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boo Yogini

낸시랭 회화展   2005_0408 ▶︎ 2005_0504 / 일요일 휴관

taboo yogini series_합성수지에 혼합재료, 홀로그램, 크리스탈_73×53cm_2005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낸시랭 홈페이지로 갑니다.

오프닝 파티_2005_0408_금요일_06:00pm

갤러리 드맹 서울시 강남구 청담동 12-17번지 Tel. 02_543_8485 www.demain.co.kr

새디스틱 낸시랭 ● 낸시랭을 접하면서 난감함을 느낀 사람은 나 뿐만은 아닌 것 같다. 그녀에 앞에서 즉각적인 긴장증을 일으킨 사람도 나 뿐만은 아닐 것이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그녀의 순진한 웃음과 창작에 대한 열정을 접하면서 순수한 호의와 숨겨진 욕망 사이를 오갔었을런지에 대해서도 짐작조차 할 수 없다. 낸시랭은 일종의 현상이라고 부를 만한 예외적 상황들을 이끌어낸다. 그런 그녀를 보면서 뭐랄까... 일종의 새디스틱한 분석이 필요하다고 느낀건 왜일까? 결국 이 글은 낸시랭에 대한 글이기도 하지만, '낸시랭'이라는 사실(fact)에 대한 글이라고 하는 것이 더욱 정확할 것이다. ● 프랑스 혁명기를 살았던 사드 백작의 가장 중요한 프로젝트는 '쥐스틴느'이라는 소설이었다. 세 번에 걸쳐 매번 증보되면서 다시 출판된 바 있고, 결국 금서(禁書)로 낙인찍혀 오랫동안 검열의 대상이 되었던 이 소설은 사고로 부모를 여의고 안락한 환경에서 갑자기 험한 세상에 내팽개쳐진 두 자매의 일대기를 다루고 있다. 바로 쥴리에트와 쥐스틴느가 그들이다. 자신들이 자라온 상류층 자제들을 위한 수도원을 나서면서 쥴리에트는 쥐스틴느에게 세상을 거스르지 말고 현실에 몸을 맡기는 것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이라고 강조한다. 이에 대해 쥐스틴느는 어떤 상황 하에서도 자신의 영혼이 이르는 대로 미덕을 간직하며 살아가겠다고 반박한다. 결국 이들은 여기서 헤어져 각각의 삶을 살아가게 되는데, 소설은 이 두 여성의 삶을 극명하게 대비시키면서 쥴리에트가 온갖 악덕을 통해 세속적 부와 명예를 얻는 과정을 보여주는 한편, 철저한 파멸과 수치 속에 살아가는 쥐스틴느의 모습을 통해 숭고함과 미덕은 그것의 필요성을 드러내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고난을 요구하는가 라는 명제를 시험대에 올린다. 심지어 결말에 이르러서는 쥐스틴느가 언니로부터 구조를 받은 뒤 벼락에 맞아 죽는 반면, 쥴리에트는 동생의 귀감을 통해 회개, 종교에 귀의하여 구원을 얻어 성녀로 추앙받게 된다는 결말까지, 의도적으로 두 삶에 대한 철저하게 불공평한 관점을 천착하고 있다.

taboo yogini series_합성수지에 혼합재료, 홀로그램, 크리스탈_73×53cm_2005

낸시랭에 대한 글을 쓰면서 이 스산한 에피소드를 떠올리는 것은 다음의 세 가지 이유 때문이다 : 첫 번째는, 이 아름다운 여성이 예술가로서 스스로를 재현하는 방식의 철저한 세속성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서 일종의 예술적 독특함처럼 지속적으로 환기되는 태도의 투명함 (거의 백치미에 가까운, 그래서 더욱 쥐스틴느를 떠올리는) 때문이다. 두 번째의 이유는 그의 작업 속에서 일관되게 다루어지고 있는 시각 속에 떠오른 대상으로서의 '여성의 신체'와 그것의 재현이라는 오랜 주제에 대한 것이고, 세 번째 이유는 '낸시랭'이라는 브랜드가 갖고 있는 잠재적 역량에 대해 말할 때 필연적으로 다루어지게 될 정체성을 둘러싼 다양한 서사의 가능성에 대한 것이다. 이 세 가지 지점은 낸시랭을 비평적으로 다루기 위한 위치를 제공할 뿐 사실상 낸시랭 본인과는 상관이 없을지도 모른다. 역설적으로 낸시랭을 예술가로 보이게 하는 것 역시 바로 이 점일 것이다. 철저하게 주체인 것. 시선을 받기만 할 뿐 그것을 되돌리지 않는 주체, 또는 자신의 고유한 영토 위에서만 반응하는 주체. 자신이 몰입하고 있는 것만을 성실하게 재현하는 이러한 사람을 우리는 예술가라고 부르지 않았던가? 게다가 흥미로운 것은 이 주체를 바라보는 시선들이 스스로의 내부에 야기 시키는 긴장증의 속성이다. 이것에 대해서는 지금부터 이야기하려고 한다. 다시 앞의 세 가지 이유들로 돌아가 보자.

taboo yogini series_합성수지에 혼합재료, 홀로그램, 크리스탈_73×53cm_2005

첫 번째로, 사드가 구상한 이분법적 서사는 세계가 불균형을 통해 어떻게 세속적 논리보다 상위에 존재하는 초월적 논리를 드러내는가를 증명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를 위해 그는 세속적, 주관적, 물리적, 정치적 규범들을 옹호하는 악당들과 정신적, 초월적, 형이상학적, 종교적 규범을 고수하는 쥐스틴느 사이에서 끝없는 논쟁과 갈등, 성적 도발과 폭력의 순환을 생산해낸다. 국가권력과 자본은 여기서 쥐스틴느의 고난을 합리화하는 조건에 불과하다. 주된 대립은 상대주의자로서 완벽하게 스스로를 정당화하는 순수한 악의와 스스로를 정당화할 아무런 구체적 물증도, 자신을 지켜줄 현실적 규범도 없는 순수한 선의 사이에서 일어나며, 주된 위기는 이 둘 사이의 경계가 욕망과 이성에 의해 번갈아가며 흐려지는 사이에 발생한다. 이렇듯 쥐스틴느의 이야기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근대적 패러디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이것은 여자에 대한 이야기다. 사실상 이원성의 도식은 쥐스틴느에게 가해진 모든 악행의 추상적 등가물이라고 할 수 있을 쥴리에트와의 관계 속에 내재해 있다. 쥴리에트와 쥐스틴느. 이 둘은 여성성으로 체화된 동일한 세계의 두 가지 측면이다. 낸시랭은 자신의 주요 작품인 'Taboo Yogini' 시리즈에서 선과 악의 중간에 존재하는 '요기니'라는 존재를 만들었다. 잘려지고 파헤쳐진 해부학적 신체의 잔해로 이루어진 날개와 다리, 다이아몬드 형태의 또 다른 다리, 공격적인 금속들로 이루어진 '건담 로보트'의 몸체, 여성이나 아이의 머리 등으로 이루어진 이 괴물은 항상 루이 뷔똥 가방을 들고 있으며 성경의 문구나 기도가 쓰여진 배경 위를 체공(滯空)하고 있다. 이 여성적 정체성을 지닌 정신분열적 합성물이 왜 선과 악의 중간자로 제시되고 있는가 하는 것은 미스테리가 아닐 수 없다. 게다가 제목에는 '금기'라는 의미의 'Taboo'가 덧붙여져 있다. 이 세상에 나와서는 안 될 존재이거나 또는 그렇게 간주되어 왔다는 의미다. 이 '타부 요기니'는 동양과 서양의 여인들, 온갖 명품 브랜드와 만화의 캐릭터들로 전전하면서 말하자면 '편재성'(omnipresence)을 그 고유한 속성으로 갖는다. 일종의 '신'(神)이라고 볼 수 있을 이 '타부 요기니' 역시 세계의 이원성을 여성의 몸 안에 체화한다. 각각의 작품에는 이러한 신화적 무용담에 소재를 제공한 오브제들이 왼쪽 하단에 부착되어 있는데, 이야기의 형식은 프라모델의 케이스 위에 그려진 과장된 만화처럼 독해하게 되어있다. 마치 이렇게 이야기하는 듯 하다 : 이 그림은 여기 붙어있는 오브제의 실제 모습이며 실제 속에서 세계는 선과 악이 합체를 이룬 분열적 여성이다.

taboo yogini series_합성수지에 혼합재료, 홀로그램, 크리스탈_73×53cm_2005

뭐랄까, 낸시랭은 사드가 묘사한 두 여성을 한데 합쳐놓은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왜 인물에 대해 이야기하느냐 하면, 사실 낸시랭의 경우 작품의 주제는 작가 자신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녀가 '타부 요기니'인가에 대해서는, 그렇다고도 아니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퍼포먼스 아티스트이자 화가인 낸시랭의 경우, 작품에 대한 독해에 작가의 태도가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것이다. 놀기 좋아하는 자칭 날라리이자, 자신의 여성적 매력을 (그것도 귀엽지만 매우 선정적인 방법으로) 유감없이 활용하는 이 작가에 대해 심각한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바보스런 일처럼 보인다. 이제까지 매스컴이나 대중잡지를 통해 소개된 그녀에 대한 기술은 일관되게 그녀의 '선정성'을 옹호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여기서의 키워드는 '애교' 혹은 '파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낸시랭의 '선정성'에 대한 옹호는 그녀의 '순진한 열정'(김경)이나 '불안할 정도의 순진함'(유혜성)과 같은 특이한 지적으로부터 비롯된다. 사고의 순박함, 관계의 순정성, 의도의 순수함, 행동의 순진함, 등등. 낸시랭에 대한 설명은 백치나 혹은 어린아이에 대한 그것을 방불케 한다. 또는 쥐스틴느를 연상시키는 것이다. 단지 낸시랭에게 있어 고난은 예술적인 문제들로 치환된 것뿐이다. 그녀가 자신의 신상에 일어났던 온갖 불행에 대해 이야기 할 때, 그리고 기독교 신앙에서 자신의 가장 단단한 기반을 발견한다고 말할 때, 그리고 이제 자신이 나아갈 길이 예술뿐이라는 것을 확신하게 됐다고 말할 때, 내가 그녀에게서 쥐스틴느의 환영을 본 것은 우연이었을까?

taboo yogini series_합성수지에 혼합재료, 홀로그램, 크리스탈_145×97cm__2005

두 번째로, 같은 이야기가 되겠지만, 낸시랭의 모든 퍼포먼스나 그림들은 모두 '여성의 신체'에 대한 재현을 다루고 있다. 다시 사드를 인용하면, 사드에게 있어 여성의 신체란 가장 성스러운 것이면서 동시에 세계가 가장 먼저 그것의 악의를 자행하는 장소로 설정되고 있다. 그것의 구현을 위해 사드가 그것을 재현하는 방식은 철저하게 여성의 신체를 경제적, 산술적, 물리적인 사고가 행동으로 실현되는 무대로 다루는 것이다. 반대로 여성이 자신의 미덕을 시험받는 이유는 그녀가 숭고한 영토로서의 신체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며, 그것이 곧 자본화 혹은 자신의 부정으로의 유혹과 폭력의 충동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낸시랭은 처음부터 자신을 공개하고 나아가 공적인 것으로 선언(publish)했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데 있어 마치 아무런 저항감을 느끼지 않는 것 같다. 오히려 그녀는 '새로운 모습을 기대해 주십시오'라는 광고문구를 '낸시랭의 마음'이라고 고백한다. 여성에 대한 오랜 신화 가운데 하나인 '공적 여성'(public woman)은 그리스, 로마 시대의 공창이자 사제였던 신탁의 여인들로부터 오늘날의 '직업여성'에 이르기까지 여성의 신체적 공유를 적시하는 남성들의 용어이다. 그런데 낸시랭의 공적 신체에 대한 선언은 '사인회'나 '퍼포먼스 파티'와 같은 주도적인 장소에서 자신을 '공적 이미지'로 위치시키는 훨씬 적극적인 입장을 보여준다.

taboo yogini series_합성수지에 혼합재료, 홀로그램, 크리스탈_73×53cm_2005

연예인 같은 태도로 팬티를 내린 자신의 엉덩이에 사인을 해서 나누어 주었던 2004년 광주 비엔날레의 퍼포먼스를 위시해서 툭 하면 비키니 바람으로 나타나는 그녀의 도발적 출연작들은 최근 범람하는 연예인 누드화보와는 다른 의미에서 시선의 흥분을 불러일으킨다. 시각적인 성적 유혹은 그 자체가 클리셰(clich?)다. 반면 낸시랭의 몸은 낸시랭의 주체가 가로지르는 무대다. 낸시랭의 경우 여성의 신체는 강렬한 주체의 인상 아래로 종속된다. 물론 여전히 무대인 몸은 관객들의 시선에 긴장증을 일으키는 주된 장치임은 분명하다. "아저씨 날 좀 똑바로 보라구요!"라는 요구는 너무나 이러한 힘의 관계를 정확하게 드러낸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낸시랭이 하나의 예술적 서명으로 자리잡을 수 있는 조건이 성립된다. 예술적 서명은 모든 장치들을 하나로 묶는 주체를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사실상 낸시랭은 신체를 드러내지 않는 경우에도 똑같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앞서 말한 것처럼, 여기서 모든 이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여성성이란 좀 더 다른 차원의 것이다. ● 순서대로 나열하자면, 낸시랭의 작품은 그녀 자신 → 그녀의 그림들 → 그녀의 신체를 둘러싼 사건들(퍼포먼스, 파티, 사교, 등) 순으로 분석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신체에 대한 시선 속의 잔상을 기억하면서 그녀가 바라보는 신체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 비로소 그녀의 그림들에 나타나는 가해적이면서도 복음적(evangelic)인 이중적 여성의 신체에 대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세 번째 주제이자, 이 글의 요지인 '그녀'의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가 시작된다. 낸시랭은 한국인이자 미국국적자인 박혜령의 화명(畵名) 또는 브랜드 네임이다. 미국에서는 살아본 적도 없고 대신 필리핀에서 고등학교를 다닌 게 전부인 이 소녀는 마치 재미교포 3세 정도 되어 보이는 매너와 억양으로 자신이 스쳐지나가는 모든 장소와 인물들에 낯설음 (D?paysement)을 불러일으킨다. 무엇보다도 한국의 사회 문화적 정서나 컨텍스트에 전혀 무지한 것처럼 보이는, 심지어 4.19가 뭔지를 물어보는 이 여성에 대해 그녀를 만나본 사람들이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호감을 느끼는 건 왜 그럴까? 게다가 한국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성적(性的) 표현마저 매우 순진한 우호적 놀이로 바꾸어 버릴 수 있는 개방성과 친근함은 도저히 이 지역의 것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운 자연스러움의 수준을 보여준다. 물론 그래서 클럽을 전전하고 스스로 뱀파이어가 되는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낸시랭의 경우는 좀 더 밝고 주성(晝性)인 개체다. 물론 압구정이나 홍대앞을 중심으로 한 놀이문화가 이미 지역성을 벗어난 지 오래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완전히 믿기지 않는 것은 각각의 개인 안에 내면화된 충돌들을 어쩌지 못하는 경우를 숱하게 보아오기 때문이다.

taboo yogini series_합성수지에 혼합재료, 홀로그램, 크리스탈_180×245cm_2005

강영민은 낸시랭의 비-지역적 특색을 '옥시덴탈리즘'(occidentalism)이라고 표현한다. '오리엔탈리즘'이 서구의 시선이 주체가 되어 동양을 자기화(appropriate)하는 것이라면 '옥시덴탈리즘'은 동양인이 주체가 되어 서구를 자기화하는 것이겠다. 그러나 여기서도 문제는 동양인의 시선 속에 '옥시덴탈리즘'이라는 용어를 성립시킬 만큼 시선의 주체가 갖는 권력의 컨텍스트가 존재하는가 라는 것이다. 그것은 자칫 도용이나 차용과 혼동될 수 있다 (사실 영어로는 같은 단어다). 도용이나 차용은 (사드가 달빌이라는 악당의 입을 빌어 언급한 용어를 빌면) 노예의 입장에서 비롯된다. 낸시랭은 대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순수하게 원하는 주인의 위치를 '구축'한다. 그녀는 자신이 바라는 것 외에는 잘 알지 못한다. 아무도 그녀의 무지에 대해 탓하는 것 같지 않다. 나는 낸시랭을 '짝퉁'(fake)이라고 불렀는데, 잘못 만들어진 가짜라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타자의 시선 속에 유사성의 오류를 일으키는 특이한 회로(circuit)라는 의미에서다. 낸시랭의 놀라운 점은 본인에게 이 모든 것이 아무런 충돌을 일으키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그녀에게는 성적 분리나 자기 검열, 규범적 반성, 사적 고립 같은 것이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과연 그런 것이 가능한 것일까? 여하튼 순수하게 자발적인 주체로서의 그녀의 '그녀 자신에 대한 재현'은 낸시랭이라는 고유명을 통해 사람들의 마음을 파고드는 것 같다. 어쩌면 이건 '낸시랭'이라는 제목의 픽션일지도 모르지만 달콤한 픽션인 것은 분명하다. ● 쥐스틴느라는 픽션의 가장 이상한 부분은 맨 마지막 부분이다. 모든 고난으로부터 구조된, 처음으로 평화와 안전을 보장받은 그녀가 보인 우울증은 사드가 마르크스와 프로이트를 어떻게 뛰어넘는지를 보여준다. 사드가 소설 속에서 늘어놓은, 쥐스틴느에게 있어서는 미덕의 간증이 삶의 유일한 이유이자 목적이었다는 식의 설명은 본질을 살짝 가려놓은 것에 불과하다. 이 소설-기계의 본질은 이원적으로 대립하는 세계를 구동하는, 끊임없이 흥분하는 추상적 힘에 대한 것이다. 인물들을 가혹하게 정점으로 내모는 추상적 힘. '낸시랭 팩트'의 흥미로운 점은 그녀가 반복적으로 재현하는 '요기니'의 이미지에서 암시하는 것처럼, (뒤샹의 '흥분하는 여성'이라는 주제를 거론하지는 않더라도) 그녀 자신이 스스로를 끊임없이 흥분된 주체로 보여주는 방식이다. 아마도 이 흥분에 대해서는 또 다른 긴 서술이 필요할 것이다. 굳이 말하자면, 낸시랭이 쥐스틴느와 다른 점은, 그녀에게 세상은 훨씬 우호적이고 그녀가 믿는 것은 예술이라는 사실이다. 물론 여기에도 시험은 존재한다. 아마도 그것은 쥐스틴느에게 있어서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설명하기 까다로운 것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그녀가 얼마나 자신의 '주체'를 특이(singular)하게 실현하는가에 대한 것일 것이다. 특이성(singularity)이란 주체가 일반적인 관념 속으로 분류되거나 함몰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여기가 그녀의 프로페셔널리즘이 자리잡는 곳이기도 하다. 그녀가 이제 막 런칭한,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간단한 구조로 되어있지만은 않은 이 브랜드가 '행복한' 스토리로 계속 이어지기를 빈다. ■ 유진상

Vol.20050414a | 낸시랭 회화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