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 혹은 밤에 보이는 풍경

박능생 수묵展   2005_1130 ▶︎ 2005_1206

박능생_차가 있는 풍경_화선지에 수묵_180×90×2cm_2005

초대일시_2005_1130_수요일_06:00pm

공평아트센터 서울 종로구 공평동 5-1번지 Tel. 02_733_9512

필묵의 집적으로 이루어낸 장쾌한 수묵의 파노라마 ● 수묵은 전통적인 표현 수단이자 동양회화 특유의 심미를 대표하는 상징성 강한 재료이다. 그러나 현대에 있어서의 수묵의 위상은 이전의 그것과 같이 절대적인 권위를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재료의 개방과 표현의 다양화 등에 따른 분방한 조형들이 등장하면서 수묵의 위치는 상대적으로 위축되고 외면 받아 온 것이 사실이다. 혹자는 수묵의 위기, 나아가서는 전통 회화의 단절을 염려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비록 예전과 같은 일방적인 것은 아니지만 여전히 수묵이 한국회화의 가장 보편적인 표현 매제이자 수단으로 인식, 수용되고 있는 현실을 본다면 수묵의 유장한 생명력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할 것이다. 이는 단순한 전통의 관성과 타성에 의해 제한적으로 나타나는 일시적 현상이라기보다는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조형에 적응하고 변화하며 그 생명력을 지켜온 것이기에 더욱 의미가 있다 할 것이다. 석도(石濤)는 "수묵은 시대를 따라 변한다."라고 말하였다. 변화와 적응은 생존의 필수 조건인 것이다. 작가 박능생(朴能生)은 대전을 근거로 하여 중앙과 해외를 넘나들며 활발한 작품 활동을 보이고 있는 청년 작가이다. 비단 문화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의 중앙 집중 현상이 극에 달한 현실적 상황을 염두에 둔다면 그간 작가가 보여준 분투와 노력은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더욱이 부단한 노력과 집념을 바탕으로 이루어 낸 작업의 성과는 단순한 분투 이상의 내용을 확보하고 있는 것이기에 더더욱 그러하다.

박능생_모란시장에 서다 / 좌_모란거리 / 우_화선지에 수묵_104×75cm_2005
박능생_서울(고속터미널 야경) / 좌_서울(혜화동 거리) / 우_화선지에 수묵_104×75cm_2005

박능생의 작업은 오로지 수묵으로만 이루어 진 흑백의 화면이다. 변화무쌍한 현대적인 도시 풍경에서부터 파노라마식의 대형 실경 작업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수묵의 표현력을 통하여 발현되는 세계이다. 그 소재와 표현은 이른바 현대 한국화가 축적한 새로운 조형 실험의 결과와 성취를 일정 부분 수용하고 있음이 여실하다. 자동차가 등장하는 도시 풍경이나 먼 거리에서 도시를 조망한 독특한 시점과 구도의 풍경 등이 바로 그것이다. 수묵이라는 전통적인 매제의 한계와 가능성, 현대 한국화가 이루어 낸 조형 실험의 성과와 질곡의 언저리는 바로 작가의 작업이 자리하는 현실적인 지표일 것이다. 굳이 수식하자면 전통을 바탕으로 현대를 호흡하며, 이를 통하여 개성을 발현하고자 함이 바로 작가가 추구하고자 하는 이상일 것이다. ● 전통적인 수묵은 선의 기능과 운용을 강조한다. 동양회화의 특징 중 하나로 '선에 의한 조형'을 꼽는 것은 바로 이러한 연유이다. 그러나 작가의 수묵은 유려한 선의 운용이나 힘찬 운필의 기교를 전제로 하지 않고 있다. 대상에 대한 합리적인 형태 파악과 원근의 구분은 일정 부분 서구적인 구도법을 차용하고 있으며, 그 표현에 있어서는 먹을 쌓아 나아가는 일종의 적묵, 혹은 점묘의 방식을 취하고 있다. 짧고 단속적인 선들을 잇대어 사용함으로써 형태를 구축하고 이들의 중첩과 반복을 통해 이루어지는 일정한 리듬감을 조형의 근간으로 삼는 작업의 전개 방식은 분명 전통적인 운필에 의한 조형과는 차이가 있는 것이다. 이는 일종의 텃치(tocch)와 유사한 필법으로 필촉에 의한 섬세하고 유려한 선의 심미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수묵 자체의 물성과 표현력에 주목하는 경우라 할 것이다. 사실 이러한 운필법과 화면 전개 방식은 근자에 들어 종종 발견되는 조형 방식 중 하나이다. 데생을 통하여 형태를 학습하고 연필이나 수채화로 사물을 표현해 내는 과정을 거쳐 비로소 수묵을 접하게 된 새로운 세대의 새로운 표현법인 셈이다. 이는 오늘의 수묵이 보여주고 있는 변화의 구체적인 양태 중 하나인 것이다.

박능생_부산거리 / 좌_거리에 서다 / 우_화선지에 수묵_208×75cm_2005
박능생_남산에 서다_화선지에 수묵_242×91×6cm_2005

비록 작가의 수묵이 동시대적인 미감과 방법론을 공유하고 있지만 그중 단연 돋보이는 부분은 바로 작업에 대한 진지한 몰입과 집착이다. 물론 이는 작가가 지녀야 할 기본적인 덕목이겠지만 박능생의 작업은 작은 재치나 기교로 난관을 우회하거나 외면하지 않고 정면으로 맞닥뜨리고자 하는 의지가 여실하다. 무책임한 발묵이나 이물질의 도입을 통한 감각적인 조형 대신 우직하리만치 꼼꼼하고 원칙적인 자세로 화면에 임한다. 노동과도 같은 반복적인 작업을 통해 얻어지는 화면은 작가 특유의 진지하고 성실한 화면을 담보해주고 있다. 명징하고 청담한 수묵의 운용과 구사는 바로 이러한 과정을 통해 획득되어진 가치이다. 수묵은 맑고 그윽함을 추종한다. 단지 검고 어두움만을 추구한다면 굳이 수묵을 고집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수묵 특유의 미감과 특질을 발현시키기 위해서는 단순한 기능적 훈련 이외에 수묵에 대한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내용들에 대한 이해와 깨달음이 전제되어야 한다. 작가의 수묵이 드러내고 있는 독특한 풍취는 오늘의 작업이 단순히 일거에 이루어진 우연의 결과가 아니라 일정 기간을 걸쳐 완만하게 진행되어진 과정을 바탕으로 하고 있음을 설득력 있게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이는 작업에 대한 진지한 접근과 성실한 노력을 통해 구축되어진 성과인 것이다.

박능생_Car(밤)_화선지에 수묵_180×90cm_2005
박능생_거리 혹은 혼잡_화선지에 수묵_180×90×3cm_2005

도시 풍경과 산수는 작가가 즐겨 다루는 두 가지 주제이다. 그중 작가의 개성이 상대적으로 충분히 발휘될 뿐 아니라 보다 풍부한 발전과 변화의 여지를 담고 있는 것은 후자라 여겨진다. 그중 특히 눈에 뜨이는 것은 [ 서울풍경도 Ⅱ] 으로 명명되어진 대작의 도시 실경이다. 이 작품은 먼 곳에서 조망한 듯 한 커다란 화면의 스케일은 대작 특유의 장쾌함을 지니고 있을 뿐 아니라 일반적인 실경 산수의 상투적인 표현법과는 일정한 거리가 있는 독특한 구도와 표현이 돋보이는 인상적인 작품이다. 무수히 많은 점과 선들이 어우러지는 가운데 산과 길을 구분하고 그 사이사이에 작고 섬세한 필치로 그려 넣은 집과 건물들은 그 자체가 하나의 파노라마이다. 상하좌우로 자유로이 시점을 이동하며 펼쳐지는 분방한 공간의 운용은 특유의 다점투시의 장점과 평면 조형이라는 동양회화의 특징들이 잘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 더욱이 이를 병풍의 형식을 차용한 다면의 화폭으로 수용함으로써 변화와 통일을 동시에 도모하는 효과를 보여주고 있다. 만약 빽빽하고 성글며, 가지런하고 흐트러짐과 같은 구도 운용의 묘를 더할 수 있었다면 하는 아쉬움이 있지만 가히 이번 전시의 대표작이자 그간의 성과를 가늠해 볼 수 있는 기념비적인 작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 앞서 서술한바와 같이 그간 작가가 보여주었던 노력과 분투는 분명 평가될만한 것이다. 더욱이 그러한 노력이 작품을 통하여 구체화되어 나타날 수 있음은 사뭇 다행스러운 일일 것이다. 그러나 만약 오늘의 성과가 단지 중앙과 지역이라는 물리적인 거리의 단축, 혹은 근접 정도에 머문다면 크게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전통과 현대,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한 개성의 발현이 작가가 당면한 문제라면 스스로 처한 현실적 좌표를 냉정히 인식하고 보다 가열찬 노력을 경주하여야 할 것이다. 그간 작가가 보여주었던 노력과 그 구체적인 성과를 바탕으로 미루어 볼 때 이는 결코 요원하거나 난망한 일은 아닐 것이다. 작가의 분발과 노력 여하에 따라 우리는 어쩌면 또 하나의 건강한 청년작가를 확보할 수 있게 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작가의 분발을 촉구하며 다음 작업을 기대해 본다. ■ 김상철

Vol.20051128d | 박능생 수묵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