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cycle Girl

박정원 회화展   2005_0419 ▶︎ 2005_0428

박정원_자전거소녀_판넬에 아크릴채색_120×120cm_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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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5_0419_화요일_06:00pm

다빈치 갤러리 서울 마포구 서교동 375-23번지 카사 플로라 B1 Tel. 02_6409_1701 blog.naver.com/64091701

生의 한가운데, 소녀들의 한가운데 ● 박정원은 자신의 그림들에 대해서 '가학적'이라거나 '병적'이라는 일탈(逸脫)적인 평가를 가장 많이 들어 왔다고 한다. 그러면서 자신의 그림에는 '남자가 없다'라는 말을 덧붙였다. 나는 곧 남자가 보이지 않는 그녀의 '일탈적인' 그림들을 지켜보다가 조금씩 안타까워져 갔다. 내가 소년이었을 때, 그림 속의 소녀들처럼 잘려지고 뒤틀려진 불구이거나(거의 모든 소녀들), 목마를 타는 대신 척추에 봉이 꽂혀져 목마처럼 돌아가고 있거나(목마소녀), 항문에 바퀴가 움푹 꽂혀 있는데 양 다리를 양 손으로 붙잡아 태연히 올리고 있거나(자전거 소녀), 다리가 셋인 기형이거나(수상한 다리들), 땅따먹기를 하는데 공기돌 대신 노란 알약들을 한 움큼 움켜쥐고 있는(땅따먹기) 소녀들을 못 만난 것이 진정 후회스러웠기 때문이었다. 결국 모든 소년들은 그렇게 결여와 뒤틀림으로 인한 불구이거나 자연스런 성적 욕망으로 사회적으로 불온해진, 혹은 동시적으로 그녀들의 웃음과 무중력 상태로 뭇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드는 소녀들을 못 만나고 만다.

박정원_의자소녀_판넬에 아크릴채색_120×120cm_2004
박정원_목마소녀_판넬에 아크릴채색_120×120cm_2004

눈을 감고 '소녀'라는 단어를 발음해보라. 그 발음에서 번져 오르는 '소녀'의 하얗고 순결한 시니피에는 봉에 꽂혀있거나 다리가 셋인 그런 다정의 화냥 같은 소녀들의 영역이 아니다. 그래서 소녀들의 한가운데에서는 백설 공주를 꿈꾸는 소년도, 남자도 모두 쫓겨나 있다. '남자가 쫓겨난' 그림 속의 소녀들은 인간 존재에 대한 안이한 선입견을 그 근저에서부터 뒤흔들어주며 대개는, 사물들과 교접하고 있다. 아마도 사람들은 그러한 교접이 내뿜고 있는 전복적인 상상력 속에서 '가학적'인 그리고 '병적'인 것의 절정들을 본 것 같다. 그런데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는 이야기이지만, 가학적이거나 병적인 것이 양식화 되어있는 것처럼 재미없는 것은 없다. 아방가르드에서 추구되었던 형식의 파괴나 실험도 양식화 되면서 고답적인 역사가 된 것이다. 박정원의 그림들은 그런 점에서 아직 양식화 되어 있지 않은 생의 한가운데에 있고, 부정한 것들을 다시 부정함으로써 긍정의 차원으로 지양시키는 일반적 길항의 과정을 전혀 수행하고 있지 않아서 더욱 재미있다. (만화 같지 않은 작품을 보고 재미있다는 표현을 하면 실례인가?) 그 재미란 가학적인 것과 편안함, 병적인 것과 관능 사이의 경계에서 형성되는 긴장감의 지속적인 미해결에서 발현된다.

박정원_두루미소녀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90×72cm_2004
박정원_이상한 도송빌 부인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62×130cm_2004

세계는 암담하고, 소녀들은 의자나 바퀴 같은 외계에 기이하게 꽂혀져 있지만, 소녀들의 표정은 병적이기 보다는 도리어 휴식을 잘 취한 건강한 짐승 같은 냄새를 풍겨내고 있는 것이 박정원의 고유한 작품 세계이기도 하다. 특히 「넘실넘실 소녀들」의 행복한 표정은 거의 완벽한 것이어서, 말로 떠드는 설명이고 개념이고 프로이트고 개나발이고를 일절 떠난 채, 물론 도덕적인 문제 제기는 스며들 틈도 없는, 그 곳 지상 2m 쯤의 공중에서 부유(浮游)하며 소녀들은 제 자신을 완성하고 있다. 그 소녀들의 한가운데에서는 마치 생의 비의처럼, 아니면 초경(初經)처럼 붉은 과실들이 우수수 쏟아져 나오고 있다. 또 한편으로는 이종 교접된 소녀들의 표정이 매우 구체적이란 것이 작품의 예술적 완성도를 담보해주고 있다. 즉 자전거 바퀴와 교접된 소녀의 그로테스크하게 편안한 표정은 바로 그것이어서, 과실과 교접된 '넘실넘실 소녀들'의 열락에 가까운 표정과는 결코 바꿔치기 할 수 없다는 것을 각각의 작품들은 선험적으로 느끼게 해주고 있다. 기이하고 불온한 교접들 속에서도 소녀들이 온전하게 간직하고 있는 저 방치에 가까운 행복의 표정들은 어디서 연유하는 것일까? 일찍이 메를로 퐁티가 갈파했듯이, 몸이란 자신한테 귀속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외계와도 이어져 있다는 양의(兩義)성에 대한 진정한 인식과 경험은, 기실 우리를 무한하게 즐거우면서도 불안하게 만들어 줄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 표정들은 아이와 여성 사이에 존재하는 알 수 없는 미지의 아우라를 계속적으로 생산해 내고 있다. 그 아우라는 알아도 설명해서는 안 되는 것이기도 하다.

박정원_넘실넘실 소녀들_판넬에 아크릴채색_160×120cm_2004
박정원_수상한 다리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45×112cm_2004

박정원은 자신의 예술 세계를 말로 표현하기 위해서 프로이트의 'Uncanny'란 개념에 주목한다. 집(Canny)처럼 낯익고 편안한 공간이 이방인에게는 문득 낯설고 기이한 곳이 될 수 있다는 것, 즉 미학적 매혹의 본질들 중의 하나에 해당하는 개념이다. 하지만 박정원의 그림들은 거꾸로 낯설고 기이한 것들을 낯익고 편안한 것들로 만들어 주는 주술적 힘도 포함하고 있다. 그런 힘은 어디서 연유하는 것일까....... 다만 화가의 작업실에서 나오는 길에 마지막으로 물어보았다. "작업하면서 많이 우세요?" 그녀는 "예"라고 대답한다. 그렇게 물어 본 것은, 그림의 소녀들 속에서 물감을 개면서 울고 있는 검은 여자가 보였기 때문이다. 그녀가 조금 더 나이 들어 조금 더 늙는다면, 그래서 자신의 그림들에 서사적 깊이를 조금 더 확보한다면, 그 그림들은 화가 자신이 아니라 그림을 바라보는 관객의 어떤 生의 장면까지 필경 투영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무서운 이야기이지만, 예술의 오래된 힘이기도 하다. ■ 이찬규

Vol.20050419a | 박정원 회화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