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로 집짓기

고명근 사진展   2005_1104 ▶︎ 2005_1125 / 월요일 휴관

고명근_Torso1_필름, 플라스틱_121×61×3cm_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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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5_1104_금요일_05:00pm

문의_한미사진미술관 Tel. 02_418_1315

안동사진창작공간 경북 안동 예안면 부포리 110번지 Tel. 054_821_1315 www.photomuseum.or.kr

이미지로 집짓기 - 고명근의 작품세계 ● 1. 고명근은 세계 곳곳에서 채집한 사진 이미지를 재구성하여 입체로 구축하는 작업을 지속적으로 해 오고 있다. 그가 작업의 재료로 활용하기 위해 축적해 놓은 이미지들은 나무와 구름, 하늘과 바다 등 자연을 비롯하여 건물, 조각, 벽 등의 인공물에 이르기까지 실로 방대하다. 자연과 인공물의 차이가 그에게는 별로 큰 의미가 없는 듯한데, 이는 복제와 모방을 예술의 위험한 적으로 간주하는 오래된 사유전통을 그가 사뿐히 뛰어넘어 버렸기 때문이다. 인간이 자연을 복제한다면 자연은 스스로를 복제해 낸다. 자연의 본성은 모방에 있어 구름은 하늘을 닮고, 강은 바다를 닮고, 풀은 나무를 닮는다. 자연이 스스로를 복제해 내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 끝없는 생명력이 유지될 수 있겠는가? 그래서 꽃은 씨를 뿌려 다른 꽃을 복제해 내고, 물은 하늘로 날아올라 구름을 복제해 낸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작가가 사용하는 작품의 재료가 건물사진이든 구름사진이든 본질적인 차이는 없는 셈이다. 그에게 더 큰 관심은 오히려 취합한 사진을 건축학적 상상력을 동원하여 재구성하는 데에 있다. 자연과 사물의 이미지를 채집하는 사진 작업만으로는 도무지 성이 차지 않는 것이다. 세계를 관찰하고 기록하며 그 이미지를 수집하는 것도 흥미롭지만 그것은 형상을 주조해내고자 하는 욕망과 양립하기 어렵다. 그런 까닭에 그는 두 가지 욕망을 같이 만족시키는 방법을 찾는다. 그렇게 그의 상상력은 이미지가 거주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데 동원된다. 그것은 한없이 날아오르기만 하는 상상력이 아니라 이미지의 집을 만드는 구축적 상상력이다. 그 상상력은 또한 열정에 들떠 부풀어오르는 상상력이 아니라 차분하고 이지적인 상상력이다. 집을 짓는 데 덤벙거릴 수야 없지 않겠는가?

고명근_Torso2_필름, 플라스틱_110×61×3cm_2005

그의 집 짓는 솜씨는 「Buildings」 연작을 통해 이미 드러난 바 있다. 어쩌면 그는 그 작업을 통해 남몰래 집 짓는 연습을 해왔는지도 모른다. 누구에게나 마찬가지겠지만 그에게 공간에 대한 욕망은 근원적이다. 집은 인간이 공간을 알게 되면서 맞닥뜨리는 최초의 세계이다. 집은 벽과 기둥, 문과 창을 갖춘 물리적인 공간일 뿐만 아니라 사색하고 꿈꾸며 몽상에 빠지기도 하는 정신의 일터이자 쉼터이기도 하다. 그것은 또한 휴식과 수면을 통해 내일의 노동을 준비하는 휴식과 여가의 공간이기도 하며, 인간이 가장 먼저 알게 되는 타인인 가족과의 관계가 형성되는 최소단위의 사회이기도 하다. 집은 곧 인간의 요람이다. 집을 모르는 자는 공간을 알지 못하고 타인을 알지 못한다. 그는 또한 휴식을 모르고 유희도 모르며 관계도 알지 못한다. 요컨대 그는 꿈꾸지 못하며 사색하지 못하며 잠들지도 못한다. 집은 인간의 공간이 탄생하는 장소이다. 집은 공간의 정수이다. ● 공간은 그냥 비어있기만 한 것이 아닌 까닭에, 그것은 공(空)이 아니라 간(間)인 까닭에 공을 채워줄 그 무엇과 짝을 이룬다. 마찬가지로 모든 사물은, 그리고 자연과 인간은 공간 없이 있을 수 없다. 공간의 바깥에 있는 사물이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이미지의 집을 짓는 것은 사물의 질서를 회복하는 것이다. 사물은 공간을 갖지만 이미지란 사물의 범주에 속하지 않는 까닭에 자신의 고유한 공간을 갖지 못한다. 결국 작가의 노동은 현실 세계로부터 빠져나와 버린 사진 이미지에 새로운 공간을 마련해주는 작업이다. 하지만 그가 지은 이미지의 집은 공간이 아니라 사물 자체가 되어 버린다. 집은 공간이면서 동시에 공간 속의 사물인 까닭이다. 공간은 사물이 아니라 사물의 조건임을 알지만 그가 공들여 구축한 집들은 어느 새 공간이기를 멈추고 사물로 전환되어 버린다. 이는 작가가 공간의 형상화에 실패해서도, 설계가 잘못되어서도 아니다. 그것은 피할 수 없는 형상의 덫 때문이다. 그 덫이 어디에 놓여있는가를 알지만 걸려들 수밖에 없다. 그런 까닭에 피해를 줄이는 방법을 찾기 위해 고심하는 것이 작가에게 주어진 건강한 노동의 길이다.

고명근_Torso3_필름, 플라스틱_119×60×3cm_2005

2. 그가 택한 방법은 공간의 투명성을 살리는 것이다. 사진을 조립하여 공간을 구축하던 방식을 여전히 견지하지만 이제 그 사진들은 투명한 필름에 인화된 것이어서 집의 표면과 내부의 구분이 사라진다. 공간의 탄생이라 할만하다. ● 하지만 작가는 이미지가 만들어내는 공간 자체보다는 오히려 시각의 위치에 따라 공간 속에 자리한 이미지의 변화에 관심을 두는 듯 해 보인다. 예를 들면 「Elements」 연작에서 보여주었듯이 한쪽 면에 새겨진 이미지가 뒤쪽 면의 이미지와 겹치고 중첩되어 만들어내는 새로운 이미지, 즉 관찰자의 위치에 따라 이미지가 변하는 현상에 흥미를 보이는 것이다. 물은 관찰자의 시각에 따라 잠든 물이 되었다가 노한 물이 되기도 한다. 불은 활활 타올랐다가 시들었다가 하며, 공기도 관찰자의 위치가 바뀜에 따라 시시각각 이동한다. 흙 또한 마찬가지로 때로는 지표면의 흙먼지처럼 보였다가 때로는 빗물을 머금은 듯 진한 갈색으로 바뀌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그의 작품은 결정되어 있지 않다. 그의 작품을 만드는 자는 오히려 관람자의 시각이다. ● 이처럼 관찰자의 능동적인 시선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작업이 「Body」 연작에서도 계속되고 있다. 시각은 의식과 맞닿아 있어서 의식적으로 사물을 끌어당기기도 하지만 본래는 사물에 끌려가는 속성을 갖는다. 시각의 능동성은 의식에서 오는 까닭에 오히려 몸의 일부로서의 눈은 사물을 향해 끌려가는 수동성을 지닌다. 투명성을 적절히 이용하여 가상적인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그의 작업은 이러한 시각의 수동성에 침을 놓아 잠든 시각을 각성시켜 그 가능성을 확장시키고 있다. 시각은 의식에 속하면서 동시에 몸에 속하기도 한다. 그래서 그것은 물질성을 가지면서도 비물질적이다. 전통 시각예술은 시각에 주어진 세계의 모습을 의심해나가면서 그 진정한 모습을 찾기 위해 고심해 왔다. 그것은 세계에 대한 의심이 아니라 시각에 대한 의심이다. 세계를 알기 위해 지성의 빛에 의지해 왔던 철학자들 또한 사유가 꿰뚫어볼 수 없는 의식의 사각지대가 있음을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물질적인 세계에 비물질적인 의식이 제대로 다가설 수 없음은 가장 총명한 지성들에게는 자명한 진리가 아니었던가? 그런 까닭에 물질성을 지닌 의식으로서의 시각에 조금이라도 의지하는 것은 부끄러운 짓이 아니라 겸손한 행위이다. ● 몸을 시각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세계를 알아나가기 위한 한 방편이다. 몸은 인간의 것이지만 동시에 세계의 일부이기도 하다. 작가의 말처럼 몸은 기억, 감정, 의지를 담은 인간의 외피로서 의식이 거주하는 집이다. 몸은 물질성을 지닌 세계에 속하는 까닭에, 끊임없이 세계와 접촉하는 까닭에 비물질적인 의식과 물질적인 세계를 중재하는 통로이기도 하다. 그런 몸이 몸의 일부인 시각의 대상으로 주어져 있다. 결국 그의 작업은 시각 연구이자 몸 연구이며 나아가 세계에 대한 연구이다.

고명근_Stone Body13_필름, 플라스틱_185×60×60cm_2005

작가는 몸이 인간의 일차적인 한계라고 말한다. 한계란 그것을 넘어서 밖으로 나갈 수 없음, 요컨대 존재를 규정하는 조건이다. 인간을 규정하는 것은 그의 몸이다. 성장과 발육, 정신의 성숙, 타자와의 관계 이 모든 것은 몸에서 시작하여 몸에서 끝난다. 그의 말처럼 인간은 몸이라는 한계 안에서 소멸한다. 몸은 인간의 조건이다. 몸에 대한 작가의 관심은 사실 「Buildings」 시리즈 시절부터 잠들어 있었다. 그는 건물은 몸의 확장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작업을 진행해 왔던 까닭에 그 작품들은 확장된 몸 연구인 셈이다. 한편 몸의 근원에 대한 연구도 「Elements」 시리즈에서 계속되고 있었다. 몸은 물질성을 지니는 까닭에 그것은 4원소로부터 잉태된 것이다. 그래서 작가는 이미 4원소가 인간의 시작이자 한계의 끝이라고 언급할 수 있었다. 그의 작업은 이처럼 아득한 근원에 대한 조형적 탐구이다. 몸은 정신이 둥지 틀고 있는 장소이기도 하지만 물질세계의 변천사가 묻어있는 기억의 저장소이기도 하다. 그가 수집한 인체조각 사진들은 시간의 흐름이 야기한 자연 변천의 역사를 보여주고 있다. 어떤 몸은 질 좋은 수분을 빨아먹고 자라 대리석보다 단아하고 우아하며, 또 어떤 몸은 바람에 깎여 거칠지만 화강암보다 단단해 보인다. 불에 그슬려 표면이 일어나는 몸, 음습한 대지의 기운을 받아 음란한 몸, 태양의 축복을 받아 생동하는 몸 등 작가는 수많은 인체조각으로부터 감각적으로 몸에 묻어있는 물질세계의 기억을 읽어낸다. 이제 몸은 단순한 정신의 외피가 아니라 세계의 생성과 변천과정이 집약되어 있는 기억의 보고이다. 하지만 몸은 물질에 불과한 것만은 아니기에 물질세계의 질서에 맹목적으로 순종 하지만은 않는다. 몸은 물질이기를 부정하면서 자기 욕망의 리듬에 맞춰 춤춘다. 어떤 몸은 날개를 달고 비상하려하기도 하고 따뜻한 대지 위에서 잠들고만 싶기도 하다. 다른 몸과 비벼대고 싶은 몸도 있고 스스로를 복제해내고 싶은 몸도 있다. 화려한 몸, 음산한 몸, 역동적인 몸, 교태부리는 몸, 흥분한 몸, 자신의 아름다움에 도취한 몸, 부끄러워하는 몸, 무미건조한 몸, 몸의 이 모든 속성은 자연이 길러준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욕망을 닮아간 탓이다. 그것이 몸을 단순한 물질세계와 구분하게 해준다. 요컨대 몸은 욕망덩어리의 물질이다. 하지만 그 욕망 덩어리가 영원히 존속하지는 못한다. 자연과 달리 몸은 유한한 물질이다. ● 작가는 몸이 아름다운 까닭은 소멸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몸은 유한성 덕분에 아름답다. 우리는 이 말 속에서 작가의 미의식을 엿볼 수 있다. 소멸하기 때문에 몸이 아름답다는 그의 말은 자연의 섭리에 역행하는 모습이 추하다는 말의 반어법인 듯 하다. 이는 자연의 질서에 대한 존중으로 정의할 수 있는 근원적인 윤리의식을 미의식과 동일시하는 태도에서 나온다. 몸의 유한성은 인간의 한계이다. 몸의 아름다움이 유한성에서 나온다면 한계를 수용하는 것 역시 아름답다. 한계란 넘어설 수 없음, 곧 불가능을 가리킨다. 하지만 한계는 역설적이게도 자신을 넘어서기를 요구한다. 넘어설 필요가 없다면 그것은 애초부터 한계가 아니다. 넘어설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넘어서야 한다는 모순된 요구가 한계의 속성이다. 넘어서려 발버둥쳐야 하는 대상이 한계이지만 그것은 결코 넘어설 수 없는 것이기에, 넘어섰다면 애초부터 한계가 아니었던 까닭에 한계는 가장 극적으로 인간의 열정을 고양시킨다. 극도로 고양된 열정 속에서 결국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불가능이 한계를 아름답게 만든다. 이 지점에서 한계는 인간에게 주어진 잔인한 저주가 아니라 세계가 내린 축복이 된다. 인간은 몸 때문에 스스로를 저주하기도 하지만 바로 몸이라는 한계 덕분에 가장 명철한 자신과 만난다.

고명근_Stone Body14_필름, 플라스틱_185×60×60cm_2005

3. 몸은 물질성이라는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욕망 속에서 비로소 아름답다. 몸의 유한성은 궁극의 한계이지만 욕망덩어리의 몸은 그 한계를 순순히 받아들이려하지 않는다. 물질성을 탈피하려 꿈틀대는 몸이야말로 진정한 몸이다. 작가는 투명성을 통해 몸의 그러한 욕망을 표현하고 있다. 물질이 형상 없이는 실체에 도달하지 못하듯 몸은 유한한 형상 없이는 물질성마저도 갖지 못한다. 형상이란 사물의 한계여서 형상 없는 사물은 존재에 이르지 못한다. 형상은 또한 시각이 부딪쳐 멈추는 지점을 가리키는 까닭에 투명한 공간은 형상을 갖지 못한다. 반대로 시각은 공간을 가로질러 한없이 나아갈 뿐이다. 그런 까닭에 시각은 형상을 붙잡지만 공간은 붙들지 못한다. 작가가 만들어낸 투명한 몸은 그래서 형상이 아니며 시야에 붙들리지도 않는다. 앞면에 나타난 몸을 보려하는 순간 시각은 즉각 그 몸을 지나쳐 뒤편에 새로이 출현하는 또 다른 몸과 만난다. 하지만 어느 것도 시각에 붙잡히는 형상으로서의 몸이 아니어서 시각은 끝없이 표류하게 된다. 그렇게 해서 우리의 시각은 몸의 이미지가 구축하고 있는 투명한 공간에 갇히고 만다. ● 시각은 인간이 세계를 알아나가고자 하는 욕망을 품어 온 이후 줄곧 사물의 참모습으로 인도해주는 지성의 빛을 가리키는 이름이었다. 멀리 내다볼 줄 아는 지혜는 꿰뚫어 살피는 눈, 즉 통찰력을 가리키며, 어둠 속에서도 전체를 아는 명철한 정신은 밝은 눈, 즉 혜안을 뜻했다. 하지만 정작 시각이란 보이는 것만을 보는 우둔함과 보이는 사물을 시각에 복속시켜 의식의 대상으로 전락시켜버리는 폭력성을 같이 지녔다. 밝음 속에서만 볼 줄 아는 편견과 어둠 속에서는 즉각 눈을 닫아버리는 폐쇄성이 시각의 이면에 도사리고 있다. 시각을 지(知)와 동일시하는 오랜 사유의 역사 속에서 그것의 폭력성은 은폐되어 왔던 셈이다. 하지만 본래 시각은 형상의 주변을 맴돌며 사물을 살피는 신중함을 지녔다. 감각의 일부로서의 시각은 사물을 경솔하게 재단하지 않고 끊임없이 주저하면서 판단을 유보한다. 사실 감각보다 인식에 우위를 부여하는 앎의 전통 속에서 감각의 가치는 평가절하 되어왔다. 투명한 공간 속에서 시각을 표류하게 만들고 형상 판단을 유예시키는 고명근의 작업은 그렇게 해서 감각의 지혜를 복권시킨다. 그것은 사물의 본래 모습이 시각을 통해 온전히 드러날 수 있다는 순진한 믿음에 제동을 걸면서 즉각적으로 시각에 주어지는 형상을 의심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자명함을 자명함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의심 많은 자의 우환 때문이기도 하지만 인간과 세계를 엄밀하게 탐구하는 성실한 예술가들에게는 노동의 조건이기도 하다. 그 노동은 시각의 자명함을 의심하는 데서 출발한다. 몸의 이미지로 구성된 투명한 집은 이제 껍데기 형상을 갖춘 사물이 아니라 몸이 거주하는 공간이 된다. 공간을 구축하고자 하는 작가의 본능적인 욕망이 실현되는 것이다. 하지만 공간은 본래 경계를 갖지 않는 까닭에, 공간이 유한한 틀을 갖는다면 그것은 공간이 아니라 거대한 사물인 까닭에 작가가 구축하는 공간은 여전히 완벽한 공간이라 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공간을 구축하고자 하는 작가의 욕망은 애초부터 잘못된 것이란 말인가? 공간은 시각에 주어지지 않음을 속성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형상의 순수한 반대급부, 형상의 부재를 가리킨다. 공간은 형상이 아니라 형상이 머무는 장소, 형상을 에워싼 대기이다. 만약 시각예술이 형상의 바깥에서 펼쳐질 수 없다면 공간의 형상화는 헛된 노동이 될 것인가?

고명근_Stone Body15_필름, 플라스틱_185×60×60cm_2005

이 지점에서 형상의 악(惡)이 싹튼다. 그 악(惡)은 모든 사물을, 심지어는 공간마저도 형상으로 축소시킨다. 공간은 사물의 질서에 속하는 까닭에 몸이 의탁할 공간을 구축하는 것은 섭리에 해당한다. 공간에 대한 욕망은 탐욕이 아니라 사물에 대한 존중의 방식이다. 한편 공간이 사물로 전락하는 것은 형상화 작업에 수반되는 피할 수 없는 결과이다. 형상을 피해가려 하는 모든 작업은 다시금 형상에 귀속되고야 만다. 형상 부수기, 형상 바꾸기, 형상 지우기, 이 모든 형상의 부정태들은 결국 또 다른 형상을 거쳐야 한다. 추상, 일그러진 형상, 지워진 형상 등은 여전히 시각에 주어져 있기에 형상으로 머물러 있다. 그러나 형상을 피할 수 없다는 명백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형상으로 전락할 공간을 쌓는 작업은 여전히 의미가 있다. 만약 작가가 구축하는 공간이 절대적으로 투명한 공간이라면, 그것이 형상의 순수한 부재라면 그 공간은 결코 우리의 시각에 주어질 수 없다. 완전히 투명한 공간이란 시각에 들어오지도, 지각되지도 않을 것이며 말하자면 순수한 부재로 머물 것이다. 그것은 침묵이자 무의미이며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는 것과 같다. 그래서 비록 공간의 구축이 형상으로 떨어질지라도 우선은 발언이 필요하다. 공간은 형상이 아님을, 공간은 사물의 조건임을 알리기 위해서는 입을 열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형상을 통할 수밖에 없다. 순수하게 투명한 공간이란 지각될 수 없고 알려질 수도 없고 그냥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공간의 형상화는 그래서 완전한 무의미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지불해야 할 어쩔 수 없는 대가이다. 그런 점에서 작가가 구축하는 투명한 공간은 형상의 악(惡)을 최소화하려는 고뇌의 산물이다. ● 하지만 정작 그 악(惡)은 윤리의 잣대로 재단할 수 있는 악이 아니다. 그것은 선악의 너머에 있다. 그것은 또한 폭력성이 제거된 악이며 세계의 의미가 움틀 수 있도록 물을 뿌려주는 근원적인 악이다. 형상을 통하지 않고서는 어떠한 사물도 알려질 수 없는 까닭에, 순수한 공간이란 시각에 주어질 수 없고 단지 형상화된 공간을 통해서만 알려질 수 있는 까닭에 형상은 시각의 조건, 지각의 핵을 이룬다. 요컨대 형상은 인식과 지각의 필요조건이다. 형상의 덫을 피하고 싶지만 피할 수 없는 것은 그것이 세계의 구조이면서 공간의 질서에 속하기 때문이다. 그 덫을 피하는 길은 침묵밖에 없다. 하지만 침묵을 넘어서 세계의 무의미와 맞서기 위해서는 덫에 걸려야 하고 악(惡)을 실천해야 한다. 덫임을 알면서도 악을 저지르는 그의 작업은 그래서 무의미를 몰아내고 세계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걸어가는 험난한 길이다. ● 사진은 오랫동안 관찰과 기록의 도구, 세계에 대한 해석의 눈으로 여겨져 왔다. 그 눈은 세계를 보는 인간의 시야를 넓혀주고 지각의 깊이를 심화시켜 주었다. 그런 점에서 사진의 자율적인 역사는 시각 확장의 역사이자 세계에 대한 해석 다변화의 역사이다. 시야 바깥에 은둔하고 있던 세계의 모습은 기계적인 눈의 도움으로 그 베일이 조금씩 걷혀져 왔다. 하지만 그 대가로 지불해야 할 것 또한 많았다. 눈은 보는 것보다 보지 못하는 것이 더 많다. 시각에 대한 신뢰는 보지 못한 것을 세계의 역사에서 배제해버리는 폭력을 낳는다. 아무리 세계의 모습을 무한히 사진으로 채집하더라도 배제는 피할 수 없다. 수많은 성실한 사진가들은 이러한 배제를 피해가기 위해 더욱 열심히 노동하지만 결국 그것은 어쩔 수 없는 한계로 남는다. 고명근의 작업은 방법론을 달리 하여 이러한 시각의 한계를 근원에서부터 드러내 보이려 한다. 자신의 작업도 결국은 그 한계에 부딪치고야 말지만 그것은 의미의 끝이 아니라 오히려 의미가 시작하는 지점이다. 그런 점에서 시각의 한계와 맞서는 그의 작업은 시각예술의 조건을 묻는 질문이기도 하다. ■ 박평종

Vol.20051104d | 고명근 사진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