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예찬을 위한 타임라인 이미지

이정화 드로잉展   2005_1109 ▶︎ 2005_1115

이정화_Records of clivia lily_종이에 혼합재료, 드로잉_120×1260cm/A4×240_2005_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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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5_1109_수요일_05:00pm

갤러리 아트사이드 서울 종로구 관훈동 170번지 Tel. 02_725_1020 www.artside.net

자연예찬을 주제로 한 타임라인 이미지타임라인_타임라인이란 일련의 연속적인 사건, 특히 연대기적인 사건을 시각적으로 재현한 것을 말한다.주제 ● "이른 새벽.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본다. 아직은 인적이 드물어 적막감이 감돈다. 도심 한복판에서 살아서 인가, 아니면 내 정서가 메말라서 인가, 하루를 시작하기 전, 잠깐의 침묵은 내게 꿀맛과도 같은 영양제이다. 그렇게 한참을 말없이 있노라면 내게 조용히 다가와 손짓하는 놈이 있다. 베란다 한켠에 놓여 있는 화분 하나. 잠시 침잠의 세계에 빠져들고 있는 나의 유일한 방해꾼이다. 나는 나를 부르는 그 유혹에서 쉽사리 벗어날 수 없다. 내 눈길은 어느새 그 곳을 향하고 있다. 어제 작은 봉우리를 맺은 군자란이 오늘은 붉은 기운을 뽐내며 나를 맞고 있다. 이른 새벽 그 어떤 이가 이렇게 곱디고운 붉은 꽃단장으로 나를 맞이하겠는가..."

이정화_Clivia lily with black and white_종이에 혼합재료, 드로잉_270×273cm/A4×21_2005

이번 전시의 주제는 자연예찬이다. 나는 오랫동안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간에- 자연을 소재로 하여 작품을 다루어 왔다. 특히 이번 전시는 꽃을 주제로 하여 그 꽃을 통해 느낀 내 자신의 감정들을 표현해 보았다. 자연의 변화는 언제나 신기하기만 하다. 겨울 내내 깊은 잠을 잔 씨앗에서 뿌리를 내리고 싹이 트는 과정을 보면서 나는 생명의 경이로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고, 가녀린 꽃봉오리가 수줍게 고개를 들며 인사를 하는 모습을 통해 살아 숨쉬는 생명력에 대한 설렘과 희망을 갖는다. 그리고 만개한 꽃의 화려하면서도 당당한 자태를 보면서 그 속에서부터 뿜어내는 엄청난 위력과 함께, 이내 내일이면 초라하게 시들 안타까움에 시리도록 저린 텅 빈 절망감과 허무함을 동시에 갖는다.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고 했던가... ● 화분에 핀 꽃은 그 놀랍고도 역동적인 생명력으로 무미건조한 일상생활 속에서 저 밑바닥에 깔려있는 지친 나의 감정을 톡톡 건드리며 살아있는 내 존재를 확인케 해준다. 화분 속의 꽃, 즉 자연을 통해서 생명의 신비와 그 신비스런 자연의 경건함을 되새기면서 동시에 때로는 한줄기 희망의 빛과 때로는 처절한 절망의 늪 사이를 오가는 나의 살아 숨쉬는 모습을 본다. 온통 내 눈과 마음을 가로채 간 그 꽃은 -경건함, 설렘, 희망, 안타까움, 절정의 기쁨, 절망감, 허무감, 삶의 덧없음- 한 동안 내 기억 언저리에서 긴 여운을 남긴 채, 자연의 위대함 앞에서 꺼질 것 같고 곧 무너져버릴 것만 같은 하루를 맞는 내 자신에게 다시 삶이란 무언가를 일깨워준다. 그러면서 자연은 사는 존재의 이유를 내게 말해준다.

이정화_Records of lily_종이에 혼합재료, 드로잉_120×210cm/A4×40_2005_부분
이정화_Digital lily_종이에 혼합재료, 드로잉__120×210cm/A4×40_2005_부분

표현기법 ● 이제까지 몇 번의 전시를 통해서 보여진 절제되었던 브러시 터치나 고른 표면감과 대비를 이루는 이번 전시에서는 무엇보다도 역동적이면서도 표현적인 필선을 사용한 점이 과거의 표현 기법과 다른 차이점이라 할 수 있다. 이번 작업에서는 자연을 주제로 한 구체적인 이미지가 재현되었는데, 다소 추상적이고 단순화되었던 과거의 표현기법과도 또한 대조를 이루는 것이다. 추상적이고 단순화된 형태에서 벗어나 이러한 구체적 이미지 재현에 따른 표현기법의 변화는 컴퓨터를 이용한 작업의 영향 때문이다. ● 아이디어 포착을 순간에 그리고 즉시, 서술적으로 연결시켜서 재현시킬 수 있다는 컴퓨터의 특징은 즉석화의 도구인 드로잉의 재료와 아주 잘 어울리는 것 같다. 그래서 이러한 연속적 개념의 이미지를 빠르게 재현하기 위한 재료의 선택은 자연스럽게 드로잉 재료로 눈길이 쏠렸다. 드로잉 재료로서 다양한 종류의 목탄과 콘데, 연필, 색연필 등을 사용하였는데, 반복되는 필선과 표현적인 선들을 여러 번 겹치고 반복함으로써 자연히 깊이감과 공간감이 생겨나게 되고, 그 결과 질감이 강조됨으로써 전통적인 회화 또는 드로잉 작업에서 나타나는 고유의 물성이 강조되었다. 그럼으로써 디지털 프린트의 비개성적인 기계적 질감과도 대비를 시켰다. 서툴고 투박한 손맛과 정확하면서도 한치의 오차도 보이지 않는 기계적 속성과의 비교 또한 재미있는 작업과정 중의 하나이다. 나는 특히 이번 작업 과정에서 수작업을 통해 굳이 정확하게 묘사하려고 하거나 표현 결과를 염두에 두고 정확한 계산을 하려고 애쓰지 않았다. 그러한 과정은 나보다도 컴퓨터가 더 신속하고 정확하게 일괄 처리해 줄 수 있는 일임으로. 그보다는 오히려 의식적이고 인위적인 것, 계산적인 사고를 가능한 한 떨쳐버린 채, 즉흥적인 감정에 따라 색을 칠하고 강약의 리듬감을 살리면서 선을 긋고, 색과 필선을 덧대는 작업과정에서 즉각적인 나의 생각과 감정, 몰입된 나의 몸과 행동에 따라 선과 형태가 자연스럽게 드러나기를 기도했다.

이정화_Lily with polychrome_종이에 혼합재료, 드로잉__120×210cm/A4×40_2005_부분

표현방법 ● 표현 방법에 있어서는 반복적인 이미지 구현을 통한 시간성(timeline)을 시각적으로 표현해보고 싶었다. 정지 이미지가 아닌 동영상 혹은 애니메이션 이미지가 과거의 스틸 이미지(still image)와 다른 차이점이 있다면, 그 중에서 가장 뚜렷한 요인 중의 하나가 시간성을 나타내는 반복적 이미지의 연속성 개념일 것이다. 수년간 수작업과 디지털 작업을 병행하면서 양자간의 변화와 차이점을 직접 경험하고 체험하였다. 그리고 그러한 체험을 통해 시각 표현의 도구로서 이 두 가지 표현 방법에 관해서 깊이 생각해 보았다. 그러면서 이 두 가지 표현 도구를 자연스럽게 접목시켜 보고 싶은 호기심이 생겨났다. ● 우선 A4 용지의 프린터 용지를 사용하여 이번 전시의 주제가 되는 이미지를 여러 장 복사하였다. 이때 이미지를 프린트 할 때, 사진에서 드러나는 분명하고 또렷한 이미지를 대부분 지우고, 거의 테두리 형태만을 남기거나 부분적인 이미지만을 남긴다. 그리하여 프린트 된 종이 위에는 검은 선으로 된 라인 드로잉만이 남게 된다. 여러 가지 다양한 드로잉 도구, 예컨대 연필, 목탄, 콘데, 색연필 등을 가지고 형태만을 드러내는 이미지 위에 드로잉 작업을 한다. 드로잉에 의한 필선의 사용으로 인해 그 밑의 기계적인 프린트 인화의 흔적은 거의 대부분 없어지고, 손에 의한 수작업의 결과만 남게 된다. 최종적으로 컴퓨터 프린트에 의한 이미지는 없어지고, 전통적인 드로잉 기법에 의한 수작업만이 남아서 하나 하나가 완전히 다른 색과 형태, 이미지가 다시 드러나게 된다.

이정화_Manual Rose_종이에 색연필__120×162cm_2005

나는 이렇게 해서 얻어진 반복적인 이미지의 작업 과정을 매우 재미있게 엮어갔다. 복사된 동일한 이미지 위에 각각 드로잉 작업을 하면서 제 각기 다른 기분과 감성을 가지고 그 이미지를 상상하면서 작업을 하는 과정은 내가 마치도 그 자연의 이미지를 내 머리 속에 각인시키려고 애쓰는 과정 중의 하나라는 느낌이 들었다. 다시 말해 내가 순간 감동 받았던, 나를 설레게 했던 자연의 심오함과 경건함을 애써 잊고 싶지 않은 내 자신의 기억을 위한 몸부림이랄까... 그렇게 한 장 한 장 엮어간 반복적인 이미지의 나열은 내 생각이 머문 시간의 흔적을 나타내 주고, 내 몸짓과 내 정신의 혼을 기록한다. ■ 이정화

Vol.20051108b | 이정화 드로잉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