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other_the mirror of nature

박상희 회화展   2005_0427 ▶︎ 2005_0510

박상희_기계적 소통_캔버스에 유채_89.4×145.5cm_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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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5_0427_수요일_06:00pm

대안공간 풀 서울 종로구 관훈동 192-21번지 Tel. 02_735_4805 www.altpool.org

타자-본성의 거울 ● 얼굴의 모양이나 표정을 알 수 없는 인물의 형상들. 그 인물의 형상들은 거의 대부분 캔버스의 중앙을 벗어나 마치 사회의 주변을 떠도는 이방인들과 같이 구석에 위치하여 정면을 바라보고 있다. 캔버스의 인물의 형상은 정면의 사물을 주시하기보다 마치 무감각한 태도로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거나, 옷을 입은 채 침대에 널브러져 있다. 그가 캔버스에 표현하고 있는 이 인물의 형상들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 그가 의도하고 있는 인물의 형태는 작품의 의도를 드러내는 시선에서 보면 두 가지 유형으로 구분할 수 있다. 하나의 유형은 「무감각적 일상」에서 보듯이 현재나 미래에 대한 어떤 의식도 없이 그저 무표정한 몸짓으로 일상의 사물을 대하는 시선이며, 또 다른 유형은 「무의식의 깨어남」에서 보듯이 그런 무딘 일상의 감각을 일깨워 무언가를 자각하고자 하는 몸부림을 보여주고 있다.

박상희_나락_캔버스에 유채_97×162.2cm_2004
박상희_The Other_캔버스에 유채_97×162.2cm_2004

일상에서 소외되어 마치 유령과 같은 일루전을 보여주고 있는 「무감각적 일상」의 인물에게 일상의 삶은 왜 그렇게 무딘 시선으로 다가서는 것인가. 그는 「가식을 입다」에서 그러한 의문의 실마리를 풀어가고 있다. 우리가 타인과 더불어 사회에서 살아가기 위해 입는 옷은 우리의 본성을 감추는 행위라고. 그는 「외출직전」에서 거울을 바라보는 행위를 통해 이러한 시선을 더욱 더 암시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그러한 가식적인 일상의 삶에서 나와 타인과의 관계는 핸드폰 단말기로 감정을 주고받는 기계적인 행위이거나, 「소통불가」에서 보듯이 대화는 하고 있으나 서로 공허하게 맴도는 단절된 상태에 불과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침대 위에 옷을 입고 널브러져 있는 장면을 그리고 있는 「나락」은 그런 상황의 절정을 묵시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즉, 「나락」속의 인물은 영웅주의와 금욕주의의 시각에서 작품을 그린 신고전주의 작가인 루이 다비드의 「마라의 죽음」속의 누드 상태의 주인공 마라와는 정반대의 시선에서 한 인간의 실존적 절망을 보여주고 있다. ● 이러한 가식적이고 무딘 일상에서 그는 어디를 지향하는가. 「보인다」에서 그는 등장하는 인물의 형상을 통해 이러한 해결책을 탐구하고 있다. 화면 속의 인물은 뒤쪽에서 서서 방관자적으로 일상의 사물을 바라보고 있는 「무감각적 일상」의 인물과는 달리 앞쪽에서 서서 적극적인 태도로 무언가를 느끼고자 하고 있다. 그리고 인물의 형상과 색채의 일렁임은 눈이 아니라 귀와 온몸을 통해서 주위의 상황을 보고 있는 듯한 모습을 느끼게 한다.

박상희_무감각적 일상_캔버스에 유채_89.4×145.5cm_2004
박상희_무의식의 깨어남_캔버스에 유채_40.9×53cm_2005

「무의식의 깨어남」은 그러한 느낌을 다시 환기시키고 있다. 화면 속의 인물은 눈을 감고 있음에도 후광의 살색을 통해 주위의 배경을 마치 생생하게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을 전달하고 있다. 그것은 마치 그 인물이 「무감각적 일상」의 인물과는 대조적으로 주위의 사물들과 어떤 교감으로 가득차있는 상태를 표현하고 있는 듯한 모습이다. 그렇기에 그가 자각하고자 하는 것은 사회적인 시선에 의한 눈이 아니라 온몸의 감각을 통해 자각하게 되는 실체이며, 다시 말해 사회적인 시선을 닫음으로써 자각하게 되는 무의식이다.

박상희_보인다_캔버스에 유채_50×72.7cm_2004
박상희_가식을 입다_캔버스에 유채_40×40cm_2005
박상희_waterbottle_캔버스에 유채_40.9×53cm_2005

그러나 그 무의식은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 「아이즈 와이드 샷」에서 사회적인 가식을 벗겨냄으로써 드러난 성적인 본성은 아니다. 그리고 그 무의식은 「무감각적 일상」에서 보듯이 까뮈의 「이방인」속의 뫼르소와 같이 방관자적인 태도를 지닌 감성이기도 하지만, 「무의식의 깨어남」에서 보듯이 랭보(Arthur Rimbaud)의 시에서 이야기하는 감성에 그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 있을 수 있다. "푸른 여름날 저녁, 내 오솔길로 가리라. 밀잎에 찔리고, 잔풀을 밟으며, 꿈꾸듯이 내 발밑에 그 신선함을 느끼고. 바람결에 내 머리를 적시면서. 아무 말도 않고, 생각도 하지 않으리라. 그리하여 무한한 사랑이 내 영혼에 솟아오르리니. 나는 가리라, 멀리, 저 멀리. 보헤미안처럼. 계집애와 함께 있는 것 같은 행복을 느끼며, 자연 속으로." 그럼에도 그 무의식, 달리말해 타자, 아니 본성에 대한 충만한 자각은 아직은 그에게는 에서 보듯이 갈증 나는 실체일 수도 있다. ■ 조관용

Vol.20050427b | 박상희 회화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