自生畵_스스로 자라는 그림

길현수 평면, 설치展   2005_0906 ▶︎ 2005_0915

길현수_自生畵-멍멍이_혼합재료_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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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5_0906_화요일_06:00pm

무심갤러리 충북 청주시 흥덕구 사창동 253-5 Tel. 043_268_0070 www.moosimgallery.co.kr

길 없는 길을 묻다 ● "존재의 모든 근원을 아득한 거리를 두고 개관하는 사유의 기호." 감히 단언컨데, 이 한줄의 문장으로 길현수의 모든 사유와 창작의 내밀한 욕망을 은유할 수 있을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그린다'는 행위는 세계의 인식과 지각되는 세계의 제상황으로부터 자신을 분리시킴으로써 하나의 상태로부터 또 다른 이질적 상태로의 이행과 변용으로부터 자신을 철저히 타자화하는 과정이다. 따라서 길현수는 경험의 추정된 조화나 통일성을 파괴함으로써 회화에 대한 지각작용을 관점과 판단으로부터 해방시키면서 자신의 미학적 목표를 획득하는 것이다. ● 선승의 손끝에서 던져져 달마의 형형한 눈을 뜨게 하는 점안의 순간처럼, 그의 손에 쥐어져 어느 순간! 존재의 단층을 향해 뿌려진 한줌의 먹은 궁륭의 우주를 자궁으로 삼아 시간의 태를 움켜쥐고 스스로 움을 틔우고 꿈틀대며 사유의 벽을 타고 흐르다가, 때로 솟구쳐 치솟으며 기개를 펼치며 자라나고 번식하다가, 때로 무위의 고요 속으로 침잠하며 느리게 바스려지고 무너져 내리며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면서 생명과 존재의 장관을 현현해 보인다.

길현수_自生畵-폭포_혼합재료_가변크기_2005
길현수_自生畵-폭포_혼합재료_가변크기_2005

존재의 낯선 변방을 캔버스로 삼아 연출되는 길현수의 「요소 설치작업」은 끊임없이 시각의 쾌락을 증폭시키며, 그러나 한편 인식의 종언을 선포하고, 더 이상 어떤 존재의 이미지의 복제나 차용이 아닌 존재하는 전체, 혹은 이미지 자체의 사유와 관조를 수행한다. 감각의 자궁 속에서 이성이 배태된 이율배반 속에서 그의 작품은 아름다운 혼돈을 거듭한다. 감상자를 탐미적 감수성에 몰입케 하면서도 철저히 거부하고, 풍요로운 아름다움을 지각케 하면서도 아무것도 판단할 수 없게 한다. 길현수는 이 '의도된 혼돈'에 대하여 들뢰즈를 인용한다. 즉 그에게 있어서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시간의 흐름일 뿐이며 생성, 상호작용들이거나 지각작용 전체이다. 각각의 지각작용이라는 사건은 오직 자신만의 세계로 열려있다. 이런 현실화된 세계를 넘어서서 다양한 지속들로 구성되는 잠재적인 전체가 존재한다.'_들뢰즈, 1989 ● 길현수의 「요소 설치작업」의 탁월함은 '낯선' 아름다움을 보여 준다는 데 있다. 그러나 이 일련의 작업들은 단지 회화적 방법론의 실험을 위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부정의 해체를 통해 자신만의 회화적 목표를 구현코자 하는 것이 궁극의 목표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 될 것이다. 담론과 추론, 실험이 충돌하고 있는 현대의 미술에 있어 길현수는 하나의 장, 한 에피스테메(인식틀)을 모색하고 있는 것이다. 시각과 회화의 담론과 향유에 있어 변증법적 방법을 모색함으로써 그는 "회화는 어떻게 존재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자신의 작업을 통해 하나의 길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길현수_自生畵-샘_혼합재료_가변설치_2005
길현수_自生畵-샘_혼합재료_가변설치_2005

그의 작업은 보는 행위, 그에 대한 인식, 표현과정과 결과 사이의 인식론적 추돌과 분리를 반복하여 드러내며 회화적 전통과 관습적 사유로부터 간과되었던 회화의 근원적인 난제들을 드러낸다. 그에게 이미지는 더 이상 세계를 서술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되지 않으며, 또한 '모더니즘 미술의 자립적 미학에 입각하여 그 자신만을 드러내기 위해 존재하지도 않는다'_뤽 타이만. ● 길현수가 일련의 「요소 설치작업」을 통해 제시하는 이미지의 서로 다른 층위들은 불가해한 기호적 요소로 분절되어 복잡한 수사과정을 거치면서 의미의 변주를 생산한다. 이를 통해 서구적 인식으로 가득찬 조형과 예술전반을 구성하는 고정관념으로부터의 무위의 자유를 획득한다. 회화는 관객의 눈으로 읽힌다. 회화의 공간은 관객의 시선이 계속해서 교차하는 장이다. 그러나 일반적인 회화적 이미지 텍스트에 비해서 길현수의 작업을 통하여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구성의 제한, 가치와 색의 분배에 제한되지 않고 자신들의 힘을 고갈시키지 않는 지각의 해방감이다. ● 자신이 선택한 질료의 물성이 갖는 독립적인 운동성을 이용하여 촉각적 경험을 유발하는 작업을 통해 길현수는 작가로서의 자신조차 철저히 배제하며 감상자의 몰입을 깨뜨리면서 존재의 고유한 운동성과 이미지에 대한 그만의 독특한 심미적 경험을 유발한다. 질료와 화면 자체의 물성이 환기시키는 순수한 시각적, 감각적 매력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화면이 다루는 물성의 섬뜩한 침묵이나 작가의 관조적인 거리감에 의해 이격되어 튕겨져 나온다. 그것들은 긍정적이든지 혹은 부정적으로든 탐미적이며 그러면서도 참혹하리만치 차갑다.

길현수_自生畵-이끼_혼합재료_가변설치_2005
길현수_自生畵_이끼_혼합재료_가변설치_2005

이미지와 기호의 범람으로 대변되는 오늘날 모든 것을 다 보여 주는 이미지와 매체 폭증의 문화현실은 오히려 개인의 판단력을 마비시키고 예술적 판단을 혼돈시키는 보이지 않는 권력으로서 작동하기도 하며 방향감각을 상실하게끔 몰아치는 어떤 거대한 변동의 일각을 형성하기도 한다. 우리는 새로운 매체와 상업주의적 대중문화 논리가 만연하여 진정한 그리기에 대한 탐구가 지속되기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 이러한 회화적 위기의 시대에 길현수가 보여 온 시각의 현대성이 가진 문제들로부터 출발한 반성적 태도는 매우 중요하며 의미심장하다. 시류에 편승하여 무조건적인 형식주의 미학의 거부나 무비판적인 포스트모던 양식의 차용, 그리고 자의식 없이 영상매체에 몰입하는 태도가 만연한 일련의 작가군들과 달리, 그의 작업은 그리기와 시각, 이미지의 창조와 소통의 문제를 통해 자기 작업의 화두로 붙잡은 인식론적 무게를 갖는 것이다. ● 벤야민은 예술이 "아름다운 가상의 제국"으로부터 벗어나 변혁될 수 있는 길을 카메라 옵스큐라에서 찾았지만, 길현수는 동일한 매체를 통해 바로 그 아름다움을 탐미적으로 구축함으로써도 예술은 변혁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예술사에 있어 심미적 역사의 중압감 속에서, 미술의 보통명사인 '회화'는 죽고 더 이상 충격적이지도 않은 회화의 종말 선고 속에서, 그는 그 내러티브의 종말로부터 다시 회화의 부활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 일찍이 바타유는 "철학은 철학을 부정할 때, 또는 철학에 대하여 조소를 던질 수 있을 때 비로소 가능하다고 갈파한 바 있다. 길현수는 자신의 작업을 통해 이렇게 웅변하는 듯이 보인다. '회화는 회화를 부정할 때, 또는 회화에 조소를 보낼 수 있을 때에 가능하다.'라고. ■ 장영신

Vol.20050910c | 길현수 평면, 설치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