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친년프로젝트 2005

2005 성곡미술관 초대 박영숙 사진展   2005_0610 ▶︎ 2005_0703

박영숙_미친년프로젝트 2005_컬러인화_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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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5_0610_금요일_05:00pm

성곡미술관 별관 전시실 서울 종로구 신문로 2가 1-101번지 Tel. 02_737_7650 www.sungkokmuseum.com

기억을 향한 기록들의 몽타주: 박영숙과 카메라, 그리고 사진 속의/밖의 여성들 1.'박영숙'을 만나러 현장에 가다 ● 몇 년 전(대략 6, 7년 쯤 전?)의 일이다. 한국의 여성주의 공동체 마을에 나름대로 오두막을 짓기 시작한 뒤 주변을 열심히 돌아다니며 이웃들이 펼치는 저마다의 삶의 모습에 신기해 할 때였을 것이다. 가는 곳마다 눈에 띠는 한 여성이 있었다. 별로 말은 없었지만, 대놓고 중앙으로 나서지도 않았지만, 가끔씩은 그저 한 귀퉁이를 채우는 묵직한 무게감뿐이었지만. 그러나 그렇게 늘 현장을 지키는 여성. 이 여성이 누구일까 궁금해졌다. '카메라를 든 여성'이라고들 했다. 나중에 일본 도쿄에서 열린 「2000 일본군 성노예 전법 국제법정」에서 카메라를 든 채 이리 뛰고 저리 뛰는 그녀를 만나 정말 반가웠다고 친구가 전해주는 말을 들었다. 그녀의 현장이 어디인지, 어디까지 확장되는지를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현장에서 만난 여성, 카메라를 든 이 여성이 바로 여성주의 사진작가 박영숙이다. 이후 그녀와 '자매'로, '동지'로, '이웃'으로 지내면서 그녀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가 행복 바이러스처럼 사람들을 감염시키곤 한다는 것, 그래서 현장을 천진난만한 긴장과 설레임의 파장으로 출렁이게 한다는 것을 또한 알게 되었다. 이 글은 그동안 그녀에게서 무상으로 받은 그 많은 에너지에 대한 작은 보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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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박영숙의 '미친년' 프로젝트1: 발광(發光)함으로 발광(發狂)하다 ● 사물에서 나오는 빛과 사람의 눈에서 나오는 빛이 만나 만드는 것이 이미지이다. 박영숙의 경우에 대입시켜 보자. 카메라 앞에서 자세를 취하고 있는 여성에게서 나오는 빛과 박영숙 자신에게서 나오는 빛, 그리고 그녀의 손에 들려있는 카메라에서 나오는 빛이 어떤 장(field)을 만든다. (여기서 나는 의도적으로 카메라의 렌즈와 카메라를 든 사람의 눈을 동일시하지 않고 있다.) 이 장에서 이미지가 만들어진다. 이 이미지는 발광(發光/發狂)의 장면화이다. 카메라는 불가피하게 파괴적인 혹은 해체주의적인 속성을 지닌다. 카메라는 지속적으로 변화하는 외양의 흐름에서 각각의 외양을 따로 떼어내 변하지 않도록 고정시키기 때문이다. 어떤 하나의 이미지를 원형 그대로 보존함으로써 변화와 소멸의 과정으로부터 보호한다는 의미에서 카메라의 이러한 기능은 기억하고 회상하는 마음의 눈과 유사성을 갖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기억과 회상 속에서 떠오르는 이미지들과는 달리 카메라가 외양의 흐름과 맥락에서 끊어내 냉동시킨 이미지로서의 사진은 그것 자체로서는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않는다. 의미라는 것은 이해 과정의 결과이며, 또한 이해는 시간 속에서 발생하고, 시간 속에서 설명되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야기를 하고 있는 사진들만이 우리로 하여금 이해할 수 있게 만든다.'(수잔 손탁, 『사진론』) 그렇다면 사진은 언제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는가? 사진은 언제, 어떻게 사진 속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사람들의 삶의 맥락으로, 시간 속에서 이해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경험의 기억으로 되돌아갈 수 있는가? "미친년 프로젝트"라는 커다란 표제 아래 우리에게 선사된 박영숙의 사진들을 보면서 우리는 이 질문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렇게 묻는다. '사진을 응시하는 사람의 삶의 이야기와 사진 속에 모습을 드러낸 사람의 삶의 이야기가 만나는 것은 언제 어떻게 가능한가? "내 안의 마녀", "꽃이 나를 흔든다" 등의 부제를 달고 있는 박영숙의 "미친년 프로젝트"의 사진들은 이 질문에 대한 길고도 사려 깊은 답변의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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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금기를 깨뜨리는 사진은 사람들을 불안과 동요로 밀어 넣는다. (「라이프」 지에 실렸던 많은 사진들의 효과를 떠올려 보라.) 그렇다면 '미친 여성' - '여성의 미침'은 어떠한가? 이것은 사회적 금기인가? 여성들 스스로에게 있어 '미침/들림'의 상태는 그렇게 낯선 것이 아니다. 피안과 차안의 다리 역할을 하는 영매들이나, 프로이트가 정신분석을 창안할 당시의 히스테리 여성 환자들의 예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여성들은 다중적 시공간의 삶을 사는 데, 변방의 언어들과 방언들을 구사하는 데 능수능란하다. 여성들은 자신의 삶 안에 깊은 영성과 존재의 은밀한 비밀들에 이르는 많은 문들을 간직하고 있다. 그러나 사회와 제도가 여성들의 '미침'을 너무나 상투적으로 만들어 버림으로써 여성들의 '미침/들림'의 경험은 이류, 혹은 삼류의 유행어가 되어 버렸다. '야! 너 미쳤냐? / 이런, 미친 년, 지랄하네. (더 심한 경우: 지랄하고 자빠졌네.)' 이런 식의 상투적 언설은 은연중에 사람들의 무의식 속에 여성성이나 여성이라는 젠더를 가리키는 수식어로 새겨져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상투화 과정의 진실은 가부장제의 상징체계가 여성들 고유의 '미침'에 대해 품는 참을 수 없는 두려움에 있다. '미친 여성'이야말로 가부장제가 자신의 존속을 위해 우선적으로 세울 수밖에 없는 금기인 것이다. 가장 상투적인 일반화의 옷을 입고 실행되는 금기 - 이것이 여성의 '미친/들린' 상태의 야누스적 얼굴이다. 박영숙의 카메라는 여기에 저항한다. '내 안의 마녀'와 조우하고 '내 안의 미친 기운'을 포착해 내는, '미쳐서 살고, 살아서 미치는' 여성들의 그 미세한 실존의 기미를 포착해내는 박영숙의 카메라는 대담하고 섬세하며, 직관에 따르고 동시에 조작적(operative)이다. 인간의 눈과 다른 능력을 지니고 있는 카메라의 렌즈는 우리의 눈에 띠지 않(았)거나 우리가 의식하지 못한 채 무심코 스쳐 지나가는 무의식의 흔적들, 얼룩들을 포착해내기도 한다. 인간의 눈이 잃어버린 미메시스 능력을 되찾거나 인간의 눈으로는 포착 불가능한 세계에 대한 인상학적 감수성을 높이는 데에 기여하는 것이 사진의 기능이라면, 박영숙의 사진들은 그처럼 '일상적'으로 '상투적'으로 처리되어 버리는 여성의 실존방식 이면에 깔린 '광학적 무의식의 세계', '미쳐서 살고, 살아서 미치는' 여성들의 의식/무의식 세계를 들춰낸다. 빛을 내뿜기 시작하는(發光) 미침/들림의(發狂) 순간. 시공간의 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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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숙의 카메라는 근본적으로 연출적 위치에 서 있다. 박영숙의 카메라 작동에서 중요한 것은 거리두기를 통한 관조와 그로부터 발생하는 영적 분위기(Aura), 또는 자본주의적 편의주의나 과학주의를 위해 마련되는 구경거리나 증거가 아니다. '누군가가 보고 있다'는 가정 하에 자신의 행동의 정의로움을 측정해왔던 사람들은 시간성을 박탈당한/벗어버린 사진의 유혹에 환호하며, 우연성에 내맡겨진 사진들의 배열에 무제1, 무제2, 무제3 등의 작명놀이로 화답한다. 기꺼이 '세상은 아름답다'는 가짜 주문의 공범자가 된다. 여기서 우리는 박영숙의 작업과 함께 '카메라가 신의 눈을 대신해 온 것일까? 종교의 쇠퇴는 사진의 발흥과 일치한다'는 존 버거의 질문이나 '사진의 예술성 요구는 사진이 상품으로 등장한 것과 동시적으로 나타난다'는 벤야민의 말을 다시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 정치, 학문, 인상학적 연관관계에서 벗어나 대상을 순수하게 시각적 관점에서 보는 소위 창조적 사진에 대한 벤야민의 비판은 새로운 시각, 즉 시각적 혁명을 통해 새로운 미적 특성을 강조하려 했던 '예술작가들'을 지나 시각적 영감은 사회적 경험에 따르는 것이지 그 반대는 아니라는 입장을 취하는 풍자 화가들의 곁에 가 선다. 유사한 맥락에서 박영숙의 카메라는 '즉각적 향유'라고 일컬을 수 있는 어떤 예술적 아름다움을 찾기 위해서라거나 혹은 모더니즘의 그 숱한 선언문적 예술운동들이 그러했듯이 예술의 철학적 본질을 구현하기 위해 대상을 포착하지 않는다. 그녀는 표현매체로서 카메라를 믿는다. 도대체 카메라를 통해 무엇이 표현될 수 있다는 것일까? 빛을 발하고 있는 여성들의 미친 내면이, 바다이며 대지이며 숫자이며 활자인, 이미지인, 검게 붉게 푸르게 타오르는 피며 살인 내면의 풍경이. 어떤 정지가. 어떤 숨 막히는 차오름이. 여성이 동지이며 연인이며 자매이며 어머니의 어머니, 그 어머니의 손녀인 여성들의 나라가. 사진의 기록적 가치를 중요시했지만, 그러나 사진을 통한 표현의 가능성을 더 확장시키기 원했던 그녀는 직관과 연출의 힘을 교묘히 활용해 이렇듯 여성의 내면세계를 표면 위로 끌어올려 일상적 삶과 교직을 이루도록 한다. 관람자의 눈에 바싹 들이대어진 '홀린/미친/들린' 여성들. 이 이미지들에 충동된(drived) 관람자들은 이제 어쩔 수 없이 말을 시작해야 된다. 겉의 말이든 속의 말이든 소리를 내야 한다. 관람자가 여성일 경우, 그것은 자기 안에서 빛을 발하고 있는(發光) 또 다른 '자기들'을 만나는 홀림/미침(發狂)의 과정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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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박영숙의 '미친년' 프로젝트2: 시물라시옹의 시대에 발광(發光/發狂) 축제를 지향하며 ● 그럴 때가 있다 갑자기/느닷없이 내 몸속을 물로 된 사람이 스윽 지나갈 때가/들어가선 못 빠져나와 안간힘 쓸 때가/핏줄기에 빗줄기가 섞여들어 졸졸졸 흘러내릴 때가○그러면 또 내가 그걸 못 견뎌서/내 몸속에서 춤추는 사람 천 명이 쏟아져 나온다[...]○그러면 또 내가 그걸 못 견뎌서/몸속에서 북 치는 사람 천 명이 쏟아져 나온다[...]그래도 아직 내 몸통 속에 갇힌/미친 멜로디가 다 풀리지 않았는지○눈물이 한 방울 간신히 몸 밖으로 떨어지고/세상의 모든 우물이 넘쳐흐른다/(김혜순, 「흐느낌」) ● 우리의 어머니와 할머니는 성자가 아니라 예술가였다. 배출구 없는 창조의 샘은 그들을 무감각하고 피 흘리는 광기로 몰아갔다. 그들은 정신적 폐기상태의 삶을 산 창조자였다. 그들은 예술의 바탕이랄 수 있는 매우 풍부한 영혼이 있었다. 사용되지도 않고 필요로 하지도 않는 재능을 참고 견디려고 애쓰는 일은 급기야 그들을 미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영혼을 버리는 것은 일로 지치고 성적으로 착취된 육체가 견딜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말하자면 자신의 영혼을 가볍게 하려는 애처로운 시도였다. (앨리스 워커, 『어머니의 정원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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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을 탄생시켰던 독일어에서 '미치다'는 어원적으로 '자리를 약간 이동하다'를 의미한다. 있으라고 한 자리, 혹은 있을 것이라고 추정되는 자리에서 조금 벗어난 자리에 있는 것, 이것이 바로 '미친' 상태이다. 여성들이 특히 '미침'의 상태와 친숙한 것은, 여성들이 있다고 가정되는, 여성들에게 있으라고 사회와 규범이 지정해 준 그 자리가 여성들에게는 맞지 않는, 자유롭지 못한 숨 막히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성들은 순간적으로, 혹은 오랜 시간 그 자리를 떠나 다른 곳에 머문다. 자신의 정체성 속에 무수히 많은 수포(水疱)같은 공간들을 마련해 놓고 들락날락거린다. 이것이 여성들의 '미침/홀림/들림'이다. 카메라를 든 여성, 박영숙은 여성들을 초대해 마음껏 시공간을 이동하라고 부추긴다. 판을 깔아놓고 빛남과 미침의 축제를 연다. 한국여성, 일본 여성, 신화 속의, 역사 속의 여성들, 동성을 사랑하는, 이성을 사랑하는 여성들 - 모두 다 부른다. 축제다. 발광(發光/發狂)이다. 마구 먹어대는 여성도, 결코 먹지 않으려는 여성도, 불안한 아이들을 스물 네 시간 돌봐야 하기에 벌컬벌컥 술을 마시고 짧은 수면을 취할 수밖에 없는 심리상담의사도, 고등어를 향해 칼을 내리치다말고 순간적으로 눈길, 손길을 놓아버리는 여성도, 산처럼 바람처럼 바다처럼 밀려들고 스미며 흘러넘치는 꽃향기, 꽃더미에 홀려 땅의 미침과 색깔의 날아다님에 몸을 섞어버리는 여성들도, 거울 속의 자기 눈에 빨려 들어가 버리는 여성도 있다 - 모두 내 안의 천 명, 만 명 북치며 춤추며 튀어나오는 창조의 여성들, 미친 멜로디의 여성들이다. 포스트모던, 시물라크르의 시대. 사진작업은 그 어느 때보다 도전과 위협 또는 가능성에 직면해 있다. '예술의 종말'(아서 단토) 이후 모든 예술행위와 실험이 가능해졌지만 그만큼 모든 예술행위와 실험은 의미의 부재라는 악몽에 시달리고 있다. 실재보다 더 실재적인 효과를 내는 시물라크르들의 시대에 사진은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시물라시옹의 현상을 이론화한 사람은 카메라를 들고 '무게, 냄새, 깊이 등 그 모든 질료적 특성들을 다 비워내고 이제 막 비실재의 세계로 사라지려는 그 마지막 순간에 소위 가장 투명한 객체성의 빛을 발하는 사물'을 포착하려 한다(보드리야르). 의미의 부재, 사라지는 원천성/지속성에 대항하는 방식이 그러나 '의미 부재의 극단화'라면 그것은 너무 근대적이고 안일한 해결책이다. 여전히 맥락 속에서 살며, 환상과 광기를 통해 비현실적인 현실을 다른 방식으로 직조하려는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다. 몸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다양한 형태의 '우리' 이야기를 펼쳐보려는 사람들은 박영숙의 "미친년 프로젝트" 축제에, 그 '현장'에 가볼 일이다. 그곳에서 '빨간 사과' 하나씩을 나누어 받고 자기 안의 마녀를 불러내 한바탕 드잡이를 벌이며, 영혼을 가볍게 하는 새로운 프로젝트들을 시작할 일이다. ■ 김영옥

Vol.20050610c | 박영숙 사진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