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 높이 아름답게

신기운 개인展   2005_0921 ▶︎ 2005_1002

신기운_하늘높이 아름답게_가변설치_2005 / 한국금융연수원 KB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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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5_0921_수요일_05:00pm

후원_서울 문화 재단_한국 문화예술진흥원

스페이스 셀 서울 종로구 삼청동 25-9번지 Tel. 02_732_8145 www.spacecell.co.kr

욕망하는 예술과 사물의 처형(處刑) ● 1. 조각가로서 신기운의 태도는 급진적(radical)이다. 그의 부정이 예술의 근원적인 존재방식까지 문제삼기 때문이다. 우선 뭔가를 생산한다는 예술의 전제에 쉽사리 귀속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렇다. 한 동안 작가는 아예 아무 것도 만들어내지 않았다. 그 자체로 이미 충분히 도발이지만, 작가는 한 발 더 나가 사물의 소멸에 전념해 왔다! 세우고 구성하고 생산하는 대신, 부수고, 파손하고 갈아 없애 온 것이다. 현존 대신 부재를 확장시켜 온 것이다. 사물들은 작가가 고안한 일종의 '사물제거장치(object terminating tool)'에 의해 서서히, 그러나 철저하게 갈리면서 제거의 과정에 회부되곤 했다. 그것은 사물로부터 존재기반을 후퇴시키고, 정체성과 신체를 동시에 박탈해 가는 과정이다. 그렇더라도, 복수는 일례를 들자면 「엣센스 영한사전」이나 「성문종합영어」같은, 어떤 사물들에만 선별적으로 가해진다. 2004년에 있었던 퍼포먼스 「A korean luggage」에서 신기운은 숱한 영어교재들을 무겁게 등짐지고 있는 한 한국인의 모습으로 등장했었다. 그 때, 영어는 글로벌시대를 사는 한국인의 운명에 드리워진 피할 수 없는 형벌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그것은 알타이어계의 언어를 사용하는 작은 나라에서 새로운 권력, 새로운 계급체계를 신속하게 구축함으로써 그렇게 작용했다.

신기운_Approache the TRUTH-성문종합영어_가변설치_2005
신기운_Approache the TRUTH-초등학교 바른생활 1-2_DVD_00:01:00_2005

르네 지라르(Rene Girard)의 '미메시스 이론'을 따르면, 영어에 대한 우리의 관계는 실로 모방적이고, 따라서 욕망적이고 억압적이다. 비록 그것이 은폐되어 잘 드러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진정 우리의 욕망은 영어를 잘 말하는 사람들, 즉 '화이트-네이티브(white-native)'을 닮고-모방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문제는 욕망이 아니라 욕망의 상실이다. 즉, 우리는 결코 네이티브처럼 될 수 없다는 사실 말이다. 원정출산을 해도, 혀의 일부를 외과적으로 절개해내도 달라질 것은 없다. 결국 우리의 모방욕망은 언제나 상실과 좌초라는 정해진 경로를 따라 지루한 여정을 지속해나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안정기엔 이것이 소위 식민지풍의 문화를 형성한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그럴 순 없다는 게 지라르의 지론이다. 그를 따르면, 모방 욕망의 지속적인 좌초는 결국 폭력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이는 신기운의 '갈아 없애기'에 잠재되어 있는 폭력성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한 단서를 제공할 수 있다. 대체 사물들에 그토록 가혹한 심판을 내리게 되는 동기는 무엇인가? 작가를 따르면, 이 갈아 없애기의 의미, 곧 '사물에 대한 복수', 사물의 처형, 사물의 박탈은 관용어구 '갈아 없애도 시원찮은...'에서 유래한 것이다. 원망과 증오, 분노가 그 저변에 깔린 정서라는 말이다. 좌초된 모방욕망, 즉, 결코 도달할 수 없는 대상의 모방이 초래한 좌절이 사물을 분쇄시키는 에너지인 것이다.

신기운_Approache the TRUTH-SKY im-6100 핸드폰_DVD_00:01:00_2005
신기운_Approache the TRUTH-컴퓨터키보드_가변설치_2005

2. 최근 신기운은 가로 2 m가 넘는 거대한 화폐를 비롯해, 여러 개의 화폐를 만들어내고 있다. 그럼에도, 즉 이전과는 달리 어떻든 뭔가를 만든다는 것이 신기운의 태도를 덜 급진적인 것으로 재정의할 만 한 단서인지는 분명치 않다. 왜냐하면 그가 예술품을 만드는 것인지, 아니면 '반(反)-예술품'을 만들므로써 예술의 순수영역을 계속 더럽히고 있는 것인지 분명치 않기 때문이다. 신기운의 세계는 '나도 작업으로 먹고살고 싶다'고 외침으로써, 즉 예술에 대한 '정상적인(?)' 욕구를 치기어린 욕망의 수준으로 등치시킴으로써 결과적으로 여전히 예술의 능멸에 가담하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신기운의 케챱이나 간장으로 그려진 화폐의 문제제기를 '예술은 곧 돈이다' 라는 식으로 툭 내뱉곤 했던 요셉 보이스(Joseph Beuys)의 방식으로 포괄하지는 말기로 하자. 그것은 너무 선동적이고, 식상하게도 허풍스런 구도자의 인상을 풍기거나, 진지한 척 하는 예술사회학자의 웅변술을 떠올리게 할 뿐이다. 오늘날 눈귀를 틀어막은 바보를 제외하면 누군들 그 위악스러운 사실을 모르랴! 문제는 거창하게 사회와 시대를 구술하는 구도자가 아니라, 자신의 손바닥만한 실존 안에서 가련하게도 버둥거리는 한 개인이다. 일테면, 만 원권 지폐 앞에서 '예술은 무엇인가'를 점잖게 묻다가 그 품위있는 질문의 온기가 채 가시기도 전에 '나도 작업으로 먹고살고 싶다'고 외쳐대는 한 개인 말이다. 신기운은 이 문제를 전적으로 자신의 의식과 실존의 문제로 끌어안음으로서, 수잔 K. 랭거(Susanne K. Langer)의 '예술은 무엇인가'에 전복적으로 답한다. 신기운이 만든-창작한- 만 원권 지폐 그 어디에도 플로베르(Gustave Flaubert)가 "이데아의 표현"이라고 불렀던 것 같은 고상한 내적 가치는 목격되지 않는다. 대체 이 '뻔뻔스러운' 표면 어디에서 로저 프라이(Roger E. Fry)가 언급했던 '시각의 정상적인 이용'이 경험될 것인가? 수잔 k. 랭거가 '창작의 정당성'으로 뭉뚱그리려 했던 어떤 개념도 설 자리가 없다. 신기운의 세계에서는 실생활의 복잡한 요인들로부터 감각적인 요인만을 선별해내는 가장 확고한 방식인 '순전한 비전'이 치명타를 입는다. 1달러짜리 지폐도 예외가 아니다. 여기서도 "우리 앞에 갑자기 나타나는 것에서 표현되는 단일성(통일성), 유기적인 완전성, 발달, 성장...." 같은 유토피아는 언감생신이다. 사실 예술은 이제 더 이상 우리 앞에 갑자기 나타나는 대신, 온갖 거만한 권력들을 동반한 채 거드름을 피우면서 접근해 온다. 통일성이나 유기적인 완전성 같은 케케묵은 덕목들 대신, 어떤 것들은 도색잡지로부터, 다른 것들은 천한 정치논쟁이나 어수룩한 미래학에서 마구잡이로 인용해대면서 말이다. 수잔 K. 랭거의 용어들은 더 이상 예술의 알리바이가 될 수 없다!

신기운_미국헌법_2004년판_분쇄된 책에 케찹으로 채색_100×240cm_2005
신기운_예술이란 무엇인가_간장, 커피_230×115×1cm_2004

작가는 수잔 K. 랭거의 텍스트와 용어들을 갈아 없앤 다음, 그 부스러기들을 만 원권 지폐로 환생시킴으로써 이번에는 예술에 더욱 가혹한 보복을 가한다. 그러므로, 신기운은 여전히 어떤 사물도 만들어내지 않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가 만드는 화폐들은 사물이라기보다는 하나의 개념, 하나의 지평, 즉 하나의 경계이다. 예술의 처형과 변질된 예술의 환생 사이의, 아니면 창작의 욕망과 생존의 욕망 사이의 경계! 그리고도 예술작품과 화폐, 즉 이데아의 현현과 세속의 침투 사이의 경계, 환상의 실패와 일상의 승리 사이의 경계.... ● 신기운은 예술의 제반 문제를 욕망의 차원으로 정렬시키고, 개인의 문제로 안착시킨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의 시야를 뿌옇게 만드는 인식론의 사기술들을 어렵지 않게 통과하고, 단번에 사변가나 이론가들로선 넘보지 못 할 통쾌한 작가적 성찰에 도달한다. 일테면, 우리 모두에게도 갈아내고 싶거나, 갈아내야만 하는 많은 사물과 이미지들이 있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자신의 진정한 실존의 채로 쳐내야 할 부유하는 이론들의 숱한 허위... 어떻게 이토록 정확하게 함축해낼 수 있을까? 이것은 매우 특별한, 짜릿하고 자극적인 경험이다. ■ 심상용

Vol.20050923a | 신기운 개인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