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판화 2005-새로운 시작

서울판화展   2005_0615 ▶ 2005_0621

고자영_헤이리다리가 있는 정원_목판, 수성목판, 석판_145×209cm_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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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5_0615_수요일_06:00pm

참여작가 고영민_고자영_고태화_구세주_권녕숙_김미로_김보경_김봉태_김상경_김용식 김정아_김제민_김종현_김창수_김현실_김형대_박노진_박선우_박성진_박영근 박지나_배지은_신경희_신수진_신승균_신장식_심철웅_심효선_안광준_안정민 오영재_오정근_오창규_윤동천_윤명로_윤유진_윤주원_이광호_이미숙_이민경 이선원_이영애_이윤경_이은산_이인애_이정은_이지민_장양희_정상곤_조명식 조혜정_주혜지_최경주_최성원_하동철_한계륜_한수정_한운성_홍보람_황용진

전시 안의 전시_기획주제展 스며듦 구세주_김보경_김창수_박선우_박지나_오창규 윤유진_장양희_정상곤_최경주_한수정_홍보람

갤러리 토포하우스 전관 서울 종로구 관훈동 184번지 Tel. 02_732_7555 www.topohaus.com

경계 사이로 '스며듦' : 판화의 부드러운 전략I. 현대미술과 중심의 상실 ○ 현대미술이, 아도르노(Th. Adorno)의 논지에 의거해 '부정의 부정'을 거듭하는 역사적인 과정의 실체라면, 혹은 더 나아가 이러한 과정조차도 회의 가능한 불확실한 담론체에 불과하다면, 도대체 현대미술에 있어서 역사성이 요구하는 시공의 위치가 존재하기는 하는 것일까? 현대미술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좌표를 잃어버렸다는 불안감을 은연중에 토로하고 있다. 어떤 이즘이나 사조가 안착되고 그 결과를 보기도 전에 다른 것들에 의하여 뒤섞이고 변질되고 간혹 전복하는 현대의 미술현상은 도대체 그 정체성을 규정하기 힘들다. 그러나 필자는 그 원인을 현상에서 찾지 않겠다. 오히려 그러한 혼란은 제도적으로 굳어버린 인식과 사고가 현상을 더 이상 설명하지 못한다는 것에 원인이 있다고 믿는다. 다시 말해, 현상은 계속해서 새로운 패러다임을 요구하는데, 이론은 제도가 되어버린 사고 틀 속에서만, 유효기간이 지난 사유의 방정식 속에 새 현상을 끼워 맞추어 해설하려고 할 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 이론과 실제사이의 틈은 치유되지 못할 정도로 벌어져 있다. 간혹 논리적인 설득력을 갖춘 논지나 개념의 제시를 통하여 응급처치가 되는 경우는 있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여전히 남아있다. 근본적인 문제? 만약 그것이 실재한다면, 이제 무엇인지 알고 싶을 뿐이다. ● 제들마이어(H. Sedlmayr)가 오래 전에 언급한 것처럼, 그 변화의 중심 축을 상실한, 혹은 다원주의라는 의식 내에서의 탈 중심성은 현대미술이 갖고 있는 경향 중에 하나라고 할 수 있다. 현대미술에는 상, 하위의 구분이 없으며, 주류와 비주류의 관계도 더 이상 의미를 갖지 못하며, 형식의 고유영역도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 속에 현대미술이 처해있다는 인식이 일반적이라면, 우리의 의식은 그 주체를 모르는 원격장치에 의하여 통제되고 있는 것이다. 현대의 미술은 교묘하게 그 관계를 위장하고 있으며, 그래서 다원주의, 국제화와 같은 현대의 헤게모니들은 그러한 위장전술의 드러난 일각이다. 중심은 사라진 것이 아니며 재편되고 있고, 단지 그것의 축이 예전과 다를 뿐이다. 현대미술에 있어 보다 근본적으로 보이는 것은, 한때 지고의 가치로서 숭상되던 허위의식으로서의 예술성이 아니라, 날마다 급변하는 시장과 매체형식 그리고 그것에 종속되어진 감수성 등이다. 열거된 것들은 사실상 외부의 요인들이며, 이것은 오래 전에 나타난 동반현상일 뿐이다.

신수진_A Record_실크스크린, 부조, 에칭_각 90×90cm_2005
고태화_진동-성장Vibration-Silent Growth_종이에 동판, 실크스크린_147×240cm_2005

모든 것이 가변적이고 탈 중심적으로 보이지만, 필자는, 현대미술에 있어 '근본'적인 것은 사조나 양식 혹은 트렌드가 아니라 작가라는 창작의 실체와 그의 독립적인 의도들이야말로 그 중심을 이룰 유일한 가능성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단지 근대적인 의미에서 미술의 주체로서 작가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창작과 전시 그리고 수집과 비평에 이르는 광역의 미술현상에서 작가가 가질 수 있는 일종의 '영향력'을 말하려는 것이다. 현대의 작가는 위에 언급한 어떤 영역에서도 주체적인 존재가 아니다. 모든 것이 기획되는 오늘날의 미술전시도 예외는 아니지만, 이 과정에서부터, 혹은 이미 창작과정에서 조차, 작가는 무기력한 수동적 존재에 불과하다. '작가의 죽음'이라는 말이 맥락은 다르지만, 이러한 상황을 이보다 더 잘 표현할 만한 것이 없다. 그러나 작가와 그의 작업은 비평과 이론에 선행하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미술현상을 존속하게 하는 주체이다. 그런 한에서 '작가주의'는 현대미술에 있어 탈 중심화현상을 주체적으로 재편할 수 있는 수단이 될 수 있다. 필자가 비판의 위험을 무릅쓰고 '작가주의'를 주장하는 것은 폭 좁은 이해관계에 얽매이지 않는 창작활동과 그 정신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신념 때문이다.

배지은_3736_목판_30×44cm_2005
심효선_싸우자!! Fighting!!_디지털 프린트_112×162cm_2005

II. 개념의 재구성 혹은 판화사 다시 보기 ● 단견에 현대판화는 형식을 비롯한 제도적 문제에 봉착해 있는 듯 보인다. 형식논리가 중심이 되어버린 현대미술의 경향 속에서 판화의 문제점은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판화는 다른 장르가 고민하는 주제와 내용에 대해서는 거리를 두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판화는 하드웨어와 프로세스만 남아있는 조형기술일 뿐이라는 자책감이 밑에 깔려있다. 그것은, 현대미술에서 판화가 그동안 '수행했던' 역할을 상기해보면, 더욱 반등된다. 거기에 장르에 대한 기대감이 높은 만큼의 상실감의 깊이가 크다는 일반적인 상식이 공동의 의식 속에 지배적인 것 같다. 한국현대미술에 있어 판화는 작가들의 조형의지를 충족시킬 도구이자, 새로운 조형성을 위한 실험 그 자체였다. 또한 미술의 대중화를 이룰 수 있었던 가능성이었고, 다른 한편 모더니즘의 탈 사회화를 극복하고 작가의 발언을 대중에 실어 나르는 매체로서 활용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모든 가능성은 장르개념에 대한 오해로, 그리고 더 직접적으로는 미술시장의 침체 속에서 나타났던 위기의식과 더불어 소멸되고 말았다. 외적인 원인은 내적인 반성을 동반하여야 하는데, 오히려 자괴감의 양상으로 나타난 피해의식은 상식적인 수준의 책임전가로 보여질 뿐이었다. 한국현대판화의 현 상태를 논의의 대상으로서의 가치 평가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들자면, 판화의 개념을 역사성과 결부하여 재고해 볼 필요가 있다. 그것도 형식의 진보로서의 역사가 아니라 그것의 역사적 관계항 속에서 말이다.

김창수_Flickering_track_F01_디지털 프린트_180×134cm_2005
오창규_일상-기도, 거울, 환상Ordinary - Pray, Mirror, Vision_디지털 프린트_235×239cm_2005

판화가 미술사에 예술의 형식으로 나타난 것은 15세기경이었다. 그 탄생시기는 캔버스가 타블로(Tableau)를 대치하였던 시기와 거의 일치한다. 그리고 서구문화의 혁명적인 사건인 구텐베르그의 활자시대의 개막과 동시대를 이룬다. 이것은 물론 짧지 않은 역사일 뿐만 아니라, 미술사적 진보논리와 결합해도 의미 있는 일이다. 그러나 이미 시작부터 판화의 역사는 형식의 발전이라는 논리에 의해 기술되어졌다. 하지만 판화사가 회화의 역사발전의 논리와 다른 점은 형식에서가 아니라 그 역할과 기능에서 찾아져야 한다. 판화는 우선 매체의 특성을 고려하여 생겨난 장르이다. 작업의 형식(Process)이 갖는 매체적 성격, 즉 중간과정이 중요한 판화는 회화의 예술성과는 별도의 특성을 선천적으로 지니고 태어났다. 그리고 판화는 원래 회화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었다. 판화는 공예에서부터 비롯되었으며, 형식적인 면을 보더라도 그것에 가깝다. 15, 6세기 판화가(Engraver)는 화가이기보다는 금속공예가였다. 16세기 판화의 대가인 알브레히트 뒤러(Albrecht Durer)도 판화는 회화와 구별되는 장르였다. 그리고 판화는 성화의 대중화를 위한 복제의 수단, 즉 매체로 인식되었다. 매체의 복수성과 원작의 아우라에 대한 문제는 발터 벤야민의 논리에 의하여 현대미술의 특성으로 인식되기 오래 전에 벌써 시류가 되어 있었다. 이때부터 판화에게는 두 가지의 가능성이 있었다. 하나는 매체로서 복제(Reproduction) 혹은 복수(Multiplication)에 개념을 따라 특정 이미지를 복사하고 전달하는 사회적 기능을 따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조형예술로서, 다른 장르와 구별되는 형상성을 개발하고, 그 미학적 그리고 전시적 가치를 추구하는 길이었다. 미술사학이 주목하는 부분은 바로 후자이다. 그러나 언급한 판화의 두 개념은 불가분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시대상황과 작가의 요구에 가변적이며, 진화하는 것들이다.

윤유진_기생(寄生)Parasite living_혼합재료, 실크스크린__90×140×60cm_2005
장양희_익명의 얼굴anonymous face_혼합재료_각 26×26cm, 설치, 가변크기_2005

16세기 매너리즘 시대를 거치면서 회화성이 서구미술을 주도하자, 판화도 다른 장르의 예술처럼 회화성을 띄어간다. 그리고 17세기에 들어서면서 동판부식판화(Etching)가 개발되자 그 회화성은 놀라울 정도로 향상되었다. 에칭은 단순히 자유로운 선을 구사할 수 있는 편리함뿐만 아니라, 형식면에서 고려해보면, 물리적인 초보적 수준에서 화학적 방법으로 이전하고 있다. 이것은 판화가 이끌어낸 수많은 실험들 중에 대표적인 하나일 뿐이다. 일반적으로 은필(Silverstift), 목탄 등이 낼 수 있는 질감의 표현력과는 구별되는 판화의 특성을 발견했으며, 음영과 빛의 연출로 인한 드라마를 효과적으로 구현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적어도 렘브란트는 회화의 대체 가능한, 즉 동등한 조형장르로서 인식하였던 것 같으며, 이로서 판화는 고유한 영역에서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해 주었다. 당대에 나타난 미술의 사회적 역사변화도 주목할 만하다. 사적인 성격이긴 하지만, 판화에 대한 수집과 전시가 나타난 것이다. 여기서 판화는 시간과 더불어, 감상의 공간적 확대를 가능하게 하는 매체가 되었다. 그리고 미술이론의 발달과 더불어 판화는 소묘(Disegno)와 회화와는 다른 장르로 갈래지어졌다. 이 차이를 명백하게 보여준 것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전문 판화가가 아닌 화가들, 자크 칼로와 렘브란트 그리고 피라네시였다. 렘브란트의 경우, 판화는 원작을 복사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자체로 작품이 될 수 있었음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시기를 지나면 판화의 개념적 정의는 매체보다는 예술성에 근접하게 되었으며, 이것은 그 시대 예술가들의 선택이었다.

홍보람_잠수부diver_흑백 디지털 프린트, 종이_1296×39.7cm(각 27×39.7cm)_2005
구세주_침범하는 물고기invading fish_에칭, 콜라쥬_41×50cm_2005

18-19세기의 판화는 산업혁명의 신기술들을 활용했다. 테크놀로지에 대한 발빠른 대응과 실험성은 판화의 미덕 중에 하나이다. 에칭에서 시작된 화학적 기법은 더욱 발전하여 석판화(Lithography)와 같은 평판기술을 활용하기에 이르렀다. 이것은 동시대 사진의 등장과 더불어 기술복제 시대를 초래할 전조였다. 석판화가 보유한 무한정한 에디션과는 별도로, 예술로서의 추구는 평판에 내재하고 있는 독특한 조형원리, 즉 평면성을 발견하였고, 부연하지 않더라도 평면성이 현대미술에 어떻게 작용했는지는 독자들이 더 잘 알고 있다. 현대미술에서 판화는 또 다시 조형매체에 대한 화가들의 관심과 새로운 조형성을 추구하는 예술가들에 의해서 주도되었다는 점에서 17세기와 유사성을 갖는다. 그러나 과거와는 달리 다양한 매체가 존재하였고, 필요와 요구에 따라 이미 개발되어진 형식들을 사용되었다는 점이 다르다. 팝 아트에서의 실크스크린은 공업 기술적인 인쇄방법을 고급예술로 이전시켰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포스트모던의 터널을 지나면서, 진보된 테크놀로지인 영상기법과 디지털프린트를 만나면서 선택할 메뉴는 더욱 다양해졌다. 그러면서 판화의 전통적인 개념으로서의 '판'은 더 이상 물리적일 필요가 없게 되었다. 이미 상술한 것처럼 판의 제작방법이 물리적으로부터 화학적으로 진화하였다고 했다. 그런 형식논리로만 본다면, 물리적인 판의 실체가 가상공간으로 이전되었을 뿐이다. 그러나 형식이전만 문제가 된다면, 절반의 이해 밖에는 되지 않는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원판에 대한 고유성과 유일성이라는 과거의 개념은 흔들렸다는 점이다. 이제 원판 자체가 완벽히 복제되는 시대가 도래된 것이며, 에디션의 문제가 아니라, 문학이나 음악처럼 저작권이 논의 될 지경에 이른 것이다.

이윤경_아쿠아리움-리빙룸_디지털 프린트 위에 물체_48×50cm_2005
김제민_자화상Self Portrait_모노타이프_각 60×45cm_2004

필자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판을 만들어내는 과정이다. 판 작업은 판화를 변별하는 핵심적인 일이다. 판 작업자체는 예술성보다는 집요한 기술력을 요구하는 것 같아 보이지만, 단순히 그러한 작업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판 작업은 조형적 실험과 아울러 섬세한 감각을 요구하는 일이며, 판화의 모든 가치는 여기서 실현된다고 볼 수 있다. 판화를 에디션으로 나타난 결과물로만 한정하여 볼 수 없는 것은 바로 그런 까닭이다. 재료와의 끊임없는 마찰과 - 여기엔 재료에 따른 기법의 수련까지 포함된다 - 이미지와의 적절한 관계성, 그리고 물리적인 효과까지, 판화는 다른 장르에서 보기 힘든 과정상의 예술이며, 전 과정에 대한 작가의 주의가 요구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전통판화가 가지고 있는 판 작업에 대한 경외적인 태도도 그냥 무시할 것이 못된다. 하지만 디지털미디어 시대의 새로운 판화에 대한 단편적인 시각도 극복되어야 할 문제이다. 새로운 매체가 제공하는 형상성에 입각한 새로운 작업방식에 대해 개념적인 이해가 필요하다. 근력이 요구되지 않는 프린트라고 폄하할 것이 아니라, 물리적인 재료가 제약하는 표현의 경계를 넓히고, 이와 더불어 판화의 매체 성격을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렸다는 긍정적인 판단이 요구된다. 과거 판화가 전환시대를 맞아 보여주었던 그런 식으로 말이다. ● 오늘날 우리는 미술상의 모든 장르가 그 내용을 실어 나르는 운반체, 즉 매체(Media)라고 생각한다. 어쩐지 고대말기의 신플라톤주의를 연상하게 하는 미디어와 내용물(Content)을 분리하는 이분법적 사고는 이제 구태가 되어버렸다. 마샬 맥루한(Marshall McLuhan)의 선언적인 발언인 "미디어가 바뀌면 메시지도 바뀐다"는 현대판화에 대한 성격을 잘 대변하고 있다. 이 대중철학가는 현대사회에 있어 매체와 메시지를 동질화시키면서, 이전의 이분법적인 사고에 도전했다. 앞에서 보았듯이 판화는 매체의 진보를 쫓아왔다. 그리고 그것에 상응하는 내용과 형상의 변화도 보여주었다. 과거 판화는 다른 장르의 입장에서 바라보았을 때, 하이테크이자 멀티미디어였다. 오늘날 그 입장이 뒤바뀌어버린 듯 하지만, 판화는 항상 새로운 것에 대한 의지를 잃지 않았던 장르이자 매체였다. 이제 문제는 폭넓은 의미의 판화 개념이 현대미술 속에 어떻게 파고 들 것인지 하는 것이다.

이정은_INNER 0505_디지털 프린트_20×110cm_2005
박지나_쌓이는 그림들-다시쌓기Piling up piled-up_드로잉_2005

III. 전략으로서의 '스며듦' ● 이번 서울판화제의 기획전 주제이자 화두인 '스며듦'은 작가들에 의한 주체적 실천의 방식을 나타내며, 그 방식은 다음과 같은 다양한 측면에서 해석이 가능하다. ● 첫째, 이 주제는 구조적인 - 아마도 건축적이라는 부르는 것이 더 타당할 것 같다 - 근대적 사고방식에 대한 도전으로 비쳐진다. 언어가 주는 뉘앙스에서 느낄 수 있듯이, 스며듦은 유기체적이며 식물성에 가까운 사고방식의 한 표현이다. 이것은 대립구도를 상정하는 서구의 근대적 사고 안에서 발생되는 갈등과 전복이나 변증법적 충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근대이후에 나타난 이종간의 유연한 교류와 친화적 이항결합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친화적 관계에서 형식과 매체 그리고 의식의 경계를 슬그머니 해소해 나가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그것은 어쩌면 현대미술에서의 혼성잡종(Hybrid)이나 크로스 오버(Cross over)를 연상시킬 수 있다. 그러나 스며듦은 각 영역 속에 들어가 형질을 변화시키는 그런 폭력성을 지양하고, 이종의 장점을 편파성 없이 드러내는 방법론으로서 인식된다. ● 둘째, '스며듦'은 탈 장르와 연관하여 기존 형식의 제한성을 극복하는 것을 의미한다. 타 형식과 교류하면서 기존 형식의 조형적 한계를 넓힐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공간적 제약은 물론 매체의 질료성에 고착된 표현의 틀까지 논의되어질 수 있다. 더불어 형식에 고정된 이미지의 틀을 벗어날 수 있다는 장점도 내포하고 있다. 이것은 기존의 형식을 벗어나는 탈 장르가 아니라, 오히려 합 장르화라고 지칭할 수도 있다. ● 셋째, 이미 존재하는 것들과 새로운 것의 통시적인 공존을 들 수 있다. 더 나아가 공존이 성립하기 위하여 사이의 빈틈을 채우면서, 새로운 조형성을 선전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다는 점도 주목된다. 이것은 단절과 부정의 역사를 추구하는 일방적인 아방가르드의 태도가 아니라, 내밀하고 부드러운 방식의 진보를 말하는 것이다. 대비 혹은 유사성을 바탕으로 한 나눔이 아니라, 배타적인 역사적 대립과 상호부정성을 해체하려는 올인(All in) 전략과 같은 것이다. 이제 서울판화는 시공의 다름을 비집고, 다른 장르의 영역으로 삼투압을 시도하고 있다. ■ 김정락

Vol.20050625b | 서울판화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