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 IN NATURE

최정미 회화展   2005_0518 ▶︎ 2005_0524

최정미_정적_캔버스에 유채_117×91cm_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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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5_0518_수요일_07:00~09:00pm

갤러리 토포하우스 서울 종로구 관훈동 184번지 Tel. 02_722_9883 www.topohaus.com

현대사회에서 미술의 형태는 무척 다양해졌지만 어떤 면으로 보면 지극히 단순화(예술 or 비예술)되어 보인 다. 이젠 장르의 구분보다는 각자 중요시하는 개념의 이해와 주장, 그리고 그 차이에서 오는 어떤 이질감의 표현으로 봐야 옳을 듯싶다. 스위스작가 실비 플뢰리(Sylvie Fleury)는 값비싼 화장품이나 명품들을 예술과 비교하는 작업을 한다. 화장품의 값과 질이 천차만별이듯, 예술작품 또한 그렇다는 것이다. 작품이 말해주듯 그녀는 언제나 우아한 옷차림에 값비싼 옷들을 걸친다. 그것이 그녀의 관심사이며, 작품세계가 된다. 사람은 생김새와 성격, 각자의 살아온 방식이나 생활조건 그리고 어떤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모두 다 르다. 하물며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예술가들의 삶은 그리고 그들의 작품세계는 얼마나 다르겠는가! 게다가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내어놓는 현대의 산업문명의 신선함에 예술가들은 얼마나 관심을 갖겠는가? 그러한 관심은 현대미술에서 갖가지의 형태로 나타난다. 니엡스의 사진기발명이 다게르와 나다르를 탄생시켰고, T.V는 수많은 스타들을, 그리고 컴퓨터의 등장은 각 분야에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이대로 간다면 모니터도 없는 홀로그램으로 T.V를 볼 수 있을 것이며, 그에 따른 예술의 형태 또한 등장할 것이다.

최정미_같은 소망_캔버스에 유채_53×67cm_2005
최정미_꿈_캔버스에 유채_73×61cm_2005

이렇듯 새로운 형태의 technology는 예술가들에게 또 다른 형태의 예술을 요구할 것이고 관람자는 차츰 그것에 적응해 나갈 것이다. 또한 과학이 고도화 되어가면서 어떤 예술의 형태는 과학과 예술의 조합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미국 작가 토니 아우즐러(Tony Oursler)는 미디어의 메커니즘을 표현하는 동시에 미디어에 대한 우리들의 믿음을 폭로하는 작업을 한다. 사각형의 모니터에만 적응 되어있는 우리들을 비웃기나 하는 듯이 얼굴모양이나 그 외의 어떤 물체에 직접 영상을 비추어 그것이 실체인 양 다가오게 하지만 그것이 하나의 영상임을 알아채는 순간 관람자는 또 다른 미술형태를 경험하며 적응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듯 수많은 예술가들이 그들만의 삶과 사고를 바탕으로 현대문명에 적응하여 그들만의 관심사를 나타내고자 했을 때, 난 오랫동안 평면에서 '빛'과 흰색의 관계를 연구해왔다. 현대문명의 발달과 고도의 technology와는 전혀 관계없이 정신적인 면만을 추구해온 것이다. 그것을 증명이나 해주듯이 헤겔(Hegel)은 예술작품이 자연의 아름다움보다 더 아름다운 이유를 인간의 정신적 사고의 결과물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처음에 재료에서 오는 테크닉과의 싸움이던 것이 이젠 나 자신과의 싸움이 된 것을 보면 나 역시 끊임없는 사고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평면에는 이차원의 공간만이 존재하지만 그곳을 정복하는 순간, 순간은 나만의 파라다이스가 된다.

최정미_샘_캔버스에 유채_35×27cm_2004
최정미_섬_캔버스에 유채_20×15cm_2004

내 작업의 핵심은, 색에 의해 어떤 구체적인 형태를 제시하는 것보다, 앵그르(Angre)에게도 있었고, 모네(Monet)에게도 있었으며. 조안 미첼(Joan Mitchelle)이나 아녜스 마르틴(Agnes Martin) 그리고 샘 프란시스(Sam Francis)에게도 똑같이 있었던 이차원의 공간에 '자연의 빛'을 재 표현하는 것에 있다. 현대문명이 던져주는 여러 가지의 미술형태 속에서 점점 어색해져가는 이런 예술의 형태가 이제 막 걷기 시작하는 아이들에게, 이제 막 무엇인가를 표현해보려고 하는 아이들에게 꼭 필요한 예술의 형태이고 보면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그렇게 생각하면 '그림을 그리는 모든 사람은 어린아이처럼 순진하다.?' 라는 의문이 들지만 인간의 성장과정에서 꼭 필요한 요소인 것을 보면 '평면을 추구하는 작가들은 끝없이 성장한다.'라는 또 다른 정의에 도달하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피카소는 어떤 대상을 똑같이 그리는데 5년이란 세월이 걸렸지만 어린아이들처럼 그리는 데는 평생이 걸렸다고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우리가 보고 있는 어떤 것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생각 속에 오래전부터 잠재해 왔던 그 어떤 것을 끄집어내는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보면 내게 오래전부터 잠재해 왔던 생각은 늘 '자연' 에 있었던 것 같다. 숨을 확 트여주는 파란하늘, 적당히 시원한 바람, 파릇파릇한 잔디, 울창한 숲, 그 사이로 흐르는 강물, 멀리 보이는 바다, 시간을 달리하며 바뀌는 하늘의 움직임과 색깔.., 자연의 빛에 의해 나타나는 이 모든 것이 도무지 잊으려고 해도 잊혀지지 않는 나의 파라다이스이다. 나에게 있어 자연의 색은 미와 정신적 평안의 상징이며, 내가 그러한 환경에 현실적으로 처해있지 않다고 해도 이차원의 공간 에서는 몇 가지의 색만으로 그곳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맛본다. 자연은 인간의 관념이 투영된 하나의 영역이고, 미적 가치의 기준이 되며, 모든 예술의 근원이 자연으로부터 왔다는 것이 그 이유가 되겠다.

최정미_행복나누기_캔버스에 유채_73×61cm_2005

현대의 산업문명은 사람들에게 정서적으로 황폐함을 가져다주었고 이제 서야 그것을 의식하는 분위기가 되었다. 자연을 그리워하고, 필요로 하며, 그 색을 느끼고 싶어 한다. 각자의 아파트에는 초록색 식물들이, 휴식이 필요할 때면 자연의 공간을 찾게 되는 사람들의 바쁜 움직임이 그 이유이다. 자연이 사람들에게는 정신적인 파라다이스가 되는 셈이다. 이년 전 '상상의 자연'이라는 주제로 개인전을 하고 있을 때였다. 두 수녀님이 두어 시간가량 머물며 그림을 둘러보고는 내게 감사의 표시를 했다. 그림 하나, 하나를 보는 순간 행복했고 마음의 평안을 얻었다는 것이었다. 공간과의 싸움이라고 표현했던 매순간, 순간, 내가 느낀 평온함을 보는 이들 역시 느껴버린 순간이었다. 이제 내 공간은 다른 사람과 공유할 수 있는 공간이 되었고, 이 공간들로 인해 관람자들은 그들만의 파라다이스에 들어서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 ■ 최정미

Vol.20050518a | 최정미 회화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