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각의 고전적 브리프와 변주

신석민 조각展   2005_0422 ▶︎ 2005_0430

신석민_torso_대리석_50×30×20cm_2001

초대일시_2005_0422_금요일_05:00pm

갤러리 PICI 서울 강남구 청담동 122-22번지 Tel. 02_547_9569

조각의 고전적 브리프와 변주 ● 자문자답으로 시작해 보자. 돌은 인간의 역사에서 어떤 의미를 가질까. 아마도 인간에게 돌은 단순히 도구적 재료나 물질적 소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과 연계된 감각적 층위, 그리고 그것을 통해 가능해진 일체의 문화적 태도와 소산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문명의 역사가 석기시대로부터 시작하는 것도 우연이 아닐 게다. 좀 과장하자면 돌은 인간 생활과 맞물려 삶과 문화의 관계를 완전히 새로운 지평에 올려놓았으며, 내구성으로 해서 그 자체가 기록이면서 동시에 기록의 장으로 역사와 공존해왔다. 이는 돌이 인류의 문화적 생존과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임을 보여준다. ● 그렇다면 혹 까라라(Carrara)의 석산에서 잘려진 대리석들은 무엇이 되었을까.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대리석이 건축의 주된 재료였음은 두말 할 나위가 없다. 다른 주된 용도로는 조각의 재료라는데 또한 이견이 없을 것이다. 무엇으로 쓰였든 그 대리석들은 자신의 운명에 만족해 했을까. 수많은 이탈리아 조각가들의 이름을 거론하고 분류하지 않더라도, 쓰임에 관한 대리석의 만족은 자신의 특질과 작가 능력의 공모 하에서만 가능한 것이기에 작가와 재료는 공동운명에 속했음은 분명하다. 따라서 작품에서는 쪼이고 갈리는 돌의 고통과 작가가 겪는 창작의 산고가 겹쳐진다. 어찌 보면 돌은 작가의 손에 의해 단순한 물질에서 정신적 대상으로 승화하는 것일 게다.

신석민_반항자_청동, 화강암_60×30×15cm_2004
신석민_autoritratto_대리석_60×40×30cm_2003

그 돌의 기능과 가능성 그리고 조각가의 장인적 기질은 신석민에게 여전히 유효하다. 그는 이탈리아 유학을 통해 대리석을 주로 다루었으며 그 돌의 묘미에 흠뻑 빠져있다. 요즈음 젊은 작가로서는 드물게 순수성과 특수성의 자리를 점령해버린 사회적 발언과 혼합매체라는 태도와 관점의 풍요 속에서 시대적 감도가 많이 떨어져 보이는 전통적 구상 석조에 몰두한다는 것은 차라리 용기에 가깝다. 그럼에도 작가 스스로 구상 인체조각에 계속 전념할 것임을 천명하고 있다. 그 신념의 추이는 후일 지켜보아야 할 일이지만 그가 얼마나 인체 조각에 천착해왔나 하는 것은 그의 돌을 다루는 세기를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어쨌든 그의 대리석 조각들은 과거 그리스나 이탈리아 조각의 위대한 시기를 숨김없이 그대로 암시한다. 오래전부터 사용돼왔던 대리석이라는 전통적인 재료를 선호한다는 의미에서뿐만 아니라 그 구조에 있어서도 고전적 배열을 고수하고자 한다. 즉 주제에 있어서도 어떤 풍자나 메시지도 없이 두상이거나 토르소라는 식으로 거장적 전통(virtuoso tradition)을 고수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과거 르네상스 조각의 영광을 재현하려는 코스모폴리탄적 지평에 이르고자 했다는 의미는 전혀 아니다. 그것은 대리석과 인체의 전통적 작업방식에 대한 작가의 지대한 관심에 기인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작가는 이탈리아 조각가들의 장인적 기질과 테크닉에 매료되었음을 굳이 숨기려 하지 않는다. 1999년에 이탈리아로 유학을 떠나게 되는 동기 중의 하나도 그들의 그런 장인정신을 배우고자 함일 것이다.

신석민_corpo e leggero_대리석, 화강암_190×50×40cm_2004
신석민_dorso_대리석, 화강암_190×40×40cm_2003

대리석 인체조각의 역사가 오래된 만큼 진부하다고 치부되기는 하지만 신석민은 그 속에 여전히 새로운 미적 감수성이 있음을 시사한다. 이번 전시에서 제시되는 대다수의 작품들은 언뜻 보기에 단지 인체의 사실적 재현으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외면적 처리 방식은 기존의 구상조각들과 유사하지만, 적어도 분명한 사실은 그가 그만의 방법론을 제안하려 한다는 것이다. 그의 작품에 과감한 생략이나 심한 왜곡이 없다손 치더라도 그것이 곧 그의 인체에 어떤 첨삭이나 변형도 없다는 뜻은 아니다. 일례로 작품 「IL DORSO, 2003」에서 보듯, 한 방향은 지극히 고전적인 재현의 규범을 따르고 있지만 반대 방향은 물결무늬이거나 혹은 무엇인가 감싸고 있는 천이 바람결에 흔들리는 형상 아니면 인체가 용암에 녹아내리는듯한 이미지로 구성되어 있다. 이도 저도 아니면 우상파괴주의자의 타격에 의해 잘려나가 파손된 조각작품 같기도 하다. 구체적 신체는 온데 간데 없다. 문제는 또 다른 방향에서 바라볼 때 우리는 전혀 다른 제3의 사물과 맞닥들인다는 것이다. 그것은 애매함이다. 구상일 수도 추상일 수도 있는/없는. 게다가 조각의 양괴와 체적은 축소된다. 이는 구상조각의 규범에 대한 은밀한 자기 부정이자 돌의 무거움을 가벼움으로 환치시키고자 함이다. ● 이와 관련하여 작품 「IL CORPO E LEGGERO」는 토르소의 복부에 가벼운 깃털을 조각함으로써 작품 「IL DORSO, 2003」의 가벼움에 부응하고 있다. 이런 시도는 관습적인 묘사 방식을 따르지만, 그 양식의 범주 내에서만 머물지 않겠다는 작가의 의지로 읽힌다. 따라서 이런 시각적 대응 이미지는 단지 작품의 표면적 효과가 아니라 작품의 내적 구조를 드러내는 것이다. 몇몇 작품들은 신체의 극히 일부분을 떼어내 확대시켜 유기적 형체와 결합시킨다. 이 또한 보기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변주된다. 즉 신체의 일부분은 지각되지만 주변의 상징적 형태와 혼융되어 분방한 변신이 가능하도록 조절되어 있다. 예컨대 신체 일부분이 섬세하게 묘사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때론 구겨서 던져버린 휴지조각 같기도 하다. 그것은 의식적이면서 직관적이기도 한 일련의 복잡한 지각의 작용과 반작용에 의해 성립되는 것으로 여겨진다.

신석민_feminile_청동, 대리석_70×20×20cm_2004
신석민_Pugno_대리석_70×35×30cm_2003

신석민의 작품들은 매우 섬세하게 다듬어지고 매끈하게 연마되어 있으며, 그 동세를 감지할 만큼 격렬한 움직임도 없어 매우 정적이다. 이는 그의 작품들이 신체의 부분이나 토르소 같이 극히 제한된 탓도 있겠지만, 한계의 요소를 작품화하려는 조형적 관심에서 나왔다는 사실이 감지된다. 이를테면 그의 작품은 전통적인 구상조각이 중요시 했던 특징들을 거의 나타내려는 한계를 지니고 있지만, 극히 부분적으로 변형만을 가함으로써 자신의 작업에 새로운 실마리를 찾고자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이러한 심미적 태도는 의외로 하나의 미덕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의 조각은 집중된 표현과 최소의 변형으로 절제된 아름다움을 추구하면서 고전적 순수성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구상조각의 지속적인 가능성에 대한 하나의 답이 될 수도 있다. ■ 유근오

Vol.20050422c | 신석민 조각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