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어떤풍경

박병춘 수묵展   2005_1109 ▶︎ 2005_1128

박병춘_노란 바나나가 있는 풍경_한지에 먹, 아크릴채색_196×136cm_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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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5_1109_수요일_06:00pm

갤러리 쌈지 서울 종로구 관훈동 38번지 쌈지길 내 아랫길 Tel. 02_736_0088 www.ssamziegil.co.kr

박병춘의 절벽그림과 필선의 이데아 ● 먹그림의 필선은 그 자체로서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는 믿음이 짧지 않은 시간동안 동양화 또는 한국화를 둘러싼 (셀프)오리엔탈리즘을 재생산 해왔다. 박병춘의 진경산수 근작들은 이러한 필선의 이데아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그는 현장사생을 통해서 얻은 절벽이미지들을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절벽 자체를 화면 가득 배치해두고 그 속에서 자유로운 다양한 용필(用筆)의 자유를 구가하고 있다.

박병춘_낯선, 어떤풍경_한지에 먹, 아크릴채색_180×135cm_2005
박병춘_사랑이 담긴 풍경_한지에 먹, 아크릴채색, 콘테_190×136cm_2005

구조와 규모의 미학 ● 절벽그림을 통해서 필선 이데아를 실현하고자하는 박병춘의 구상을 검토해 보는 일은 우선 그가 어떻게 화면을 자신의 뜻에 맞게 구획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일로부터 출발한다. 박병춘의 필선실험은 화면 가득 절벽을 배치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는 화면 위쪽에 빼꼼하게 하늘을 남기고 절벽의 끝자락에 붙어 있는 나무들을 사실적으로 묘사해 둠으로써 절벽의 윗부분 경계를 가늠한다. 아랫부분에는 오랜 세월에 걸쳐 절벽을 깍아낸 물이 흐른다. 그 물 위의 앞 쪽 둔치에는 사람이 있어도 좋고 없어서도 좋다. 중요한 것은 위쪽 하늘과 아래쪽 물 사이에 확보된 널찍한 절벽이다. 박병춘이 이번 전시의 핵심인 붓질 실험을 위해서 절벽을 선택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절벽에 바짝 다가선 화가의 시선은 하늘과 물의 경계를 제외한 나머지 대부분의 화면을 형상재현을 넘어선 필선유희의 공간으로 만들어 놓고 있다. 그 넓은 절벽 앞에서 광풍이 휘몰아치듯 격렬한 붓질로 큰 덩어리를 잡아내는가하면 섬세한 세필로 자잘한 이야기들을 담아내면서 모필의 쓰임을 한껏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박병춘 근작들의 또 하나의 시사점은 주로 초기작에서 많이 나타났던 사물의 이미지를 풍경 위에 배치한다는 점이다. 초기작 이후의 풍경들에서 인물들의 이미지를 단정하게 배치하면서 다소간 착한 그림을 그렸던 박병춘이 다시 초기작에서 보여주었던 특유의 불온한 그림으로 선회한 것이다. 그의 풍경 속에 등장하는 사물들은 풍경의 맥락을 깨트려버림으로써 오히려 그림을 살리는 이미지들이다. 예를 들어 그의 그림에서 수박이 등장하는 이유는 의외로 간단하다. 사생을 나섰다가 무더위 탓에 절실하게 수박을 그리워했던 그 여름의 기억이 선명하기 때문이다. 집과 탑과 가족, 낙서, 노란 선 등 그의 풍경 위에 겹쳐있는 사물의 이미지들은 풍경과 동떨어진 이미지들이다. 가지런하게 자연의 경관을 옮겨놓은 풍경에 끼어든 이들 물건들은 도대체 갈피를 잡을 수 없는 떠도는 이미지들이다. 그것들은 작가의 개인적인 체험과 기억 속에서만 존재하는 사적인 기호들이므로 풍경의 가지런함을 저해하는 요소들로 작용한다. 수박이나 바나나와 소파와 우체통 등등의 사물과 절벽이 도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하나하나의 필선들이 모여서 나무와 물과 땅과 바위를 가리키고, 바위 위에 붙어있는 나무와 그 위의 하늘, 바위 아래에 이어진 물과 그 앞 땅의 경계를 통해서 바위를 절벽으로 인식하게끔 하는 일련의 지시작용으로 이루어진 절벽풍경이라는 견고한 재현의 장에 이렇듯 엉뚱한 사물이 개입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그것은 견고한 구조를 파괴함으로써 예술적 자유를 얻고자하는 박병춘의 전략이다. 자연풍광을 재현하는 풍경의 동어반복을 파괴함으로써 그는 재현회화를 넘어서는 회화의 세계를 획득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물의 이미지들은 초기작 이래 그가 놓치지 않았던 자유로운 영혼의 상징들이다. 다양한 필선으로 가득 찬 절벽의 바위 곳곳에 꼬물꼬물 재미난 도상들을 심어두고 있다. 그 작은 도상들은 절벽이라는 커다란 구조에 귀속하는 하나의 조형적인 요소들로 작용하면서 동시에 구조에 복무하는 선들을 파격적인 유희의 세계로 인도하는 장치이다. 정교한 필선들 사이에 배치된 이러한 도상들은 박병춘 특유의 자유분방한 상상력을 드러냄으로써 초심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그의 실험정신을 살려내고 있다.

박병춘_입술이 있는 풍경_한지에 먹, 아크릴채색_70×48cm_2005
박병춘_빨간우체통이 있는 풍경_한지에 먹, 아크릴채색_96×70cm_2005
박병춘_페러글라이딩을 타고 山水 위를 날다_한지에 먹, 아크릴채색_48×35cm_2005

필선실험 또는 붓질놀음 ● 까만 풍경에서 보여주었던 새까만 먹색의 강렬한 카리스마와는 달리 철저하게 선적인 요소로 채워진 신작들은 모필을 쥔 화가 박병춘이 붓그림 특유의 회화적 가치를 드러내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화폭의 대부분을 깎아지는 바위로 확보한 박병춘은 그 공간을 다양한 필선의 유영으로 채워 놓고 있다. 가히 '붓질에 필(feel) 꽂혔다'고 말할 만하다. 먹그림에 있어서 필선이 보여줄 수 있는 매력들을 찾아내는 데 주력했다. 붓은 사물을 관찰하고 그것을 회화적으로 재구성하여 평면위에 옮겨놓는 화가주체의 몸이다. 몸의 연장으로서의 붓이 만들어낸 결과가 선이며 그 선들의 조합은 모종의 형상을 만들어낸다. 선을 그어 사물을 옮기는 그림 그리는 행위의 한 가운데에 붓을 쥔 화가주체가 있다. 박병춘의 절벽그림은 선을 긋는 화가주체의 몸을 드러내기 위해 바위의 면적을 극대화한 후 그 속에서 자유로운 필선의 실험을 펼치고 있다. 그것은 모필을 운용하는 화가주체의 유희본능을 충족하는 붓질놀음의 세계이다. 오랜 세월동안 모래와 흙이 쌓인 수평의 퇴적 띠가 역력하게 드러나는 수평 절벽 그림은 면벽수도 하듯 선을 긋는 화가에게 있어 하나의 선긋기의 고단함을 실감하게 하는 수련의 장이기도 하다. 풍화작용으로 떨어져나간 바위들의 거친 표면, 거대한 압력으로 인해 휘어진 지층의 곡선 등 시간의 단면을 드러내는 절벽의 표정을 담아내는 데 부벽준이니 피마준이니 하는 준(準)의 법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 박병춘의 대작들에 나타나는 바위들이 구조적으로 필선의 자유로움을 획득하는 계기를 부여하고 있다는 점은 같은 구조를 가진 소품들이 상대적으로 정갈한 재현회화의 형식에 가깝다는 점을 반증으로 들어보아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대작들에 비해서 30호 크기의 소품들은 기억의 풍경, 빨간우체통이 있는 풍경, 소년이 있는 풍경 등 풍경과 단일 사물이미지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단촐한 구성이 돋보인다. 그런가 하면 15호의 작은 그림들은 사물들의 개입이 적은 정직한 선묘 그자체로 이루어진 그림들이다. 작은 화면에서 이룰 수 있는 섬세한 필선들에다가 단먹으로 그려낸 단정한 그림들이다. 넓은 화면에서의 필선실험보다는 그림 사이즈에 걸맞은 심플한 이야기를 집어넣는 것으로 구조의 묘미를 살림으로써 규모의 미학을 실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비해 예를 들어 청송에서 만난 벽을 그린 수박 세 덩어리와 참외 하나를 넣어둔「낯선 어떤 풍경」같은 작품은 콘테와 먹을 섞어서 고깔모자 붓질로 나무를 묘사하는가 하면, 꼬물꼬물한 하늘과 강물 사이를 온통 필선으로 가득채운 붓질놀음의 세계로 만들고 있다. 커다란 면적을 마련해서 그 공간을 유영할 화가주체의 자유로움을 확보하는 짜임새는 규모에 맞게 운필의 맛을 달리하는 노련한 화면운용을 돋보이게 해준다. ● 꼭대기 나무가 매우 작게 묘사된 것으로 절벽의 크기를 짐작할 수 있는「사랑이 담긴 풍경」은 중국의 십도에 있는 150미터 높이 절벽을 그린 것이다. 화면 속의 연꽃과 참외, 모란, 똥 등의 사물 이미지와 등산, 섹스, 패러글라이딩 등 인물들의 외삽들은 제목 그대로 사랑이 담긴 풍경이자 삶이 있는 풍경이다. 화면 가득한 바위의 수직선들은 그 자체로 바위를 가리키고 있다기보다 필선의 유희로 가득한 화가주체 자신 의 자유공간에 다름 아니다. 선의 움직임을 극대화하기 위하여 수평의 선으로 이뤄진 바위는 사물의 특성상 그 자체로 훌륭한 필선실험의 대상인 것이다. 군데군데 파스텔을 쓰는가 하면 드물게 번짐이 있는 붓질과 수직선들이 교차하는 거대한 화면은 차라리 선긋기나 점찍기로 일관하는 추상회화의 단면을 보는 듯하다. 바로 이것이 박병춘이 절벽그림을 통해서 절벽이라는 구조에 기능하는 필선들을 필선이라는 개체에 복무하는 구조로서의 절벽으로 역전시키는 대목이다. 하여 우리는 운필을 물신화하는 동양화 이데올로기로부터 벗어나 진반농반으로 "필(筆)은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거니까~요"라고 말할 수 있는 새로운 깨달음을 갖기까지 붓질 자체의 강박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내공을 쌓아온 화가의 손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박병춘_노란우체통이 있는 풍경_한지에 먹, 아크릴채색_48×70cm_2005
박병춘_노란소파가 있는 풍경_한지에 먹, 아크릴채색_70×48cm_2005

진경산수와 필선이데아 ● 청송의 옥계 계곡을 그린「노란 바나나가 있는 풍경」을 보면, 하늘 아래 절벽 위쪽은 매우 사실적인 풍경이며, 아래는 바위와 물이 만나는 경계이다. 그 가운데 커다란 화면은 박병춘이 붓질로 노니는 필이 꽂히는 공간이다. 격정적인 감흥을 널찍한 평붓으로 쓱쓱 쓸어서 담아내는가 하면 태권브이, 비키니 수영복, 인물, 연꽃 등이 곳곳에 널려있다. 실제 풍경과는 다를 것이라는 예상을 깨고, 그의 화첩에는 정확하게 일치하는 모필사생의 습작이 있다. 아무리 복잡하게 얽혀있는 구조일지라도 정확한 사생에서 비롯된 풍경이라는 원칙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그의 절벽그림은 절벽에 다가서서 섬세하게 관찰한 후에 그것을 정교하게 재구성 해낸 결과물들이다. 이러한 시각은 (어안렌즈를 쓴다고 하더라도) 카메라가 한 컷으로 담아낼 수 없는 것이다. 오직 절벽 앞에 선 화가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시각이다. 사생화첩 70권의 내공을 쌓아온 화가 박병춘의 저력은 이렇듯 모필사생에서 뽑아내어 재구성한 진경산수의 진정성에 있다. 필선의 실험을 통해 예술적 묘미를 살리되 필선을 물신화하지 않는 태도야말로 먹그림을 대하는 이의 가장 중요한 예술적 태도일 것이다. 종이위에 붓에 먹을 묻혀 그리는 전통회화에 있어 종이와 먹과 붓의 3요소는 그 자체로 물신화 하는 경향이 있다. 하여 우리는 동양화의 정신성을 이러한 물질적 요소로부터 나오는 것인 양 호도하는 시각에 기대어 이른바 동양화 신비화 전략을 생산해내는 세태와 더불어 살고 있다. 이러한 전략은 스스로를 타자화하는 시각이다. 내 안의 오리엔탈리즘을 끌어안고 당대 예술을 논하는 것은 스스로 굴레를 쓰고 달리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 박병춘의 실험이 남다른 것은 '모필로 그은 선'인 필선 자체를 물신(fetish)화하는 필선페티쉬를 넘어서서 모필의 가능성을 극대화하는 실험을 지속하고 있다는 점이다. 박병춘은 조형적 이상으로서의 필선의 이데아를 진경산수와 결합한 근작의 절벽그림을 통해서 모필의 허상을 넘어서고 있다. ● 마치 조소작가들이 인체조형작업을 통해서 구조를 찾아들어가듯이 화가 박병춘에게 있어서 절벽은 그것을 절벽으로 만들어주는 기본적인 장치들을 제외하고는 온전히 자신의 붓질놀음에 복무하도록 한다. 물론 박병춘의 필선실험을 객관화해주는 것은 풍경화이다. 그는 풍경화라고 하는 물질적 존재를 통해 자신의 붓질 이데아를 실현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풍경화가 세잔의 정물이나 생빅트와르 산과 같은 의미를 가지는 것은 아니다. 세잔은 세계를 기본적인 조형요소로 파악하고 그것을 담은 사물로서 풍경이나 정물을 대했다면, 박병춘은 대상을 물화(reification)하지 않고 함께 호흡하는 생동감 넘치는 장면이나 사건으로 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박병춘에게는 철저한 현장사생이라는 실천적인 예술행위가 있다. 그가 그린 절벽그림들은 번지없는 산수가 아니라 명확한 주소지를 가지고 있는 진경산수라는 점이 중요하다. 요컨대 박병춘의 풍경은 관념산수가 반복해왔던 보도 듯도 못한 산수의 이상화된 덧없음이 아니라, 생생하게 살아있는 우리 주변의 풍경이라는 점을 다시 새겨보아야 할 것이다. 이점을 전제로 그는 그 풍경의 실체들을 자신의 필선실험의 무궁무진한 장으로 활용하면서 회화적 요소로서의 붓질 자체의 매력을 한껏 탐색하고 있는 것이다.

박병춘_낯선, 어떤풍경_한지에 먹, 혼합재료_190×136cm_2005
박병춘_빨간소파가 있는 풍경_한지에 먹, 아크릴채색_96×70cm_2005

박병춘의 성산동 작업실 화장실에는 걸터앉는 좌변기가 아니라 흔히들 양변기라고 부르는 쪼그려 앉아서 일을 보는 변기가 있다. 이 양변기는 쪼그려 앉은 사람으로 하여금 온몸을 지탱하며 균형을 잡기 위해서 평소에 거의 사용하지 않는 정강이와 장딴지의 근육을 심하게 자극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양변기는 그리 길지 않은 시간에 걸쳐 몸에 대한 깊은 사색을 이끌어 낸다. 박병춘의 출품작들 가운데 150호 대작 여덟 점은 우리로 하여금 평소에 그 중요성을 별로 깨닫지 못하는 정강이와 장딴지 근육을 장시간 사용할 기회를 제공한다. 대개의 커다란 화면 뒤로 멀찍이 물러서서 한눈에 그 짜임새와 분위기를 바라보게 만들지만, 그의 그림은 가까이 다가가서 허리를 굽히거나 쪼그려 앉아서 자세히 들여다보게 만들기 때문이다. 박병춘의 그림 앞에 바짝 다가가 쪼그리고 앉아 세심하게 그의 필선이데아에 심취해 보시길 권면한다. ■ 김준기

Vol.20051109e | 박병춘 수묵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