倉洞庫_CHANGDONGO-②

창동3기 입주작가 오픈스튜디오展   2005_0616 ▶ 2005_0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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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5_0616_목요일_06:00pm

참여작가 권오상_김건희_김성수_김주연_김혜련_박소영_방병상_신기운_신동필_유영호 이강욱_이영화_이주영_채우승_허윤희_가브리엘라 버틸러_브리짓 오브라이언 써니킴_얀크리스텐센_오싸 엘젠_하이디 헤세

작가연구 세미나 2005_0616_목요일_04:00~06:00pm_창동스튜디오 전시실 강수미_심상용_유진상_이진숙_최봉림

부대행사 작가별 스튜디오 개방시간_ 04:00~06:00pm 하이디 헤세 '아메리칸 애플파이 프로젝트'_ 06:00pm~_104호 작업실 뒷풀이 행사_ DJ 임식과 함께하는 바비큐 파티_07:00~09:00pm_야외조각장

창동미술스튜디오 서울 도봉구 창동 601-107번지 Tel. 02_995_0995 www.artstudio.or.kr

김주연 · 박소영 · 채우승 , 그들 세대의 미술을 찾아서 0. '중견 세대 미술론' 부재 유감 ● 무엇이 김주연, 박소영, 채우승, 이 세 작가를 함께 묶어 그들의 작품에 대해 해석과 비평의 글을 쓰도록 하는가? 아니, 무엇이 우리를 이들 세 작가의 작업으로 동시에 이끌고, 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논하게 하는가? 적어도 우리는 이들을 함께 보아야 할 필연적 근거가 없으며, 김주연-박소영-채우승(과 그들 작업) 안에 통일성을 이루는 것이 없음을 알고 있다. 결국 개별 작가와 개별 작품들 안에는 항상 이미 다르고 다른 '예술'만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들을 한자리에서 보고 논하려 하고, 그래야만 한다. 이유는 '어떤 과제' 때문인데, 창동스튜디오 측이 세 작가에 대한 작품론을 묶어 요청한 것이 그 외형적이고 부차적인 이유이다. 그러나 이는 각 작가에 대해 각 장을 배당해 쓰면 되는 일이어서 문제가 안 된다. 나는 현재 동시대 한국미술에서 중견작가들의 삶의 경험과 작업의 꾸준한 이력이 과소평가되는 ―극단적으로는 '신세대미술'의 선호로 그 물리적 연륜이 핸디캡이 되는― 상황을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와중에 이 글이 목표해야 하는 지점을 설정할 수 있었다. 그것은 '중견 세대 미술론'이다. 말하자면 물리적인 연령과 작업 경력으로 나눴을 때, 일명 '중견 세대'에 속하는 작가들의 미술이 갖는 형태와 질량과 질감을 그에 맞는 렌즈로 조명해 보자는 것이다. 기왕에 미술에서도 세대구분이 작품읽기의 한 방법론이 되었다면, 말의 진정한 의미에서 그 '세대'라는 단층들을 각각 볼 필요가 있으며, 그렇게 했을 때 '공평함'의 문제를 넘어 한국미술의 지층을 구성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다. 김주연, 박소영, 채우승. 이 사십대 중엽의 세 작가는 짧게는 12년에서 길게는 15년에 이르는 작업 경력을 쌓아 오고 있다.(생물학적 연령과 경력은 각 작품들과 별 상관없는 사적이고 작품 외적인 요소가 아니라 '바로 그 작품'이 있게 한 원천이다.) 굳이 장르를 나누자면 김주연은 자신의 작업이 "설치미술"이라 하고, 박소영과 채우승은 완고하게 "조각"이라 한다. 어쨌든 이들은 입체물을 만들고, 3차원 공간을 다루데, 이들 각각의 작업 속에서 '중견 미술의 성질'을 논하기에 앞서, 우선 나는 이들의 작업이 한자리에서 조응했던 「쉼표」전시부터 방점을 찍어 나가고 싶다. 그 「쉼표」를 교차점으로 해서, '세 갈래의 다른 미술'이라는 '상당히 긴' 길 위를 짚어 가고 싶기 때문이다. ● 1. 「쉼표」, 이 긴장된 작품들 앞에서 우리는 과연 쉴 수 있을까? ● 보도 자료에 "「쉼표」전은 우리의 삭막한 삶 속에 잠시 정체하여 호흡할 수 있는 장소로서 창조적인 여유와 휴식을 제공하고자 한다."라고 써 있었다. 그러나 막상 김주연, 박소영, 채우승의 작품들이 붙고-떨어져 설치된 창동스튜디오 전시장에 들어섰을 때, 관람자는 여유와 휴식이 아니라 엄정한 고요 속에서 사물-예술작품이 뿜어내는, 각각 다르고 매순간 다른, '긴장'에 기가 눌린다. 정확히는 그 사물이 뿜어내는 긴장이라기보다는 그것들을 바로 그렇게 있게 했던 '작가의 쌓인 삶의 경험'이 작품에 새겨놓은 긴장이다. 멍한 백색 큐브 전시장에서 박소영의 '녹색 가짜 이파리로 덮인 의자'는 엉덩이판과 다리가 잘린 채 바닥의 회색 폴리우레탄으로 침몰하는 중이고, 채우승의 '백색 종이가구'는 눈 밝고 감수성 예민한 이들에게만 그 종이장식의 잔물결을 감지토록 하며 흰 벽으로 스며들려 한다. 그리고 그 위태하게 비어 보이는 전시장 공간의 중앙에서 김주연의 녹색 소파, 둔중한 개가 엎드려 있는 것처럼 보이는 예의 그 소파는 한 쪽 다리가 '삐끗'한 듯 바퀴가 달린 채 기울어져 있다. 이 침묵 속에, 고도로 긴장감을 유발하는 작품-가구들 앞에서 나나 당신은 절대로 쉴 수 없다. 사물은 마치 전혀 이질적인 세계에서 여기로 당도한 듯이 의미와 쓰임으로부터 탈구(脫句이자 脫臼)되어 있으며, 공간은 그것들을 담고 있느라 무척 긴장하고 있다. 결국 '단번에 의미를 파악하지 못한' 우리는 여기를 '쉼표'가 아니라 김주연, 박소영, 채우승의 작업으로 가는 '교차로'로 여기고, 그 이질적인 세계, 바로 이 작가들의 경험세계와 작품으로 나아가야 한다.

김주연_이숙_천, 씨앗, 세수대야_7개 의상길이 350cm_2002

2-1. 김주연 : 다른 곳에서 자라는 감각, 그 제스처 방식 ● 분명 여러분이 가장 잘 알고 있을 김주연의 작품은 「이숙(異熟)」(2002, 사루비아다방)일 것이다. 이 작품에서 순결의 상징 같은 흰 드레스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자연의 수동성의 상징인 식물들에 의해 점점 점령당하고 잠식됐다. 씨앗이 자람에 따라 흙색에서 주황색으로 그리고 급기야 녹색으로 얼룩져 가던 그 기이한 드레스는 ―마치 식물에게 자신의 육체를 대지로 내주려는 듯 엄청나게 긴 치맛자락과 소매를 갖고 있던― 보는 이에게 아주 낯선 감각을 키웠다. 그 감각은 '생태미술'이나 '장소 특정적 미술'이라는 말 속에서는 미처 포착되지 않는 작가 김주연만의 경험에 의해 보는 이에게 촉발된 것이다. 델리케이트하고 은밀하며 단독자로 살아온 사람의 경험. 독일 유학 시절뿐만 아니라 지금 현재도 어느 한 곳을 터전으로 삼고 살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커진 공간과 사물의 특이성에 대한 파악능력과 적응력. 그런 사적이고 내밀한 경험들은 결국 개념으로는 설명 불가능하므로 '제스처'로만 보여주는 것. 이것이 김주연의 전체 작업들에서 공통적으로 느껴지는 감각이고, 그녀가 작품 속에 투입한 섬세한 경험의 결들이 드러나는 방식이다. 즉 그녀의 작품은 개념이 아니라 감각을 일깨우는데, 그 감각이 「이숙」에서처럼 특별한 형태의 작업이든 일견 별스럽지 않은 일상의 사물을 빌려 쓰는 작업이든 간에 예민함, 비밀스러움, 고독감을 자아낸다는 것이고, 그 감각은 작가의 지난 삶의 경험이 '제스처'의 옷을 입고 드러난 것이라는 말이다.(아도르노가 카프카의 문학세계에서 포착했던 바로 그 "제스처") 후자의 예로 우리는 「독(獨)-신(身)/독(獨)-방(房)」, 「일상의 성소」 등을 들 수 있는데, 너무나 일상적이어서 오히려 감상자를 당혹시킬 침대, 소파 등이 김주연의 이 작품들에서는 아주 미세하게 비틀린다. 예컨대 사람이 아니라 침대만 홀로 남겨진 방이라거나 오줌 누는 강아지처럼 한쪽 다리가 살짝 들린 소파라거나 하는 식으로. 이런 식의 작품은 눈만이 아니라 사물을 자기 식대로 상상할 수 있는 감각에 밝은 사람에게만 그 미세하고 비밀스러운 정서와 감각을 드러낸다. 일상의 결들이 '평범함'쪽으로 빗질되어 있다면, 오히려 그 결을 거슬러 솔질하는 감각에 민감한 사람만이 김주연의 설치작품들이 풍기는, 그 평범해 보이지만 기이한 제스처를 알아채고 의사소통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제스처들은 의미를 부여하면 오히려 은폐되는 경험의 흔적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차라리 김주연의 설치작품 속에서 씨앗이 움을 틔우고 성장하는 그 순간들을 지켜보거나 기우뚱한 소파에 몸을 기대 보거나 완전히 고립된 방의 침대에 누워 일상적인 경험의 매 순간에 당도하는 비밀스러운 감각을 지각해 보는 수밖에 없다.

박소영_녹색의자_오브제, 모조잎_가변 크기_2005

2-2. 박소영 : 껍질을 입힘으로써 "조각"의 껍질 벗기기 ● 2000년 금산갤러리 개인전에 선보인 「조각의 껍질」은 박소영의 작업이력에서 하나의 이정표가 되는 작품이다. 조각가들이 성형재료로 흔하게 쓰는 값싼 폴리코트 빈 통의 안쪽 면을 가짜 꽃으로 도포한 이 작품은 전통 안에서 부패해 가는 "조각(sculpture)"에 대한 박소영 식의 비판이자 그 스스로 새로운 '조각'을 주장하는 것으로 읽혔다. 즉 '가짜 껍질 붙이기'라는 이 박소영식 조각의 행위는 우리가 전통적 예술장르 개념으로 이해하는 "조각"의 아우라를 박탈하는 작업인 것이다. 그러나 같은 시기에 발표한 「꽃, 사물」은 「조각의 껍질」과 조화(造花)를 붙인다는 방법 면에서는 동일하지만 문맥은 상당히 다르다. 후자가 "조각"에 대한 해체적 조각이라면, 전자는 일상의 물건에 껍질을 덧씌워줌으로써 "조각"에 국한하지 않고 사물 일반에 부여돼 있는 관습적 가치를 박탈하는, 말하자면 (모조의)의미를 덧붙임으로써 (관습적 ? 기능적)의미를 떼어내는 작업이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박소영은 이후 이 작업들에 더 집중하고 있다. 대학시절 자신이 만든 여인입상에서부터 길에서 주운 상패, 폴리코트 통, 빈 병 따위, 그리고 앞서 「쉼표」전 불구의 의자에 이르기까지 그녀는 거의 무차별적이다 싶을 정도로 각각 그것만의 '과거'를 가진 '사물'의 표면을 모조이파리나 모조 꽃으로 뒤덮어버림으로써 지금 여기의 '조각'으로 '현재화'시켜버린다. 그러므로 나는 박소영의 일련의 「껍질」 작업을 미술 내부, 더 작게는 "조각"에 대한 메타 비평적 작업이라 평하는 것은 지나치게 단순한 독해라고 생각한다. 결국 이 작가가 다루고 있는 소재 영역은 현실 삶의 부스러기이자 파편들이고, 그녀 작업은 삶의 파편과 "조각" 사이에 '가짜 혹은 모조'라는 흔히 우리가 열등하고 부정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가치'를 삽입함으로써 양자를 역승화(converse sublime)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에 수억 개도 넘게 있을 음료수 병 중 하나가 박소영의 모조 꽃잎을 껍질로 해서 「꽃, 사물」이 된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조각으로서 우리 눈앞에 전시되고 비평의 입말에 오르내리는 순간 "조각"의 관습화되어 견고해진 껍질은 한 꺼풀 벗겨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지금 내가 구분하고 있는 전통 "조각"과 일상의 '사물'과 박소영의 '조각' 간에는 말처럼 분명한 구분이 뒤샹의 「Fountain」이후 사라져버렸거나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해서 박소영의 현재 '껍질조각' 또한 언제라도 타성에 젖은 장식적인 조각으로 고착되거나 일상의 사물처럼 교환가치의 대상으로 축소될 위험에 직면해 있다. 현실의 경제 만능 문화는 잡식성이고, 작가는 그런 현실에 이미 항상 노출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런 위험을 돌파하는 방법 중 하나는 끊임없이 작업이 '자기의 것'이라고 전제되어 있는 범위로부터 탈주하는 것일 것이다. 박소영은 최근 2차원 평면의 조각을 만드는 것으로 이런 탈주의 시도를 하고 있다. 이제 가짜 이파리는 3차원 덩어리 위에서가 아니라 2차원 투명 비닐 위에서 '조각의 껍질'을 벗길 것이다.

채우승_잠시 머무르다 가다_종이_가변 크기_2005

2-3. 채우승 : 담을 수 없는 것들과 그것을 담는 행위 ● 바람은 보이지 않는데, 자락은 흔들려 길게 나부낀다. 하늘은 다 담을 수 없는데, 구름은 발밑에 그려져 있다. 건물을 받치고 있는 힘이 엄청날 텐데, 기둥은 우아한 주름을 드리우고 있다. 백색종이로 만든 가구는 그 용도성이 아니라 그 표면의 심미성을 극대화하면서도 눈에 띄지 않으려는 듯 고요하게 놓여 있다. 채우승의 조각에 대해 오직 하나의 정서로만 말해보라면 나는 '우아함'을 들겠다. 그의 작업이 무엇을 다루는지, 즉 그의 조각적 과제가 무엇인지 말해 보라면, 나는 다른 것은 다 제쳐놓고 '채우승의 조각은 담을 수 없는 것을 담으려 하는 시지프tm 식 반복 수행'이라 말하겠다. 물질적으로 견고하고 공간에 (2차원 환영이 아니라)실제로 존재하는 사물을 만드는 작업인 "조각"이, 볼 수 없고, 한 형상으로 구현할 수 없으며, 쉽게 감지할 수 없는 어떤 상태, 현상, 질감을 목표로 한다는 게 일견 패러독스다. 그런데 채우승은 그 비가시적이고 감촉하기 어려운 세계의 양태들을 하나 하나 조각 작품으로 잡아채내고 있다. '잡아챈다'고 했지만, 그것은 작가가 작업할 때 세계의 순간적인 양태와 벌이는 사투의 의미에서이고, 그의 완결된 작품을 보는 우리에게는 그 양태가, 그 속성이 우아하게 전해진다. 그래서 그의 작품들은 서두에 썼듯이 그렇게 우리 눈앞에 펼쳐지는 것이다. 예컨대 흰 천이 바람에 날리듯 보이는 「자락」의 '우아함'은 '정지'로부터 온다. 그 정지는 멈춤(stop)이 아니라 잘게 잘려진 시간의 '한 순간'에 가깝다. 채우승이 포착한 그 '한 순간'은 조각-씨실이 되어 우리 감각의 미세한 결들에 파고든다. 그런 후 생활 속에 무디게 풀려있다 작품 앞에서 긴장하게 된 우리 감각을 날실로 해서 우리 내부에 '심미성'이라는 옷감을 짠다. 그의 최근작 「잠시 머물다가다」는 이러한 '작가 + 감상자의 심미성'이라는 직물이 상당히 잘 뽑아내질 수 있는 경우로 보인다. 우리나라 고가구를 흰색 종이가구로 재현한 듯 한 이 작품들이 재현하는 것은, 사실 고가구의 외양이 아니라 그것이 갖고 있는 전통의 겹 시간과 지독하리만치 완벽을 기하는 수공의 장인 정신이고, 그래서 감상자는 지나간 시대의 취향과 섬세한 감각을 현재 지각할 수 있다. 이렇듯 비가시적이고 무한이며 감촉할 수 없는 불가해한 존재들(예컨대 바람, 힘, 시간의 쌓임)을 파악하는 일은 채우승의 경우, 가장 눈에 띄지 않는 사물들에 의해 촉발된다. 재미있는 것은 그 불가해한 존재들이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물질을 필요로 함에도 불구하고, 물질적이지 않을수록 그 불가해한 실재가 더욱 더 확실해진다는데 있다. 채우승은 오랫동안 자신을 둘러싼 세계와 사물에 시선을 던짐으로써 그것들이 존재하는 방식과 스스로를 드러내는 양태를 이해한 듯 하다. 그래서 불가해한 실재의 '한 순간'을 거의 전투적 긴장 속에서 잡아채 내서, 자락이나 주름 혹은 종이 장식의 결들이라는 물질에 살짝 기거시키는 동시에 그것들이 할 수만 있다면 물질성을 띄지 않도록 공간에 배치하는 것이다. 육안으로 포획할 수 없을수록 그의 조각은 확실한 존재감을 갖기 때문이다.

Heidi Hesse_애플파이 프로젝트_비디오_2005

0-1. 다시 '중견 세대 미술론'에 대하여 ● 이 짧은 글에서 '중견 세대 미술론'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그에 해당하는 세 작가의 작품에 대해 논했다고 해서 중견 세대 미술론이 부흥할지는 미지수다. 또한 여기서 중견 세대의 미술이 갖고 있는 변별점과 가치를 일반화시켜 주장할 만큼 논의가 충분히 개진된 것도 아니다. 나는 다만 외눈박이처럼 '트렌드'와 '대세'를 쫓는 미술계 흐름에 다른 시점도 있음을, 아니 나아가 수천 시점과 시선이 매번 형성되고 공존해야 함을 시론으로나마 말하고 싶었다. 미술계 안에는, "신세대 미술론"에 밀려 관심의 사각지대에 있는 듯한 "중견 세대의 미술"이라는 단층도 있음을 기억시키고 싶었다. 그 미술은 예컨대 김주연의 작업에서처럼 삶의 미세한 경험의 결들이 쌓여 은밀한 제스처를 취하는 것이다. 그 간단치 않은 미술은 예컨대 박소영의 '조각'처럼, 전통을 거쳐 자기비판과 해체에 이르는 와중에 절대로 쉽게 자신이 속한 '미술 영역'의 함정에 빠지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또 예컨대 채우승과 그의 작품처럼 담을 수 없는 것을 담고자 하는 어찌 보면 무모한 과제를 반복 수행하는 것이다. ■ 강수미

jan cristensen_벽에 아크릴 페인트_가변 크기_2005

권오상_피부적 리얼리즘 ● 권오상의 작품들에서 가장 쉽게 파악할 수 있는 비평적 카테고리는 바로 '가벼움'이다. 조각이 중력으로부터 사물을 해방시키기 위한 노력의 역사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을 기억한다면 그의 작품이 겨냥하는 가장 기본적인 지평을 이해할 수 있다. 조각은 물질을 이미지로, 혹은 시선의 등가물로 치환함으로써 중력으로부터 벗어난다. 그러나 권오상의 입체작품은 조각이 중력으로부터 벗어난다는 사실을 이상하게 해석하고 있다. 그는 이미지를 둥글게 연결하고 쌓아나감으로써 조각의 표면과 유사한, 애초에 사물이었으므로 공간 속에서 실체를 지녔던 어떤 대상의 '실재했었음'을 입체적으로 지시하는 신기루와도 같은 조각을 만듦으로써 조각의 비-물질화 과정을 과장한다. 불특정한 시점의 불특정한 공간에 '입체적으로' 실재했었던 대상의 등가물은 최대한, 그러나 그 대상의 실재에 항상 일정한 간격을 두고 못 미치는 거리에서 그것을 그대로 '지시'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진들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진이 항상 그러하듯이 실제의 대상이 얼마나 생생하게 어떤 곳, 어떤 장소에서 나의 시선 앞에 존재했었는지에 대해 강렬하게 증언한다. 때로 그것은 작가의 기억 속에서 변질된 형태로, 백일몽이나 괴물들, 혹은 의도적인 상념의 대상들로 떠오른다. 권오상의 작품들에서 '가벼움'은 상념의 가벼움, 그것들이 실존의 어떤 레이어로부터 '뜯겨져' 나와 마치 가벼운 물고기 가죽처럼 새로운 기억의 틀 위에 덧 입혀지는 피부적 리얼리즘(dermal realism)이라 부를만한 것의 가벼움이다. 여기서 시야는 항상 4x5 사이즈 정도의 범위에 한정되어 있다. 매번 이 정도 넓이의 면적을 한번씩 밖에 볼 수 없는 존재를 상상해보라 -물론 그것은 카메라다-. 이 존재는 대상의 표면을 수 십 번, 수 백 번에 걸쳐 주시한 뒤 그것들 전체를 하나의 완결된 대상으로 재구성한다. 그의 입체작품에서 핵심적 기술이 되는 사진들의 집적은 하나의 시선에서 다른 하나의 시선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발견되는 이음매들을 필연적으로 강조한다. 대상은 심연과도 같은 날카로운 이음매들이 증거하는, 280개의 혹은 350개의 전혀 다른 현실의 면들로 이어진 기억의 프랑켄슈타인, 혹은 대상에 투사된 시선의 실존적 불연속성에 대한 완벽한 재현에 의해 '간헐적'으로 '보고'된다. ● 액션 샘플러 ● 대상들은 왜 입체이기를 강요당하는가? 권오상은 대상의 현전성에 접근하는 가장 강력한 두 개의 경로, 즉 조각과 사진을 모두 동원한다. 대체로 그의 작품들을 보면서 느껴지는 사실은, 애초의 대상들이 사진만으로 충분히 어떤 '실재'를 드러내기에 충분했다는 점이다. 권오상은 일단의 과도한 조작을 통해, 즉 사진들을 입체적 공간 속에 '우겨넣음'으로써 그것들에 새로운 현실을 강요한다. 이 과정은 거칠고, 매끈하지 않으며 심지어 서투르기까지 하다. 왜냐하면 누구나 그것이 또 다른 '입체적 실재'에 이르기에 불충분하다는 것을 알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충분함에서 불충분함에로 이르는 과정을 단순히 '촉지적'(haptic) 현실을 획득하기 위해서라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갈증이 남는다. 왜 현실은 그에게 있어 반드시 3차원으로 우겨져 들어가야 하는 것일까? 그의 작품들 가운데 '액션 샘플러'라는 작품은 실제로 다중촬영 카메라의 이름을 제목으로 딴 것이다. 아마도 동작을 차례대로 복수의 화면으로 기록, 재현할 수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일 것이다. 그의 입체물들은 실은 현실로부터 샘플링된 표면들의 시리얼(계열), 일종의 데이터로 이루어진 좌표값들의 연속이라고 볼 수 있다. 이정우가 지적한 것처럼 그것들은 작가 자신이 본 적이 있는 어떤 광고의 내용을 반복하고 있을 수 있지만, 아마도 그렇다면 그것은 특이하거나 '예외적'인 행위의 계열 속을 통과하는 대상을 선택하기 위한 것처럼 보인다. 권오상에게서 자본주의적 현실의 시뮬라크르를 다시 '재현'하고 싶어하는 듯한 기색을 발견할 수는 있지만, 분명 그의 야심은 거기에 머무는 것 같지는 않다. ● 분열적 보고서_데오도란트 타이프 ● 실제로 많은 면에서 권오상의 작품들은 사진적 조각 이라기보다는 조각적 사진에 가깝다. '데오도란트 타이프'는 그런 점에서 흥미로운 개념이다. 다게레오 타입이나 칼로 타입과 같은 사진적 명칭이면서 동시에 'Odor'가 함축하는 관념적 대상에의 지시를 부정하는 명칭인 것이다.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 3차원적 재현을 통해 지시할만한 대상 같은 것은 없다. 왜냐하면 대상은 3차원적 등가물에 의해 지시되거나 할 정도로 일관된 재현 속에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항상 불충분하게 지시되는 것이며 그러한 재현의 불충분함을 기록하는 것으로 훨씬 더 그것에 대한 기술에 접근하게 된다. 권오상이 사진을 통해 대상을 다루는 방식은 분명 불충분함에 대한 과도한 강조, 다시 말해 지나치게 충분하다고 강조하는 것이다. 그의 '플랫' 연작은 잡지에서 오려낸 수많은 사진들을 다시 촬영하여 확대한 뒤 수직으로 세워놓고 마치 실물인 것처럼 재촬영하는 과정으로 이루어진다. 여기서 사진의 평면성은 3차원으로 우겨넣어지는 대신 철저하게 2차원적 평면상에 나란히 놓이는 방식으로 3차원을 적극적으로 재현한다. 오히려 모든 사진들이 철저하게 사진적 평면을 보장하는 동일한 시점에 대해 나란히 나열되어 있어 앞의 입체작품들과는 전혀 다른 관점을 드러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평면적 이미지들이 불러일으키는 일루전은 너무 강력해서 실제에 거의 근사한, 또는 실제보다 훨씬 그럴듯한 사실성의 동의를 얻어낸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과도한 사실성은 재현의 불충분함을 드러내는데 직접적인 단서를 제공하며, 실제로 작가의 작업실에 놓고 찍은 관계로 저 뒤의 시선의 지평선 너머에는 다소 지저분한 벽이 보이기도 한다. 입체작업과 이 평면작업의 공통점은 다음과 같은 곳에서 발견된다 : 현실은 분열적이며 과도하게 사실적인 것들에 의해 항상 불충분한 상태에 머문다. 거꾸로 분열적이며 과도하게 사실적인 예술작품은 그것이 드러내는 불충분함에 의해 현실을 가장 예민하게 번역한다.

권오상_THE FLAT 5_람다 프린트 디아색_120×150cm_2003

유영호_잠재적 예술 공동체와 교환가치 ● 유영호는 두 가지 점에서 매우 독자적이다. 첫 번째는 예술의 잠재적 공동체라는 매우 오랜 꿈과 관련해서 그것의 가장 정통적인 관념을 구현하는 작가이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그것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매번 새로운 형태의 교환가치라는, 아주 구체적인 문제들에서 실마리를 찾기 때문이다. 2002년 일 년 간 그가 독일의 뒤셀도르프에서 열었던 'hoch2'라는 이름의 매장은 현실적으로 도저히 교환가치로 떠오를 수 없는 일련의 예술작품 혹은 작업들을 판매하기 위한 목적으로 운영되었다. 예컨대 여기서 다른 독일 작가와 함께 진행한 '1000개의 상자 프로젝트'는 실제로 에디션이 표기되어있는 빈 종이상자를 진열해서 실제로 팖으로써 그것을 사는 사람들과 만들어 파는 사람들 사이에 이해하기 어려운 일시적 이해관계의 공동체를 이끌어낸다. 많이 팔지는 못했다고 하지만, 그것 또한 이 공동체를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척도가 된다. 교환과 매매의 공동체,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적 현실을 가장 단단하게, 또 가장 모호하게 지탱하고 있는 이 공동체는 그것의 주된 기능 가운데 하나로서 가치의 생산과 강요, 그리고 그것의 지속적인 파괴와 갱신이라는 일련의 모순된 프로세스들을 반드시 수반한다. 유영호에게 있어 예술가가 스스로의 노동에 의해 지속적으로 구축하는 창조적 장소들의 전형은 이미 오래 전부터 관념적 가치들이 물적 토대를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현실을 구축할 것을 꿈 꾼 캄파넬라, 로욜라, 블로흐 등의 유토피아에서 찾아볼 수 있다. ● 조직기반미술_Organization Based Art ● 이러한 공동체는 예술에 있어 다음과 같은 모순을 야기한다 : 공동체란 본질적으로 무리를 떠올린다. 다시 말해 그것은 다수의 개인들이 자신들의 이해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구성한 삶의 형식이다. 그러나 여기서 잠재적 예술 공동체는 항상 어떤 작가 개인에 의해 제안되며 추구되고 실현된다. 다시 말해 예술적 공동체란 존재하지 않는다. 있다면 그것은 작가 개인에 의해 상상되고 구체화되는 공동체의 일시적 모델하우스 같은 것일 뿐이다. 유영호의 작품들 속에서 실현되는 공동체들 역시 마찬가지다. 버크민스터 풀러의 '뭔가를 해내는 것은 항상 개인이다'라는 선언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유영호의 조직기반미술은 전적으로 개인의 영역, 그 중에서도 개인의 경제 영역에서 이루어진다. 그것은 최소한의 비용과 노력으로 구축되는 유토피아에 대한 것이다. 2003년에 사루비아에서 열린 'Price Shop'은 마치 백화점의 매장을 연상시키는 공간으로 만들어졌다. 그리고 밝게 조명이 비추어진 진열대에 전시된 것은 동으로 캐스팅된 가격표들이었다. 동일한 크기의 가격표에는 10,000원부터 10,000,000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가치들이 표시되어 있지만 실질적인 차이는 아무데도 없다. 가치의 판단을 전적으로 구매자의 추상적 의지에 맡긴 이 작품에서 실질적인 미술의 작동은 잠재적 공동체의 가정으로부터 출발한다. 사실 모든 예술은, 뿐만 아니라 종교, 자본, 권력까지도 기본적으로는 잠재적 공동체의 형식을 띤다. 차이는 무엇이 추상적 가치로 떠오르는가, 혹은 그것을 대체하는가에 있을 뿐이다. 유영호는 예술적 교환, 혹은 창조적 소통의 방식으로 그 때 그 때 형성되는 일시적이고 덧없는 공동체의 출현과 그것의 제도적 형식, 그리고 물적 조건들을 상상해낸다. 이것을 조직기반미술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것이 조직이기 때문이 아니라 미술이기 때문이다.

유영호_Kunst- Akademie_사루비아다방_2003

예술적 행동주의의 목적 ● 예술적 행동주의가 정치적인 발언과 변화의 추구를 목적으로 한다면, 유영호의 행동주의는 현실적인 정치적 목표를 향해 발언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업이 행동주의적 형식을 띠는 것은 그것이 어느 시점에서 정치적 행동주의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어떤 것과 동일한 지점에 다다르기 때문이다. 물론 그 때에도 역시 유영호의 행동주의가 위치하는 장소는 약간 그 좌표를 달리하게 될 것이다. 즉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그것은 '유토피아'를 실현하는 것이다. 유토피아는 속성상 누구에게나 각각 매번 다르게 떠오른다. 어쩌면 유토피아란 기질적인 차이와 신경학적 변수만큼이나 다양한 체제와 형식으로 이루어지는지도 모른다. 유영호에게 있어 예술적 행동주의는 그가 만들어내는 유토피아의 속성이 무엇인지에 대한 검토를 통해 보다 분명하게 밝혀질 것이다. ● 평행한 자본주의와 그것의 아카이브 ● 2004년 12월에 열린 부산 비엔날레 설치 작업은 전시와 동시에 그것의 부대시설을 제공하는 시공참여 형태로 이루어졌다. 이 작업은 전시지원금과 약간의 비용을 가지고 작가들이 직접 설계와 자재구매, 시공에 이르기까지를 전담하는 다소 노동집약적인 형태로 이루어졌는데, 이런 프로젝트를 추구한 이유에 대해서는 당연히 예산에 대한 비-의존적 입장에 서기위한 노력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들이 만든 키오스크와 파빌리온들은 식당과 오락실, 큐레이터 부스에서부터 디스코테크까지 다양한 편의시설들을 포함하고 있는데 작가 측에서는 이것들이 예상한대로 사용되는 것이 작품의 주요 목적으로 설정되어 있다. 이 건축물들- MDF로 직접 만든-은 유영호가 이제까지 해온 많은 작업들과 마찬가지로 자본주의적 조건들과 그것에 대해 비-의존적인 체제라는 평행한 관계를 드러낸다. 최소한의 자본과 자신들이 직접 제공하는 노동력 역시 마찬가지이다. 유영호의 시스템은 매번 자본주의에 대해 평행한 유사-회로를 구축하고 그 회로 내부에 고유한 제도와 사물들로 이루어진 필요충분적 구조를 구축한다. 내부의 모든 것들은 실제로 기능하는 것들이면서 이 제도를 위한 아카이브이기도 하다. 'Price Shop'의 가격표처럼 그것은 그 체제에서 사용되고 기록되며 그것으로 기억된다. 유영호의 작업은 평행한 자본주의의 실현이라는 예술 창작에 있어 매우 야심적인 영역을 향해 나아간다. 그리고 그것은 매번 그것이 실현한 지점들에 대한 기록으로, 아카이브로 남게 된다. 지금부터가 그의 실험이 본격적으로 전개되어야 할 시점이라고 여겨진다. ■ 유진상

Vol.20050626b | 창동3기 입주작가 오픈스튜디오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