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뻐꾸기'로 생각한다

김도근 조각 설치展   2005_0920 ▶︎ 2005_1130

김도근_하늘그림-저어새_스텐_50×0.5×600cm_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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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5_0920_화요일_06:00pm

2005_0920 ▶︎ 2005_0926

수원시미술전시관 경기 수원시 장안구 송죽동 409-2번지 만석공원 내 Tel. 031_228_3647 www.suwonartgallery.com

2005_1008 ▶︎ 2005_1130

생태문화학교 화성시 송산면 우음도

서봉산과 화성호 ● 이번 전시의 주제는 생명을 상징하는 "물"에서 파생된 기록과 형상물이다. 이는 산이 물의 생성 모태라는 생각에서 시작되었다. 이때 산은 작가인 '나'가 삶터를 이루는 '서봉산'으로 상징된다. 작품으로 풀어 낸 서봉산은 생태환경을 유지했던 과거가 아닌 골프장 건설로 파괴된 현재의 서봉산이다. 이를 몇 가지 방법으로 풀어냈는데, 첫째는 생태계 붕괴로 인한 삶터의 변화를 다큐 사진작업으로 보여주는 것(슬라이드 쇼), 둘째는 서봉산의 물길이 끝나는 화옹호 풍경이다. 산의 물은 바다에 귀착된다. 그러나 화옹호는 물의 귀착을 막고 서 있는 거대한 암벽이다. 이러한 상황설정이 이번 전시의 기획동인이자 작품의 구체적 표현이고 주제이다. 이 이야기는 4년전 서울에서 이사와 서봉산 아래에 둥지를 튼 '나'의 이야기이다. 아이에게 도시가 아닌 자연의 삶(시골생활)을 보여주고자 했던 작은 희망이다. 그러나 아이가 볼 수 있었던 것은 풍요롭고 넉넉한 자연이 아니었다. 골프장 건설로 인해 산이 헐려 나가는 파괴의 현장과 이를 저지하기 위한 어른들의 시위였다. 자연과 인간의 아름다운 공존이 아니라 자연을 부수고 그 자리에 유희배설공간(골프장)을 짓고 있는 욕망의 실태였다. 과연 이것이 내 아이에게 보여줄 전부인가. 나는 아이뿐만 아니라 실제적 피해 당사자인 자연에 주목했다. 물과 나무, 새, 그리고 이들이 뿜어내는 향기, 소리, 풍경 등이 그것이다. 산의 무너짐은 산과 더불어 생태를 이루는 모든 삶의 붕괴이다. 공존과 상생의 관계항 상실이다. 이를 거역하는 것이 바로 인간의 욕망이었다. 이 욕망의 결과가 초래하는 것은 무엇인지 의문하지 않을 수 없다. 서봉산은 산 고유의 습지생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옹달샘, 지하수, 논, 웅덩이와 같은 천연 습지를 말이다. 또한 오래된 나무와 식물군락이 잘 보존된 지역이어서 화성시가 삼림욕장을 조성하기도 했다. 즉, 서봉산은 맑고 깨끗한 청정지역으로 화성시의 허파역할을 하고 있는 산이란 얘기이다. 전 국토에서 벌어지고 있듯 자연풍광이 빼어난 산들은 골프장 건설로 몸살을 앓고 있다. 서봉산도 이러한 골프장 전략에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주지하는 바 골프장이 들어서면, 산의 붕괴뿐만 아니라 인공환경 조성으로 인한 농약살포 등으로 인해 주변생태계가 도미노처럼 빠르게 무너져 내린다. 이 순서를 보면, 녹색사막인 골프장→지하수 개발, 농약살포→토양 및 하천과 그 지류 오염→하층 생태계 파괴→강을 따라 바다로 유입→갯벌 생태계, 해안 생태계 위협 이것은 살아 생동하는 생태계 전체에 악영향을 주고 있는 셈이다. 나는 기억한다. 백로, 꾀꼬리, 솔부엉이, 서쪽 새, 뻐꾸기의 소리의 아름다운 소리를. 그러나 이 소리는 어느 새 자취를 감추고 있다. 화옹호의 저어새가 사라질 날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다. 내 작업은 이 모든 죽임의 논리에 대한 기록이자 저항이다. ■ 김도근

김도근_보이지 않는 뻐꾸기_나무, 스텐, 물, 디지털 컨트롤러, 소리센서, 할로겐_450×150×130cm_2005 나무가 사각으로 비스듬히 걸쳐진 스텐판(검은색 칠- 죽은 나무)에 물을 담고, 나무속을 비워 디지털 컨트롤러와 소리센서를 설치, 뻐꾸기 소리가 들리면 쓰러진 나무모양의 수조에 파장이 일고 이것을 조명을 통해 파장이 생기는 모습을 벽에 반영함(소리의 시각화). 인간의 유희적 욕망을 채우기 위해 만들어진 골프장공사로 인해 죽어가는 서봉산의 모습을 나무로 표현하였으며, 사람과 점점 멀어져 가는 보이지 않는 뻐꾸기소리를 상징적으로 표현해본다.
김도근_새 밥그릇_스텐, 동, 나무, 흙, 그리고 풀_50×50×150cm_2005

나는 '뻐꾸기'로 생각한다 - 환경조각의 실체, 김도근의 생태 조각론 ● 구자희는 『한국현대 생태담론과 이론연구』에서 생태문학이란 "생태계 문제를 성찰하고 비판하며 그 원인을 생태의식을 바탕으로 규명하고 나아가 보다 바람직한 생태사회를 제시하는 문학"이라 말한다. 그리고 '바람직한 생태사회에 이르는 과정'이 생태문학의 하위 장르로서 생태비평이 추구하는 길이라 덧붙인다. 또한 생태소설은 다양한 생태위기의 현실과 바람직한 생태의식의 모습을 살아 있는 인물들을 통해 제시함으로써 보다 분명히 생태위기의 현실을 전달하여 이에 대한 문제제기와 나아가 극복방안에 대한 면밀한 천착을 가능하게 한다고 역설한다. 구자희의 '바람직한'이 얼마만큼의 구체적 실효성을 가지며, 그 공무용어적 추상성이 실체로서의 모습을 드러낼 수 있는지는 의문이지만, 그가 제시하는 개념설정은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뿐만 아니라 '문학', '비평(문학)', '소설'의 역할개념의 위치는 다분히 타 장르의 개념에도 투사될 수 있는 보편성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이 개념들은 '미술', '비평(미술)', '조각'에서도 동의한 양상으로 정의될 수 있을 터이다. 바꿔 말해 생태조각은, "다양한 생태위기의 현실과 바람직한 생태의식의 모습을 살아 있는 인물들을 통해 제시함으로써 보다 분명히 생태위기의 현실을 전달하여 이에 대한 문제제기와 나아가 극복방안에 대한 면밀한 천착을 가능하게 한다"는 생태소설의 개념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다만, 소설이 '살아 있는 인물들'을 통해 제시하고, 조각이 조각적 어법의 조형물을 등장시킨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그러나 '살아 있는 인물들'이 갖는 은유적 지점은 다를 바 없다. 조각가 김도근의 조각개념도 이 지류에서 흐른다.

김도근_저어새(우음도 설치)_ 철, 나무_150×150×270cm_2005 멀리서 망원경을 통해서 볼 수밖에 없는 가까이 할 수 없는 안타까운 현실을 반어적으로 가까이 있는 커다란 모습으로 과장하여 표현하였다. 저어새는 우리나라의 환경오염으로 인한 개체 수 감소의 대명사로 인식 되어있다. 환경을 말하는데 있어 '옛날엔 좋았는데'라는 말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새를 보고 알아가는 행위는 늘 새로운 경이로움을 느끼게 해주는 너무도 가슴 벅찬 즐거움이다.

김도근의 조각은 '김도근'이란 사람의 삶에서 비롯된다. 이러한 주장이 모든 예술의 경우에서 한정될 수 있으리란 생각은 오해다. 삶과 예술이 교집합의 비율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느냐는 물음이 더 정확할 것이다. 최소한 김도근에 있어 교집합의 비율은 찌그러진 수박정도는 된다. 그 크기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는 그 자신의 몫이겠지만, 뚱뚱한 대추씨알을 조금씩 키워-삶의 화두를 조각작업의 지향으로 싹 틔웠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 증거들을 전시장에서 의문 없이 발견할 수 있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뻐꾹'하는 소리에 놀란다. 검은 물항에 꽂아 둔 고목(古木)에서 들려오기 때문이다. 나무 뻐꾸기가 울면, 나무의 혀는 물의 표면을 흔들어 놓는다. 어두운 전시장 바닥에 설치된 이 작품은 우리가 볼 수 없는 '자연'의 실체를 매우 '구체적'으로 드러낸다. 나무에 숨은 뻐꾸기는 볼 수 없다. 나무가 뻐꾸기인지 뻐꾸기가 나무인지 헛갈린다. 그러나 '뻐꾹'하는 소리가 물의 파동으로 금방 나타나기에 '물결의 뻐꾸기'는 볼 수 있다. 간단한 과학원리를 이용한 것이지만, 그의 조각적 메타포는 사실 절규에 가깝다. 작품「보이지 않는 뻐꾸기」의 미학적 개념은 보이지 않는 실체인 '소리(청각)'를 물의 파동으로 시각화하는 전략에 있지만, 작품구성의 재료와 질료는 오히려 그러한 전략을 뛰어 넘는 기의(significant)를 확보하고 있지 않은가. ● 죽은 나무에 깃들어 있는 뻐꾸기의 울음소리에서 뻐꾸기의 부재를 알아 차려야 한다. 이러한 부재는 그가 살고 있는 화성시 소재의 서봉산에서 비롯된다. 이곳은 화성시에서 산림욕장을 조성할 정도로 청정지역이었는데, 최근 해병대 골프장이 들어서면서 산의 기세와 형세가 모두 망가져 버렸다. 백로, 꾀꼬리, 솔부엉이, 소쩍새, 뻐꾸기의 살림터였던 서봉산의 붕괴는 곧장 사람살이에 영향을 미쳤고, 그는 몇 년간의 골프장 건설 반대운동이 무산된 이후 아무런 동요도 없이 흘러가는 파괴된 일상을 지켜보았다. 이러한 비관적 현실이 작품으로 등장한 것이다. 그럼에도 물항의 중심에 띄워 둔 물배추의 푸른 잎과 뿌리는 이 작품의 전략이 비판과 절망, 절규에 머물지 않고 '생명'으로 환원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생태위기의 현장고발은 예술가가 아닌 운동가의 몫이다. 이 몫에 대한 고민이 이번 전시의 외형적 조형성을 단단하게 구축하는 맛을 떨어뜨린 점도 있다(예:「저어새」). 높은 조형성의 획득과 의미의 확보가 충돌하는 지점이기 때문이다. 그런 측면에서「보이지 않는 뻐꾸기」는 매우 뛰어난 조형성과 의미를 확보하고 있다.

김도근_하늘그림(우음도 설치)_스텐판재 투조_50×50×200cm_2005 오염의 불편을 모르는 듯 즐겁게 놀고 있는 화성호의 새들. 괭이 갈매기, 검은 머리 물떼새, 마도요, 큰 뒷부리도요, 백로, 저어새 등 현재 화성호에 살고 있는 새들의 표현을 통해 갯벌의 이상한 개발로 인해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는 막연한 갯벌생물의 미래가 쓸쓸하게 보여 슬프게 느껴지지만 그래도 아직은 우리의 곁에 힘찬 모습으로 다가오는 너무나도 반가운 녀석들이다.
김도근_하늘그림_스텐판재 투조, 블랙 라이트_50×50×200cm_2005

집성나무로 조각된「저어새」에 대한 아쉬움은 작품이 '전시장 작품'에서 벗어나지 않았기 때문인지 모른다. 2미터70센티의 대형 조각은 '저어새'의 모뉴멘탈적 신화를 내재한다. 즉, 모뉴멘트 조각은 그 상징적 의미를 기념하고 확산하기 위해 세워지며, 조각이 세워진 장소와 공간성을 포용하고 있는 사회는 조각의 상징을 신화성으로 전래시킨다는 점이다. 「저어새」는 "멀리서 바라볼 수밖에 없기에-작은 모습으로 밖에 볼 수 없는 현실을 감안해 큰 모습으로 과장하여 표현"했다는 작가의 고백이 있긴 하지만, 살아 있는 생태환경의 리트머스로 등장하는 '저어새'가 전시장 한 복판에서 거대한 조각으로 부활하고 있음은 이미 '「저어새」신화'를 확산하려는 의도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의도의 확산이 리드미컬하게 전개되지 못했다. 단지 거대한 조형물의 새 이미지로 지켜봐야 하는 현실에 발목 잡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 작품을 화옹호의 생태적 상징으로 확장시켜 '주술적 놀이'의 대상으로 개방했으면 하는 생각이다. 반면, 「저어새」뒤로 그림자를 길게 드리운 '새'의 철판투각형상들은 실제 크기의 구상조각으로 재현한「저어새」와 더불어 시적 긴장의 맥놀이를 만들어 내었다. ● 지역 환경운동에서 시작된 그의 생태 조각론의 발아는 첫 번째 전시에서 이미 예견되었지만, 이번 전시에서 확정적 태도로 결정된 듯 보인다. 또한 조각적 언어에 있어서「아픔의 기억-서봉산」, 「새집」, 「새 밥그릇」과 같은 작품들도 훌륭한 메타포를 던지고 있다. 모두 통나무를 활용했는데, 「아픔의 기억-서봉산」은 통나무 속을 파낸 후 나무의 단면에 작은 모니터를 설치하고 골프장 공사 진행과정을 슬라이드 쇼로 보여준다. 「새집」은 새들의 안식처로서 나무로 만든 집이다. 송두리째 뽑혀진 통나무, 여기서 통나무는 '파괴'의 피해자이며 증언자이다. 산에 뿌리내리고 살아 온 이 통나무로 하여금 파괴의 과정을 증언하게 한 이 설치작은 인간의 잔혹한 욕망을 '기억'을 통해 재생시킨다. 푸른 숲의 기억과 죽임의 과정에서 목격한 욕망의 기억, 그리고 관람객인 우리 '인간'에게 그 '기억'을 보여준다. 물론 이 기억의 주인공은 자연의 몸인 '나무'이다. 우리는 전시장에서 두 개의 '기억'과 만난다. 또 다른 하나는 사람(작가)이다. 나무와 사람의 기억은 모두 '아픔'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두 기억에서 배면적 상황을 연출하는 것은 결국 사람이다. 작가는 이 아픔의 기억을 영상으로 펼쳐 놓는다. 죽음이 혈흔처럼 묻어나는 폐허의 현장을 화려하게 바라 볼 자 누구인가'

김도근_저어새_스텐, 합성수지_50×40×150cm_2005 작아져가는 호수의 적막함과 환경오염으로 인해 전세계에서 1400여 마리 밖에 남아 있지 않다는 저어새의 쓸쓸함을 표현하고자 함. 옛날에는 우리가 생활하고 살았던 논 주변에서도 쉽게 접했던 새였다는 사실이 더욱 쓸쓸하게 한다.

「새집」과 「새 밥그릇」은 이 시대 환경조각의 패러다임이 어디에 있는가를 묻는 작품이다. 주지하듯 환경조각은 공공조각(public-sculpture)과 동의한 측면에서 불려진다. 예컨대, "환경조각은 공(公)적인 조각이다. 개인의 거실이나 특정 사람을 위한 조각이 아니다. 누구에게나 감상의 기회가 주어진 거리의 조각으로 대중에 의하여 수용되어야 하는 절대적인 명제가 있다."고 말하며 "관객을 찾아 거리에 나선 능동적인 조각", "불특정한 대중을 위해 공공의 장소에 설치되는 환경조각이야말로 예술의 민주화로 대중에게 봉사하는 미술의 척후병" 등등으로 회자되며 찬사된다. 그러나 환경조각은 환경미술의 큰 지류에서 하위단위에 불과하며, 뿐만 아니라 환경조각의 작은 지류에는 사람만을 위한 '공공성'에 국한되지 않는 다양한 지류가 존재한다. 큰 범위에서 환경은 '자연'에 속하기 때문이다. 그럼으로 '사람을 위한', '새를 위한', '나무를 위한', '빌딩을 위한', '숲을 위한', '저어새를 위한'…등의 환경조각은 무수히 많은 것이다. 오직 사람을 위한, '구경' 꺼리로 서 있는 조형물을 환경조각이라 단정 짓는 것은 무지의 소치이다. 이제 환경조각의 개념적 패러다임도 새롭게 정립되어야 한다. 1980년대 건축물 앞에 세워지기 위해 만들어진 '1%법'의 한계에서 완전히 떨어져 나와야 한다. 김도근이 제작한 「새집」은 서봉산의 새들을 위한 환경조각이다. 작품 철수 일에 찾아가 본 전시장에는 벌들이 날아다니고 있었다. 전시를 위해 보관해 둔 새집 조각상에 벌들이 둥지를 튼 것이다.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 그러나 그의 새집들은 아직 비어 있다. 어쩌면 비어 있기에 안간힘을 쓰는지 모른다. 오라고,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라고. 하지만, 발 디딜 곳 없는 산에, 골프 공 소리 요란한 그곳에 새들이 잦아들 수 있을까? 우리는 전시실 한편에서 솟대처럼 솟아 있는 새의 집을 묵묵부답으로 보아야만 하는가. ■ 김종길

Vol.20051021a | 김도근 조각 설치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