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RTRAITS OF ARTIST

이종수 사진展   2005_0608 ▶ 2005_0617

이종수_유근택_흑백인화_45×30cm_2000

초대일시_2005_0608_수요일_06:00pm

학고재 서울 종로구 소격동 70번지 Tel. 02_720_1524 www.hakgojae.co.kr

다른 작가의 작업을 사진으로 기록하는 일은 매우 소모적이고 고달픈 일이다. 통상적으로 말할 때 평면 작업은 쉽고 입체 작업은 어렵다고 생각되어지지만, 두 작업 모두 쉽거나 어려움이 따른다. ● 한 작가의 작업 환경과 그 작가의 모습을 사진으로 기록하는 것은 그 사람의 작업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는 의미 있는 작업이다. ● 아마도 전시회를 둘러보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작가 이종수가 전시회를 가지는 의도를 명확하게 전달 받게 될 것이다. 그러하기에 어쩌면 이러한 글조차도 사족일 수 있겠다. ● 사진작가 이종수는 나와는 같은 사진 작업을 하는 도반으로 많은 인연을 맺어왔다. 그런 그가 다양한 작가들의 모습을 기록한 사진을 갖고 전람회를 연다면서 글을 부탁하기에 그러지 하고 쉽게 대답을 하였다. 하지만 글을 쓰는 이 시각에도 목이 메어 글을 쓸 수가 없을 것 같은 기분이다. ● 일전에 그를 만났을 때, 그가 이민을 간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미국으로, 이 땅보다 더 큰 세상에서 새로운 삶을 살겠다고 한다. 비록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하지만, 그와 나 사이의 인연의 끈이 계속 이어지기를 기대한다. 전혀 다른 환경 속에서 시작되는 새로운 이종수의 사진 작업을 기다려 보고자 한다. ■ 주명덕

이종수_월전 장우성_흑백인화_34×34cm_2001
이종수_박서보_흑백인화_45×30cm_1997 / 이종수_서세옥_흑백인화_45×30cm_1997
이종수_김기린_흑백인화_44.5×30cm_2000 / 이종수_변종하_흑백인화_46×31.5cm_1998
이종수_김영원_흑백인화_46×31.5cm_1997 / 이종수_이승택_흑백인화_46×31cm_1999

이종수 형 ● 이종수형은 자신은 모르겠지만 어깨가 약간 휘었다. 얼마나 카메라와 함께 살았으면 몸까지 그리 되었을까. 그의 눈과 마주치면 나는 늘 내가 탐색 당하는 것 같아 흠짓 놀랜다. 작지만 날카로운 눈매. 끝까지 사물 뒤편의 그 무엇을 밝혀내려는 듯한 타는 욕망의 눈초리. ● 이종수형을 본격적으로 만난 것은 95년 광주비엔날레 작품을 하면서부터다. 그 전에도 마주치긴 했지만 그냥 수인사나 하는 정도였다. 나는 첫 광주비엔날레에 너무 들뜬 나머지 지금 돌이켜보아도 좀 쑥스러운, 과한 계획을 세웠던 것 같다. 몸에 슬라이드를 투사하여 사진을 찍고자 했다. 그러나 이 작업은 생각만큼 쉽지가 않았다. 몇 날 밤을 새웠으나 실패를 거듭했다. 이종수형을 다시 보게 된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이 문제를 너무나 쉽게 풀어버렸다. 본인의 스튜디오도 아닌 능곡의 나의 작업실에서 불과 한나절 만에 내가 원한 영상을 만들어 주었다. 이때 작업이 당시 나름대로 화제를 모았던 '이젠 내 놓을 것이 없으니 임옥상이 옷을 벗고 누드로 나섰다'라는 포스터 연작이다. 이것을 인연으로 우리는 급속히 가까워졌다. 아니 나는 그랬다. 그를 일로서 신뢰하기 시작한 것이다. 평소 아무리 가깝다 하더라도 일을 함께 하다 보면 전혀 뜻밖으로 의외의 상황에 봉착하여 둘의 관계가 소원해지기 일쑤인 것이 우리네 인간관계이다. 잇속을 너무 챙기는 사람, 사기성이 있는 사람, 과장이 너무 심한 경우, 약속을 안 지키는가 하면, 마무리가 엉성하기 일쑤고, 전문성이 영 떨어지는 사람 등, 일을 통해 두 사람의 관계가 재조정되기 십상이다. 이 반대의 경우는 매우 드물다. 따라서 일의 파트너가 된다는 것은 오늘날 같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축복이 아닐 수 없다. ● 이종수형은 나의 모든 일을 도맡아 해주었다. 그는 항상 내가 원하는 것 이상을 만들어 주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때로는 매우 차갑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일 이상의 대인관계를 원치 않는 것처럼 오해되기도 했다. 일 귀신! 일이 끝나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사진 찍기가 무섭게 그는 후속작업을 위해 자리를 떴다. 나도 그것이 편하기도 했다. 그리고 시간에 정확히 맞춰 도착한 작업 결과는 탄성을 지르게 했다. ● 대지의 어머니, 일어서는 땅, 역사의 징검다리, 광주는 끝나지 않았다, 영암 구림의 '세월', 광주농성지하철역의 '솟아오르는 산', 철기시대, 흙의 소리 등, 그는 나의 모든 작업을 기록했을 뿐만 아니라 재해석하여 특유의 그의 작품으로 재창조해 냈다. 또한 어딜 가나 만날 때면 약속된 일이 아니더라도 카메라를 들이대곤 했다. 나도 모르게 나는 그의 사냥감이 되곤 했다. ● 나는 늘 그에게 미안하다. 그의 전문성을 높이 평가하는 만큼의 경제적 예우를 못하기 때문이다. 작가의 작업을 기록한다는 것은 애정이 없으면 안 되는 일이다. 더욱이 미술시장이 꽁꽁 얼어붙어 있는 상황에서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그런 속에서도 형은 늘 꿋꿋했고 부지런히 움직였다. 후배 화가들은 돕는 것도 많이 목격되었다. 그런데 그는 무엇보다도 그림을 좋아한다. 감식능력도 탁월하다. 그래서 그의 주변엔 많은 양질(?)의 작가들이 모여 포진하게 되었다. 나도 모르는 작가들을 다시 보게도 되고 만나게도 되었다. 어찌 보면 작가들을 그 만큼 속속들이 잘 알 수 있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작가들의 사는 모습, 작업실, 생활패턴, 호불호, 성격 등 작가들의 모든 것이 이종수형의 안테나에 잡혀 들지 않을 수 없다. 이젠 이종수는 미술계의 소식통이요, 유비통신의 해설자다. 이종수형이 보는 현실은 카메라로 들여다 본 현실이다. 현실은 사진작가답게 정확하고 예리하게 분석, 정리된다. 형을 통해 듣는 세상은 그만큼 새롭고 특이하고 흥미롭다. 이제 비로소 그는 진정 일할 수 있는 고지에 도달했다. ● 그런데, 그런데 형이 일을 접는단다. 나는 이 얘기를 처음 들었을 때 너무 충격이 컸다. 정말 가슴에 큰 구멍이 뻥 뚫린 듯한 느낌이었다. 나는 아직도 이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가슴이 너무 아프다. ● 이종수형의 사진은 간결하다. 군더더기가 없다. 시간과 공간의 응축, 동결. 그의 사진 속에서 나는 거리를 포착한다. 아니 거리가 사진 속에 설정되어 있다. 더 이상 가까이 오지 말라. 더 이상 멀어지지도 말라. 이 거리만을 유지하라. 나는 옴짝달싹 못하고 그에 작품에 사로 잡힌다. 그의 작품의 자력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기꺼이 몸을 맡긴다. 비록 그가 일을 접는다 하더라도 나는 그것이 일시적인 일이라고 믿는다. 어찌 그가 카메라의 매력을 잊겠는가. 또 그가 멀리 떠난다 해도 그 거리는 이미 설정된 그 이상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가 내뿜는 자력은 그만큼 크고 강렬하기 때문이다. ■ 임옥상

이종수_정종미_흑백인화_42.5×42.5cm_2001
이종수_안성금_흑백인화_30×44.4cm_1988
이종수_한만영_흑백인화_30×45cm_1992
이종수_문범_흑백인화_30×44cm_1999
이종수_김정헌_흑백인화_30×45cm_2000

이종수의 사진과 미술계 ● 이 글은 평문이 아니다. 늦은 나이에 미국으로 새 삶을 떠나는 나의 친구 이종수와 그의 사진에 대한 단상이다. 몇 년 전 나는 그를 산 친구로 만났다. 백두대간의 멤버로, 그는 일반 산악회 출신이었고 나는 대학 산악부 출신으로 우리는 서로 잘 아는 산 선배들을 공유하고 있어 스스럼없이 이야기가 통할 수 있는 상대였다. 이종수의 과거를 나는 잘 모른다. 내가 그를 만났을 때 그는 인사동 종로경찰서 옆 건물 3층에 사진 스튜디오를 운영하면서 주로 미술작품을 전문으로 촬영하는 사진작가였다. 차츰차츰 알고 보니 그의 스튜디오는 미술계의 인사동 사랑방 같아, 그는 나보다도 훨씬 많이 미술계의 소식에 밝았고 내가 술 먹고 뭐 하더란다는 이야기까지 그를 통해 내 귀로 들어올 정도였다. 어떤 사람은 그를 내 앞에서 비판했고, 어떤 사람은 칭찬했지만 나는 항상 그를 산에 대한 의리로 대했다. ● 사진작가로 많은 미술작품과 작가들을 접하면서 이종수는 나름대로의 미술에 대한 식견과 안목을 갖추고 있었다. 그 식견과 안목이 나와 일치하지 않는 부분도 있었지만 산이 우리를 포용하듯, 때로는 의기투합하여 일을 꾸미기도 했다. 양평 일대의 작가들과 함께한 『명달리』展과 『남한강』展 등이 그러한 투합의 결실이었다. 그는 나보다 일의 추진력이 강했고, 영락없는 사진꾼인 그를 발견하고는 "아, 사람마다 하는 일이 이렇게 다를 수 있구나"하며 그의 노련함을 맛보기도 했다. ● 피사체를 직접 대하지 않으면 일이 될 수 없는 게 사진 작업이다. 사진은, 실제와의 대응에서 즉발적인 판단력을 필요로 하고, 작가에게 무한한 인내심을 요구하기도 한다. 곧, 사진은 발로 뛰어야 한다. 이종수는 이러한 자질과 성격을 타고난 듯 좋은 사진을 얻기 위해 장비의 무게와 발품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역할에 충실했다. ● 그동안의 발품과 무게로 얻은 작품을 골라 개인전을 가졌어도 몇 번이었을 이종수가 이렇게 갑작스럽게 한국을 떠날 줄은 나는 정말 몰랐다. 사람이 배우고 익혀 직업을 갖고, 가정을 꾸려 먹고 사는 일에 커다란 변화가 없을 수는 없겠지만, 이종수와 관련하여 무언가 찜찜한 회의(懷疑)의 심경이 일어, 나는 무척 안타깝다. 이 땅에 사진의 문명이 꽃을 피우려고 일어날 즈음 그가 떠나니 그게 아쉽다. 서구와 달리 사진의 예술 세계로의 진입이 늦은 우리는 그만큼 사진 작업에 대한 다양성의 공존과 인식이 부족했었다. 그 공존과 인식이 대중적으로 나아질 즈음 등장한 '인터넷'과 '디카'는 우리에게 서구가 누린 사진의 체계적인 발전을 송두리째 앗아갔다. 상업과 광고로서의 사진 영역은 확대되었지만 예술로서의 사진이 발붙일 터전은 그만큼 상대적으로 줄어든, 쉽게 말하면 사진계의 구조 조정이 일어난 셈이다. ● 이종수는 누구보다도 미술계를 충실하게 기록해온 사진작가다. 곧, 기록을 예술로 치환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흥미로운 사실들, 예를 들면 '중광 스님의 임종 무렵'이나 여러 작가의 작업실 표정들은 사진만이 지닐 수 있는 기록과 예술로서의 독특한 매력을 우리에게 제공한다. 작가로서 개개의 인물을 영웅적, 천재적 예술가로서의 표상으로 읽을 수도 있겠지만, 그 개개인의 성격과 인간됨을 객관적으로 되짚어 보게 하는 윤리적, 낭만적 표상의 인물이기도 하다. 이런 측면에서 이종수의 이번 개인전은 미술계의 어느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하나의 성과다. 그 성과는 유독 이종수 만이 사진으로 우리의 미술계를 주목해왔다는 한 가지 사실 만으로서도 가치가 있다. ● 나는 이종수의 이번 사진전이 그가 우리의 미술계에 베푼 마지막 선물이라고 생각한다. 돌이켜보면 나를 포함한 어느 누가 애정의 눈으로 미술계를 감쌀 줄 알았는가? 냉소의 비평으로 자만했고, 권력과 부를 축적하기 위한 수단이었고, 작가와 작품의 미명아래 제 것 챙기기에 바빠 옆을 돌볼 겨를이 없었던 우리의 미술계가 아니었던가? 이런 사진들을 남겨 우리의 미술계를 따뜻하게 만져주니 감사할 뿐이지만, 이제 그런 그도 가야한다니 서글플 뿐이다. 마지막으로, 그의 앞날이 가족과 함께 이국(異國)에서 평안하기를 기원하며 그와 함께 했던 지난날들을 잊지 않으리라. ■ 정영목

이종수_안창홍과 민정기_흑백인화_46.5×31cm_1997
이종수_이흥덕_흑백인화_45×30cm_2001 / 이종수_이길래_흑백인화_46×31cm_1998
이종수_김호득_흑백인화_45×31cm_1999 / 이종수_최석운_흑백인화_45×30cm_2000
이종수_임영선_흑백인화_45×30cm_2000 / 이종수_김섭_흑백인화_44.5×30cm_1997
이종수_반미령_흑백인화_46×31.5cm_1997 / 이종수_육태진_흑백인화_46×31cm_1997

나의 잃어버린 안국동 스튜디오_이종수 사진전, 그리고 '한 우정의 작은 歷史'를 추억하며

1. 누군가 나에게 인생에게 가장 슬픈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서슴없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는 것'이라고 말하리라. 그리고 또다시 인생에서 가장 잊을 수 없는 것이 무엇이냐고 연이어 묻는다면, 나는 주저 없이 한 사람과 나눈 '한 우정의 작은 역사'라고 대답하리라. 이종수 선생과 나는 내가 일민미술관의 수석큐레이터로 등관한 지 얼마 안 되는 시점인 1997년에 만났다. 우리는 처음부터 서로가 만만치 않은 존재임을 직감했다. 전시장 촬영을 나왔던 그에게 나는 아주 쌀쌀한 표정으로 대했고, 이종수 선생 역시 전문가다운 포토그래퍼로서 지닐 수 있는 가장 도도한 자세를 나에게 보여 주었다. 우리는 그렇게 세상에서 가장 차갑고 냉정하게 만났다. 그리고 8년 여 동안 우리는 형제보다 가까운 사이로 지냈다. 만날 수 없는 날에도 거의 매일 전화를 하다시피 했으니 이 말은 사실과 다름이 없다. 이러한 관계를 아는 가까운 이들은 '서로 사귀느냐?'고 농담을 던지기도 했다. 이종수 선생은 나에게 있어서 형과 같은 존재였다. 이제 그가 우리나라를 떠나 미국으로 영구이민을 간다고 하니 언제나 큰 그늘을 드리워주었던 아름드리 느티나무 하나가 잘려나간 느낌이다. 나는 이종수 선생의 스튜디오를 '안국동 미술복덕방'이라고 부르곤 했다. 이제 언제나 뜬금없이 들를 수 있었던 안국동 미술복덕방이 이 세상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그의 떠남보다 슬픈 것은 괜한 말이 아니다. 이제 안국동은 내 추억 속의 한 영토일 뿐이다. ● 떠나는 이를 보낼 때가 늘 그렇듯이 내가 이종수 선생한테 해준 게 없는 듯 하여 그것이 몹시도 후회스럽다. 내가 좀 더 그를 붙잡아 둘 수 있을 만큼 경제적 힘이 없었다는 사실이 나를 자책케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종수 선생이 전시회를 하고 가게 된 것은 그 무엇보다 다행스러운 일이다. 무릇 헤어질 때는 "이제 헤어져야겠다."고 이야기해야 한다. 나는 오늘 이종수 선생의 사진에 관한 글을 쓰면서 저 지평선 너머로부터 밀려오는 화두가 하나 있다. 그것은 '사진은 생명'이라는 것이다. 사진은 인화된 종이 위의 진실 앞에만 있는 것도 아니며, 카메라에 포착된 사물의 존재증명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따뜻한 인간의 시선에 의해 건져 올려 진 '사랑하는 것에 대한 열정이며 헌신'이다. 이종수 선생은 그것을 사진에 담아 왔고, 나는 그것을 목격했으며, 오늘 나는 그것에 대해 말해야 하는 것이다. 적어도 내가 글로써 그것을 전달해야 하는 한 비평가로서 살아있다면 말이다.

이종수_박이소_흑백인화_46.5×30cm_1999
이종수_김선두_흑백인화_45×30cm_2002
이종수_이기봉_흑백인화_30×44.5cm_1997
이종수_이종빈_흑백인화_30×45cm_1997
이종수_조덕현_흑백인화_31×46cm_1999

2. 이종수 선생과의 만남 속에서 가장 극적인 드라마는 2개월여 동안 전국의 서원을 돌며 지방촬영을 다녔던 일이다. '시대가 선비를 부른다(효형출판사, 1998)'라는 책에 들어갈 선비 23인의 자취와 흔적을 찾아 주말이면 함께 남한 일대를 돌았던 것이다. 경기도 일대, 충북 단양과 청원, 경북 안동, 경남 산청, 전북 부안, 전남 화순과 장성, 그리고 광주, 나주, 강진 등 우리는 선조들이 남긴 유적지들을 돌며 가슴 벅찬 감회를 누렸던 것이다. 특히 경북 안동에 있는 서애 유성룡의 병산서원, 퇴계 이황의 도산서원, 하서 김인후의 필암서원, 다산 정약용의 강진 유배지를 찾아갔던 일은 깊은 인상으로 아로새겨져 있다. 지금도 그 여행길에서 보았던 우리 산하의 아름다움과 선비정신의 흔적들은 내 인생에 있어서 잔잔한 여울목처럼 흐르고 있다. 당시 이 '선비의 자취를 찾아 나선 전국 답사촬영'은 동아일보 기획연재물의 책 발간을 위한 일민미술관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이 지방 답사촬영이 하나의 드라마처럼 각인된 것은 내 인생의 가장 큰 시련기를 예고하는 전주곡과 관련이 있다. 이 일은 후일 적당한 기회에 다시 언급할 기회가 있을 것이기에 여기서는 줄이겠지만, 어쨌든 우리는 이 지방답사를 다녀 온 후 이전과는 다른 두터운 우의를 다지게 되었던 것이다. 이 2개월여의 지난한 여행은 우리가 이어 온 '한 우정의 작은 역사'에 있어서 역사적 사건의 단초를 마련한 사건의 생성공간이기도 했다. 이종수 선생은 그것을 잘 알기에 내 인생의 역사적 사건에 관한 한 애틋함과 애정을 간직해 오지 않았을까 하고 나는 가끔 생각한다. ● 이종수 선생은 그 이후로 내가 재직하고 있었던 일민미술관의 기획전의 전시를 비롯하여 신문박물관 소장품 촬영을 맡아 헌신적으로 도와주었다. 특히 기억에 남는 기획전은 박성태』, 『임영선』 개인전과 『몽유금강(夢遊金剛)』전이었다. 박성태전은 몇 차례의 작업실 방문을 통해 개인전 진행과정을 사진촬영하여 하나의 도큐멘터리처럼 도록에 실었던 전시였고, 임영선전은 화재로 소실된 작업실을 현장촬영하고 그것을 그대로 전시장으로 옮겨와 전시했던 실험적인 전시회로 이종수 선생이 전시의 전 과정을 사진으로 담아냈던 전시였다. 그리고 이종수 선생을 포함하여 참여작가 일행과 봉래호를 타고 금강산 답사를 다녀왔던 『몽유금강』전은 많은 사연을 나누었던 잊을 수없는 여행이었다. 도록에 금강산의 현장사진들을 온전히 담지는 못했지만, 이종수 선생은 작가들의 작품, 금강산과 관련한 고미술품과 관련 자료를 촬영하는 일을 도맡아 주었다. ● 이종수 선생과 보다 가깝게 지내게 된 것은 선생이 월간미술의 사진 디렉터 일을 그만 두고 스튜디오를 열면서부터이다. 처음에 독립문 근처에 스튜디오를 냈다가 안국동-정확히는 경운동이지만-의 최안과 건물 3층으로 옮기게 되었는데, 비록 허름한 건물이었지만 널찍한 홀과 화장실, 암실 등을 갖추어진 사진스튜디오로는 안성맞춤인 공간이었다. 이곳으로 이전한 이후 나는 인사동의 전시 관람이나 작가들을 만날 때면 예고 없이 들르곤 했다. 마치 고속도로변의 전망 좋은 휴게소와 같은 장소였던 것이다. 내가 이종수 선생의 스튜디오에서 가장 갖고 싶은 것이 있었다면 그것은 커피머신이었다. 작은 크기의 기계였지만 원두커피를 갈아 마시는 커피맛은 어느 곳에서도 느낄 수 없는 신선함이 있었다. 우리는 커피를 마시며 허물없이 신변잡기는 물론 미술계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내가 알고 있는 미술계 소식은 이곳에서 듣는 것이 가장 최신 정보였는데, 이것은 이종수선생의 스튜디오가 미술계의 복덕방 역할을 톡톡히 했음을 보여주는 증표가 아닐 수 없다. ● 내가 일민미술관을 그만두고 청주국제공예비엔날레 전시예술감독을 맡은 것은 1999년도부터 2001년도 말까지였다. 1999년도 초빙큐레이터를 맡았을 때에는 운니동에 오피스텔을 얻어 일을 하고 있었던 터라 지척인 관계로 자주 만날 수 있었지만, 2001년도 전시예술감독을 맡았을 때에는 응봉동 아파트로 이사하여 업무를 보았던 탓에 간간히 만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2002년도부터는 내가 홍익대학교 예술학과 박사과정에 입학하여 3년여를 프리랜서로 일하면서 공부를 한 탓에 이종수 선생의 스튜디오에 자주 들르지 못했고 2003년 10월경에 집을 신림동으로 이사하고 나서부터는 더욱 격조하게 지냈다. 이러한 점에서 이종수 선생은 어쩌면 나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치열했고, 힘들었던 시기를 변함없이 지켜주었던 분이다. ● 이러한 과정 중에 이종수 선생의 주선으로 양평의 고송리에서 살고 있었던 최석운, 이종빈, 김남진, 장원실 선생을 비롯하여 이인 선생과의 만남은 좋은 추억으로 아로새겨져 있다. 나는 이종수 선생과 함께 여름이면 그곳에서 하루를 보내며 고기를 구워먹으며 술잔을 나누었고, 개인전 오프닝 때면 함께 만나 우의를 나누곤 했다. 양평의 고송리는 이종수 선생과 나에게 있어서 작가, 사진가, 큐레이터라는 유대적 관계를 확인시켜주는 고즈넉한 이름이었던 것이다. 사실 이종수 선생과 나는 성격 면에서는 조금 다르지만 취향이 비슷한 점이 많았던 듯하다. 커피, 와인, 시가를 좋아하고 컬렉터적 수집취향 등에서 의견이 통했다. 그러한 가운데 내가 관심을 두고 있는 작가 층도 비슷해서 함께 모임에 동행하거나 같이 전시에 동참하는 경우도 빈번했다. 그 중에 한사람이 해남에 살고 있는 서양화가 윤해남이었다. 근래에 이러저러한 일로 함께 만나게 된 서울대 미술이론 교수인 정영목 선생님과는 어느덧 삼형제처럼 가깝게 지내는 사이가 되었다. 내가 이종수 선생과 한 가지 실행하지 못한 일은『현장의 작가들』이라는 제목으로 작가론과 사진집을 묶어 공저로 내자고 해놓고 지키지 못한 일이다. 이 프로젝트는 사실 이종수 선생이 미술계에 뛰어들어 가장 의미 있게 진행해 온 일이기도 했는데, 비록 책으로 엮어지진 못했지만 다행히 이번 사진전을 통해 작가들의 사진초상이 일부나마 선보여지게 되어 다행스럽기 그지없다. ● 나와 이종수 선생과는 가끔 의견 충돌이 있기도 했지만 결국에 가서는 나의 의견을 잘 받아들여 주곤 했는데, 이것은 이종수 선생의 품성이 의롭고 자애롭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이 아닌가 한다. 지난 해 우리는 남한강을 주제로 한 전시를 학고재 아트센터와 화랑에서 동시에 열면서 책을 하나 냈는데,『생명의 강에서 역사의 노래를 듣다』(명상출판사)라는 책이 그것이다. 이 책은 정영목, 장동광, 이종수가 세 사람이 합작하여 이루어진 공동기획이었지만, 그 기획의 시초는 이종수 선생의 몫이나 다름없었다. 나는 이 책을 쓰면서 현장의 작가들의 예고편으로서 후일을 기약하려 했지만, 결국 이종수 선생과 언제 다시 이러한 책을 내게 될 지 알 수 없게 되었다. 더불어 이 책의 발간과 진행, 편집디자인 등을 총괄적으로 책임을 지느라 이종수 선생에게 경제적인 부담이 컸었다는 점에서 나는 늘 미안할 따름이다. 아무쪼록 이 글이 그 미안함을 달래는 조그마한 헌사가 되었으면 한다.

이종수_임옥상_흑백인화_30×45cm_2000
이종수_육근병_흑백인화_30×45cm_2000
이종수_김승영_흑백인화_46.5×31cm_1999 / 이종수_석철주_흑백인화_45×30cm_2001
이종수_김성남_흑백인화_44×30cm_2000 / 이종수_김연_흑백인화_41×27cm_1999
이종수_중광_흑백인화_22×32cm_2001

3. 이종수 선생의 곁에는 늘 좋은 지인들과 작가들이 있었다. 나는 이종수 선생을 통해 그 분들과의 교분을 더욱 두텁게 나눌 수 있었던 것에 깊이 감사한다. 그 이름 중에는 주명덕, 민정기, 임옥상, 이종빈, 우찬규 학고재 사장님 등이 앞서 떠오른다. 그리고 김남진, 최석운, 이인, 조덕현, 임영선, 송필용, 박성태, 유근택, 김선두, 강경구.....등등이 연이어 떠오르고, 그리고 젊은 작가들의 숱한 이름들이 나비처럼 날아다닌다. 이들은 내가 이미 알고 있었던 경우도 있지만, 이종수 선생을 통해 알게 된 경우도 많았다. 이들은 결국 나에게 있어서 작가와 큐레이터라는 유대적 관계를 피상적 관계에서 보다 인간적 관계로 나아가게 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이종수 선생의 사진작업은 따뜻한 인간적 관계를 맺어가는 다리이자, 매개체였던 것이다. ● 사진이 필연적으로 가지는 현실재현의 욕망은 그가 포착하려 했던 피사체의 내면적 탐구, 특별한 형상성으로 인해 현실 너머의 '저 편, 어딘가'를 지시하는 표지로 변조되었다. 사진 이전의 현실은 흑백으로 인화된 사진 속에서 작가의 가장 극적인 표정, 작가를 둘러싼 환경, 빛과 그림자의 조응관계로 재맥락화 되었다. 이것이 이번에 그가 보여주게 될 작가 초상사진의 특징들이다. 작고한 중광스님, 변종하 화백의 임종직전의 모습부터 신진작가에 이르기까지 그의 초상사진의 포트폴리오 속에는 작가들의 내면을 극대화하려는 사진가로서의 치열함이 배어있다. 그 치열함 속에는 작가들과의 친소관계는 물론, 작가들과의 진한 감정적 교류가 여과되지 않은 채 투사되어 있다. 어떤 사진은 즉흥적으로 이루어진 탓에 마치 부둣가에서 날생선을 보는 듯하고, 어떤 사진은 의도적으로 연출되어 있어 작가와 사진가가 나눈 어두움 속의 낮은 호흡을 느끼게 한다. 이러한 예술가들의 초상사진이 보이지 않는 작가의 내면을 외재화하려는 사진가적 시선이라고 한다면, 다른 맥락에서 그의 백두대간 사진작업이나 자연생태에 관한 환경적 사진들은 다분히 조형적 관심에 치우쳐 있다고 생각된다. 모든 작가들에게 필연적 고민이겠지만, 사진가가 처했던 자연의 시간과 기후에 의해 영향을 받고 그것을 카메라에 담을 수 없다는 점에서 '상황 특정적' 성격을 지닌다. 당시에 처한 상황이 곧 사진이라는 매체로 옮겨지는 것이고, 이러한 점에서 사진적 리얼리티는 본질적이다. 그의 사진에 의해 포착된 백두대간은 계절의 흐름 속에 내재한 산세들, 나무들, 계곡들의 모습이 선과 점과 면의 묘한 교차적 관계성으로 우리의 시각적 진동을 유도한다. 그가 담으려했던 자연생태에 관한 사진들은 그래서 이미 예상된 기술적 방법론이 전제되어 포착된 실경이지만, 결과적으로 흑과 백의 미묘한 담채적 효과 속에서 명상적 사유를 유발시키기도 한다. ● 나는 이종수 사진작업을 구축해 온 이 두 가지 축, 즉 예술가의 초상사진과 자연생태에 관한 포착이 궁극적으로 '인간과 생명에 관한 진실한 접근'에 기반한 것이라고 평하는 것에 주저함이 있을 수 없다. 나는 그가 한시도 카메라를 곁에 두고 있지 않은 것을 본 적도 없지만, 따뜻한 애정 없이 작가와 작품을 만난 것을 기억할 수도 없다. 그의 손에 잡힌 카메라는 하나의 기계였지만, 그가 담으려 했던 피사체들은 가슴으로부터 길어 올려 져 눈가에 머물다가 셔터를 통해 전이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와 함께 보낸 지난 10여년의 세월, 그 작은 우정의 역사를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이종수 선생이 어느 날 카메라를 들고 나타나 현장의 작가들을 찾아 나서기를 나에게 요청한다면, 나는 흰백발의 머리를 쓸어 올리며 펜과 노트를 들고 흔쾌히 나서리라. ■ 장동광

Vol.20050608d | 이종수 사진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