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안(彼岸)의 풍경

김성복 개인展   2005_0601 ▶ 2005_0607

김성복_너랑 나랑_장지에 채색_65×89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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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5_0601_수요일_06:00pm

학고재 서울 종로구 관훈동 100-5번지 Tel. 02_739_4937 www.hakgojae.co.kr

피안(彼岸)의 풍경 - 눈으로 담아내어 마음으로 그리다. ● 야트막한 산부터 험준한 산까지 오르내리면서 바라 본 풍경에서 작가 김성복에게 다가온 것은 웅장한 산의 위용이 아니라 그 안에 숨 쉬고 있는 작은 존재들이다. 냉이꽃, 제비꽃, 강아지풀, 엉겅퀴, 노루발, 질경이 등의 풀꽃들과 무당벌레, 사마귀, 나비 같은 곤충들. 이들은 모두 거대한 산 풍경 속에서 허리를 굽어 찬찬히 관찰하지 않으면 스쳐지나갈 만한 작은 대상들이다. 작가는 짧은 시간을 살다가는 이 작은 생명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그들을 기억하고 다듬어낸다. 작가 김성복의 풍경이 주는 현장감은 바로 이러한 작가의 세심한 관찰과 이를 통한 해맑은 색채의 재현에서 기인한다. 우리가 자연을 체험하면서 느끼는 청명함을 김성복은 그녀만의 맑은 색채로 그려놓았고, 이로써 그녀의 꽃들은 그저 들판에 피어난 예쁜 풀에 그치지 않고 자연의 기운과 생명력을 지니게 된다. 여러 겹의 색채를 입혀나가면서도 그녀의 들풀들은 밝은 빛을 발하고 있다. 그리고 푸른 들판에서 움트는 작은 꽃들, 그 잎사귀를 넘나드는 풀벌레와 나비. 넓게 선염된 푸른 들판은 마치 머나 먼 고향이나 낙원을 기리는 듯 다가온다.

김성복_봄볕_장지에 채색_43×61cm
김성복_5월 한낮에_장지에 채색_70×98.5cm

이렇듯 작가의 풍경에서 너른 들판은 작고 연약한 꽃과 풀의 보금자리이다. 세밀하게 그려진 작은 풀꽃들은 생명력 있는 모습들이며 초록으로 잔잔하게 선염된 먼 들판은 이와 대조적으로 무심하게 펼쳐진다. 김성복의 담채 풍경의 또 다른 개성은 이처럼 근경 대상과 원경 사이의 단순하면서도 역동적인 화면 내 구도의 신선함에 있다. 예를 들어 「산들바람」이나 「5월 한낮에」에서 전경의 꽃과 식물들이 선명하게 채색된 반면, 아스라이 멀리 보이는 희미한 산의 능선이나 들판은 급격하게 멀어져서 몽환적이기까지 한다. 화면 전체가 살아있는 식물의 생명력으로 가득하지만 그것이 땅에 뿌리를 내리고 있기 보다는 이상적 세계에서 볼 수 있는 맑은 정취의 한 떨기 꽃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이러한 비현실적인 느낌은 형태나 색채의 주관적 표현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묘사된 대상의 형태는 얼핏 보기에는 사실적으로 다가오고, 실제 자연풍경을 모사한 듯 보이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묘사적이거나 사실적이지만은 않다. 나뭇잎, 꽃잎, 풀잎 등의 묘사가 단순화 되어있고 대상의 크기에 있어서는 전경의 작은 들꽃들이 실제 비례와 달리 확대 묘사되었는가 하면, 토끼가 엉겅퀴 잎사귀 그늘에 숨어있기도 하고 은방울꽃만한 나비를 그려 넣기도 한다. 이렇듯 화면 내에 툭툭 배치되어 있는 소재들은 대상의 크기나 묘사가 작가의 심경에 따라 실제와 상관없이 주관화 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표현의 결과는 작가가 스케치나 실제 묘사에 의존하지 않고 산행 이후 기억에 의존하여 그려낸 것이기 때문이다. 마음속에서 수없이 그려낸 형상들이 형상과 색채로 드러난 것이다.

김성복_진밭골 가는 길_장지에 채색_48×74cm
김성복_마타리 2004_장지에 채색_38×54cm

김성복의 풍경을 보니 조선시대 강희맹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군자가... 책상에 앉아 종이에 붓을 날려 만물을 정관(靜觀)할 때에 마음으로는 터럭만한 것도 능히 꿰똟어 볼 수 있으며 손으로 그림을 그릴 때 내 마음도 극치에 도달하는 것이다. 무릇 모든 초목과 화훼는 눈으로 그 진수를 보아 마음으로 얻는 것이요, 마음에 얻은 진수를 손으로 그려내는 것이니, 한번 그림이 신통하게 되면 한번 나의 마음도 신통하게 되며, 한번 그림이 정신을 신통하게 되면 마음도 신묘하게 된다."이는 사물을 마음으로 관찰하고 표현하면, 그림이 마음을 새로운 경지로 이끌어준다는 것으로 자연과의 물아일체(物我一體)가 작품의 표현 뿐 아니라 작가의 정신과도 큰 상관관계가 있음을 설명하는 것이다. 이 글에서처럼 작가 김성복은 들판의 작은 대상들을 애정 어린 시선으로 살펴보고 이들을 마음에 담아서 자신의 화폭에서 새롭게 태어나게 하며, 이내 그녀의 들꽃 풍경은 다시 그녀의 눈과 마음을 닦아내어 다시금 그녀를 산으로 재촉하는 것 아닐까. 이러한 이끌림으로 그녀는 봄부터 가을까지 계절마다 다른 모습들을 체험하며, 같은 장소이어도 이전 해와는 또 다른 소소한 풍경들에 감탄하고 이들이 마음에 차 올라 손으로 풀어낼 수 있을 때까지 걸음을 지속하는 것 아닐까. 그러고 나서 마음이 화필을 통해 쏟아 부어질 때 이름 모를 꽃들과 작은 벌레들은 작가 자신이 되고, 그 안에서 자연의 자유로움과 생명력을 맘껏 누리는 듯 하다.

김성복_10월의 정취_장지에 채색_70×100cm

넓고 푸른 벌판을 빠르고 엷게 선염한 후 청명한 색채들로 대상을 풀어나가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그것이 풀이 되기도, 꽃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벌레가 되기도 한다. 어느덧 그녀의 기억 속 풍경들이 그림 속에서 하나씩 선명하게 되살아나서 그녀만의 이상향을 구현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때 묻지 않은 태고의 자연 같은 그녀의 풍경에서 피안(彼岸)의 세계를 느끼게 된다. ■ 김유숙

Vol.20050604a | 김성복 회화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