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숲

2005년 관훈갤러리 공모당선 민재영 수묵채색展   2005_1116 ▶︎ 2005_1125

민재영_사람숲_한지에 수묵_100×136cm_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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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5_1116_수요일_05:00pm

관훈갤러리 서울 마포구 관훈동 195번지 Tel. 02_733_6469 www.kwanhoongallery.com

나의 타자가 나이다 ● 한국화라는 용어를 국수(國粹)적으로 선택함으로써 '전통'과 근대성의 대립이 더욱 분명해지고 양자 중 하나를 가치 판단의 규범이자 진로로 설정하는 양상이 오랜 동안 지속되었던 화단에서 최근의 새 바람이 불고 있다. 전통과 현대라는 두 개의 세계를 하나의 화면에 혼용, 충돌시키는 작업들이 그것으로 고래의 화법과 외래의 화법을 조우하게 함으로써 한국화를 둘러싼 화단의 규범과 진로에 대한 권위와 그 허위에 대해 저마다의 의견들을 내 놓고 있는 것이다. '일군의 작가'들은 한국화와 관련된 미술계의 시각이 제도적 관행에 불과한 것으로 보고 동서고금을 가로지르는 이미지의 횡단으로 습관화된 한국화의 지각체계들에 대해 도전한다. 또 다른 작가들은 한국화라는 관습화된 분야의 권한범위 내이긴 하지만 새로운 유행에 동참한다는 면에서 이질성의 충돌을 전략적으로 선택한다. 어떤 식으로든 일군의 작가들이 보여준 창작 사례들은 현재의 한국화단이 안고 있는 부조리함에 대한 실존적 선택으로 볼 수 있고 그런 면에서 그들의 전유 행위는 나름대로의 현실성과 진정성을 지니고 있다.

민재영_PAUSE-얼굴_한지에 수묵, 채색_100×136cm_2005

예술이 자신을 틀지우는 제도에 저항하고 부정하는 것은 모더니즘 미학의 본질을 이루었을 만큼 결코 생경한 주제가 아니다. 오히려 그 과정에서 창작자라는 자아의 극단적 절대화가 진행되었고 예술적 창작이 '자유'의 실현이자 수호로 인정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유인으로서 예술가가 제도화되는 아이러니한 신화들이 발생하였다. 그러므로 실제로 작가들이 진정 자유로운가에 대해서는 극히 회의적일 수밖에 없다. 근대주의의 계몽철학이 자유를 고안함과 동시에 규율을 제안하였듯이 자유란 또 하나의 상상계이지 않을까. 동양화가로서 민재영은 한국화의 규범과 전통, 한국화에 대한 화단과 일반인의 시선으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한 자신의 현실 상황과 관련한 작가적 상황을 화폭에 드러내고 있다는 면에서 상기한 '일군의 작가'들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민재영은 단순하고 정직하며 직접적으로 자신의 '갇힌 상황'을 드러낸다는 면에서 그들과 구별된다. 여기서 내가 '갇힌 상황'으로 묘사하고자 하는 것은 한국화의 기성 질서와 체제의 가장자리에 있으나 그것들의 전복에 대해서는 유보적인 내부자로서 민재영의 상황이다. 민재영은 그림을 통해 갇힌 상황에 함몰하지 않으며, 그 속에서 반성적 노력이 필요함을 깨달은 것 같다. 그의 반성이 구체제로서 한국화 내부의 순수한 정화를 위함인지, 외래 체제와의 감응을 자기 확장의 계기로 삼는 것인지는 앞으로 많은 시간을 두고 관찰해야 할 것이지만, 성찰적이고 실존적인 반성의 방법은 과도한 자유를 누리는 듯한 작금의 작업양상들과 비교하여 찾기 어려워진 작업임이 분명하다.

민재영_사람숲_한지에 수묵, 채색_136×250cm_2005

민재영의 그림들이 브라운관 TV의 주사선을 모티프로 한 '가로선들의 중첩'으로 바뀐 것은 2002년 무렵이다. 도시인으로서 느끼는 일반적 공허와 낯섦을 형상화하면서 타인과의 소통과 공감을 모색하였다고 요약할 수 있는 이전 그림들의 일상적 붓질이 규칙적인 가로선으로 바뀐 것이다. 민재영의 그림들이 변화를 겪게 된 계기로는 작가의 그리 신선할 것 없는, 이번 전시에서도 이어지고 있는 도시인에 대한 주제의식에서라기보다는 새로운 회화적 형식과 기법의 모색이 변화의 모터로 작용한 듯하다. 초기 그림들은 수묵과 함께 아크릴릭을 혼용하였다. 지금은 어떤 이슈에도 끼지 못했을 '혼용'이 당시 화단의 냉담한 반응으로 확인되었다는 민재영은 오히려 '혼용'의 실체를 문제삼고 반성함으로써 새로운 돌파구를 찾게 되는 것이다. 형식이나 매체의 측면은 결코 그림의 내용이나 주제와 무관한 것이 아니며 함께 회화적 제도와 시각 체제를 형성하는 것임을 새삼 환기할 필요가 있다. 그의 형식적 변화는 회화적 주제의 변화를 동반하였다. 민재영의 두 번째 전시가 사진기의 시선으로 본 도시의 내부였고 지하철, 버스, 거리 등을 클로즈업된 스넵 사진처럼 그려내었다. 수묵의 느림과 서정성에 대한 기계복제의 즉각성과 사실성을 교차시키며 도시 내부를 관찰함으로써 도시를 전유할 수 있는 강력한 수단을 가진 화가의 면모를 어렴풋이 지닐 수 있었다. 지난해 세 번째 개인전에는 조망시점으로 눈을 높였고 사진기가 아닌 TV 모니터로 비친 영화를 참조함으로써 주사선과도 같은 수묵의 선들이 출현하게 되었다.

민재영_PAUSE-길 위에서_한지에 수묵_130×170cm_2005

이번 전시에도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뚜렷한 회화적 형식의 특성인 '가로선들의 중첩'은 새로운 내용적 가능성과 결부된다. 민재영의 가로선들은 얼핏 쇠라식 색점 환원을 연상시키지만 지속성과 불변의 미학을 염원하였던 쇠라의 안정감에 비해 흔들리고 부유하며 모호한 불안감을 유도한다는 면에서 대조적이다. 그것은 쇠라의 철저한 화면 재구성과는 달리 스스로 촬영한 사진의 한 컷만을 모티프로 삼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표현 형식인 가로선이 근본적으로 부유하는 전기적 빛의 유동성과 덧없음을 간취하기 때문이다. 사진을 죽음에 대한 저항으로 보는 바르트의 생각이 일깨우듯, 기억은 사진과 같은 형상을 통해 육신을 얻고 망각과 싸우며 영원성을 얻으려는 유한한 인간을 영속시킨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사진의 매혹은 유한한 인간이라는 자명한 현실을 새삼 확인하는 순간 발생한다. 다시 말해 이제는 더 이상 실재하지 않는 대상을 보며 깨닫는 상실감과 노스탤지어들이 오히려 매혹이다. 이제는 사라졌으므로, 그래서 이미지로만 남았기에 더욱 만감이 교차하는 게 사진이다. 회화의 이미지가 영원한 안정감을 드러내기보다 덧없는 무상함으로 흐를 때 사라질 운명의 모든 실존들에 대한 유한자 인간의 내면이 드러날 가능성이 높아진다. 민재영의 가로선들은 그 무수한 줄긋기와 중첩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형상을 표현하지 못함으로써 유한하고 불안한 인간적 기억의 상과 관련될 수 있다. 유한할 뿐만 아니라 불안정하고 분산되었으며 모호하기까지 한 인간의 기억상은 사진보다 더 절실하고 시급한 기록을 필요로 한다. 회화적 기록은 사진과 같은 망각에 대한 저항이기 이전에 인간의 실존을 확인할 최소한의 지평과 관련될 수 있다. 그렇다면 보다 근본적이고 필수적인 활동이 될 수 있다.

민재영_P사람숲_한지에 수묵_110×150cm_2005

그런데 나를 어렵게 만드는 것은 민재영의 그림이 항상 (적어도 내가 본 그의 모든 작업들이) 불확정적인 기록이라는 데 있다. 그것은 주로 인상과 관련되고, 전반적인 회화적 정조와도 연관된 지각 판단인데, 민재영의 불확정적임은 내가 보기에 판단의 유보이거나 확신의 결여에서 유래한다. 그는 도시 속의 사람들을 그리면서도 도시와 사람들에 대한 분명한 성찰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가 보여주는 도시인은 현대 도시의 거주자이자 문명인이며, 메갈로폴리스 서울의 시민이 아니라 집합적이고 분류적 개념으로서 인간에 가깝다. 조망의 시점을 분명한 특징으로 이어가는 이번 전시작에서도 나타나듯 개별자의 실체는 묘사되지 않고 주변과의 관계와 상황을 드러내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조망의 시점과 가로선의 중첩은 모두 인간의 매개화된 관계를 연상시킨다. 인간이 관계를 통해 자신과 타자를 구분하고 경험과 의식의 지평을 넓혀가는 것은 불변의 진리와도 같다. 그런데 하나의 공리라 할 '관계맺음으로서의 인간'을 드러내는 것이 어떤 회화적 매혹을 지닐 수 있을까? 내가 보기에 회화적 매력을 위해서는 공리 자체의 정당성보다 그것에 대한 민재영의 개별 체험과 민재영 특유의 관계맺음이 드러나야 함을 주장할 필요가 있다. 즉 공리와 개별성 사이에서 양자의 관계맺음이 서로의 고유성과 어떻게 함께-가능(compossibility)한가를 나름대로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이 점이 나를 어렵게 만든다. 아마도 민재영의 고민도 이 부분일 것이다.

민재영_PAUSE-오후_한지에 수묵, 채색_148.5×210.5cm_2005

의미심장하게도 현대적 대중, 대량, 일방 관계를 표상하는 텔레비전의 의미를 뒤집어 메를로-퐁티는 텔레-비전이라는 것이 일종의 고립된 주체의 초월과 타자들의 공감적 진입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런 그의 생각은 우리가 상정하는 눈의 보기 행위에 대한 다른 이해를 전제로 한다. 그는 「눈과 마음」을 통해 눈이 위로부터 사물들을 바라본다면, 마음은 보는 이를 조감되는 세계 속에 몰입시킨다고 지적하며 그 이유로써, 잘 알려진 대로 화가의 '신체'를 설명하였다. 화가는 자신의 머리 속에 떠올린 이미지가 아니라 지각된 세계와 얽혀 있는 자신의 신체로 그림을 그린다. 거울은 내가 보면서 보이는 것처럼 나의 신체는 세상의 영도(零度)로서 지각의 출발점이지만 세상 속에 둘러싸여 있는 상태로서 신체이다. 시각적 소유 행위를 본질로 하는 회화라는 존재는 '나'라는 신체로부터 비롯되지만(보이는 것) 나를 둘러싼(보이지 않는 것을 포함하는) 것들의 굴곡지고 주름지며 걸쳐있는 관계를 드러내는 신체적 행위인 것이다. 나는 이 난해하지만 의미 있는 메를로-퐁티의 화가의 신체가 '체험'(Erleben, lived experience)에 대한 성찰을 통해 지혜를 얻는다고 본다. 주체의 육화된 경험을 말하는 체험은 신체와 세상이 만나는 장이자 신체와 세상을 두루 의미 있게 만드는 에너지이며 체험에서는 신체와 세상이 어느 것으로도 분리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체에 새겨진 의미'를 드러냄으로써 세상과 '함께 가능한' 자신을 볼 수 있다.

민재영_사람숲_한지에 수묵_130×170cm_2005

나는 민재영이 세상을 보는 방식에 대해서가 아니라 세상을 체험하는 방식과 체험된 신체의 의미를 드러내는 방식에서 일정한 편중과 한정을 본다. 굳이 비평적 의미를 부여하자면 매개적 경험의 전면화 속에 구석에 몰린 신체적 체험과 그 한계선을 지각하는 화가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메를로-퐁티의 구분을 따르자면 민재영은 마음으로 대상을 보고 있을 뿐 신체적 눈으로 체험한 인간과 도시는 그리지 않고 있다. 그는 도시를 오가며 생활하지만(그의 집은 분당이다.) 도시는 그의 간이역이며 도시인은 대상화된 실체로서 단자화 타자들이었다. 그의 신체적 눈은 늘 카메라 렌즈에 가려졌으며, 텔레비전 주사선이 모티프이자 회화로 구성되는 이중재현 속에 그림이 제시된다. 민재영은 무수한 도시경험을 출사를 통해 수행하였다고 반박할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의 시각에 앞선 지각 도구와 경험보다 근본적인 체험 부재가 문제될 수 있음도 사실이다.

민재영_사람숲_한지에 수묵, 채색_74×100cm_2005

나는 민재영의 그림이 근본적으로 화가로 살아감에 대한 실존 풍경이라는 데서 최소한의 의미를 건져 올리고 싶다. 실존은 보편적 관심이기도 하면서 회화적 고유성의 문제로만 환원될 수 없는, 고리타분하지만 생각해야할 과제라고 본다. 민재영의 회화에는 영상 미디어의 지각 경험이 마치 직접적이고 정서적으로 연루되어 있고 참여적이고 경험하는 신체 속에 뿌리박고 있다고 보는 영상 미디어의 환경적 편재성(ubiquitousness)이라는 관념과 결부되었다.(나는 이 편재성을 관념으로 보고 있다는 점에서 많은 미디어 이론의 도구주의적 진화론과 분리되고자 노력한다.) 그러한 관념의 피상성은 실재(인식)의 왜곡과 연관되기도 하지만 예술적 모티프로 차용되어 다양한 세상을 그려내기도 한다. 후자의 경우에서 민재영은 상상력을 활용하기보다 경험을 끌어들인다. 민재영에게 '미디어 편재성'은 자신을 둘러싼 한국화가로서의 삶의 경험을 비출 거울일 수 있는 것이다. '미디어 편재성'은 보편적 공리처럼 이해되는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상상계에 불과한) 것이고 한국화가로서의 경험은 민재영의 고유한 상황이라면 그는 공리와도 같은 관념을 매개로 자신의 현실을 드러내는 방법을 선택했다고 말 할 수 있다. 적어도 이러한 정황 이해에서 민재영의 선택이 지닌 작가의 실존 풍경이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민재영_PAUSE ⅩⅨ_한지에 수묵, 채색_55×70cm_2005

이제 서문으로서는 좀 길고, 지극히 사적인 편지쓰기에 해당하는 나의 생각이 끝으로 이른다. 나 역시 민재영과 같이 최선을 다하는 작가들에 대한 진술의 체험적 어려움을 공유한다. 나의 체험적 어려움은 대상의 숭고함에서가 아니라 진솔함에서 오며 계시나 가르침으로부터가 아니라 공감과 깨우침으로부터 연유하는 어려움이다. 즉 민재영의 상황을 통해 나를 보기 때문이다. 내가 말할 수 있는, 굳이 말하는 것은 단지 말하는 자로서 드러날 수 있기 때문일 뿐이다. ● 나는 민재영에게 삶을 다른 몸살이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삶이 몸살이와 마음살이라는 두 가지의 살이로 이루어졌다는 깨달음을 현대철학이 제시하였고 우리말이 입증하듯(몸과 마음은 하나로서  에서 연유한다), 민재영의 '살이'가 실체로서 신체와 마음이 함께 체험하는 살이의 풍경이어야 한다는 것이다.(물론 나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다.) 엠마누엘 레비나스가 이야기하듯, 내가 나로서 홀로서기를 하며 생존하는 과정은 삶의 향유와 불안이 끊임없이 교차하는 세계 속에 자신의 설자리를 점유하는 것이며 그 힘겨운 과정에서 타자의 얼굴과 마주침에 대해 눈뜰 것을 제안하고 있다. 그것은 체험을 영도로 세상과 감응하는 '나'이자 타자 속에서 보는 나의 얼굴이다. 민재영의 그림은 나르시시즘의 창으로서 텔레비전을 은유하는 것이 아니다. 모호하고 이중적이며 확신의 결여인 채로 살아가는 현대인의 모습이 비쳐진 거울이고 그 속에 민재영이 보는 홀로서기의 단면이 있다. 그러나 홀로선 '그들'을 알지 못하며 그들과 민재영 또한 서로를 보지 않는다. 그것은 나의 얼굴과 표정에 비친 타자를 허용하지 않는  살이의 방식이다. 다시금 함께 가능한 방식을 묻지 않을 수 없다. 무수한 홀로서기의 어려움들 앞에. ■ 안인기

Vol.20051112e | 민재영 수묵채색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