이라는 명제를 주제로 한 일련의 작업들을 진행해오고 있다. 이를테면 초점이 맞지 않은 TV 화면의 화려하지만 흐릿한 화면을 배경으로 하여, 그 위에다가 가는 실로 인간의 두상 형상을 중첩시킴으로써 영상에 중독 된 현대인의 일상을 풍자한다. 이때 소재로서 차용된 실은 그 자체 조형적인 한 요소로서 기능할 뿐만 아니라 표정과 같은 일말의 의미론적인 기능마저 내포하고 있다. 또한 웃고 있는 인간의 얼굴과 토끼의 형상을 대비시킨 그림에서는 타자와의 관계에 있어서의 웃음 뒤에 숨은 공허함을(이는 타자와의 진정한 소통에 대한 회의로 나타난다), 그리고 쇼핑백과 팝콘과 같은 현대 소비사회의 일상적인 아이템을 소재로서 도입한 그림들에서는 쇼핑 중독을 각각 풍자한다. ● 이처럼 작가는 현대인의 일상적인 삶의 풍경이 돼버린 명품중독, 게임중독, TV중독과 같은 일련의 중독현상을 그려내고 있으며, 그 속에는 욕망에 바탕을 둔 자본주의의 메커니즘에 대한 반성이 함축돼 있다. 여기서 자본주의의 욕망은 욕망 자체를 충족시켜주기보다는 새로운 욕망을 불러오기 위한 계기로서 작동할 뿐, 결코 그 대상에는 이르지 못한다. 오히려 욕망은 끊임없이 지연되고 보류된다. 결국 자본주의의 본질은 욕망의 충족이 아닌 욕망 그 자체에 있으며, 이에 대해선 그 자체 순수한 이미지, 추상적이고 허구적이고 심리적인 이미지에 지나지 않는다고까지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가하면 욕망은 결핍과 결여로 나타난 인간의 존재론적 조건이기도 하다. 이로써 작가의 작업의 이면에는 결코 채워지지 않는 욕망에 바탕을 둔 자본주의의 메커니즘과 인간의 존재론이 맞물려 있는 상호관계에 대한 이해가 깔려 있는 것이다. ● 그리고 이는 그대로 현대인이 겪는 정체성 상실과 혼란의 한 징후에, 그리고 무의미한 삶을 보상받기 위한 일종의 자기암시에 바탕을 둔 중독 현상에 접맥된다. 여기서 중독은 그 자체 하나의 구체적 실체를 갖는 물질적 대상으로 나타나는가 하면, 소비에 대한 무모한 욕망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나의 순수한 이미지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말하자면 장 보들리야르(Jean Baudrillard)가 현대사회를 소비사회로 규정하면서 내놓은 시뮬라크르(Simulacres) 개념에 맞닿아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순수한 이미지, 소비되는 이미지, 시뮬라크르는 그 자체 소외를 부르는 원인이자 결과로서 작동한다. 그러니까 노동으로부터 삶의 의미를 소외시키고(자본주의의 본질로서의 소외), 타자와 주체와의 유기적인 관계를 소외시키고(대타적 소외), 마침내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스스로를 소외시킨다(실존적 소외).

류지선_침묵_캔버스에 지우개 가루_130×162cm_2005

류지선의 그림에는 소비를 종용하고, 중독으로 유도하며, 마침내는 소외를 내재화하는 광고, 매스미디어, 에로티시즘, 상품, 영상, 만화, 쇼핑백, 팝콘과 같은 온갖 대중문화의 부산물들이 차고 넘친다. 결핍과 결여에 바탕을 둔 인간의 존재론에 과잉과 잉여에 바탕을 둔 또 다른 존재론이 포개진 것이다. 이 과잉과 잉여의 부산물들은 삶의 풍경을 욕망의 만화경으로 변질시키고, 이는 그대로 매스미디어가 생산한 이미지로 연출된 스펙터클 사회 즉 구경거리의 사회가 소외와 억압을 종용하는 현실을 은폐한다고 보는 기 드로브(Guy Debord)의 상황주의 논리에 연속된다. 그 논리의 연장선에서 나의 정체성이 소비되고, 나의 몸이 소비되고, 나의 의식이 소비된다. 나는 비로소 하나의 순수한 재화, 상품, 이미지가 된 것이다. ● 작가는 이질적인 것들을 병치시키는 방법을 통해서 이런 순수한 이미지로 화(化)한 인간의 존재를 표상한다. 특히 사람과 피자를 결합한 피자맨에서 욕망의 주체는 욕망의 대상과 뒤범벅된 형태로 나타나며, 이는 정체성을 구분하기 위한 최소한의 근거마저도 상실한 극도의 혼란 상태를 보여준다. 욕망의 대상이 욕망의 주체를 집어삼킨 욕망의 전도 현상을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그런가하면 제트비행기 혹은 공군기와 피자를 결합한 그림에서는 자본주의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를 내세운 신제국주의 혹은 후기 식민주의에 대한 논평을 엿볼 수 있다. 이 일련의 그림들에서 욕망은 거만한 소파의 형태로 나타나며, 그 욕망의 정신병리학적 증상을 치유하기 위해서 캡슐 형태의 알약이 동원된다. 욕망은 팝콘처럼 부드럽고, 솜사탕처럼 달콤하며, 소파처럼 푹신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제트기처럼 공격적이다. ● 근작에서는 이처럼 외관상 서로 무관하게 보이는 온갖 이질적인 요소들이 하나의 화면 속에서 재구성된다. 팝아트의 소재가, 동물적인 우화가, 기타 의미론적인 요소가 중첩된다. 초콜릿과 팝콘과 같은 작은 소재들을 화면 가득히 크게 확대하여 그리거나, 이질적인 사물들을 서로 결부시킨 그림들에서는 일말의 낯설음, 생경함, 의외성이 발견된다. 그리고 이를 반어법과 아이러니의 화법이 지지해주고 있는 것이다.

류지선_동상이몽(同床異夢)_캔버스에 지우개 가루_73×61cm_2005

지우개 그림 ● 작가는 화면에다가 지우개 가루를 부착하는 방법으로써 일종의 동물 형상을 재구성해낸다. 동물을 소재로 차용한 점과, 그리고 동물에 빗대어 인간의 삶을 들여다본 점에서는 그 주제의식이 전작에서의 여타의 동물을 소재로 한 그림들에 이어져 있다. 지우개 가루를 이용하여 재현해낸 이 동물의 형상들은 그 질감이 실제 동물의 표피와 유사성을 암시해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개는 그 세부가 지워진 실루엣의 불완전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또한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포지션 자체는 물론 보는 이로 하여금 심리적인 불편함을 유도하기 위한 것이지만(일종의 인지 부조화 현상에 바탕을 둔), 이 역시 불완전한 모습이기는 마찬가지다(이에 반해 일부 측면으로 묘사된 동물 형상은 상대적으로 실제에 더 가깝다). 따라서 이는 그대로 익명적이고 양가적이고 다중적인 주체로 나타난 인간의 불투명한 정체성을 대리한다. 또한 동물들은 흔히 화면을 가로 세로로 교차하는 빈 막대에 의해서 가려진 형태로 현상한다. 이때 빈 막대는 일종의 양가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즉 막대 자체는 동물들을 억압하고 가두는 창살이면서, 이와 동시에 타자로서의 동물들에 대한 공감을 호소해오는 십자가(인류애의 상징인)일 수도 있다. 마치 심리 테스트를 위한 그림처럼 이미지와 의미가 모호하게 만나고 있으며, 그만큼 중의적인 의미를 향해 열려 있는 것이다. ● 그런가하면 이 일련의 지우개 그림들은 재료의 확대라는 관점에서 접근해볼 수가 있다. 전작에서 작가는 이미 실리콘을 이용한 그림을 그리기도 했었다. 흔히 지우개 가루는 창작의 부산물로 간주되기 마련인데, 작가는 이와는 거꾸로 버려진 지우개 가루를 이용하여 그림을 그림으로써(엄밀하게는 그림을 재구성해냄으로써) 그리기 자체의 문제에 대해 반성한다. 특히 연필화에서 그리기란 연필에 의해 그려진 일방적인 프로세스로서보다는, 연필에 의한 그리기와 지우개에 의한 지우기(교정하기)의 상호 역동적인 관계로 보인다(목탄과 같은 단색의 묘화 재료를 이용한 그림 역시 그 경우가 다르지 않다). 그러므로 지우개에 의한 지우기는 실은 그리기의 한 부분인 것이다. 실제로 지우개 가루는 어떤 이미지를 낳는 과정에서 비롯되는 산물이며, 따라서 그 속에 그려진 그림을 숨기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우개 가루를 이용하여 재구성해낸 작가의 그림은 그리기와 지우기의 역동적인 관계를, 그 불투명한 경계를 함축해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 류지선의 그림들은 재현적이고 서사적인 문법에 그 바탕을 두고 있다. 그러면서도 직설적인 화법을 빌려 이데올로기와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유혹에 빠지지는 않는다. 그보다는 외관상 무관한 여러 이질적인 의미의 편린들을 중첩시키고 대질시키는 방법으로써 다중적이고 중의적이고 암시적인 의미를 향해 열려 있다. 대중적인 소재와 동물적인 우화가 어우러진 그 그림들에서 삶의 풍경은 때로는 결핍으로, 그리고 때로는 과잉으로 나타난다. 인간의 부질없는 욕망(욕망은 결코 그 대상에 이르지 못한다)을 대리하는 동물들이 연민을 자아낸다. ■ 고충환

Vol.20050413a | 류지선 회화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