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청년미술제

포트폴리오 2005展 ③   2005_0420 ▶︎ 2005_0522

박성연_숨쉬는 사과_렌티큘러_16×16cm_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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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미나 / 2005_0513_금요일_03:00pm~05:00pm_서울시청 후생동 강당

'청년미술'이 이미 도착한 지점_강수미 / 니가 진짜로 원하는 게 뭐냐?_반이정

참여작가 회화, 평면 / 강경은_강민규_강승혜_강영민_고동현_고영규_고우리 고정민_고지영_권기수_권희정_김귀은_김남훈_김성엽_김원규_김지애 김지은_김지혜_김진아_김혜란_낸시랭_노석미_노충현_노현정_도기종 류승환_류지선_류현미_모군오_문중기_박계숙_박미현_박상희_박주욱 박형진_박형현_서해근_소윤경_손민형_송명진_송상희_송지훈_송하나 신승재_신영미_신지선_안세호_안승주_양소정_양현정_여지현_염선희 오병재_우승란_윤석만_윤유진_윤정선_윤정원_이강욱_이동엽_이만나 이미숙_이보람_이부록_이상선_이샛별_이선하_이송_이시현_이원영 이은주_이은화_이제_이지선_이지송_이지용_이지원_이지현_이해은 임병국_장희정_전상옥_전은숙_전인아_정경희_정보영_정세라_정자영 정직성_조주현_조혜은_지경아_진정선_최은경_표영실_한슬_함수연 수묵화 / 고경희_고영미_김보민_김정욱_김지용_김지은_김창미_박병일 배상윤_백진숙_서은애_서희화_심하용_윤진숙_이애란_이영빈_이윤주 이정아_이형주_임택_전가영_전수민_정열리_정재호_정진용_진현미_홍주희_홍지윤 사진 / 권정준_김문경_김민겸_김상길_김상덕_김영경_김윤호_김인숙_김정 김종엽_김혜미_나지성_남지우_박명래_박용식_방명주_배남우_손정목_신기선 신은경_안상욱_양지연_양철모_유지훈_유희영_이성희_이용훈_이원철_이윤진 이은종_이진우_이진준_이태성_이현우_임선영_전은선_전종대_정규진 정규현_정소영_정은정_지정아_최원준_최중원 판화 / 김미로_김수현_김숙정_김영훈_김제민_김혜균_김효숙_박유진_방인희 배남경_부지현_신숙_신현정_엄정호_이경은_이서미_이수연_이은희 이주학_이지영_장양희_정희경_좌선심_하임성_홍인숙 입체, 설치 / 강선미_고창선_권경환_김수연_김수진_김시하_김영은_김용남 김윤수_김인배_김주연_김효연_김희정_박관우_박지은_백기은_백연수_변시재 송필_신주혜_신치현_심정은_유지현_윤형민_이규연_이기우_이길렬_이동석 이범용_이수진_이자연_이재광_이지은_이환권_조주현_차민영_최성록_최정완 최홍구_프로젝트그룹 옆(김선희_신동희_위효선_이유경_이은구_한지연) 플라잉넷(문요나_박혜민_슈크림_정직성)_CLP(김이조_김철중_윤규상_정연찬)_한상혁 영상 / 김낙현_김선주_김용경_박성연_송영미_오창근_유혜진_이가경_이소명 이원정+윤돈휘_이해민선_장지아_전재철_정정주_조정성_최재훈

서울시립미술관, 경희궁분관, 남서울분관 서울 중구 서소문동 37번지 Tel. 02_2124_8947 www.seoulmoa.org

니가 진짜로 원하는 게 뭐냐? What do you really want? ● 지난 93년 상반기,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호암갤러리에서 일평균 380명 총 23,582명의 관객을 동원한 전시가 하나 있었다. '서양미술사의 명작'을 앞세워 호암의 세 과시도 하고 짭짤한 수익도 거머쥘 수 있는 소위, 흥행몰이와는 다소 거리가 있는 현존 작가들을 성찰하는 전시였지만 그럭저럭 매체로부터 호평을 받은 전시로 기억된다. 전시 타이틀이 『미국 포스트모던 대표작가 4인전』이었는데 당시 미국에서 날고 긴다던 작가 4인방(쥴리앙 슈나벨, 데이비드 살르, 에릭 피슬, 로버트 롱고)을 소개한 의미 있는 볼거리였다. 이미 만국어가 되어버렸으나 당시 한국에서는 좀체 익숙하지 않던 포스트모더니즘이란 용어가 시각 교보재가 되어 상륙한 사건이기도 하다. 본인이 미술공부를 시작한 후, 한 지면에서 위에 거론된 작가 중 몇 명과 소위 신표현주의 작가군이 하나로 묶여 비판받는 걸 보고 의아하게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비판의 요지는 그들의 작업이 모더니즘의 형식주의 미학에 저촉되는 서사성을 너무 강하게 표방한다는 거였다. 어찌 보면 이것이야 말로 철지난 비판 같지만, 심각한 거대 서사도 그렇다고 난해한 형식주의도 그리고 테크놀로지의 실험도 전부 피해가면서, 그저 지리멸렬한 익명성의 실존과 나른한 일상, 혹은 고전적인 신화를 소재로 불러내 캔버스에 옮기는 이 새로운 변종 미학이, 지난 패러다임의 집권자들에게는 꽤나 불편했을 것이다. 꼭 그렇다고 단정할 순 없지만 이때 소개된 포스트모더니즘의 유형과 멘탈리티는 작금의 우리 미술계의 기대주들이 공유하는 지점과도 일부 일치한다. 그들은 다시금 2차원 평면작업에로 귀환했고, 단조로운 서사를 복구했으며, 고전적인(정확히 말하면, 제도에 의해 그동안 잘못 분류되어왔던) 장르적 구분을 파괴했다. 그리고 선명한 미학적 이분법은 사라지고 인식론적 상대주의에 호소한다.

이수연_Two Venus 1_3D렌티큘러(홀로그램)_67×90cm_2004
이원영_가족이라는 이름으로_캔버스에 유채, 설치_210×520×50cm_2004
임선영_Bunny Girl Seies #4_디지털 프린트_20×24″_2002

바탕 화면 1. 대안 공간과 그녀의 신생아, 대안 작가 ● 99년 한국에는 생소한 개념의 미술 거점(들)이 신장개업을 했다. 출발과 취지는 필시 비주류였으나 불과 수년만에 주류로 급성장한 이 공간들을 미술계에서는 (그들이 자칭했던 이름을 그대로 써주는데), 대안공간(alternative space)이라 불렀다. 이들이 제기하는 '대안'이란 기존의 미학적 태도와 작가 선출 방식을 쇄신하는 것을 의미한다. 투명하지도 신선하지도 못했던 종전의 미학적 태도와 작가 등단절차에서 탈피하여, 변화하는 매체와 인식을 반영하는 작업들을 선별해 그들에게 전시의 기회를 주자는 것인데, 대안공간을 거친 소위 '대안작가군'중 적지 않은 수는 수년 이내 국공립 미술관, 주요한 사립 미술관 그리고 상업 화랑으로 진출했다. 따라서 일반에게 여전히 낯선 개념인, 이 대안 작가군의 작업을 확인하기 위해 어디 박혀있는지 찾기도 어려운 신예들의 고향인, 대안공간을 방문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 이번 서울시립미술관의 기획전도 부분적으로 '대안공간들이 표방했던' 바로 그 이념을 기획의 정신으로 실현한 것이고, 작가들중 많은 수는 이미 대안공간을 거쳤거나 혹은 이 곳에 응모를 한 이들이다.) 따라서 현재 그리고 추후 한국 미술의 방향타를 해설하기 위해서는, 언제나 99년 대안공간의 탄생과 그들의 작가 정책이 가져온 영향력을 배경 설명으로 들지 않을 수 없다. 대안공간은 더 이상 주류 미술에 대한 반대급부를 의미하지 않게 되었고, 정반대로 주류 진입을 검증받는 엄정한 시험대가 되었다.

안상욱_703호실_컬러인화_8×10″_2002
강선미_빠지다_벽에 라인 테잎으로 공간 구성_2005
이동석_Passion_혼합재료_160×100×100cm_2005

바탕 화면 2. 문화의 격변기와 정체된 미학 사이에서 : 주변미학 잉태되다. ● 그렇다고 차세대 유망주로 관리되는 젊은 작가군(20대 후반~30대중반)이 모두 비슷한 정서를 공유하는 건 아닐 터이다. 다만 이들이 배양되는 토양은 유감스럽게도 대동소이하다. 교육 현장(미술대학)은 현장에서 이뤄지는 실험적 변화를 체험하기에는 너무 닫혀있는 공간이다. 적지 않은 미술대학의 교육자(교수)들의 미학적 시간은 그들의 왕년에서 멈춰버리곤 한다. 자연히 그들의 가르치는 작가 지망생들의 시간도, 4년 혹은 6년간 '스승의 멈춰버린 시간'과 자신의 미적 정서를 일치시키기를 반복할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현장에서 무슨 변화가 고민되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한 채 교문을 나선다. 지금까지 기술한 내용은 거의 대부분의 미술대학에서 매해 반복되는 실제 사실이다. 하지만 이민 2세대 3세대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회의하듯, 미술대학의 내부에서 주입되는 경직된 미적 정서도 어린 학생들이 대학 밖에서 경험한 빠른 변화와 저항에 그럴싸한 답을 내주진 못한다. 이들은 어떤 삶을 살아왔을까? 70년 초~중반세대는 이들은 감성이 예민한 유년 및 학창시절에 급변하는 매체 문화의 속도를 경험한 세대이다. 흑백 TV에서 컬러 TV로의 이행도, 변두리 동시개봉관과 번화가 멀티플렉스의 가파른 흡수과정도, 학교에서 금지시킨 공개적 전자오락실이 합법적이고 내밀한 PC 방과 방안으로 합병되는 과정도, 모두 이들 세대가 목격한 풍경이다. 이들의 학창 시절 놀이문화래야 고작 음침한 만화방, 단체미팅, 그리고 지금은 거의 자취를 감춘 우표수집 을 필두로 일련의 수집문화 정도를 들 수 있다. 하지만 이들이 미대에 들어간 90년대 초~중반 한국에는 PC통신이 도입됐고, 이후 변화곡선의 가파름은 설명하나마나일 것이다. 그리고 이 같은 미디어 문화의 전면 부상은 이미지 생산/소비에 대한 인식도 변화시킨다. 시각물의 과잉 속에서 모든 것은 '재미'라는 코드를 통해 유통되는 세상 앞에서 왕년에는 학급에서 자기만큼 '그림 잘 그린' 친구가 없었지만, 이미 밖에서는 이미지의 소란은 요란하기 짝이 없었다. 네트워크를 타고 삽시간에 출몰하고 퍼지는 이미지의 홍수 앞에서 본의 아니게 세상의 주류와 격리된 이들의 잠재의식 속에는 패배감과 이기심이 들어앉는다. 바로 이런 '게임이 안 되는' 환경이 지금 젊은 세대 작가들이 편협하게 일상과 주변에서 소재를 찾게 만든 이유이다. 남들도 다 할 수 있는 건 차별성이 없다. 남들이 전혀 모르는 세계는 작가의 내면세계에 대한 성찰이고 그것의 이미지화다. 적지 않은 회화/사진 작업이 일상에 천착하는 이유, '일상'의 남발의 원인이기도 하다. 일상의 남발은 또한 이들이 직면한 상상력의 공동(空洞)화이기도 한데, 그것의 취약점을 매우기 위해 이들은 단조롭지만 산뜻한 화면구성으로 시각적 공감의 여지를 남겨둔다.

송필_boom_골치_합성수지에 카페인트 도색_300cm 내외_2005
류지선_사랑이 끝난 후_캔버스에 아크릴과 볼펜_130×162cm_2005
노충현_사라진 창문_캔버스에 유채_60.6×72.7cm_2005

『시대상황과 미술의 논리』, 그 후속편 ● 5공화국 군부 독재의 끝자락인 86년 일련의 민중미술 이론가들의 기고문을 묶은 단행본 한권이 발간되는데 서명이 『시대 상황과 미술의 논리』이다. 시대의 반영으로서의 민족미술을 주창하는 당시의 필자들 대부분은 현재 미술판에서 제법 영향력 있는 자리에 올라있다. 앞서 변모된 환경에 맞춰 생존한 차세대 작가들이 종전의 미학적 토대에서 벗어났다고 설명한 바 있다. 한국은 오랜 군사정권의 그늘이 드리워진 남다른 역사 탓에, 미술의 지향점도 양반되어 나타났는데 소위 '순수 대 참여'가 그것이다. 적어도 이런 이분 구도는 노태우의 정권말기였던 90년대 초까지 유효했지만, 민정으로 이양된 이후의 변화는 미술의 창작현장에서도 반영된다. 아젠다를 앞세운 참여미술(소위 민중미술)은 낡고 시효가 지난 듯 했고, 속사포 같은 세상의 변화에는 아랑곳 않는 순수의 도그마도 너무 진부해져 채택의 여지가 없어 보였다. 거기에 포스트모더니즘의 인식론적 상대주의까지 도입되면, 선명한 입장을 선포하는 것보다는 어중간하게 모더니즘과 리얼리즘 사이에서 엉거주춤 하는 것도 '용서되고' 더불어 '선호되는' 시대였다. 앞서 일상을 읊조리던 작가들의 '모더니즘의 오랜 기치'인 재현의 문제와 그리기에 대한 관심을 여전히 투영하는 것도 그것의 일부이다. 거기에 삽화적 묘사와 만화적 상상력으로 모더니즘의 주제를 특별하게 소화해내고 관객의 공감까지 얻어낸다. 그리고 이렇듯 예쁘장하게 단장한 소품들은 남부럽지 않은 고가의 팬시상품의 얼굴을 하고 있다. 그렇다. 이들은 '팔려야 만' 한다. 반면 일상의 재현을 통해 미시적인 사회비판의 기틀을 잡으려는 움직임은 '사실주의의 존립근거'에 다름 아니다. 이들은 사회의 비리를 전투적으로 폭로하기 보다는(그래갖곤 약발이 안 먹기도 하고, 미술공간에서 그와 같은 전투적 리얼리즘은 큰 의미를 생산하지 못한다.) 알레고리나 농담에 기대 사회상을 조소할 뿐이다. 그리고 변화의 주체는 관객의 몫으로 남겨둔다. 이것은 사회적 이슈를 시각물로 재현하는 역할을 비전공자에게 상당부분 양도한 이들 세대의 선택이기도 하다. 해서 오늘날 리얼리즘의 후발주자, 혹은 포스트 민중미술 작가는 지리멸렬한 현실에 소프트하게 대응한다는 점에서 더러 모더니즘의 후발주자와도 겹쳐진다. 한때 양강구도를 이뤘던 한국의 모더니즘과 리얼리즘은 공중분해 후, 새로 쓰여지고 있다.

홍인숙_귀가도_종이에 혼합재료_60×150cm_2003
김미로_사진들이 취하는 포즈_석판화_70×100㎝_2002

부록: 동양화가 아직 존재하나요? ● 우리에게는 미술의 장르를 세분하는 유서 깊은 괴상한 전통이 있는데, 평면회화를 동양화와 서양화로 나누는 구분법이다. 일반인은 물론 전공자들조차 여전히 별 의심 없이 이 형용 모순의 이분법을 수용한다는 사실이 문제의 요지이다. 학계와 학교에서도 다소의 논란이 있었지만 여전히 이 개념 정의를 수용하고 있는 걸 보면, 아니 거기에 덧붙여 한국화라는 신조어까지 덧붙인 걸 보면, 사람들의 자기 전통에 대한 거점 확보의 욕심은 대단한데가 있어 보인다. 하지만 사물에게 (가당치 않은)이름을 주어서 정체성을 규정하려는 시도 자체가 이미 전근대적인 사고방식이다. 우리가 마주하는 차세대 '동양화가군'은 이런 정의를 몸소 부인한다. 작품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이들의 노력이 다시 미술관이나 도록에 수용되는 과정에서 다시금 그 낡은 이름을 뒤집어 써야할지라도 이들의 결과물 앞에선 양식있는 관객이라면 이들을 '동양화'라는 분명하지만 결코 분명하지 않은 정의로 읽어낼 수 없다는 걸 깨닫게 될 것이다. 이들의 작품은 동양적이냐 서양적이냐는 지역적 감성을 훨씬 뛰어넘는다. 이들의 작품은 2차원에 묶여있던 상상력을 3차원으로 쭈욱 뽑아내는 기개를 보이기도 한다. 또 관념회화라는 무게감을 털어내고, 관객과의 보폭을 좁힌 것도 이들의 성과이다. 지필연묵紙筆硯墨:종이ㆍ붓ㆍ벼루ㆍ먹)으로 요약되었던 지난 시절의 완고한 존재의 조건 역시, 이들에 의해 매체의 수용과, 입체로의 연장, 보다 가벼운 소재에의 천착 등을 통해 투명해지고 있다. '동양화'로 지칭되는 장르는 여전히 엄존하지만, 불편했던 관념 뭉치는 일찌감치 분해된 상태이고, 그 해체된 더미 위로 차세대 작가들이 날렵하게 올라앉아있다. ■ 반이정

전시프로그램 20대 중반~30대 중반 사이에 퍼져 있는 신진작가들의 면모와 관심사, 의식과 취향 을 선보이는 이 전시는, 전시와 더불어 두 가지 소통 통로를 마련하였다.

세미나 / 2005_0513_금요일_03:00pm~05:00pm_서울시청 후생동 강당 미술평론가 2명을 초청, 최근 미술계의 현황과 논점, 과제와 전망 등을 배경으로 두고서 2-30대 젊은 작가들의 작업에 대하여, 또 이 전시에 대한 비평도 포함하여 문제제기하고 토론한다. / 강수미_'청년미술'이 이미 도착한 지점―『포트폴리오2005』를 계기로 본 한국 동시대 미술의 몇 가지 기호(taste/sign) / 반이정_니가 진짜로 원하는 게 뭐냐?_What do you really want?

전시설명회_2005년 4월 26일(화)부터 전시기간 내내 매일 3:00pm/5:00pm

Vol.20050420e | 서울청년미술제_포트폴리오 2005展 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