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라한 사람들 2

박은태 회화展   2005_0812 ▶ 2005_0821

박은태_노숙자의 회상_장지에 아크릴채색_150×211cm_2004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000522a | 제1회 박은태 회화展 갑니다.

초대일시_2005_0812_금요일_06:00pm

혜화역 전시장 서울 종로구 명륜동4가 1번지 Tel. 011_9733_8703

전시를 준비하며… 첫 개인전을 하고나서 하루에도 몇 번씩 팜프렛을 만지작거리며 5년이 흘렀다. 나의 "초라한 사람들"은 지금도 현실에서 여전하고 나는 다시 같은 이름으로 전시를 준비하고 있다. 첫 전시의 전반적인 어두운 분위기를 벗어나지 못하고 다시 비슷한 그림을 내보일 수 밖에 없는 사정은 작가의 세계관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현실은 어려워도 따뜻하고 밝게 그릴 수도 있기도 하겠지만, 자칫 현실성과 비판적인 시각을 잃지 않을까 염려되기도 한다. 원래 구부러진 막대기를 바로 펴려면 반대편으로 더 세게 잡아 다녀야 하는 법이다.

박은태_짐꾼 아저씨_장지에 아크릴채색_149×186cm_2003

왜 혜화역이고, 서울역인가 하는 물음에 대한 답은, 나는 다른 경험을 한 사람은 그에 맞는 다른 방식의 사고와 실천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선택을 한 것이다. 우리 문화의 현실은 생산물과 소통 방식이 상품과 시장구조의 기준에 엄격히 적용 되고 있고 작품의 내용과 형식도 여기서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이런 논리 속에서 문화의 향유층도 자본의 편중에 따라 문화적인 교육과 여가가 결정되는 현실이다. 이런 현실 속에서 나의 이런 노력은 생뚱맞기만 한 것인가

박은태_고물장수 아저씨_장지에 아크릴채색_150×211cm_2003

나는 서울역 전시장에서 첫 개인전을 치르면서 예상했던 것 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얻었다. 내 그림의 주인공을 만날 수 있는 계기가 되었고, 그들의 반응은 나에게 이후 작업을 하는데 많은 용기와 힘이 되어 주었다. 내가 두 번째 같은 제목으로 이 전시를 기획 한 것도 이들에게 무언의 약속을 지키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서울역 전시장은 없어져 차선책으로 혜화역을 선택했다. 왜 서울 시내에 이런 초라한 사람이 우연히 그림과 만날 공간은 만들어지지 못하는 것일까? 내가 만약 인사동을 택했다면, 다른 특정 몇몇 애호가들만을 만날 수 밖에 없었을 것이고 같은 제목으로 두 번째 전시를 준비할 용기를 얻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그간의 노동 미술 활동에서 현장의 그들에게 그림을 갖고 찾아 다녔을 때 당시의 고무되고 흥분된 마음을 평생 잊지 못한다. 어쩌면 그건 나 자신을 찾아 가는 행위였는지 모른다

박은태_짜장면 배달_장지에 아크릴채색_170×100cm_2001

그림에 대하여「노숙자의 회상」 겨울이 끝날 무렵 화성 발안근처 간적이 있었는데 빈 농가가 많았다, 그 중 한 채는 벽 한가운데가 허물어진 있었는데, 그 구멍으로 들여다본 안채의 모습은 마치 집주인들이 살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을 갖게 했다. 실제 그 안으로 직접 들어가 보았을 때에는 먼지가 수북한 폐가가 된지 오래된 집이었지만, 난 그 집에서 유년기를 보낸 아이쯤을 주인공으로 삼아 그 아이가 어른이 되어 옛집 담 밑 따뜻한(?) 눈 위에 잠이 들어 꿈을 꾸게 만들고 싶었다. 「짐꾼 아저씨」 수원 남문 시장통 어귀 횡단보도에서 마주친 아저씨의 훵한 모습이 너무 강하게 가슴에 남아 작업실에 돌아와 에스키스 해두었다가 시작한 작업이다. 「고물장수 아저씨」 공장 다닐 때를 회상하여 그린 그림인데, 일하던 작업장과 폐철을 버리는 장소는 너른 공장 운동장을 가로질러 가야했다. 이 그림의 장면처럼 리어카에 폐철을 싣고 가면서 하루 중 유일하게 바깥풍경을 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나는 이 기억을 IMF이후 부쩍 늘어난 고물 줍는 아저씨의 모습을 보고 나의 모습을 오버랩 시켜보았다. 지금 우리 사회는 몇 십년의 노동 후에도 구조의 속성상 결국 도시의 빈민으로 전락하기 쉽상인 형편이다. 노년의 삶이 그리 안정적이지 않는 사회에서 저 노인은 살림살이를 리어카에 싣고 저승으로 가고 있다. 「짜장면 배달」 수원 영통지구에서 질주하는 오토바이 바구니 뒤의 곰 인형이 너무 인상적이어서 배달하는 그이의 심정과 연결 시켜보고 싶었다.

박은태_세일 50%(비정규직)_장지에 아크릴채색_186×65cm×4_2004

「종로3가에서」 그 장소에서 우연히 마주친 모습을 그려보았다. 노숙자의 반쯤 정신을 놓아버린 눈은 긴 터널 저편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반사유리 위에 그가 유년 시절 건넜을 듯한 징검다리를 그려주고 싶었다. 「따뜻한 가로등」 겨울날 노숙자들이 웅크리고 선잠을 자는 모습과 골목길을 걷다 골목안의 가로등이 너무 따뜻하게 느껴져 그이의 몸에 비춰주고 싶었다. 「작은 아버지」 만다라 형식 속에 작은 아버지가 평생을 거쳐온 직업들을 상징적으로 그려놓아 보았다. 「공장풍경」 시화공단에서 저녁노을에 스쳐간 이미지를 그려보았다. 「세일 50%」백화점이나 대형마트 앞에 세워져있는 등신대크기의 세일 광고판 고운 모델위에 세일 몇 %라 씌어져 있는 모습을 비정규직 노동자로 바꾸어 그려보았다.

박은태_80년대 이야기_장지에 아크릴채색_150×350cm_2005

「80년대 이야기」 5.6년 전에 고향에 내려 갔을때, 실로 오랜만에 근처 무위사에 들렸다. 난 그때 당시 우리 시대의 아미타래영도를 그려보겠노라고 에스키스 정도를 해두었다가 선뜻 들어가지는 못하고 망설이다가 올 해 들어 개인전에 내보일 욕심으로 무리한 시도를 하게 되었다. 이 도상은 다른 어떤 탱화와도 다른 특이한 양식을 갖고 있기도 했는데 그림을 다 완성해놓았을 때에는 작은 걸게 그림 같았다. 「새벽 출근」 안산에서 매일 새벽 같은 자리에서 마주쳤던 건물청소하는 아주머니들의 새벽출근 모습에 내 어머니 모습을 오버랩 시켜보았다. 「꿈속에 길을 잃다」 어느 날 어머님께서 몸살 앓으시고 꿈을 꾸셨는데, 당시 일 하시던 고층건물에서 길을 잃고 대걸레를 들고 한참을 헤매이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편치 않은 마음에 작업실에 돌아와 에스키스를 해두었다 한 작업이다. 「엄마 기다리는 아이」 방과 후 수업에서 아이들과 씨름하다 지쳐 퇴근하던 어느 날 근처 놀이터에서 혼자 그네 타던 아이의 모습이 내내 마음에서 떠나지 않았던 그림이다.

박은태_꿈에 본 고향_장지에 아크릴채색_150×195cm_2002

「몽당 빗자루」 언젠가 박경리 선생이 그의 글에서 거친 현실을 산 여자의 삶을 몽당 빗자루에 비유한 적이 있어, 내 어머니의 모습과 연결시켜 보았다. 「새벽 하늘」 수원의 옥탑 작업실은 유난히 난간이 높았다. 밤낮을 바꿔 사는 내 처지에 새벽하늘은 매일 보지만 비 개인 뒤의 하늘은 더욱 새롭다. 답답하지만 그리 절망적이지 않는 옥탑 생활과 하늘을 대비시켜보았다. 「빈 화분에 풀씨 날아와」 옥탑 작업실 옥상은 밝기보다는 어두운 편이었다. 구석에 놓인 빈 화분에 어느 날 서로 다른 풀씨가 날아와 꽤 그럴듯한 모습을 갖추어 가족을 이루어, 볼만하였다. 나중에 쥐도 그려 넣었주었다. 「꿈에 본 고향」 어느 날 한잔 하고나서 스쳐간 이미지를 그려보았다. 집짓는 일을 하는 일용노동자가 술 한잔하고 퇴근하면서 고향을 생각하는 모습이다. 「귀가」 새벽 인력시장에 나갔다 그냥 돌아오는 친구의 모습일까, 아니면 우리들의 귀가길인가? 터덜 터덜 시대의 긴 터널을 걷는다. 내가 5년 전에 이런류의 그림을 내놓았을 때만 해도 거대담론속의 이야기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요즘은 다양성의 일부로 취급되고 있는 현실이다. 나 자신이 그 논리에 나도 모르게 동조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땐 더 놀란다. 이 세계화라는 괴물 앞에 내 붓은 얼마나 더딘가. 나의 "초라한 사람들"의 작업 여정에 고통을 같이 해준 가족들께 죄송스런 마음과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그리고 늘 지켜봐주신 김남준선생님께 머리숙여 감사의 말씀드립니다. ■ 박은태

Vol.20050812a | 박은태 회화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