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도화된 풍경

김지은 개인展   2005_1123 ▶︎ 2005_1211

김지은_무지개떡 프로젝트5-강동 성원 상떼빌_캔버스에 유채_130.3×162.1cm_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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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5_1123_수요일_05:00pm

인사미술공간 서울 종로구 관훈동 100-5번지 Tel. 02_760_4722 www.insaartspace.or.kr

수신불량 리얼리스트, 능동적 관찰자 되어 돌아오다. ● 딱 6년 전인 99년, 서양화과 4년 재학생 김지은은 그 무렵 전력투구하던 수신불량 TV 수상관을 베끼는 연작에서 빗겨간 입체작업 하나를 내놓는다. 「복합매체」수업 과제물로 제출한「마우스로 그림그리기」가 그것인데, 모니터 화면에서 이미지를 구현하는 보편적 도구인 포토샵 그림판과 툴바를 고스란히 고지식한 캔버스에 확대한 크기로 옮겨 그린 평면과 그것을 정조준 하고 있는 턱 없이 거대한 대형 붓 조형물의 조합이었다. 각각 21세기와 16세기적 재현도구를 대표하는 포토샵 그림판과 고전적인 붓 사이의 거리감은, 16세기적 도구를 손에 쥐고 21세기를 맞이하는 1999년 미대생의 정체성을 투영한다. 그 해 겨울 대학원 수료를 코앞에 두고 엇비슷한 정체성 혼란기를 겪던 나는, 심사 통과 후 미대 50동 벽면에 동기생의 졸업 작품들과 나란히 붙어있던 김지은의 TV수상관 베끼기 그림을 지켜봤고 같은 날 새벽 황량한 도서관 열람실에 앉아 그 누구도 주목하지 않을 「'99 서울미대 서양화과 (학부)졸업미전과 4명의 출품작가에 대한 소견서」라는 거창한 제목을 단 리뷰 한편을 작성했다. 그리고 거기에 김지은을 짧게 노트한 바 있다. "흐리게 그리기를 통해, 표면 위의 효과에 집착하는 작법으로 미술이 당면한 흐릿한 처지와 매력을 재현하며, 그리기의 즐거움에 몰두하는 구상주의자"일 거라는, 참으로 무색무취하고 평면적인 리뷰다. 당시 흐릿한 TV 모니터를 부지런히 그려대던 그 학생이 이제 인미공 기획초대전에 '부동산적 풍경화'라는 기상천외한 제목을 들고 돌아왔다. ● 대략 90년대 전반까지 창작현장을 무리하게 이분 구도(형식주의 vs. 사실주의)로 장악한 두 개의 미학 냉전주의의 균형이 무너진 후, 절대 미학 계보에서 벗어난 yKa(한국청년작가!)들은 다채로운 주제를 향해 자기 정체성을 찾아야했고, 그 중 가장 빈번히 각광 받은 주제군은 '핍진적 일상성'과 '도시주의' 그리고, '그리기의 본질'관한 해답 없는 고민이었다. yKa의 다른 주제들 보다 굳이 이 셋을 나열한 까닭은 세 주제의 벤다이어그램 교차점에 김지은이 놓여있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한편 자신의 작업 이미지에 가장 적절한 제목을 골라내는 김지은의 언어 선별력도 포함시켜야겠다.

김지은_무지개떡 프로젝트1_캔버스에 아크릴 채색_91×91cm_2004
김지은_방진막_캔버스에 유채_91×91cm_2004

일상성은 천호동과 성내동 사이를 오간다. ● 김지은이 일상을 취급하는 yKa 전문 작가군과 대비되는 까닭은 사사로운 주제인 일상을 도시주의라는 무겁고 공적인 주제와 결합시켰기 때문이기도 하고, 일상주의 회화들이 흔히 뒤집어쓰는 감상적 개인주의를 빈틈없이 제어하는 가치중립적 화면 구성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인적이 실종된 그의 무채색 정물화와 풍경화들은 모두가 공감할 법한 보편적 문제의식을 실어 나른다. 99년 TV화면 연작은 일상에서 목격되는 TV화면을 반복적으로 옮겨오는 것이 큰 줄거리일 테지만, 여기서 차별화된 본질은 재현된 화면 모두가 심하게 일그러진 수신불량 상태라는 점이고, 그것이 작위적 연출이 아니라 실제 김지은 집의 TV 상태를 재현하고 있다는 점이다. 김지은 사적 소유물의 저품격 화질 속으로 공적으로 고품격인 심은하와 지누션을, Invisible한 상태로 재현하고 있다. 그러니 그들이 보일 턱이 없다. 보이지 않는 화면을 턱없이 그려댄, 작품의 제목처럼 '비 내리는 TV(Raining in the TV)'는 아무것도 인식할 수 없는 그녀 개인 소유물(TV 모니터)를 재현하지만 이는 아무것도 읽어낼 수 없는 침묵하는 화단 일반의 추상주의를 비판적으로 알레고리 한다. 고물 TV라는 중간매체를 거쳐 사인(私人) 김지은과 유명스타 공인(公人)사이의 거리는 더욱 이격되고 그녀의 시각경험을 지배한 불친절한 수신불량 수상기는 그녀가 교육현장에서 주입받은 추상주의의 도그마를 유비하며 알레고리 한다. 말하자면 TV연작은 김지은이 직면한 일상성으로 그녀의 시각 경험이 무엇에 의해 규정되는지를 탐구한다. 건축물 관련법령을 교범 삼은 이번「부동산적 풍경화」역시 작가가 직면한 일상을 다만 사사로운 현실 경험으로만 매듭짓지 않고 보편인의 시각경험 일반을 규정하는 제도주의의 문제로 접근한다는 점에서 99년의 아이디어가 살을 붙인 격이다. 그러나 차이점은 99년의 주제를 중개하는 매개는 작가의 수신불량상태의 TV 모니터였고, 그로 인해 자신과 동기생이 직면한 조형 환경을 고찰했다. 반면 2005년 매개체는 처음에는 CCTV라는 점에서 종전과 동일하지만 차츰 도시라는 거대공간을 주목하고 그 배후에 비가시적인 관료적 규정들이 놓여있음을 폭로한다. 이번 역시 김지은의 일상 취급법은 개인의 주관적 경험을 교범삼지 않는다. 김지은의 사적 시각체험은 천호동에서 성내동을 오가는 사이에 형성되었다지만, 그것은 대한민국의 도심을 바라보는 시각경험 전체와 정확히 일치하고 이 같은 동일화는 범령에 따라 통제되고 규정된다. 따라서 김지은은 자연스럽게 자신의 조형 교범으로 관련 법령을 뒤져야했다.

김지은_부동산적 풍경화2_캔버스에 유채, 레터링_80.3×100cm_2004
김지은_조형물과 고기불판_캔버스에 유채_60.6×72.8cm_2004

16 분할된 CCTV 적 견지에서, 4 분할된 제도적 풍경화까지. ● 중앙도서관에 비치된 도난방지용 16분할 지원 CCTV 모니터는 종전 수신불량 TV 모니터의 발전적 연장선이다. 관료적 시선은 CCTV를 통해, 혹은 관련법령의 제재를 통해, 보편인의 시각체험을 합법적으로 규제한다. 그 결과 피감시자인 다수 보편인은 소수 감시자의 처지에 동화되어 도시를 지각하고 미적 취향마저 제약받는다.「무지개떡 프로젝트」와 「부동산적 풍경화」는 건축물 관련 법령이 알게 모르게 장악하고 있는 우리들의 미적 취향과 제한된 시야를 폭로한 작업이다. 공사 중인 주변 건축물에서 반성 없이 마주하는 3색 방진막에 대한 작가의 조형적 고찰이 '무지개떡'으로 희화된다.「무지개떡 프로젝트 1」은 캔버스를 방진막의 삼색으로 채운 색면추상 작품이다. 그것은 방진막을 지시하나 실은 색면추상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도심에서 흔히 관찰되는 조야한 싸구려 방진막은 '무지개떡'이란 이름을 매개로, 고상하고 흔치 않은 전시장 안의 색면 추상과 대등한 지위에서 사유되고 체험된다. 실제로 그 둘은 판이한 탄생 배경과는 달리, 흡사한 속성과 운명을 공유한다. 야외(제도권 도시)와 실내(제도권 화랑)를 통일한 이 두개의 상이한 무지개떡들은 모두 평균인의 시각 세계를 규정하며, 미적 몰취향의 절대주의를 강화하고, 그 어떤 명령문도 포함하지 않고서 전국의 도심과 전시장 그리고 구성원들의 인식체계 위에 군림했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해서 수작업으로 캔버스에 옮겨져 전시장 벽에 걸린 조야한 방진막 그림은 현실 공간에서 방진막과 추상주의가 휘두르는 횡포를 중의적으로 비판하고 야유한다. 「무지개떡 프로젝트 5- 강동 성원 상떼빌」은 3색으로 구성된 방진막이 도심을 장악하는 경관을 CCTV적 4 분할 구도의 견지에서 포착한 그림이다. 그것은 4가지 각기 다른 시선을 한 화면 안에 불러온 것에 불과하지만 실상 그 배후에는 대기환경보전시행규칙 제 62조(비산먼지발생사업의 신고 등)의 세부 지침이 놓여있다. 동일한 인식하에 제작된「부동산적 풍경화」의 두 연작 또한 화면 속에 종횡으로 나뉜 가옥 구성은 다분히 환원주의적인데, 이 빈틈없이 촘촘한 도시적 형식주의 또한 지적법시행령 제3조(지번의 구성 및 부여방법)의 세부지침에 따른 작도된 '그림'인 것이다. 김지은의 미학적 일관성은 완고하게 전수되어오는 전례의 개념들을 지금 여기서 어떻게 재구성해서 우리가 내면화시키느냐에 모아져있다. 그 방법으로 두개의 충돌하는 개념을 제목으로 채택하거나, 그가 쟁점화 하는 요점을 선명한 직설법을 빌어 투척하기 보단 가치중립적 화면구성 속에 묻어버리는 전략을 취한다. 관객은 잘 마감된 붕어빵 같은 도심의 파노라마를 지켜보면서, 생활공간에 스며들었으되 조감할 수 없었던 제도적 통제를 읽어내지만 그 폭로의 무게만큼 불편함을 느끼지는 않고 다만 '감상'한다. 그것이 사진이 아니라 사진처럼 그려진 회화여서 그렇다. 관료적 편의주의로 재단된 무뚝뚝한 도심 경관을 가치중립적 조감도 위에 지번까지 매겨, 제시하면 관객은 그들이 놓인 현실공간을 낯설게 느끼고 자신의 삶의 거처를 대상화시켜 관찰케 된다. 이런 심도 있는 내용이 구체적인 법령과 하나의 짝이 되어 제시되나, 그림 자체만을 볼 때 충분히 심각한 표정 짓지 않고 감상할 만한 구상회화란 점이 김지은의 역설이다. 또 하나의 사례「조형물과 고기불판」의 경우, 전혀 '격이 맞질 않는' 두개의 오브제, 조형물과 고기불판이 한 장소에서 연출 없이 재현된다. 물론 이런 기이한 풍경화의 배후에도 여지없이 관련 법령이 지침으로 놓인다. 바로 문화예술진흥법시행령 제 24조(건축물에 대한 미술장식)다. 이것은 공공미술의 오랜 쟁점을 다루지만, 적과 청의 조야한 대비가 뒤엉킨 주변 흔한 풍경을 제시하는데 그친다. 김지은 그림은 구체적인 문제의식이 기획되었지만 보통 이런 방식으로 맺는다. 거기엔 선명성이 두드러지지 않는다. 그저 인적 없는 풍경이요, 붓자국 없는 표면이요, 가치중립적인 무채색의 혼합이다. 화면 속 오브제 배치도 균질하며, 사선구도 역시 좌우로 균형을 유지한다. 혹은 네 장의 비슷한 장면을 한 화면 안에 옮겨온 CCTV적 구도가 유지되는 식이다. 그리고 이 모두는 주제면에서 암암리에 관료적 제도주의로 깊게 물든 시각적 몰취향과 CCTV 감시체계가 내면화된 구성원들과, 더 나아가 공공미술의 한 사안을 다루지만, 취급하는 사회적 현안의 중량감 때문에 보는 이가 불편해 하는 일은 없다. 오히려 그의 그림은 일견 호퍼(Edward Hopper)의 황량함과 닮아있다. 차이는 호퍼가 주체의 실존적 황량함을 재현했다면 김지은은 편재된 객관적 사회 현안을 실존적 황량함과 결합하는데서 오는 듯하다. 이게 바로 모두에서 말한 바 김지은이 일상성, 도시주의, 그리기의 '일반적인' 재현 방식과 결별하고 능동적 관찰자로 현실을 직시하는 전략이다. ■ 반이정

Vol.20051123a | 김지은 개인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