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즉시색 空卽是色

공공미술 프로젝트 『공즉시색』展   2005_0518 ▶︎ 2005_0614

김주호_드림통-불꿈_드럼통, 에나멜_105×67×80cm_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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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5_0518_수요일_06:00pm

참여작가 / 강선미_강영민_강효명_김석_김주호_노석미_이웅배

세미나_공공미술_관계의 미학: 도시, 공간, 사람, 그리고 예술 강사_박삼철 / 장소_광화문 흥국생명빌딩 14층 세미나실

① 2005_0526_목요일_07:00pm / 새로운 시대, 새로운 미학; 공공성과 관계미학, 사용미학 월드컵광장, 촛불광장, 찬-반 탄핵시위, 참여OO, OO연대... / 싸이질, 블로그, 댓글, 문자, people-centered/cared, action planning... / 후기산업시대에서 정보통신시대로 삶의 환경이 변화하는 와중에 예술의 기반은 그대로일까? / 접속의 시대(The Age of Access)는 공공성에 의한 참여문화와 사용자(user)의 위상을 새롭게 만들고 이에 걸맞은 새로운 미학을 요구하고 있다. 공공미술을 공공성과 사용미학이라는 기반에서 넓게 조망해본다.

② 2005_0602_목요일_07:00pm / 공공미술의 흐름; 모뉴멘트에서 뉴장르 퍼블릭아트까지 미술장식과 공공미술은 다르다? / 현재 공공미술을 둘러싸고 미술시장과 문화정책은 갑론을박중이지만, 공공미술의 흐름과 이유 등 본연은 도외시되고 있다. 공공미술은 18세기의 모뉴멘트에서 출발해 공공장소의 미술(art in public space), 공용공간으로서의 미술(art as public space)를 거쳐서 공익 속의 미술(art in public interest)로 보폭을 넓혀가고 있다. 공공미술에 대한 시대적 요구와 미술의 사회적 대응을 살펴봄으로써 미술의 사회적 처신과 새로운 미학의 개척을 살펴본다.

③ 2005_0609_목요일_07:00pm / 도시와 공간, 사람을 위하여; site-specificity와 body-scape 공공미술을 르페브르(H. Lefebvre)의 공간만들기(Production of Space)와 최근 서구에서도 관심을 갖고 있는 관계미학(N. Bouriaud, Relational Aesthetics; 이것에 관한 한 우리는 훨씬 풍부한 삶과 문화를 가지고 있다.) 등을 통해 전망한다. 공공미술은 더 이상 작품 만들기에 머물지 않고, 동시대의 도반, 동반으로서의 시민관객들이 머물러 쉬고 사유하는 공간(과 이슈), 그리고 그러한 공간을 가능하게 해주는 관계 만들기, 경험 만들기로 나아간다. 살만한 공간, 머물고 싶은 공간을 예술가가 창의하고 사용자의 몸이 직접 완성해가는 '공간으로서의 작품'을 상상해본다.

부대행사_내가 꿈꾸는 도시와 예술-도시 상상 웹 프로젝트 행사기간_2005_0515 ▶︎ 2005_0615 / 장소_www.artnpublic.net 행사내용_전시 작품, 전시 장면, 작가 약력 등 전시 전반에 관한 정보 시민참여공간-'내가 꿈꾸는 도시'를 주제로 한 일반인의 글과 이미지

주최_일주아트하우스_(주)아트컨설팅서울 후원_한국문화예술진흥원_흥국생명보험(주)_(주)영화사 백두대간

일주아트하우스 미디어갤러리 / 흥국생명빌딩 앞 거리, 광장 서울 종로구 신문로1가 226번지 흥국생명빌딩 Tel. 02_2002_7777 iljuarthouse.org

『공즉시색』전은 도시의 3요소인 빌딩(채움), 광장(비움), 가로(이음)이라는 개념을 설정하고, 흥국생명빌딩, 흥국생명빌딩 앞 광장, 거리를 전시장소로 선정했습니다. 채움의 공간은 물질과 기능 중심으로 구성되는 도시 빌딩에 대해 개입하는 공간으로 빌딩 내/외부를 작업 공간으로 설정하는 강선미의 「연결되다」, 강영민의 「조는 하트」가 전시됩니다. 비움의 공간은 광장, 공원 등 개체들의 접촉이 이루어지는 공간으로, 공원, 광장의 기능을 활성화시키는 복합기능(전시-휴게-비평)을 하는 이웅배「병촉야유秉燭夜遊II」를 전시합니다. 이음의 공간은 순환과 교통이 아니라 만남과 탐험의 길에 대한 사회적, 심리적 개입이 이루어지는 공간으로 길 위의 자연스러운 이동을 만드는 미술, 길의 심리적 회복을 꾀하는 미술작품인 노석미의 「눈물이 나다」, 김석의 「겸손에 경의를 표하다」와 「무無-지식의 무게」, 김주호의 「꿈」 시리즈가 전시됩니다. ■ 일주아트하우스

강영민_조는 하트_애니메이션 설치 무한반복_2004

공공미술 프로젝트 『공즉시색』 ● 순수미술(fine art)은 미술만으로 자립할 수 있지만, 공공미술(public art)은 작품이 놓이는 공간의 문맥, 그리고 작품을 사용할 시민관객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는 점이 둘 사이의 큰 차이이다. 순수미술이 스스로 의미를 완성하고 스스로를 지시하는 텍스트(text)라면, 공공미술은 나와 남이 어우러지는 텍스트의 충돌과 겹침, 화해 속에서 비로소 의미를 생성하는 콘텍스트(context)라 할 수 있다. 그래서 공공미술은 르페브르(H. Lefebvre)가 선도했던 '공간 만들기'이고 최근의 부리오(N. Bourriaud)가 주창했던 '관계의 미학'이다. ● 서울 광화문의 한 거리와 빌딩 안팎에서 펼치는 『공즉시색』은 이 '공간'과 '관계'에 대한 공공미술의 역할을 생각하는 프로젝트이다. 공(空)과 색(色) 두 글자를 붙잡고 작가들과, 시민관객들과 놀고 즐기는 과정을 통해 공공미술의 가능한 것들을 찾고 그러한 가능성의 탐색을 통해 머물고 싶은 공간, 살만한 도시에 대해 함께 상상하고 비평할 것을 권유하고자 한다. ● '공즉시색'이란 말 자체가 반야심경(般若心經)의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에 기원을 두지만, 이 모티브는 현학적인 포장을 위해서가 아니라 놀고 즐기면서 비평할 수 있는 '거리'를 찾기 위해 빌린 것이다. 첫째는 '공즉시색'이 만드는 말소리에서 공간의 색, 꿈, 욕망을 상상하는 것이고, 둘째는 그 반대로 말뜻에 담긴 인연으로 공공미술을 성찰하고자 한다. 몸으로 체험하는 공간의 느낌을 중시하는 말소리의 공공미술과 모든 것을 가유(假有)로 돌리고 본질을 찾고자 하는 말뜻의 공공미술이 모순된 긴장관계를 만들지만, 이 모순적인 말놀이에서 공공미술의 많은 것들을 엿볼 수 있다.

김석_無-지식의무게_화강석_120×120×120cm_1999
김석_겸손에 경의를 표하다_철, 모터장치, 채색_80×70×190cm_2005

왼쪽으로 눕고자 하는 힘과 오른쪽으로 반발하고자 하는 힘이 화해함으로써 자전거가 똑바로 서서 앞으로 나아가듯이, 공공미술은 모이면 흩어지고 싶은 개인의 자유와 흩어지면 그리워 찾는 '더불어 삶'을 섬세하게 균형 잡는다. '색즉시공 공즉시색'이 본질과 현상의 균형으로 '중도(中道)'를 생성하는 것처럼, 공공미술은 순수로의 초월, 환원과 일상, 도시, 사람들의 욕망과 필요, 꿈 등 불순한 삶 사이의 균형을 찾아야 한다. ● '성장기계', 무채색의 근대 도시가 모더니즘의 위압으로 거세시켜버린 도시와 일상의 제3공간(Thirdspace, E. Soja)과 서술공간(Representational Space, H. Lefebvre)을 색으로 재생시켜야 한다. 그리고 자기완결로서, 완성의 결과로서 스스로 자존(自存)하고 자율(自律)하는 모더니즘의 수직적 비상을 관계 속에서, 과정 속에서, 즉 '사이'에서 생성되는 수평적 연관의 미학으로 교정해야한다. 그래서 '욕망(몸)하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와 '인연(본질)이 없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역설이 공존할 수밖에 없다.

강선미_연결되다_대형화 한 도미노 블록과 유리벽에 라인 테이프_2005

우리의 도시, 공간에는 삭막하다, 황폐하다의 형용사가 자동으로 따라붙는다. 이 삭막함, 황폐함의 원인으로 멈포드(L. Mumford)는 죽음을 꼽았다. 그는 신의 도시에서 출발해 메트로폴리스를 거쳐 네크로폴리스(Necropolis), 즉 죽음의 도시로 가는 도시 삶의 노정이 삭막함, 황폐함의 주된 요인으로 보았는데, 여기에는 생태, 환경 등 물리적 조건의 악화뿐만 아니라 도시체제의 지시와 억압이 크게 작용한다. 색을 죽이고, 욕망을 죽이고 도시체제의 성장과 생산을 지시하는 훈육들만 양육한다. 그렇게 거대하고 개념적인 진리만 양육하니, 역사(시간)와 사회(사건)만 자라고 공간, 몸은 죽어야 한다. 야경으로, 원경으로 볼 때 멋있기 그지없는 도시에 앉거나 눕고 '개길' 공간은 없다. 시각을 통해 철저히 개념과 지시, 훈육을 키우지만, 몸을 통한 느낌과 비평, 서술을 없앤다. '만지지 마시오!', '들어가지 마시오!', '정숙!'의 지시어들은 교양의 포장을 빈 훈육의 상징들이다. 몸에 대한 훈육이자 욕망, 비평과 저항에 대한 사전경고이다. ● 우리 도시와 공간이 물리적 수준보다 훨씬 더 삭막하고 답답하고 비인간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몸과 욕망, 비평에 대한 원천봉쇄 탓이다. 빼앗긴 들에 봄은 혁명으로 와야 하듯이 빼앗긴 몸에 꿈은 혁명이나 망상 중의 하나로 온다. 브르통의 「걷기예찬」이 도시에서의 몸놀림, 몸부림의 즐거움에 머물지 않고 인간 실존에 대한 자각으로 이어지는 것은 몸, 공간을 매개로 한 관능과 느낌, 그것들로 숙성된 꿈, 욕망의 생성력이 실존을 깨칠 수 있기 때문이다. 도시, 공간은 인간의 몸을 담아내는 그릇이어야 한다. 인간의 욕망과 꿈을 살리는 매트릭스여야 한다. 인간은 공간을 만들고 공간은 사람을 만든다는 르페브르의 역설은 머물고 싶고 살고 싶은 도시, 공간에 대한 저항적 욕망과 실천을 촉구한다.

노석미_눈물이 나다_드로잉 출력_78×110cm_2005

도시는 잇고 채우고 비우는 것들로 구성된다. 이음의 길은 사람과 사건, 시간의 이음이 아니라 오로지 물류(物流), 차류(車流)를 위해 존재하고, 채움의 빌딩은 생산과 재생산만을 채운다. 비움은 시간과 사람들과 공간을 위한 비움의 미덕이 아니라 아직 채워지지 않은 채움일 뿐이다. 성장과 생산을 머물게 하고 훈육과 지시를 순환시키면서 욕망과 꿈, 비평을 철저하게 배제하는 도시사회가 될 수밖에 없다. 개념적인 지시와 훈육이 신체적인 느낌과 비평, 저항을 철저하게 배제하는 도시의 무채색은 논리적이고 효율적이며 의도적이다. 이에 대한 저항의 한 방편은 신체적인 '개김'이다. 빈둥거리며 배회하고 소요하면서 색을 갈구하는 것... 개념 아닌 몸으로 체감하는 색에 대한 갈구는, 벌이가 아니라 살림, 삶의 내용으로 채우고 사람과 사건, 시간을 잇고, 앞으로 채워져야 할 것들을 위해 비워두는 빈터를 만들 수 있다. 그런 공간들이 살아있는 공간들이고, 다시 사람을 살리는 공간들이다. 제3공간, 서술공간은 벌이에게 빼앗긴 도시의 봄을 살림에게 돌려주는 물질적, 비물질적 공간이다. ● '공즉시색'은 그런 공간, 그런 색을 꿈꾸면서 그렇지 못한 우리 도시를 성찰하고 비평하는 공공미술의 단위이다. 물리적인 차원의 색깔로 무채색의 도시체제의 훈육에 개길 수 있다. 억압을 강요당해온 욕구, 욕망의 힘과 비평 능력, 한발 더 나아가 개김으로써 더욱 강화되는 생성적인 에너지로 도시체제의 지배욕망에 살림의 저항을 대결시킬 수 있다. 여기서의 아름다움은 획일적이고 기계적인 도시체제, 도시사회의 아름답지 못함을 일깨우고 드러내는 아름다움이다. 비록 도시에 내던져진 존재이지만 그 안에서 자신을 자신의 욕구대로 내던질 수 있는 욕망을 통해 도시의 문제를 새롭게 제기하고, 생산과 관리에만 반응하는 성장기계의 금욕 강제적인 도시설계와 운영에 대해 비평하고, 초월적인 순수미학과 형식 중심으로 구축되는 미술을 교정하고 재활하는 시도가 이 부류의 아름다움의 원천이다. 욕망함으로써 존재하고 아름다움을 갈구함으로써 사는 것이다.

이웅배_병촉야유秉燭夜遊 Ⅱ_스테인레스 스틸, 전기장치_490×197×240cm_2003

'인연을 떠나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으로서의 '공즉시색'은 공공미술의 본질을 요약한다. '나는 누구인가'의 서구문명이 개체를 위해 경쟁하고 소외되는 자유로 인한 고독을 극복하고 타협하기 위해 공공미술에 심혈을 기울인다면, '우리는 어떤 관계인가'의 동양문명은 상호의존적이고 상생적인 '더불어 삶'을 일찍부터 체화시켜왔다. 자연관은 특히 그렇고 사람과의 관계, 물질과의 관계가 그렇다. 우리식 연관, 관계의 공공미술은 서구로부터 도입한 공공미술의 한계를 초월적으로 극복(超克)하면서 공공미술의 본질에 더욱 다가설 수 있게 해준다. 서구 공공미술에서 순수미술을 소승(小乘), 공공미술을 대승(大乘)으로 분류하면서 동양문화를 이야기하는 것도 그러한 연유에서다. 공공미술에 관한 한 우리 문화가 더많은 비전과 솔루션을 가지고 있음에 대해 각별히 유의할 필요가 있다. ● 지금까지의 공공미술은, 환자의 욕구와 필요에 무관하게 진단하고 처방하며 수술하는 의사처럼, 수직적 위계 속에서 처방하며 이를 전문, 순수로 정당화해왔다. 철저히 작가 중심이고, 완성만을 중시하고, 높다란 좌대 위에 "손대지 마시오!"와 함께 전시되어왔다. 흰 가운으로 의미를 생성하는 병원의 전문문화처럼 공공장소의 미술작품은 높은 좌대와 현학적인 미학으로 '세계-내-존재'가 아니라 '미학-내-존재'로 의미를 생성해왔다. 작품으로 파생되는 인연은 부차적이고 非미학적인 것이다.

강효명_Drop..._철, 레드와인_260×150×150cm_2005

"의미를 찾지 말라. 사용을 찾아라!"(Rirkrit Tiravanija)는 외침은 바로 인연을 벗어나서 공공미술이 존재할 수 없음을 각성한 후 "인연을 만들라!"고 역설한다. 공공미술은 더 이상 창작미학 만으로 완성될 수 없다. 나만의 각성이 아니라 너의 각성까지 함께 수레에 태울 수 있을 때 공공미술은 더욱 아름답게 완성된다. 그래서 공공미술은 사용미학의 영역을 개척한다. 나뿐만 아니라 너를 일깨우고 창의와 비전을 갖게 함으로써 세상에 대한 동반, 도반의 미디어로서의 미술을 가능하게 한다. ● 사용미학에서는 더 이상 관객은 객석을 채우는 관객이 아니다. 작품을 통해 쉬고 사유하고 비평하는 동시대의 동반(同伴)이자 사회적 정의를 좇는 도반(道伴)이다. 미술의 인연을 통해 동시대의 문제를 성찰하고 창의하고 비전을 갖는 참여의 주체이고 공공미술을 완성하는 제2의 주체이다. 미술의 인연을 통해서 미술의 아름다움에 대한 동반, 도반이 되며 한발 더 나아가 살만한 세상의 가능성을 찾는 도반, 동반이 된다. ● 그런 인연을 만들기 위해 '공즉시색'의 미술은 인연 속에서 존재하고자 한다. 인연은 몸으로 더욱 실제화된다. 꿈, 욕망을 나눌 수 있을 때 인연의 깊이는 더욱 깊어진다. 서구 공공미술에서 접근(public access), 향유(public use)가 강조되는 것은 신체적인 접근과 사용뿐만 아니라 심리적인 접근과 사용, 정치적인 접근과 사용에서 일체감과 소유의식을 전하는 인연의 역할을 본 탓이다. 미술의 자치(autonomy)가 근대미술의 중요한 수확이라면 이제 공공미술은 이 자치와 다른 자치들의 인연을 통해 더불어 사는 세상을 모색한다. 이번 '공즉시색'의 공공미술은 미술의 아름다움이자 세상의 아름다움이고자 하는 작은 출발이다. ■ 박삼철

Vol.20050531a | 공공미술 프로젝트 『공즉시색』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