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순택 사진집-분단의 향기

사진, 글_노순택

지은이_노순택 || 발행일_2005_0501 || 가격_15,000원 판형_19×19cm || 쪽수_174쪽 || ISBN 89-8163-120-4 || 도서출판 당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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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출판 당대 서울 마포구 연남동 509-2번지 2층 Tel_02_323_1316

누구나 살면서 몇 번은 겪게 마련이다. 체험한 일이 없는 상황에서 느끼는, 왠지 모를 익숙함. 기시감旣視感 또는 데자뷰deja-vu라 일컬어지는 이런 경험을 겪을 때, 우리는 혼란에 빠진다. 그리고 불현듯 다시 혼란이 찾아온다. 분명 체험한 일인데도, 처음 겪는 사건인 듯한 낯섦. 미시감未視感 jamais vu이라 명명된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표현할 길 없는 갑갑함을 느낀다. 기시와 미시의 감각을 둘러싼 해석은 다양하고, 논쟁적이다. 다만 이 느낌이 인간의 뇌기능 가운데 '기억'을 다루는 부분과 관련된 것이라는 가설에 다수가 동의하고 있다.

노순택_'The Stars and Stripes의 51번째 스타' 대한미국의 애국시민.... 간첩처단, 이라크파병 촉구 애국시위를 마친 뒤 성조기를 곱게 말다. 반미집회 뒤의 성조기 화형식을 떠올리며 성조기를 대하는 우리 사회의 '두 가지 태도'에 대해 생각하다_흑백인화_2003_1015_서울역
노순택_자유대한미국의 영원한 우방 아메리카합중국의 대형깃발이 서울시청 앞 광장에 펄럭이다. 애국시민들, 애국가를 부르며 주한미군의 지속주둔과 반미세력 척결을 외치다_흑백인화_2003_0301_서울

분단은 우리에게 무엇일까? ● 전쟁체험 세대가 소수로 '전락'한 오늘의 한반도에서 동족상잔의 비극이 어쩌고저쩌고 운을 떼는 것은 고리타분한 냄새를 풍기는 것만 같다. 한국전쟁은 이제 교과서와 같은 학습의 대상이거나, 전쟁기념관 속 유물과 같은 관람의 대상인 것이다. 가끔은 '6.25 사변일'에 하루선생님으로 찾아든 늙은 군인의 향수어린 옛이야기로 다가오기도 한다. 바야흐로 21세기다. 분단에 관한 우리의 감각은 이제 무뎌졌다. 전쟁은 낯선 얘기처럼 들린다. ● 그러다가 문득, 분단은.... 기시감이 되어 스멀스멀 기어든다. 익숙한 낯섦.... "국회에 간첩이 잠입, 활동하고 있다"는 한나라당 17대 국회의원들의 확신에 찬 증언은 우리의 기억에 익숙하고,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가 얘기되는 오늘의 시간과 낯설다. ● 1994년 영변 핵시설에 대한 미국의 폭격계획이 거의 실행단계까지 갔다가 가까스로 중단됐다는 사실이 최근에 드러났을 때, '경악'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행동(항의)'은 말할 것도 없다. 이미 과거지사(전쟁은 일어나지 않았다!)인 까닭이 컸겠지만, 이런 상황이 (사실은 처음 겪는 일인데도) 좀처럼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다는 점도 작용하지 않았나 싶다. (나만 그런 느낌을 가졌던 것일까?) 이런 종류의 익숙함은 대개의 상황이 떠들썩한 호들갑과는 달리 극단으로 치닫지는 않았다는 기억을 끄집어내어 안도감을 준다.

노순택_미국의, 미국에 의한, 미국을 위한 군사법정.... 운전병 마크 워커 병장과 관제병 페르디난도 니노 병장을 무죄방면함으로써 두 아이에게 유죄를 선고하다. 아이들은 열네 살이었다_흑백인화_2002_1003_서울 종로
노순택_미대사관으로 향하는 수백 개의 깃발을 수백 대의 닭장차로 가로막다_흑백인화_2002_1214_서울 광화문 네거리

'간첩 주기설'이 회자될 정도로 우리의 근현대사는 매 주기(얄궂게도 선거철과 같은 생체주기로) 대규모 빨갱이 사냥이 재연되어 왔음을 기록하고 있다. 불과 10여 년 전에는 남한조선노동당 중부지역당 사건이라는 사상초유의 메머드급 간첩사건이 벌어짐과 동시에 박홍 신부가 "학생운동권 뒤에 주사파가 있고, 그 뒤에 사노맹이, 그 뒤에 사로청이, 그 뒤에 김정일이 있다"는 고해성사를 함으로써 우리의 안보상황이 심각한 백척간두, 누란지경에 놓였음을 만천하에 공표하기도 했다. 그 뒤 대통령 선거에서 벌어진 '사상검증 쑈쑈쑈'는 이념의 주홍글씨가 얼마나 천박하고 잔인한, 그래서 좀처럼 지울 수 없는 이빨자국으로 새겨지는가를 여실히 보여준 버라이어티 쇼였다. ● 정형근들과 박홍들의 경고에 따르면 남한은 벌써 적화통일이 됐을 터인데, 다행스럽게도 우린 지금껏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자유와 자본을 마음껏(!) 누리고 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스칼렛 오하라가 지친 몸으로 외친 것처럼, 어지간한 발광에도 불구하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내일엔 또 내일의 태양이 떠오른" 것이다. ● 이런 사건들의 반복된 익숙함에도 불구하고, 불안과 공포는 언제 그랬냐는 듯 낯설게 다가오기 위해 다시 치장한다. 익숙한데도 낯설고, 낯선데도 익숙한 기시와 미시의 교차상황.... 분단은 이런 식으로 우리 몸과 시간과 공간을 훑고 있다. 기억과 망각, 안도감과 불안감을 동시에 조장하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조!장!'되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정교하건 어설프건 늘 '과장'을 동반한다. 과장된 슬픔이 웃음을 불러오듯, 과장된 희극이 비극을 반영하듯 분단은, 분열된 자아를 드러낸다.

노순택_미7공군 소속 A10 전폭기가 매행리 갯벌 위 표적지에 기총소사한 뒤 농섬에 폭탄을 퍼붓기 위해 날아오르다. 우린 다만 바라보다. "와, 무슨 영화의 한 장면 같다"며 탄성을 지르다_흑백인화_2000_0719_경기도 화성군 우정면 매향리
노순택_매향리 농섬 위의 표적용 차량이 벌거벗은 몸으로 화약향기를 풍기다. 구름이.... 화약연기를 흉내내다_흑백인화_ 2001_0324_경기도 화성군 우정면 매향리

분단은 희생자만 만들어내는 처연함은 아니다. ● 수혜자를 만들기에 괴물이다. 그 괴물의 정신상태와 꼬라지를 들여다보기 위해 미국이라는 열쇠구멍을 찾는 것은 효과적이다. 지구상 유일의 전쟁도발 국가인데도 한반도에서만큼은 아름다운美 나라國로 불리는 미국에 대한 관찰은 분단상황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에 대한 단서를 제공해 준다는 점에서 소홀히 할 수 없다. 일제강점기에서 해방된 한반도가 어떤 과정을 통해 전쟁과 분단에 이르고, 친일파를 위시한 극단적 반공정부와 가부장적 기득권자와, 신자유주의 기업과, 20%의 가진 자들과 결탁해 '사회안정'과 '사회정화', 나아가 '세계질서'를 도모해 왔는지 살펴보는 것, 그리고 이 과정에서 분단상황에 대한 기억과 망각의 작용이 어떻게 이용되었는지 생각해 보는 것은 괴물의 실체에 다가서는 중요한 걸음이다. ● 이 걸음 속에서 우리는 반탁신탁, 정부수립, 친일파득세, 요인암살, 4.3제주학살, 여순사건, 전쟁발발, 민간인학살, 휴전, 반민특위 해산, 4.19혁명, 5.16 쿠데타, 한일협정, 베트남 파병, 5.18 광주의 학살, 간첩단 사건, KAL 858기 사건, 매향리 폭격, 여중생의 죽음, 이라크침략전쟁 참전 등 근현대사의 크고 작은 사건들을 미세하게나마 다른 눈으로 볼 수 있는 단서를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오늘의 우리....

노순택_주한미군 2사단 소속 병사, 북괴의 도발에 대비한 한미합동 훈련을 하던 중 잠시 생각에 빠지다_흑백인화_ 2003_0309_경기도 연천군 임진강 상류
노순택_주민들이 철조망에 매단 붉은 리본을 떼려다 들킨 미군병사.... "이런 개새끼들, 니들이 뭔데 이걸 떼고 지랄이냐"는 항의에 해맑은 웃음으로 답하다_흑백인화_2004_0221_경기도 평택 팽성읍 대추리

분단은 정교한 전략과 전술을 통해 집행되는 상황으로 자신을 치장하고자 하나, 동시에 어이없는 허술함으로 상스러운 정체를 드러낸다. "모든 증거를 가지고 있다"던 박홍이 아직도 증거를 내놓지 않고('못하고'가 아니다!) 있는 것이나, 국회 간첩 암약설을 떠들썩하게 주장한 한나라당 국회의원 주성영이 면책특권 뒤에 숨어 '표현의 과장'과 '정치적 수사修辭'를 들먹이는 모습은 상스러운 블랙코미디의 단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 이런 과정을 통해 강요된 분단의 긴장감은 이에 대한 반박과 저항으로 이어지기도 하지만, 반복되는 학습을 통해 체념과 순응의 무기력함을 주입함으로써 장기적으로 승리하는 게임을 주도해 왔다. 시민을 향한 적절한 긴장과 공포가 권력과 자본에게 통치와 경영의 수월함을 선사한다는 사실은 9.11 테러 이후 미국과 우리의 반세기 분단상황이 잘 보여준다. 권력과 자본에겐 해로울 것이 별로 없는 게 반세기 넘도록 지속되고 있는 분단특수상황이자, 분단일반상황인 것이다.

노순택_인류평화와 지속가능한 미래를 위해 오늘도 절치부심, 와신상담, 전전긍긍, 주경야독, 백골난망하시는 조지 따블유 부시님과 X선 찌라시_흑백인화_2003_1115

과거인 듯하여 잊혔다가도 불현듯 곁에 나타나 존재의 강건함을 드러내는 괴물. 그 괴물이 연주하는 익숙하고도 낯선 불협화음의 풍경은 분단의 시공간을 살고 있는 우리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그것에 대한 시각적 드러냄이 설령 자기모멸감을 불러일으킬지언정 우리는 우리가 만들어낸 분단의 시공간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그 시각적 드러냄이 제각각의 다양한 색깔과 목소리로 터져 나와야 한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이 바라봄과, 드러냄은 분단의 희생자(물) 뿐만 아니라, 분단의 수혜자와, 그리고 평범한 우리....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분단의 일상을 살아가며, 때론 항의하고, 때론 부추기고, 때론 방조하는 우리의 모습을 포함할 때 더 진지한 유쾌함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그것은 직간접적으로 분단의 해소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 ● 우리시대 가장 유명한 전쟁사진가인 제임스 나트웨이James Nachtwey의 사진집 『인페르노Inferno』 목차에 Korean peninsula가 등재되어 재발한 지옥의 풍경으로 제시되는 걸 반길 사람은 '악의 목록'을 작성한 악마 그 자신 밖에 없잖은가. ■ 노순택

지은이 소개 ● 노순택_노순택은 대학에서 정치학을, 대학원에서 사진학을 공부했다. 교수신문과 오마이뉴스 기자를 거쳐 다큐멘터리 웹진 이미지프레스(imagepress.net) 편집장으로 활동했다. 현재 국제민주연대(Korean House for International Solidarity)와 '월간 말' 편집위원을 맡고 있으며, 한국전쟁의 흔적과 사회적 폭력의 문제를 필름에 담는 '코메리카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개인전 『분단의 향기』(2004 김영섭화랑)를 비롯, 『영속하는 순간 - 한국과 오키나와, 그 내부의 시선』(2004 뉴욕 근대미술관MoMA 별관 PS1 갤러리), 『리얼링15년』(2004 사비나미술관), 『금지된 상상력』(2004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갤러리), 『한국 일본 오키나와에 관한 기록과 기억』(2003 오키나와-오사카-도쿄-서울 순회) 등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차례1장_애국의 길 ● 2장_아이들은 열 네 살이었다. ● 3장_잠시 멈춘 전쟁

이 책은 한국문예진흥원의 지원을 받아 발간되었습니다.

Vol.20050502c | 노순택 사진집-분단의 향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