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본다 - 자라다

안재홍展 / ANJAEHONG / 安在洪 / sculpture   2005_1019 ▶︎ 2005_1127

안재홍_나를 본다 - 자라다_전시전경_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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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_1019 ▶︎ 2005_1025

갤러리 큐브 서울 종로구 관훈동 37 수도약국 2층 Tel. 02_720_7910

2005_1029 ▶︎ 2005_1127 초대일시_2005_1029_토요일_05:00pm

제비울 미술관 경기도 과천시 갈현동 산 38-1 02_3679_0011 www.jebiwool.org

'조각의 돌'에서 나를 보다 - 자기 서사의 구축미학, 안재홍의 '자라다' ● 안재홍, 그의 조각은 사람의 외적 형상성에서 '몸'의 내적 구조에 대한 성찰로 전환되고 있다. 나무가 뿌리를 내리고 자라듯 그의 조각에 대한 시선도 자랐다. 구리선 뭉치에서 볼 수 있었던 짚과 풀의 느낌은 사라지고 작은 가지들이 등장한다. '덩어리'를 묶는 방식이 아닌 자라고 번식하는 식이다. 몸의 내부가 나무로, 숲으로 치환되면서 '억압'의 굴레를 벗고 완전한 '자아'로의 탈아(脫我)적 힘을 획득한다. 이제 그의 '사람'들은 일어나 걷는다. 땅으로부터, 벽으로부터 독립해 투명한 유영의 숲이 된다. 이 변화의 힘은 어디에서 오는가.

안재홍_나를 본다 - 자라다_구리선_42×47cm_2005

」자아의 신화」와 조각적 통섭 ● 파울로 코엘료는 『연금술사』에서 」나」를 찾는 것이란 '자아의 신화'를 찾아 떠나는 여행이라 말한다. 이 여행에서 또한 반드시 찾기를 소망하는 것이 '철학자의 돌'이다. 코엘료의 이야기에서 철학자의 돌은 자아의 신화를 이루어 가는 여정 자체이며, 또한 이 돌은 만물과 통하는 우주의 언어를 꿰뚫어 궁극의 '하나'에 이르는 길, 각자의 참된 운명, 즉 자아의 신화를 사는 것으로서 은유된다. 돌이 들려주는 소리는 "사람은 무언가를 진심으로 바랄 때 만물의 정기에 가까워지는 거야. 그것이야말로 궁극의 힘이지."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철학자의 돌에서 '아프락사스의 돌(abraxas stone)'을 연상하게 된다. 아프락사스의 돌은 로마가 멸망해갈 당시 병에 걸리지 않기 위해 주문을 외던 'abracadabra'란 주문과 함께 사용했던 돌이다. 돌은 재앙에 맞서서 '나'를 보호하는 호신의 상징이지만, 정확한 의미는 선한 영(靈)을 불러 모으는 주술적 힘의 실체이다. 또한 아프락사스가, "알은 곧 세계이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해야만 한다. 그 새는 신을 향해 날아간다."에 명시된 신의 실체임을 주지한다면, 아프락사스의 돌은 새로운 몸, 즉 탈아(脫我)의 몸을 상징한다 할 것이다. 그렇다면, 자아의 신화란 궁극의 하나의 언어를 찾는 것으로서 '참된 운명'에 다가가는 것이며, 그러한 운명이란 새가 알에서 깨어나듯 새로운 몸으로의 환생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이러한 추론이 가능하려면 우선 '자아'에 대한 분명한 인지가 필요할 터이다. '나=자아'에의 인식은 '여정'과 무관하지 않다. 여정은 곧 삶이다. 여정의 오랜 침적상태가 바로 삶이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태궁에서 시작된 여정의 시작은 의식과 무의식의 층위를 형성하며 삶을 축적한다. 그럼으로 '자아의 신화'에서 있어 신화로서의 '자아'는 총체적 삶의 형태로서 존재하는 '나'이다. 그러한 '나'의 본성에 신화의 화원이 있는 것이다. 안재홍의 조각은 '자아의 신화를 사는 것'에 대한 물음에서 시작된다. 구리선을 뭉쳐 옭아매거나 덧대는 방식에서 출발한 그의 작품들은 '알'의 형상을 닮아 있었다. 마치 세상에 처음 몸을 드러낸 형국처럼 그의 인물들은 알의 '덩어리'였다. 덩어리들은 돌이나 나무에 기생하거나 그것들에서 떨어져 나오려는 형상으로 변이되는데, 일견 이 몸은 자연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물아일체적 사유로도 읽힌다. 그러나 '자연=몸'의 사유가 화려한 나비의 부활처럼 아름답거나 충만한 기쁨이 결코 아니다. 「꿈꾸는 몸의 기억」의 네 인물은 형(形)을 꿈꾼자들의 상처를 엿볼 수 있다. "이 투쟁 또한 고통을 수반하고", "자신의 업장을 감소시킨"상태에서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은, 결코 싸움에 의지하지 않고 뒤틀린 육신의 추한 모습을. 이들은 결코 강대하거나 아름답지 않을 뿐만 아니라 현자가 설파한 "영원한 가치"와도 무관한 추(醜)의 용사들이다. 머리가 없거나 그로테스크하게 뒤틀려 있는, 엉거주춤한, 존재의 첫 호흡을 시작하려는 바로 그 시점에 노출된 인물들이다. 이는 억눌려 있던 작가의 내면의지에서 비롯되고 있으나 포박된 상태로 잉태한 것은 "거짓 없는" 순수성 즉 형(形)이 소유할 수 있는 최고의 속성이 결코 "아름다움"은 아니라는 무언의 외침이다. - 졸고, 「자기 그물망에 사로잡힌 내적 자아의 실체들-안재홍의 조각, 심지(心地)에서 자라난 줄기」,『미술세계』(2004년 12월호)

안재홍_나를 본다 - 자라다_구리선_220cm_2005

안재홍의 조각적 '몸'들은 불안한 심기를 감추지 않았다. 이 불안함의 몸짓은 자기 내부로부터 발아한 '불안'이며 '몸짓'이다. 이 둘의 상태가 하나의 실을 뽑아 내기 시작했다. 조각에서 구리선으로 등장하지만, 그 의미와 상징은 '고치'가 되는 과정이라 할 것이다. 불완전성의 몸에서 다시 완전한 몸으로의 탄생은 그가 줄기차게 밀고 온 조각적 힘이다. 그럼으로 수년에 걸친 이 작업의 침적상태가 바로 그의 '자아의 신화' 가 아닐까. 아이를 낳고 기르고, 다시 조각가의 삶을 시작해 지금에 이른 조각의 신화 말이다. 철학자의 돌, 아프락사스의 돌은 조각가에 있어 자아의 신화를 응집한 조각이라는 '작품'이며, 그 서사이다. 조각가는 그 안에서 명징하며 궁극한 '하나'의 언어를 찾기 위해 여정을 시작한다. 자아의 신화와 만나는 조각의 통섭은 그러므로 한 생을 향한 노정에 다름 아닐 터이다. 그에게 있어 조각적 물음은 '나를 본다'에서 출발한다. 세계 안에 존재하는 사회적 자아라기보다는 본래적 존재로서의 '나'이다. 그 '나'를 찾아가는 여정이 동일하게 그의 작업적 태도이며, 삶이란 얘기다. 2002년의 작품들이 낱개 하나마다 그 이름을 달리했지만, 2003년부터 작품의 개별이름은 사라지고 전체 주제로 「나를 본다」를 설정한다. 그러니까 자기 존재의 진정성을 찾아가는 시발점에서 그는 '꿈'이라는 형이상학적 무대를 설정했고, 그러한 환타지를 유영하는 '몸'이 조각적 화두였는데, 이후 이러한 무대는 현실공간으로 내려와 희노애락의 긍정상태인 '몸'으로 바뀐다는 점이다. 내가 발 딛고 있는 이 땅 위의 '나' , 늘 부유한 마음의 상태로 떠돌아야 하는 '나'를 확연히 바라보기 위해 그는 「나를 본다」에 집중하는 것이며, 그럼으로써 그 내부에 부표처럼 떠 있는 형상의 이미지를 자유롭게 소환하여 재배치한다. 그것은 곧 자아의 신화가 조각으로 현현해 드러나는 풍경이자 꽃이다.

안재홍_나를 본다 - 자라다 부분_2005

이번 전시에서 안재홍은 「나를 본다-자라다」를 펼쳐 놓는다. '자라다'의 몸은 이전의 몸과 다르다. 몸의 내부에 '다의성' 구조로 혼합적 양상을 축적하던 방식에서, '몸=나무'의 방식으로 바뀌었다. 몸의 구조가 혈맥의 구조처럼 잔가지를 형성하며 자라고 있다. 몸에 대한 사유 방식이 "불완전한 육체의 눈뜸→완전한 몸의 소망→고치되기 혹은 탈아적 형상으로 돌아가기→「몸=나무」사유로 전환→나무의 몸으로 눈뜸"으로 전이되고 있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조각적 '몸'에 대한 사유가 한 단계를 마무리하고 다음 단계로 진입했음을 읽을 수 있다. 즉, 몸과 직렬로 연결된 '안재홍'이라는 화두가 '몸'이라는 육체적 물성에서 벗어나 궁극의 하나의 언어를 찾는 시적 화두로 변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그가 바라보던 '나'의 본성이 '웅크림'으로 정지(멈춤)되어 있는 것-앉아 있거나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자아의 신화'를 획득해 가는 과정에 있음을 증언하다. 이제 그의 인물들은 걷기 시작했다. 당당한 몸으로 활보한다. 이 몸에서 지난 날 노숙처럼 떠돌았던 몸의 그늘을 찾기란 쉽지 않다. "차라리 이대로 너를 재워둔 채 / 가만히 떠날까도 싶어 네게 묻는다 / 어떤가 몸이여"라 말하는 김사인의 노숙처럼 그도 얼마나 많은 날을 떠나야 했던가.

안재홍_나를 본다 - 자라다_구리선_220cm_2005

'몸=나무', 나무의 신화로 만나다 ● 안재홍의 변화된 사유에서 두 개의 이야기와 만날 수 있다. 하나는 강유환의 시에서 만날 수 있는 몸과 나무의 '애무'이다. "허기졌던 한철의 둥지를 버린 / 새들의 날갯짓 아직 남아 있어 / 소란스러운 지난날의 몸짓들이"가 지난 조각들에 대한 회상이라면, "색색이 물들어 지는 저 비밀들처럼 / 한때 수없이 나를 흔들던 소리들 / 소리도 오래 묵으면 높낮이를 알아 / 제 음을 짚으며 제자리로 내려앉고 / 잎 떨군 나무들 가지런히 모여 / 커다랗게 그물맥이 된 숲에서 / 아름다운 노래가 풀려 나온다 // 이파리만 기억하는 이에게 나무는 / 비어 있는 몸에 가득한 노래를 / 들려주고 싶어 하는 것 같아 / 깊어지는 숲 속으로 발을 옮겨 몸 흔드는 나무에 귀 걸어 둔다."(강유환,「나무의 몸을 만지다」)는 '자라다'의 몸이 나무와 어떻게 환유(metonymy)될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집과 작업실을 매일 출퇴근하듯 오가는 그에게 길의 길목에서 만나는 작은 숲과 나무들은 깊은 인상이 되었다. 하루 여덟시간의 예술노동을 위해 오전과 오후, 오가는 이 길의 '기쁨'이 그의 몸을 변화시켰다. 그는 인체의 아웃라인 위에 드로잉의 선과 같은 필력의 선들을 용접한다. 큰 흐름의 선들이 인체의 중심을 바로잡고, 그 선에서 잔가지의 줄기를 틔워낸다. 느리게, 맥점의 가지들을 찾아 연결하고 다시 틔워 나가는 이 작업은 긴 시간동안 반복된다. 굵기가 다른 구리선은 아래로부터 상승하는 가지의 생명력을 힘차게 보여주고 있다. 또한, 가지의 빈 사이에서 바람의 둥우리와 흔적을 엿볼 수 있음은 '나'가 훨씬 자유로와 졌다는 것을 반증한다. "커다랗게 그물맥이 된 숲"의 시어가 안재홍 조각에서 동일한 양상으로 전개는 셈이다. 그리고 "몸 흔드는 나무에 귀 걸어 둔다"는 시적 표현은 이전의 작업들이 땅에 뿌리박고 있었던 것을 생각할 때 도무지 상상할 수 없는 데로 나아가는데, 이번 작업에서 공중에 설치된 둥근 원과 원 안의 인물은 그러한 '나'의 적극적 의지로 표상 되고 있다. 나무에의 상상이 나무에 깃든 모든 '생명'의 에너지로 확장되는 게 아닐까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몸=나무'의 긴장도 원근의 시선에 따라 다층적으로 해제될 수 있는 상황이 연출된다. 흰 벽에 부조로 설치된 작품들은 검은 획의 선으로 노출되기 때문이다. '덩어리'에서 '선'으로 풀어진 인체의 형상, 즉 몸의 드로잉이 차후 드러날 조각에의 전환적 단계로 이해될 수 있으나, 의미론적 해석과 달리 조형적 맛이 차감되는 효과는 이번 전시의 아쉬움이다.

안재홍_나를 본다 - 자라다_구리선_200cm_2005

두 번째는 '여정'의 유목적 사유일 터이다. 리타 골드 겔만의 『나는 유목민, 바람처럼 떠나고 햇살처럼 머문다』에서 "모든 여자의 꿈은 영원히 혼자 여행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여자들은 고루한 사회적인 인식에 의해 자신에게 부여된 삶에 매여 있다. 그러한 사회적 압박감으로부터 벗어나길 원하기 때문에 누구보다 더 혼자서 떠나고 싶은 여행의 충동을 늘 가슴속에 묻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인식은 안재홍의 유목적 진정성과 맞닿는 부분이다. 한 곳에 뿌리를 박고 살아야 하는 나무의 천형은 일견 유목과 상관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달리 생각해 보면, 나무는 바람이 전하는 유목의 냄새를 맡고 자란다. 그가 떠나는 것이 아니라 떠남의 존재를 받아들이고 내 보내는 정거장인 것이다. 철마다 새들이 잦아들고, 바람이 머무는 것을 떠 올려 보라. 시베리아 침엽수림에서 날아 온 씨앗들이 바람에 묻어 있고, 그 아름다운 노르웨이의 숲도 맛볼 수 있다. 남녘 땅 호주의 깊은 계곡에 떨어지는 폭포의 물방울도 있고, 연경에서 외치던 옛 선인들의 탄성, 울란바토르 외곽의 묘비명에 적힌 "끊임없이 이동하는 자만이 살아 남는다"는 명구도 들려 온다. 백두산에서 한라산에서 지리산에서 태백의 영봉에서 날아온다. 나무는 지금 여기를 살지만, 시간에 뿌리 대고 먼 창공에서 호흡한다. 그는 나무에서 유목의 가지를 뻗어 올리고 있다.

안재홍_나를 본다 - 자라다_구리선_158×60cm_2005

'몸=나무'에서 '몸=형상'을 찾다 『연금술사』에서 말하는 '하나의 언어'는 '신(神)'이다. 즉, 절대적 언어란 얘기다. 그리고 그러한 신에의 궁구(窮究)가 바로 '나'를 찾아가는 길이라 말한다. 조각에 있어 하나의 언어는 무엇일까. 어쩌면 그것은 신을 찾아가는 길, 나를 찾아가는 길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렇다면 반어적으로 표현해 나를 찾아가는 하나의 언어는 '조각'이다. 조각을 찾아가는 것이 곧 '나'를 찾아가는 길이란 얘기다. 앞서 언급했듯이 안재홍의 조각적 화두는 '나'를 찾아가는 길이자 하나의 언어로서 '조각'을 찾아가는 길이었다. 그가 고백하듯이 조각가의 업을 찾아 들기 전 '소녀'의 유목에 대한 꿈이 그를 이 길로 몰아 왔는지 모른다. 그토록 먼 길에서 그는 자신의 언어를 찾아 온 것이다. 그러나 그의 조각 언어가 내부적 변화를 거치며 진화해 왔음에도 조각의 형상성은 어떤 알 수 없는 '강박'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 '나'의 언어를 지나치게 고집하려는 의식과 깨쳐 나가려는 무의식이 긴장의 교집합 상태로 작동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궁금하다. 오히려 대지를 뚫고 나왔던 처음의 조형이 형상적 힘을 방출한다. 공간을 압도하는 그 인물들은 하나의 덩어리만으로도 '신화'의 내재성을 담보했다. 이는 '나'가 곧 '타자'의 시선과 전시공간 안에서 맥놀이침을 말한다. '몸'의 사유가 깊어지면서 거칠고 뭉툭했던 조형들이 조금씩 사라져 가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일이다. 처음, 형상의 출현이 어디에서 시작되며 어디로부터 연유하는 가에 대한 근본적이며 근원적인 질문을 쉽게 포기하는 순간, 자아의 신화는 예견치 못한 곳에서 길을 잃기 때문이다. 이 질문에서 작가마다 특수한 상황과 개별적 답안이 제출되겠지만, 조각적 탈바꿈의 지점이 파동하는 현장에서 다시 돌아 봐야 할 문제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자라다'의 형상과 의식은 긍정적이다. 작가의 의식이 유연해졌기 때문인데, 의식의 유연성이 이후 작업들에 미칠 영향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유연한 의식의 유목이 '형상'과 맞물려 확장되는 순간을 기다려 보는 고고자(鼓鼓子)의 기다림도 즐거운 일이다. ■ 김종길

Vol.20051016c | 안재홍展 / ANJAEHONG / 安在洪 / sculptu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