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의 길

신낙균선생 서거50주년기념展   2005_0527 ▶ 2005_0626 / 월요일 휴관

신낙균선생 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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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5_0527_금요일_05:00pm

전시 오프닝 행사와 함께 「1920년대에 쓴 최초의 사진학」출판기념회가 열립니다. 세미나_전시기간 중 매주 1회씩 총 3회, 선생에 관련된 주제 특별강연 형식(전시장 영상실)

주최_동아일보_신낙균선생기념사업회 주관_동아일보 신문박물관_명지대학교 한국사진사연구소 관람시간_10:00am~06:00pm / 관람료_일반 3000원_초중고교생 2000원

동아일보 신문박물관 4층 기획전시실 서울 종로구 세종로 동아미디어센터 내 Tel. 02_2020_1830 www.presseum.or.kr

2005년 선생의 50주기를 맞아 ● 선생은 19세기 마지막 해인 1899년 4월13일 경기도 안성에서 출생해 1955년 4월 4일 경기도 수원에서 작고하셨다. 57세의 짧은 생애였다. 선생은 짧은 생애와는 달리 만학이었는데, 생전에 여섯 곳의 학교를 다녔을 뿐만 아니라 도쿄사진사진문학교도 늦은 27세에 졸업하고 귀국 후에도 사단활동과 저술 활동을 계속했는데, 이 정신은 말년까지 이어졌다. 고향인 안성에서 공립보통학교(1912년 졸업)를 다닌 후 인천공립상업학교(1915년)를 다니다가 오숙근(吳淑根)여사와 결혼 후(1916년) 다시 진학해 경성관립공업학교를 졸업(1918년) 3,1만세운동 후 일제의 문화정치 표방과 함께 무단통치가 완화되던 1924년, 일본에 유학, 도쿄 정칙(正則)영어학교(1922년)와 동양대학 문화학과(1924년)를 거쳐, 1924년 일본 유일의 사진전문학교인 도쿄사진전문학교(東京寫眞專門學校)에 입학했다. ● 도쿄사진전문학교는 현 도쿄 공예대학교 전신으로, 일본 대표적인 사진 산업체인 코니시록쿠의 창설자 杉浦六右衛門이 기금을 출연해 설립한 사진전문학교로, 1926년에 도쿄사진전문으로 개칭해 많은 일본사진계의 지도자를 배출했는데, 선생은 1927년에 제2회로 졸업했다. 선생이 이 학교에서 수학하던 시기는 니엡스의 사진발명 백년제가 개최되어 사진발명의 과정과 백년간의 사진변천사 등 많은 연구발표와 행사가 개최되었으며 일본사진계는 메커니즘의 개발이 최대의 관심사였다. 사진공업이 눈부신 성장을 거듭해 사진재료와 사진기까지도 자급이 가능해졌을 뿐만 아니라 외국 사진술의 수입과 병행해 독자적인 개발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여기에 도쿄사진전문학교의 학과목도 이러한 사진계의 분위기를 크게 반영해 편성되었다.

신낙균_자화상_젤라틴 실버프린트_1926년 경_한국사진사연구소 소장

1927년 귀국, 서울에서의 사진 활동은 교육기관으로는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학교 사진과 경성사진학강습원, 사진단체 활동으로는 경성사진사협회, 도쿄사진전문학교 동창들이 중심이 된 경성연우회(京城硏友會), 그리고 후학들이 결성한 경성사구회 등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1934년 『동아일보』 사진부장으로 신문사진계에 몸담게 되면서 많은 사진 연구 성과를 기고하기도 했다. ● 이 짧은 선생의 생애에 두 번의 중요한 변화의 계기 맞게 된다. 그 하나는 1919년 3월1일의 3,1만세운동이다. 당시 20세. 나라를 일본에 빼앗긴 지 10년, 압제에서 허덕이던 민중은 3,1만세운동으로 일제에 대항해 일어섰다. 만세소리는 방방곡곡을 노도처럼 뒤덮으며, 서울에 인접한 안성에서도 만세운동은 파급되어 경기도내에서는 수원 다음으로 큰 규모의 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 ● 이 안성삼일만세운동에는 거사준비에서부터 시위까지 생전에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과 함께 참가했는데, 1970년대 말(1976년으로 기억된다) 선생의 친구인 이건춘(李建春, 전『청년』지 편집장) 옹은 필자에게 "3월 29일 안성군 원곡면 만세시위에 가담했는데, 이를 앞두고 비밀리에 만세운동에 참가할 군중들에게 나누어줄 선언문을 복사하고 태극기를 만드는 등 사전 거사준비를 하게 되었다. 선생을 비롯한 우리 친구 몇 사람이 주동자와 함께 사랑방에서 시위에 필요한 물건들을 밤을 새워 만들고, 이것을 장터까지 들고 나가 군중들에게 나누어 주면서 만세운동에 참가했다. 그 후 친구 신낙균은 이 사건 때문에 도피생활을 해야 했는데, 밤에 변장을 하고 안성을 빠져나가 서울에 피신해, 매부(鄭旭鎭) 집에 은신해 8개월 동안을 숨어살았다. 그리고 이 도피 생활이랄까 이런 생활 속에서 아마추어사진가이던 매부 정욱진로부터 사진술을 접할 수 있었고, 이런 저런 사정으로 해서 사진과 연관을 맺을 수 있는 결정적인 사건으로 이어졌을 것이라"고 증언했다.

신낙균_어린아이_젤라틴 실버프린트_1930년대_한국사진사연구소 소장

선생의 생애에서 또 한 번의 중요한 계기는 『동아일보』 일장기말소사건이었다. 1936년 『동아일보』는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경주에서 우승한 손기정 선수의 사진을 전재하면서 일장기를 말소해 게재했는데, 이 과정에서 동료 기자들과 주도적인 역할을 자담했기 때문이다. 1936년 현지에서 나라온 손기정 선수의 베를린 올림픽대회의 마라톤 경기 세계 제패 소식은 일본의 지배 하에 신음하던 온 국민을 흥분과 감격으로 휩싸이게 했으며『동아일보』는 이러한 온 국민의 감격과 승리에 대한 함성을 일장기말소사건이라는 승리의 주인공인 손기정선수의 가슴에 부착된 일장기를 말소해 지면에 반영한 것이었다. ● 이 사건은 이렇게 발로되었으며 누구누구가 했고, 누가 발의했느냐 하는 주도적인 역할을 대한 논의가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는 바로 이러한 거사 동기에 있기 때문이다. 선생은 당시 사진게제의 전 책임을 맡은 사진부 데스크로 서영호(사진부), 현진건(사회부), 이길용(운동부), 최승만(잡지부) 등과 함께 40일간의 혹독한 고문 끝에 언론기관에 일절 참여하지 않겠다는 서약서 서명하고서야 풀려났다. 이 사건의 거사는 민족정기가 흐려지고 변절자가 속출하던 당대에 민족혼의 각성을 도출하는데 그 목적이 있었지만, 선생은 모든 것을 박탈당해 더 이상의 저항을 시도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1936년 8월 25일자 석간 2면에 실린 손기정 선수 관련 지면(일장기 말소 전)
1936년 8월 25일자 석간 2면에 실린 손기정 선수 관련 지면(일장기 말소 후)

말미에 붙여 ● 한국에 사진이 수용된 후 사진관이 설치되고, 예술사진 활동이 펼쳐지는 등, 다양한 모습으로 발전해 가는 과정 속에서 신낙균 선생의 역할은 우리 사진계의 거목이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거목과 같은 선생을, 사진사 관계의 작업, 특히 일제 하에서의 사진 활동 등이 제대로 규명되지 않아서인지 숲에 가려져, 참모습으로 그려지지 못했다. 그리고 선생이 타계한지 50년, 그 50여년 사이에 선생이 지나온 역정, 사진에 대한 정열과 정신, 사진을 학문으로 일궈내려고 했던 사진교육과 학문적 업적, 선생이 남긴 사진에 대한 정신적 유산, 심지어 선생의 이름까지 잃어버린 지 오래되었다. ● 그러나 선생이 수학했던 일본 도쿄사진전문학교는 도쿄 공예대학교로 발전해 일본 사진계의 많은 지도자를 배출했으며 유서 깊은 이 학교에 유학하는 우리나라 학생들이 끊이지 않고 있다. 그리고 신문화운동의 구심점으로 최초의 사진 교육기관을 두었던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는 서울 종로 2가에 YMCA라는 청년운동의 본고장으로 그 역할을 이어가고 있다.

신낙균_ 최승희_젤라틴 실버프린트_1930년대_한국사진사연구소 소장

사진 교육기관이 없어, 뜻있는 사진가들이 마련한 강습회 같은 재도를 활용해 어렵게 운영했던 때와는 달리 곳곳에 대학교와 대학원에 사진과 없는 곳이 없다고 할 정도로, 사진교육은 한국사진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또 하나 잊을 수 없는 사건은 손기정, 남승룡 선수가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을 차지하고도 우리 선수라고 할 수 없었던, 일본 식민지 통치 시절에, 손기정선수를 우리 선수라고 일제에 맞대들었던 일장기말소 사건은 어떤가. 무기정간을 당했던 『동아일보』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신문이 되었으며, 또 우리나라도, 식민지 통치의 질곡에서 벗어난 지 오래되었다. ● 그럼에도 선생은 1955년, 광복된 이 땅에서, 일제에 의해 씌워진 굴레를 벗지 못하고, 그때까지도 일장기말소 사건 때의 그 모습 그대로, 저항을 좌절당한 피압박 민족의 모습인체로 세상을 뜨고 말았다. 선생의 서거 50주년을 계기로, 사진계는 사진계대로의 일제 하에서 벌어졌던 사진활동을 재대로 규명해 선생의 사진사적 위치를 바로잡아야 할 의무가 있으며, 사진 교육계는 사진을 교육을 통해, 사진을 학문으로, 창조적인 작업에서, 우리가 주체된 사진사상을 조성하려했던 선생의 사진학 정신을 이어가야 한다. 그리고 언론계와 『동아일보』는 일제의 강요에 의해 일장기 말소라는, 기자들이 일으킨 전무후무한 저항정신으로 인해 언론계에서 추방당해 나락의 길로 떨어졌던 『동아일보』 『조선중앙일보』 기자들의 명예가 회복될 수 있도록 적극 나서야 한다._「1920년대에 쓴 최초의 사진학」 해제 中 ■ 최인진

신낙균 선생 ● 故 申樂均(1899-1955) 선생은 우리 민족의 암흑기라고 할 수 있는 일제시대에 당시 새로운 예술의 장르이자 선진 학문이었던 사진을 공부하고 사진가로 활동하시면서 한국사진의 제도적, 미학적 기초를 만드신 분이었다. 선생은 1927년 우리나라 사람으로는 최초로 일본의 동경사진전문학교에서 사진을 체계적으로 공부하시고 졸업하셨으며, 귀국하신 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공적 사진교육 기관인 YMCA의 사진과 교수로 부임하여 근대 사진교육의 기초를 마련하셨다. 또한 사진 공교육을 위해 「사진학강의」, 「재료약품학」, 「채광학대의」, 「사진용술어집 · 재료약품학부록」이라는 우리 최초의 사진학 저서를 출간하시어 사진의 학문적 체계를 정립하시기도 하였다. ● 1934년에는 동아일보의 사진부장으로 입사하시어 포토저널리즘 분야를 개척하셨고, 1936년에는 손기정 선수의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우승 시상식 사진을 신문에 게재하면서 일장기를 말소하는 소위 「동아일보 일장기 말소사건」을 주도하시다 일제에 의해 언론계에서 추방당하시는 등 일제에 대한 저항정신과 민족정기를 수호하려는 기자 정신을 발휘하셨다. 한편으로 1930년대 일제하에서 한국인들에 의한 예술사진 운동을 주도하여 표현의 도구로서 사진의 가능성을 넓힘과 동시에 사진을 대중 속에 보급하는 사진예술의 선각자로써 면모를 보이셨으며, 이를 통해 우리나라 근대문화와 예술의 발전과 정착에 기여하셨다. 특히 선생은 당시 사진의 표현 영역과 가능성을 확장시킨 비은염, 은염 기반의 특수인화법을 우리나라 사람 최초로 연구하고, 실제 사진의 제작에 적용시켜 미학적으로 매우 고양된 작품을 제작하시어 후세에 남기고 있다.

「1920년대 쓴 최초의 사진학」 출판_4X6배판, 520쪽, 하드카바 양장, 4도 인쇄. 가격 70,000원

- 1978년에 복간된 적이 있는 선생의 대표적 저술인 「사진학 개설」을 현대적 문체로 재구성하여 복간본과 원본의 이미지를 그대로 재연한 영인본을 합하여 출판한다. 이 책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 1920년대 초판본 「사진학강의」, 「재료약품학」, 「채광학대의」, 「사진용술어집 · 재료약품학부록」 의 전체 내용 영인 / 현대적인 방식으로 재 집필된 사진학 개설 전체 내용 / 해제 : 선생의 사진학 저술, 사진사상, 생애를 중심으로 - 최인진

Vol.20050603b | 신낙균선생 서거50주년기념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