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ima Donna

한문순展 / HANMOONSOON / 韓文順 / photography   2005_0907 ▶ 2005_0913

한문순_primadonna_디지털 프린트_120×156cm_2004

초대일시 / 2005_0907_수요일_06:00pm

토포하우스 TOPOHAUS 서울 종로구 인사동11길 6(관훈동 184번지) Tel. +82.(0)2.734.7555 www.topohaus.com

정체성과 여성성 그리고 친화력 ● 한문순의 사진들은 셀프 포트레이트들이다. 더 자세히 말하자면 연극적 셀프 포트레이트들이다. 그녀는 사진 속에서 배우처럼 옷을 갈아입는다. 그러면서 다양한 직업과 생활 속의 여성들로 자신을 변주 시킨다. 그렇게 역할 연기를 보여주는 그녀의 사진들은 여러가지 관점에서 읽힐 수가 있다. 우선 그녀가 연기하는 여성들의 다양한 직업들이 경제 사회적인 차별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그것은 일견 여성 노동자들의 문제에 대해 비판적 시선을 보여주는 것 같다. 하지만 그러한 사회비판적 시선은 그녀가 평범한 생활 속의 여성들을 또한 보여줌으로써 자기 앞의 생을 당당히 담당하는 동시대의 여성들에 대한 긍정적 시선으로 바뀐다. 또는, 예컨대 수녀복을 입은 사진이 그러한데, 그녀의 사진들은 서로 다른 삶의 조건 속에서 살아가는 당대 여성들이 저마다 혼자 간직하지 않으면 안되는 내면의 내러티브를 침묵으로 들려주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그녀의 사진들은 어디까지나 셀프 포트레이트들이고 셀프 포트레이트는 그것이 어떤 표현방식을 취하든 궁극적으로 정체성의 문제를 제기한다. 한문순의 사진들도 정체성 그것도 여성적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제기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여성적 정체성이란 어떤 것일까?

한문순_primadonna_디지털 프린트_50×66cm_2004
한문순_primadonna_디지털 프린트_100×132cm_2005
한문순_primadonna_디지털 프린트_100×132cm_2004

좀 도식적이기는 하지만 정체성은 네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우선 '전통적 정체성 (Traditional Identity)'이 있다. 근대적 정체성이라고 부를 수도 있는 이 정체성은 누구나 알듯이 불변하는 에고, 자아라고 부르는 자기동일성을 전제로 한다. 두 번째는 '복제적 정체성(Reproductive Identity)'이다. 전통적 정체성과 대극적 관계에 있는 이 정체성을 전범적으로 보여주는 건 잘 알려진 A. 워홀의 'M. 몬로 시리즈'일 것이다. 이 작품은 소위 스타의 정체성이라는 것이 (여기서 스타는 물론 현대인의 동의어이기도 하다) 끊임없이 자기복제적 재생산물, 요컨대 원본 없는 허구의 재생산물임을 신랄하게 폭로한다. 이 대극적 양축 사이 어느 지점에 잘 알려진 C. 셔먼의 초기사진들이 있다. 여성적 정체성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본격적으로 제기하는 그녀의 'Untitled' 시리즈는 '복수적 정체성 (Plural Identity)'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즉 그녀에게 여성적 정체성이란 고정된 하나가 아니라 무수히 변주되는 다면체, 하나의 에고가 아니라 무수히 많은 에고의 표현이다. 마지막으로 J. 크리스테바가 '과정 속의 정체성 (Identity in Process)'이라고 부르는 유동적인 정체성이 있다. 그녀에게 여성적 정체성은 고정성과 고정성 사이 안에 부유하면서 존재하는 무정형적인 것이다. 그것은 남성적-권력적 담론의 결과물로서가 아니라 담론들과 담론들 사이를 떠다니면서 그 담론들의 그물코를 빠져나가는 정체성이다.

한문순_primadonna_디지털 프린트_120×156cm_2005
한문순_primadonna_디지털 프린트_100×132cm_2004
한문순_primadonna_디지털 프린트_100×132cm_2005

당연한 얘기지만 한문순의 사진들이 보여주는 여성적 정체성을 전통적인 그것과 일치 시킬 수는 없다. 만일 그랬다면 그녀는 자신의 고유한 에고를 적극적으로 주장하기 위해 역할 연기가 아니라 고전적인 셀프 포트레이트의 방식을 취했을테니까. 마찬가지로 복제적 정체성 또한 한문순의 여성적 정체성과는 무관하다. 그러기에는 그녀가 연기하는 역할들이 너무 다양하고 소박하고 또 진솔하다. 반면에 C. 셔먼의 여성적 정체성은 한문순의 그것과 매우 유사해 보인다. 특히 두 사람 모두 옷 갈아입기의 역할 연기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고자하는 방법에서 그렇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그 표면적 유사성 속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C. 셔먼이 역할 연기를 통해서 보여주는 여성적 정체성은 그 역할만큼이나 다양하지만 무수히 얼굴을 바꾸는 그 정체성들 속에 에고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녀가 보여주는 다양한 연기들은 에고의 해체라기보다는 오히려 에고의 변주 혹은 복수의 에고들을 보여준다. (W. 벨쉬, '심미적으로 사유하기'). 그러나 한문순의 역할 사진들 속에서 셔먼적 특별한 에고를 발견하기는 힘들다. 그녀의 에고는 단수도 복수도 아니다. 굳이 말하자면 그녀의 에고는 역할에 따라서 그때그때 태어나는 무정형적이고 비정체적인 어떤 것이다. 그래서 한문순의 정체성은 크리스테바의 유동적 정체성에 보다 더 가까워 보인다. 하지만 거기에도 차이가 있다. 크리스테바의 여성적 정체성이 대남성적 적극성을 띠는 것이라면 한문순의 사진들 속에서는 그러한 투쟁적 징후가 없다. 그렇다면 한문순이 역할 연기의 사진들을 통해서 보여주고자 하는 여성적 정체성이란 어떤 것일까?

한문순_primadonna_디지털 프린트_120×156cm_2004
한문순_primadonna_디지털 프린트_120×156cm_2005
한문순_primadonna_디지털 프린트_100×132cm_2005

나는 그것을 한문순의 사진적 지각방식에서 찾고 싶다. 그녀의 사진들에서 내 시선을 붙드는 건 옷 갈아입기의 변주를 통해서 제시되는 여성들의 다양한 모습들이 아니다. 그건 그 다양한 여성들을 프레임 공간 안으로 포착하는 한문순의 사진적 시선이다. 한문순의 사진들은 셀프 포트레이트이지만 동시에 풍경 사진이기도 하다. 그녀는 자신이 역할 연기를 하는 여성들을 셔먼과 달리 사진 공간의 특별한 주제로 삼는 것이 아니라 풍경으로 둘러싸고 껴안는다. 이 풍경은 그런데 예외적 순간의 풍경이 아니다. 그것은, 낚시터를 지나가는 익명의 남자를 통해서 은유되듯, 누구나 늘 만나지만 아무도 지각하지 않는 풍경이다. 어디서나 존재하지만 그 누구에게도 지각되지 않기 때문에 그 존재가 늘 부재의 그늘 속에 묻혀있는 범속한 순간의 풍경들 - 이 풍경들은 무엇을 은유하는 것일까? 내게는 그것이 한문순이 인식하고 있는 당대 여성들의 보편적 실존에 대한 은유인 것 같다. 그러나 더 중요한 건 그 풍경들이 인식에서 그치지 않고 사진적 실천으로 확장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풍경이 오브제들을 껴안듯 한문순의 사진들은 자신이 역할 연기를 하는 여성들을 애정으로 껴안는다 (그녀의 역할 연기는 그러한 애정의 또 다른 이름일 뿐이다). 이 애정이 또한 정체성의 표현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친화력적 정체성 (Identitaet in Wahlverwandtschaft)'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친화력은 내적인 동질성을 지니는 존재들이 서로를 알아보고 강하게 끌어당기는 생래적 결속력이다. 한문순의 사진들이 정체성의 문제를 제기한다면 타자와 나를 구분함으로써가 아니라 타자와 내가 하나임을 인식하는 그녀의 정체성은 이 생래적 결속력과 무관하지 않다. 그리고 자기의 에고를 타자들에게 투사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들 속에서 자신의 에고를 발견하는 이 친화력적 정체성을 우리는 여성성이라는 이름으로 바꾸어 불러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 김진영

Vol.20050903b | 한문순展 / HANMOONSOON / 韓文順 / photograph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