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묵과 빛

김태완 사진展   2005_0921 ▶︎ 2005_0927

김태완_강원도-낙산사_흑백인화_50.8×61cm_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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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5_0921_수요일_06:00pm

관훈갤러리 서울시 종로구 관훈동 195 Tel. 02_733_6469 www.kwanhoongallery.com

먹과 빛 그리고 시간 ● 김태완의 사진들은 풍경사진들이다. 하지만 이 풍경들은 작가 자신의 눈으로 발견해서 포착한 풍경들이 아니다. 거기에는 오래 된 모델들이 있다. 한국 고유의 산수화라고 불리우는 진경산수화 (眞景山水畵)가 그것이다. 겸재 정선과 단원 김홍도로 대표되는 '진경산수화'는 중국 남종 문인화의 방작들인 관념산수화와는 미적으로 또 정신적으로 확연히 변별된다. 관념산수가 중국 문인화를 관념적으로 미적으로 모방한다면 진경산수는 먼 나라 화본 속의 풍경이 아니라 제나라의 실제풍경을 직접 찾아가 관찰하고 느낀 뒤에 그려진 사실주의적 산수화다. 때문에 진경산수화는 리얼리즘의 화풍뿐만 아니라 민족적 고유정서를 그 화풍의 주제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진경시(眞景詩)와 판소리 그리고 실학의 이념과도 맞닿는 정신의 높이를 평가받고 있다.

김태완_강원도-망향정_흑백인화_50.8×61cm_2005

그러나 우리가 지금 여기서 보는 것은 진경산수화가 아니다. 우리가 보는 것은 진경산수화 속의 풍경을 카메라로 다시 포착하고 재현한 김태완의 풍경사진들이다. 진경산수의 화본을 따라 그 실경들을 카메라로 재현하려는 김태완의 노력은 산수화 속 풍경들의 장소를 직접 찾아가는 부지런한 발품에서 끝나지 않는다. 그는 그렇게 찾아가서 만난 풍경들을 진경산수화 고유의 부감법(俯瞰法)과 구도에 정확히 부합시켜 재현하려고 한다. 그가 목적하는 것은 진경산수를 모델로 삼아 그 풍경들에 대한 자신의 메타적 시각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그가 목적하는 것은 그야말로 옛 장인들이 붓과 먹으로 그려놓은 풍경들을 빛과 필름으로 다시 한번 바꾸어 그리고자 하는 것이다. 얼핏 생각하면 그러한 그의 작업은 무용한 도로(徒勞)처럼만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럴까? 똑같은 대상도 매체가 바뀌면 당연히 얼굴이 달라진다. 옛 진경산수화와 그것을 정확히 재현한 김태완의 사진들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김태완이 보여주고 싶어 하는 것 그리고 우리가 그의 풍경사진들 속에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진경산수화 자체가 아니라 다름아닌 이 차이인 것 같다. 그렇다면 이 차이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는 것일까?

김태완_강원도-속초_흑백인화_50.8×61cm_2005

우선 진경산수화와 그것을 재현한 풍경사진 사이의 차이는 진경산수화 자체에 대한 실질적 이해를 도와준다. 즉 우리는 아직 회화화 되지 않은 실경을 보여주는 김태완의 사진들과 진경산수화본들을 비교 관찰 하면서 진경산수화의 고유하고 다양한 화법들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가 있다. 나무를 그리는 수지법(樹枝法), 바위를 그리는 암석법(巖石法), 물결을 그리는 수파묘법(水波描法) 그리고 산의 주름을 잡는 독특한 준법(皴 法)등등 진경산수에 응용된 다양한 기법들이 어떻게 실경을 회화로 바꾸어 보여주는지를 스스로 경험할 수가 있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건 유사한 기법을 사용하면서도 전혀 다른 화풍을 보여주었던 진경산수화의 두 대가 - 겸재 정선과 단원 김홍도의 명백한 차이 또한 김태완의 사진들을 통해서 확인할 수가 있다는 사실이다. 같은 풍경을 두고도 겸재와 단원이 얼마나 상이한 그림을 그렸는지는 잘 알려져 있다. 주관성과 표현성이 뚜렷한 겸재의 그림과 기록성과 객관성에 충실했던 단원의 그림들 사이에는 분명 하나의 장르로 통합할 수 없는 간극이 있다. 그러나 김태완의 실경사진들을 통해서 우리는 그 화풍의 간극이 진경산수화라는 하나의 장르 속으로 어떻게 무리없이 통합될 수 있는지를 이해하게 된다.

김태완_강원도-월송정_흑백인화_50.8×61cm_2005

김태완의 사진들이 보여주는 건 상이한 두 회화의 동일한 소재가 되었던, 요컨데 풍경의 원본들이다. 그 원본들은 실경이 어떻게 상이한 회화작품들로 재현되었는지를 추론할 수 있게 만든다. 그리고 겸재와 단원의 차이 - 주관성과 객관성, 표현성과 기록성의 차이가 사실은 양극적 대립이 아니라 상호보완적 공존의 문제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즉 우리는 김태완의 사진들이 보여주는 풍경의 원본을 통해서 비록 표현의지가 돌출하지만 겸재의 그림들은 실경에 대한 기록성을 전제로 하고 있으며 아무리 객관적이어도 단원의 그림들 속에는 주관적 표현성이 또한 전제되어 있다는 걸 쉽게 깨닫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깨달음은 실경의 리얼리즘적 기록을 전제로 하지만 동시에 작가의 주관적 표현성을 마찬가지로 중요시 했던 진경산수화의 장르적 특성을 동시에 이해하게 만든다. 하지만 그러한 양면성이 진경산수화만의 특성일까? 그러한 양면성은 오히려 사진이라는 매체에게 더 본질적인 특성이 아닐까? 사진은 생래적으로 기록적이고 객관적인 매체다. 그러나 혹은 바로 그렇기 때문에 사진은 또한 주관성과 표현성을 떠날 수가 없다. 우리는 여기서 다큐멘터리 사진/ 예술 사진이라는 오래된 이분법의 허위를 새삼 인식하면서 묘하게도 진경산수화와 사진 사이에는 매체의 차이를 넘어 공집합 영역이 존재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김태완_강원도-죽서루_흑백인화_50.8×61cm_2005

그러나 진경산수화본들과 그것을 재현하는 김태완의 실경사진들을 비교 관찰하면서 우리가 확인하게 되는 것은 상이한 매체들이 서로의 차이 속에서 공유하는 미적인 문제만이 아니다. 수백년 전 그려진 옛 그림의 풍경들을 다시 찾아가 그 풍경들을 오늘 여기의 빛으로 재현한 김태완의 사진들을 통해서 우리가 보다 직접적으로 경험하게 되는 건 다름아닌 시간성의 문제이다. 진경산수화들과 김태완의 사진들 사이에는 똑같은 풍경 위로 그동안 흘러간 세월들이 존재한다. 이 시간의 존재감은 아무리 화본을 모델로 삼아 사진을 찍어도 다시는 복원할 수 없도록 그 사이에 변형되고 사라져 버린 옛 풍경의 디테일들 속에서 확연히 경험된다. 그러나 그 무상한 시간의 경험이 두 번 다시 재현할 수 없는 옛 풍경의 디테일들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옛 그림과 그것을 다시 보여주는 현재의 사진 사이에서 우리가 몸으로 경험하는 건 오히려 우리들 자신의 시간적 존재성이다. 김태완의 사진들이 먹으로 그려진 과거의 풍경을 굳이 오늘의 빛으로 다시 한 번 재현하면서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도 다름아닌 우리들 모두의 이 시간적 존재성에 대한 환기일 것이다. ■ 김진영

Vol.20050918b | 김태완 사진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