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지현 회화展   2005_0622 ▶ 2005_0628

한지현_야누스의 머리_캔버스에 유채_130.3×387.8cm_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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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5_0622_수요일_05:00pm

인사아트센터 6층 서울 종로구 관훈동 188번지 Tel. 02_736_1020 www.ganaart.com

한지현의 꽃, 모호성의 이미지 ● 부용과 팬지꽃이 화면 가득 그려져 있다. 이렇게 작은 꽃들이 커다랗게 단독으로 그려져 있으니 비현실감이 돈다. 한지현의 꽃(식물)은 마치 날것으로 꿈틀거리고 헐떡이는가 하면 피를 흘리고 거친 숨을 토해내는 것처럼 다가온다. 식물이 동물처럼 비칠 때 순간 그로테스크해진다. 익숙한 시선이 무너지는 자리에 낯설고 기이한 형상이 다가온다. 망막 너머, 의식 저편에서 건너온다. ● 작은 꽃을 확대해서 보면 더욱 새로운 세계가 보인다. 우리는 보이는 것만을 전부로 알면서 보이지 않는 것, 볼 수 없는 것을 은연중 외면한다. 그러나 이 작은 꽃잎과 뿌리를 가만 보고 있노라면 미처 접하지 못했던 오묘하고 신기한 세계의 풍경이 환각처럼 펼쳐진다. 작가는 작은 것을 애써 유심히 들여다보는 한편 이를 소중하게 생각하게 한다. 작은 것을 크게 확대하고 보고 느끼고 그렇게 되기를 자신 또한 염원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인간과 자연의 친화적인 관계를 드러내는 생태학적 관점이 피처럼 스며들어있다.

한지현_서로 다른 시선 2_캔버스에 유채_200×80.3cm_2005
한지현_부용_캔버스에 유채_162.1×260.6cm_2005

작가는 식물을 커다랗게 확대했다. 꽃이나 뿌리 부분만이 극대화되어 화면 가득 점유하고 있는 구성이다. 그러자 꽃은 인간의 실핏줄이나 내장, 심장, 피를 떠올려준다. 어떤 것은 여자의 생리혈, 응고된 핏덩어리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연상작용에 의해 하나의 이미지에서 또 다른 이미지가 줄을 잇는 체험은 낯설지 않다. 그리고 전체적으로 검붉은 색에 대한 작가의 집착은 아마도 개인의 심리적인 기억, 정신적인 트라우마와 연관이 있어 보인다. 사실 모든 그림은 결국 한 개인이 상처, 기억과 상기의 고통을 근원으로 한다. ● 린시드와 테레핀을 묽게 탄 유화물감은 마치 수채화나 수묵처럼 홍건하다. 화면은 온통 물에 잠기듯이 적셔져있어서 주룩주룩 비가 내리듯, 액체가 분비되는 듯 하다. 작가는 팔레트에 물감을 짜서 쓰는 게 아니라 작은 통에 물감을 풀어서 쓰고 있다. 그러니까 물감을 구축적으로 칠하고 덮어나가는 게 아니라 즉흥적으로 번지고 흘리면서 그로인한 우연적이고 동적인 효과에 매료되어 있다. 유화를 마치 수묵이나 수채화물감을 다루듯이 그리고 있다. 작가는 유화의 반짝이며 끈적거리는 점성 및 맑고 강한 색감을 좋아한다고 말한다. 어쩌면 작가는 자신의 이러한 기호와 취향에 따라 그 같은 기법으로 잘 그려낼 수 있는 소재, 자기 감각에 맞는 것을 찾다보니 꽃과 식물을 만난 것 같다고 한다. ● 자연계의 모든 것들은 온통 곡선, 유선형으로 꾸불거리고 퍼져나가며 분열적인 프랙탈한 선, 공간으로 존재한다. 생명의 속성이 바로 그러하다. 예측할 수 없는 분열과 생장, 무서운 생명력으로 꿈틀대고 유선형으로 증식되어가는 자연의 모습이 작가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한지현_소중유검_캔버스에 유채_145.5×224.2cm_2005
한지현_돌아보기....돌아서기_캔버스에 유채_130.8×130.8cm_2005

그렇게 작가는 어느 날 부용과 팬지꽃을 보았다. 그 꽃을 보다보면 꽃의 형상에서 또 다른 이미지를 찾게 되고 새로운 것들이 마구 연상되는 기이한 상상의 체험을 한다. 다른 것을 강렬하게 연상시켜 주는 꽃의 이미지! ● 한지현은 꽃에서 다른 존재를 본다. 두 꽃이 맞닿아있거나 꽃잎이 접혀있는 모습에서 이상한 존재의 형상을 보았고 피를 만났고 상처를 접했으며 감각적인 쾌와 섬짓한 공포 등 여러 감정이 교차도 경험했다. 꽃 안에 흡사 괴물 같은 것이 숨겨져 있는가 하면 인간의 형상도 얼핏 보여 진다. 그것은 꽃이면서 동시에 꽃이 아니다. 나는 꽃을 보고 있지만 다른 것을 보고 있다. 아니 다른 것이 보여 진다. 그렇다면 본다는 것은 결코 단일하거나 명료한 인식으로 귀결되지 않는다. 이중적이고 모호한 것에 대한 이 기호는 보이는 것에서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눈, 보이지 않는 것에서 또 다른 것을 보는 눈의 틈과 사이를 말한다. ● 메를로 퐁티는 분명한 것은 결코 투명하지 않은 세계에 고유한 몸이 존재하고, 몸이 그러한 세계로 향한다는 사실뿐이기 때문에 몸 앞에 주어진 실존적 사태는 객관적이고 분석적인 사유로는 포착할 수 없고, 불투명하며 모호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세상의 의미는 몸의 체험을 통하기 때문에 늘 개방적이고 발생적이라는, 해석학적인 의미의 모호성이 개입하게 된다는 것이다. 사실 지각된 것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 교차하며 얽혀있는 관계에 다름 아니다. ● 다시 퐁티의 말에 귀 기울이면 그는 모든 실재가 분리되기 이전의 상태, 즉 몸과 정신, 보는 몸과 보이는 몸, 나와 남, 인간과 자연,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꿈과 현실, 가상과 실재 등이 경계를 넘나드는 근원적 세계이거나, 아니면 양쪽 모두를 포한하는 경계 그 자체라는 것이다.

한지현_부유_캔버스에 유채_162.1×130.3cm_2005
한지현_노란 팬지_캔버스에 유채_162.1×260.6cm_2005

한지현의 작업 역시 사물을 고정되게 보는 것이 아니라 보이는 부분과 보이지 않는 면까지 아우르고 있다. 주체와 대상의 고정적이고 결정적인 이중성은 무너지고 그 사이에서 월경하는 시선, 감각, 이미지가 속출한다. 그런가하면 아름다운 것에서 아름답지 않은 것을 보고 아름답지 않는 것에서 문득 아름다움을 발견하기도 한다. 이 세상은 서로 분리되거나 날카롭게 나뉘었다기보다는 한 몸에 붙은 이중의 존재로 이루어졌다. 이것과 저것이 아니라 이것이면서 저것이고 저것이면서 이것인 혼재와 중첩이 한지현 작업의 키워드다. ■ 박영택

Vol.20050627b | 한지현 회화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