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oes for Art

김혜련 회화展   2005_1026 ▶︎ 2005_1204

김혜련_신발을 벗으며 (노랑, 주황, 파랑, 하늘) 4부작_캔버스에 유채_200×200cm×4_2005_전시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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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5_1025_수요일_05:00pm

주최_베를린 시립 미술관 후원_한국문예진흥원 / 협찬_미하엘 슐츠 갤러리

베를린 시립 미술관 Ephraim-Palais Stiftung Stadtmuseum Berlin, Landesmuseum fu"r Kultur und Geschichte Berlins, Stiftung o"ffentlichen Rechts, Direktion und Verwaltung, Poststraße 13-14, D-10178 Berlin-Mitte Tel. 49_30_24002_150 www.ephraim-palais.de

Museum Ephraim-Palais ● 동베를린 시내 중심지에 위치하고 있는 베를린 시립미술관(Stadtmuseum Berlin) 에프라임-팔레(Museum Ephraim-Palais)는 "베를린의 가장 아름다운 모퉁이"라는 별명을 가진 건물이다. 유대인 은행가에 의해서 건축되었다는 이유로 1936년 나찌 시대에 '새로운 베를린'을 건설한다는 명목 하에 파괴되었지만 1985-1987년 재건되어 베를린 시립미술관 소속이 되었다. 로코코 양식의 금장 발코니와 얇은 토스카니 스타일의 기둥을 자랑하고 있는 이 궁전은 전쟁이전 베를린시의 위용을 보여주는 풍부한 건축 자료이기도 하다. 포스트 아방가르드 이후 회화강국으로 부상한 독일의 최대도시 베를린의 이 유서 깊은 문화공간에서 2005년 10월26일에서 12월4일까지 김혜련의 최근 회화작품이 대규모로 소개된다. 이 초대 개인전은 한국이 2005년 10월 프랑크푸르트 국제도서전 주빈국이 된 것은 계기로 베를린 시가 한국 문화예술을 소개하려는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기획하였다. ● 이 번 작품들은 작가가 국립현대미술관 소속 창동 스튜디오에서 2004 여름부터 일 년 간 심혈을 기울여 제작한 캔버스 작업들이다. 독일의 비평가들은 김혜련 작업에 담겨진 새로운 회화의 가능성과 내재적인 힘에 일찍이 주목하고 있었다. 미술평론가이자 「Die Welt」 誌의 편집위원장인 게르하르트 찰스 룸프(Gerhard Charles Rump)박사는 작가가 "동양과 서양의 회화 정신의 가교"를 놓고 있어 마르크 로드코에 비견할 만한 회화적인 "순수함의 정수(spirit of purity)"가 담겨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이 번 베를린 에프라임-팔레에 전시될 "예술을 위한 신발" 연작들에서 작가는 우리 전통 신발인 당혜 또는 고무신을 연상시키는 형태를 대형 캔버스 위에 다양하게 변주시켜 그렸다. 작품 속에서 신발은 '배'의 형태를 닮아있는데 존재의 현존과 부재를 떠올리는 신발은 결국 '떠남과 이별'을 의미한다.

김혜련_어떤 꿈, 3부작_캔버스에 유채_227.3×545.4cm_2005_전시풍경

작가는 이 번 연작들에서 '동양과 서양의 회화 정신'에 대한 철학적, 방법론적인 탐구를 전개시키고 있다. 소박하고 힘찬 윤곽선의 신발은 그림의 주인공이면서 동시에 또 다른 주인공을 등장시키는 소개자이기도 하다. 또 다른 주인공은 다름 아닌 화면의 배경이다. '배'를 의태하는 신발들이 놓여있는 공간은 색채로 가득 찬 공간이다. 채도와 명도가 다른 다양한 색의 뉘앙스를 담고 있는 화면을 더욱 풍부하게 만들어 주는 것은 바로 붓의 움직임(속도)이다. 이런 붓질의 움직임은 동양화의 작법중의 하나인 '골법용필'이라는 용어와 관련이 있다. 이것은 붓질이 단지 손끝에서 이루어지는 잔재주가 아니라 온몸의 움직임과 감정의 상태가 표현되는 경지를 의미한다. 붓이라는 도구가 작가의 영혼의 연장(延長)이 되는 것은 작가가 서양적인 매제를 동양적인 정신 속에서 녹여 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 대작 「여덟 번의 이별 연습」과 「신발을 벗으며」에서는 수묵화의 농담을 유채에 적용하여 기름으로 유화가 번지는 효과를 통해서 색채의 다양한 변주를 극대화시키고 있다. 작품들에서 흘러내린 유화 물감은 두텁게 발라진 작품들과는 다른 독특한 질감의 표면을 만들어 내어 유화가 가진 새로운 물성을 드러내준다. 기름이 많이 섞인 묽은 농도의 유화는 천천히 마르면서 작가가 의도를 넘어선 자율적인 흐름을 캔버스에 남기고 있다. 이를 통해 색채는 단순한 채도와 명도의 차이를 넘어선 투명함과 불투명함이라는 정신적인 오묘함을 얻게 된다. ● 캔버스 위에 먹으로 그린 「이별」은 가로 세로 40cm 크기의 캔버스 36개를 연결시킨 작품으로 직접적으로 동양화의 매제와 서양화의 매제를 혼합한 실험적인 작품이다. 화선지에 스며들 듯이 먹은 캔버스 위에 스며들면서 화선지에서는 맛볼 수 없는 번짐과 견고함을 느끼게 해준다. 매제의 선택에 있어서 전통적이지만 그 사용에 있어서 지극히 현대적인 그의 작품은 총 54점이 출품되어 에프라임 팔레를 더욱 빛나는 공간으로 만들 것이다. ■ 이진숙

신발에서 배로 :김혜련 최근 회화 연작에 대한 비평 ● 우리가 바라보는 모든 것들이 형태와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예술에 있어서의 모든 경험은 형태적(formal)이다. 예를 들어 색채 경험을 말할 때에도 색채의 외곽을 설정하는 형태이든, 색채로 구성되어지는 형태이든 간에 이것은 어떤 모양들(shapes)과 연결되어 있다. 이러한 색채 경험은 바네트 뉴만(Barnett Newman) 작품에서처럼 "경계 없는(boundless)" 형태가 되기도 하고 세르게 폴리아코프(Serge Poliakoff)에서처럼 한정된 형태가 되기도 한다. 우리는 예술에 있어서 심지어 어떤 태도(attitudes)조차 형태화한다는 것은 잘 알 지 않는가? ("When attitudes become form"). 이러한 논쟁을 우리는 살짝 비켜갈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치러야 할 대가는 그대로이다. 내적인 것이든 외적인 것이든, 실제의 것이든 상상의 것이든 간에, 만약 세계 경험이 어떤 방식으로든 이미 형태가 아니라면 이 경험은 결코 형태화 되어질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더구나 잘 알고 있다. 형태들(forms), 혹자는 이것을 모양들(shapes)이라고 부를 수 있겠는데, 우리의 지각 시스템 중 게슈탈트(Gestalt)원칙에 상응하는 것이다. 연상 작용이 강한, 예술가가 약간의 변주를 통해 변형시키기 전에는 스스로 따를 수밖에 없는 그 자신만의 고유한 문법의 원칙 말이다. ● 이것이 바로 김혜련이, 그것도 아주 확실하게, 그녀의 회화 연작 "예술을 위한 신발"에서 이루어놓은 일이다. 작가는 자신의 초기 작품에 적용시켰던 유효한 원칙들을 충실하게 따르면서도 동시에 그것들을 한층 더 발전시켰다. 작가는 시각적 세계를 탐구하고 있으나 보이는 외양의 얇은 표피가 아닌 심층으로 파고들었다; 그녀에게 있어 조형적 형태/조형 형태로서의 형태란 사물의 외양과, 캔버스 위의 형상과, 색채 또는 색채공간과 같은 비 형태적 측면의 지속적인 대결상태를 의미한다. 그리고 여기에 또한 상징주의의 비밀스런 주문이 추가된다. 작가는 선명하게, 때때로 매우 용감하게 결정적인 형상을 만들어 놓는다. 윤곽선을 통해 주어진 형상들은 조심스럽게 뭉개지기도 하는데 마치 회화가 실제의 세계와 평행한, 그 자신의 법칙, 미학적 경험의 법칙을 펼쳐 보이는, 또 하나의 세계를 이루고 있는 듯, 그렇게 보인다. 우리는 이것들을 그림의(pictorial) 형태에 관한 법칙이라고 부를 수 있겠다.

김혜련_여덟 번의 이별연습, 8부작_캔버스에 유채_259×800cm_2005_전시풍경

이 모든 것들은 작가의 회화 연작 "예술을 위한 신발"을 감상함에 그대로 적용될 것이다. 이 작품들에서 작가는 물론 반복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변주를 하고 있다. 다소 큰 크기(194 x 259 cm) 인 프러시안 블루에 흰 선이 그려져 있는 작품을 보면 마르지 않은 파란 부분에 흰 선이 섞여져 흰 선이 점차 하늘색으로 변해간다. 이런 기법은 선적인 성질을 갖고 있지만 동시에 회화적 성질을 갖는 요소로 선들을 변화시켜 선들을 소위 "선이 아닌 (non-linear)요소로 전환시키고 있다. 윤곽선들은 이 때 한국의 전통 신발들을 우리에게 상기시켜주고 있다. 하지만 그림에는 비어있는 공간을 암시하는 윤곽선 바로 아래 평행으로 약간 밝은 파란색 부분이 등장한다. 비유적으로 표현하자면 우리는 이 공간 속으로 살짝 미끄러져 들어갈 것 같다. ● 2005년 작인 이 신발 그림들에서 작가는 이전 작품, 특히 2000년도 정물화 연작에서 발전시켰던 조형적 전략을 대형 화면으로 전이시켰다. 그리고 그 성과는 매우 좋다. 작은 크기의 정물화 연작에서는 소재들이 그려진 형태로 돌출되어 보였다. 자유롭게 선택되어진 색채로부터 대상의 견고함이 생겨났고 동시에 캔버스의 내부 공간은 구획되어졌고 눈에 띄는 깊이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뒤에 있는 것 같은 사물이 앞으로 등장하고 앞에 있어야 할 것 같은 사물들이 뒤 쪽으로 밀려나 있었다. 그리고 또한 그래픽적인 선이 아닌, 회화적으로 그려진, 두텁고 진한 윤곽선 안으로 색채들이 또 다른 이야기를 펼쳐내고 있음을 목격하게 된다. 공간이나 경험, 이 모두의 상투적인 영역과 차원을 거스르는, 일상적 경험을 거스르는 작용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즉 선들이 회화가 되고, 따라서 공간, 볼륨, 형태를 재 정의하게 만든다. 김혜련은 새 작품들에서 선에 집중하고 있는데, 이 선들은 우리 마음의 형태 저장고의 내용에 상응하여 신발이라는 이미지를 만들어내고 있지만 동시에 그 선들의 자율성을 전혀 잃지 않고 있다.

김혜련_이별_캔버스에 먹_각 40x40cm×36, 전체 240×240cm_2004

새 작품에서도 역시 사물들은 일종의 견고함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캔버스의 물리적 크기보다 더 큰 공간으로 여겨지는, 어떤 공간 속에 자유로이 떠다니고 있는 듯이 보인다. 왜냐하면 우리가 화면에서 보고 있는 신발은 단지 파편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배경은 무한한 것으로 확장된다. 이것은 다시금 선과 색이라는 미학적 요소의 자율성을 지탱시키고 있다. 그러나 이 두 가지는 확실히 형태를 가지고 있다. ● 삼면화를 포함해서 8미터 폭에 2.59 미터 높이의 다폭화에 이르기까지 커다란 크기의 유화작품들을 보고 있으면 우리 마음의 형태 저장고에서는 활발한 활동이 일어난다. 삼면화에서는 신발 한 켤레가, 각각 나란히, 그러나 약간의 사선 각도로 그려져 있다. 이제 압도적으로 큰 크기도 아니며 파편적으로 보이는 신발 형태도 아니다. 적당하지만 캔버스 크기에 비하면 오히려 어느 정도 작아 보이는 신발이다. 이것은 캔버스 위 약간 왼쪽에 있는, 한 짝의, 작은, 고립된, 외롭게 떠다니는 신발들을 그린 다폭화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여기서 우리가 읽어내는 이미지는 바로 배, 선박 그것이다. ● 배와 신발 사이에는 형태적으로나 기능적으로 물론 유사성이 있다, 특히 한국-또는 일반적으로 아시아-의 배와 신발에서는. 더구나 이 작품에서 그 유사성은 너무나 명확하여 더 부연 설명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이런 유사성을 매개로 형태적인 면에서나 회화적인 의미에서 강렬한 인상을 주는 그림들을 만들어냈다는 점 외에도 -무엇보다도 이 그림들은 미학적인 섬세함으로 가득 차 있어 서구인에게나 동양인에게나 모두에게 매력적인 호소력을 가지고 있는데- 김혜련의 작품은 또한 상징적 차원의 문을 열어 더 많은 내용들을 선사해주고 있다. 그리고 이 상징적 차원의 내용은 또한 서구인에게나 동양인에게나 모두 유효하다. 서양 미술사에서 배는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Caspar David Friedrich) 작품의 예처럼 인생의 항해를 상징화하고 있다. 그리고 그리스 신화에는 죽은 자가 샤론이라는 사공의 배에 실려 스틱스(Styx)강을 건너 저승세계인 헤디스(Hades)로 가게 된다는 이야기가 있다. 또한 우리는 "요르단 강을 건넌다." 라는 표현이 죽음을 말하고 있는 것을 익히 알고 있다. 영혼을 영원한 세계로 인도해주는 수단으로서의 배, 이러한 상징체계는 동양인에게 친숙한 이미지이겠지만 서구인의 의식에도 이에 상응하는 호소력이 있다. ● 신은 걷기 위해 만들어진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인생의 여정을 걸어가고 있다. 실제로도, 또한 은유적으로도 역시. 그리고 우리 모두는 언젠가 신발을 벗고 인생 너머 마지막 여정을 떠나야 할 순간을 맞게 될 것이다. 문 앞에 신발을 벗어놓아야 하며, 남겨진 신발의 모습은 우리가 이제 처하게 될 마지막 여행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과일 잼 같은 하늘 아래 오렌지 나무 옆으로 배를 타고 강을 건너고 있을 것을 생각해 보자.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 강을 다 건너기 전에는 사공에게 우리가 지불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예술은 남을 것이다. 그것도 우리 자신보다 더욱 위대한 방식으로. ● 이런 것들에 대해 이 그림들은, 조용히, 회화적으로, 예술적으로 말하고 있다. 모든 위대한 예술들이 그러했듯이_2005 ■ 게하르트 차알스 룸프

관련 링크 ● 베를린 시립 미술관 ● 미술창작 스튜디오 - 창동&고양 ● 학고재(소격동) ● 색(色)의 바다를 건너는 배_글쓴이 이진숙

Vol.20051011a | 김혜련 회화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