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사람 나의 풍경

신혜선 사진展   2005_0727 ▶︎ 2005_0802

신혜선_sister_디지털인화_68×99cm_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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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5_0727_수요일_06:00pm

갤러리 토포하우스 1관 서울 종로구 관훈동 184번지 Tel. 02_734_7555 www.topohaus.com

모나드 그리고 4개의 코드에 대하여 ● 현대사회는 모래사회다. 사회 구성원들은 모래처럼 뿔뿔이 흩어져 존재하는데 (러시아워의 지하철 환승역 풍경을 생각하라. 그 많은 익명의 사람들. 그들 사이에 무슨 질적인 관계가 존재하는가?) 사회 자체는 유기적 구조물처럼 견고하고 잘 돌아간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비판적 사회학자들은 그건 다름아닌 현대사회를 안보이게 통제하고 있는 완벽한 사회관리시스템 때문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런 문제는 반드시 후기자본주의의 비판사회학자들이 처음으로 제기했던 질문이 아니다. 이미 17C에 G. W. 라이프니쯔는 개체와 우주의 관계를 똑같은 방식으로 질문 했었다. 아무 상관없이 흩어진 개체들이 어떻게 우주라는 유기체를 형성하고 살아있게 만드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라이프니쯔는 '모나드 (Monade)'라는 개념을 만들어 냈다. 모나드는 번역하면 '단자'다. 그것도 '창문 없는 단자'다. 즉 그것은 외부와 완벽하게 차단되어 있는 독자적 존재들이기 때문에 단자와 단자들 사이에는 아무런 연관관계가 없다. 하지만 모래처럼 흩어져 존재하는 단자들이 함께 존재함으로써 우주는 유기체처럼 살아서 돌아간다. 즉 개체들 사이에는 관계가 없지만 그것들이 하나의 시공간 안에 공존하게 되면 모종의 결속력이 단자들 사이에 존재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모종의 결속력, 드러나지 않은 채 작동하는 조화의 에너지, 그것을 라이프니쯔는 신의 섭리, 좀더 분명하게 말하자면, '운명적 하모니 (praestabilierte Harmonie)'로 설명했다.

신혜선_cousin_디지털인화_68×99cm_2003

사진은, 특히 영화와 비교할 때, 본질적으로 모나드다. 물론 사진은 현실에서 탈취한 한 편린이다. 하지만 사진이 된 현실의 편린은 두 번 다시 현실로 재접목될 수가 없다. 그 되돌릴 수 없는 단절성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게 사진의 프레임이다. 예컨대 영화의 프레임은 유동적이다. 영화 또한 현실의 편린들을 보여주지만 한 장면에서 잘려나간 부분은 다음 장면에서 프레임 안으로 다시 들어온다. 결국 영화는, Ch. 메츠가 말하듯, 다 보여준다 (그래서 영화는 본래적으로 포르노그라피라고 F. 제임슨은 말한다). 하지만 사진의 경우는 다르다. 사진에서 한 번 프레임 밖으로 잘려나간 부분은 두 번 다시 프레임 안으로 들어설 수 없다. 사진, 그것은 외부가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다. 오로지 내부만이 존재하는 창문 없는 모나드 이미지이다. 사진이 프레임 밖 모종의 현실을 지시한다면 다름아닌 이 창문 없는 모나드적 성격 때문인 것이다. ● 신혜선의 사진 또한 모나드다. 신혜선의 사진 또한 그 무엇인가를 지시한다. 그 무엇이란 무엇일까? 그것을 읽어내기 위해서, 내 경우, 네 개의 코드가 필요하다. 첫 번째 코드는 주제와 배경의 코드이다. 신혜선은 인물을 찍는다. 그 인물들은 모두가 자연을 배경으로 삼고 있다. 사진의 주제는 인물이고 자연은 부수적이다. 그러나 신혜선의 경우 사진의 무게중심은 인물이 아니라 오히려 배경 쪽으로 옮겨져 있다. 인물들에게 고유한 표정을 수여해 주는 건 (신혜선의 인물들은 모두가 무표정하다) 인물 자신이 아니라 그 인물들이 소속되어 있는 자연풍경들이다. 예컨대 만개한 꽃들, 무성한 잎들, 엉킨 나뭇가지들, 헐벗은 바위들, 들판과 하늘과 산들... 인물을 껴안고 있는 그러한 자연의 배경이 삭제된다면 신혜선의 사진 속에서 인물들은 어떤 존재감을 지닐 수 있을 것인가?

신혜선_Dobong Mt. seoul_디지털인화_108×135cm_2004

두 번째 코드는 객관성과 표현성의 코드이다. 신혜선의 시선은 위생적이다. 그녀의 위생적 시선은 작가나 오브제 모두에게 철저하다. 신혜선의 사진 속에서 작가의 서정적 감정이나 주관적 의도는 남김없이 증발되어 있다. 오브제인 인물들과 풍경도 마찬가지다. 인물들은 모두 무표정하고 프레임 공간 정중앙에 한그루 나무들처럼 직립하고 있다. 배경의 자연풍경들도 버려진 것처럼 거칠고 투박하다. 결과적으로 신혜선의 사진 프레임 안에 존재하는 건 음영의 법칙만으로 제시되는 사실성 그 자체 뿐이다. 하지만 그 엄정한 객관적 시선을 통해서 신혜선의 사진은 역설적으로 표현성을 획득한다. 그 표현성은 (이것이 또 하나의 코드를 필요하게 만든다) 작가 자신이 아니라 보는 사람에게서 발생되는, 말하자면 무의도적 표현성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 ● 세 번째 코드는 친숙함과 낯설음의 코드이다. 신혜선의 사진 속에서 보는 이를 낯설게 만드는 요소는 사실 아무 것도 없다. 인물들은 주변 어디서나 만나는 평범한 얼굴이고 풍경들 역시 대도시 근교 뒷산 어디서나 목격할 수 있는 일상적 자연풍경들이다. 하지만 그러한 친숙한 대상들이 반복적으로 프레임 공간 안에 포획됨으로써 신혜선의 사진은 보는 이에게 이물감과 낯설음을 불러일으킨다. 어쩐지 낯선 친숙함/ 어쩐지 친숙한 낯설음 - 그러한 복합적인 데자뷔 감정이 야기하는 경험적 효과는 그러나 편안함이 아니라 모종의 불안함이다 (친숙함의 반복에서 발생하는 이 불길한 낯설음을 프로이드는 '섬뜩함 (das Unheimliche)'이라고 부른다). 이 불안함은 뭘까? 그것은 무엇을 지시하는 것일까?

신혜선_cousin_디지털인화_68×99cm_2002

마지막으로 남은 코드는 정보성과 정보화 될 수 없는 것의 코드이다. 인물과 자연, 객관성과 표현성, 친숙함과 낯설음의 정보적인 코드를 통해서 신혜선의 사진이 지시하고자 하는 건 코드화 될 수 없는 것, 정보화 될 수 없는 어떤 것이다. 그 어떤 것은 항간에서 여러가지 이름으로 회자된다. 무의식적인 것 (das Verdraengte), 비장소적인 것 (das Atopische), 동일화 할 수 없는 것 (das Nichtidentische), 탈코드적인 것 (das Unkodierbare), 타자적인 것 (das Andere)... 분명한 건 라이프니쯔가 모나드론에서 '운명적 하모니'라고 이름 지었던 친화적 에너지 또한 그 어떤 것의 한 이름이라는 사실이다. 하지만 현대사회 속의 우리들에게 그 어떤 것은 더 이상 긍정적인 얼굴이 아니라 모종의 낯설음과 불안함으로 다가온다. 습관의 두꺼운 각질을 깨트리는 그 부정적 데자뷔 체험은 하모니 없이 단자화 된 오늘날의 소외된 삶을 되돌아보도록 요청한다. 그 되돌아봄의 어려움 - 아마도 그것이 신혜선의 사진 앞에서 느끼게 되는 방어의식과 불편함의 이유일 것이다. 그리고 신혜선의 단자적 사진이 후레임 밖의 무엇을 지시하고 있는지 역으로 말해주는 것 또한 다름아닌 그 방어적 불편함일 것이다. ■ 김진영

Vol.20050725c | 신혜선 사진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