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brato Cantabile

라유슬 회화展   2005_1130 ▶︎ 2005_1206

라유슬_지느러미가 잘린채 물속에 잠기다._캔버스에 유채_162×130cm_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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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5_1130_수요일_05:00pm

노암갤러리 서울 종로구 인사동 133번지 Tel. 02_720_2235

그림을 보다. ● 새삼스럽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작가의 작업을 직접 대하면서 든 생각은 '내가 지금, 그림 앞에 마주하고 있다'라는 단순하지만 자명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 느낌은 현재형으로 전해져야만 더 분명하게 다가올 수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처음 사진으로 대했을 때 받았던 여러 가지 색상의 옷자락을 겹쳐놓은 듯한 그런 이미지의 느낌과 확연히 달랐기 때문이다. 이는 그림은 역시 그림이라는 사실에 앞서서 아무래도 작가의 그림이 형태를 갖고 있긴 하지만 명확하지 않은 것이었고, 무엇보다도 그런 애매한 형태를 시각적으로 뒤덮고 있는 선명한 색채의 존재감 때문인 듯싶다. 더구나 정지된 화면이긴 하지만 보는 이로 하여금 잔잔한 물결처럼 파동을 일으키게 하는 형태와 색채의 율동감 있는 배치로 인해 이런 시각적 체험의 생생함이 더욱더 가중되었던 것 같다. 그녀의 작업을 보고 있노라면 이렇게 무언가 밀려오는 시각적인 움직임이 먼저 일어난다. 다분히 현상학적인 체험과도 같은 이런 느낌을 먼저 말하는 것은 '그림에서 어떤 무엇이 직접적으로 보여지지 않는다'라는 사실, 다시 말해 추상회화의 몸짓과 닮아 있다는 식의 논조와 함께 계속되는 상투적이고 일반화된 설명에 머물 바에는 차라리 먼저, 내게 전해오는 구체적인 감각의 움직임을 말하고 나서, 다시 그 이유에 대해 곰곰이 따져보는 방식을 취하는 게 더 현명한 방법일 것 같아서였다. 그림이 역시 그림이라면 우리는 그 그림을 직접적인 현전의 상태로 바라봐야 하고 그 상황이 던져주는 다양한 것들을 느끼고 곱씹어보는 즐거운 경험을 이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라유슬_부드럽고 아늑한 거기_캔버스에 유채_194×259cm_2005
라유슬_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은 흐른다._캔버스에 유채_97×194cm_2005

색과 형태 그리고 비브라토, 칸타빌레 ● 작가의 작업의 가시적인 면, 곧 그 외관에서 전해져 오는 것들은 비교적 일관된 스타일을 취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미묘한 움직임과 떨림을 전하고 있는 형태의 파장 혹은 그 율동감이 표현되어 있고, 이를 선명한 색채감으로 증폭시키고 있는 방식이 그것이다. 그런 이유로 화면에서 잔잔하게 요동치는 운동감이 느껴지기도 하고, 어떤 면에서는 겹겹이 쌓여 있는 형태와 색채의 층위가 감지되기도 한다. 마치 음악에서 음의 미묘한 흔들림과 떨림의 기법을 말하는 비브라토(vibrato)처럼, 그 미세한 떨림이 전해져오는 것이다. 여기서, 그림을 그리기 전에 음악을 했다는 작가의 범상치 않은 이력과 이메일 아이디로 사용하는 비브라토는 분명 단순한 우연만은 아닌 듯싶다. 마치 노래를 하듯(cantabile), 그림을 그리고 있다는 것인데, 분명 작가의 작업은 음악과도 같은 회화의 오래된 모습을 떠올리게 하고 특히 화면을 가득 메우고 있는 색채감은 이런 음악성을 증폭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여기서 마티스가 색에 대해 언급했던 "나의 모든 색들은 다 함께 노래한다. 그것은 음악에서의 화음과 같다. 색들은 합창에 필요한 힘을 가지고 있다."라는 구절이 연상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녀의 작업에서 색채가 음악적인 리듬감을 증폭시키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어느 면에서는 그 리듬감을 침잠하게 하는 효과 역시 자아내기도 한다. 다시 말해 색채감이 강렬하다고 느껴지면서도 동시에 그 느낌이 발산의 느낌 못지않게 수축의 느낌을 전해주기도 하는데, 예컨대 찬란하면서도 슬프다고 느껴지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그런 면에서 그녀의 색은 화면의 리듬감을 정돈시키고 조절하는 것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고저와 강약을 혹은 빠르고 느림의 관계를 조절하면서 시간의 흐름을 엮어내기도 하고, 화면에서의 그런 색채의 구성이 보는 이의 심리에도 영향을 주는 것이다. 그렇게 음악적인데, 전체적으로 낮은 채도의 색상을 층을 지워 사용했다는 면에서 단조풍의 음악성이 느껴지지만 아주 우울할 정도의 느낌은 아니다. 속없이 말해 그냥 그 사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특히「지느러미가 잘린 체 물속에 잠기다」에서 느껴지는 화려하지 않은 보색대비의 효과는 확실히 우울한 정조의 느낌을 묘하게(화려하게) 전해주고 있기도 하다. 이런 면에서 작가가 다루고 있는 색채는 강렬한 상태의 느낌을 표현하는 방식이라기보다는 리드미컬한 상태를 유지시키고 이를 조절하는 기제로 사용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색채의 효과는 다시 형태가 가지고 있는 음악적인 리듬감과도 연동되는 것들이다. 정확히 말해 화면에서 전해오는 형태감은 바깥으로 확산되는 파동감이 느껴지면서도 그것이 다시 안으로 층을 짓는 구조를 이루고 있다. 곧 확산과 동시에 수축의 방식으로 긴장감을 이루며, 화면의 형태와 그 느낌을 만들고 있는 것인데 이에 대해서는 차라리 주름 짓고 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듯싶다. 그렇게 화면에서의 색채와 형태를 펼치듯이 접어가면서 이미지를 만들고 있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작가는 이 과정을 통해 어떤 것들을 드러내고 표현하려 했던 것일까, 혹은 화면에서 느껴지는 이런 운동감의 효과는 단순한 시각적인 리듬감에 머무는 것이었을까 라는 질문이 이제 이어질 때가 된 것 같다.

라유슬_내 먼 그림자 속에 네가 있다._캔버스에 유채_73×91cm_2005
라유슬_혼자일 때 알 수 있는 것들-자화상_캔버스에 유채_70×70cm_2005

그림이 전하는 울림 혹은 공명의 관계 ● 앞선 질문에 대한 편한 대답은 이렇다. 둘 다. 혹은 그 이하이거나 그 이상이거나. 작가의 의도는 화면에서 느껴지는 동적인 느낌을 통해 관람자로 하여금 작가가 느끼고 고민했던 어떤 마음의 타래들이 전해지길 원했던 것 같다. 화려한 듯 하면서 잔잔하게, 마음의 울림이 서로 공명을 하듯 말이다. 작가가 전하려 한 그 고민들은 때로는 관념적인 단상들이기도 하고 매우 구체적인 감각의 편린들이기도 하다. 어떤 면에서는 문학적인 단상의 형식을 취하기도 하는데 그렇게 작가의 삶에 관한 고민들을 전하려 한다. 좀더 명시적인 작가의 소망은 마치 명상의 효과처럼 자신의 그림과 함께 감정의 기복의 형태를 넘어 평온함에 도달해가는, 그렇게 시간의 흐름 속에서 좀더 근원적인 마음의 상태에 도달할 수 있는, 심적인 변화의 계기를 보는 이로 하여금 느끼기를 권유하고 있다. 화면에서 느껴지는 잔잔한 운동감이 시간성, 곧 내면의 성찰에 필요한 시간성의 계기로 전화되길 바라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말할 수 있는 것은 이렇게 작가가 바라고 있는 것이 그림의 가시적인 면, 곧 앞서 서술한 형태와 색채감의 리듬감과 얼마간은 닮아 있고 서로 심적인 울림의 관계에 있다는 정도이다. 다시 말해, 색과 형태의 퍼지는 듯한 파장과 함께 일어나는 누적된 층의 생성, 움직임과 정지의 운동감이 관람자로 하여금 마음의 착시라 할 수 있는 정서의 잔잔한 흔들림과 내적인 침잠을 유도하고 있다는 정도이다. 그렇게 흔들리면서 내적인 성찰의 공간으로 마음을 조용히 쌓여가는 과정이 명상이라는 면에서 일견 그 의도가 성취된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이런 작가의 소망이 온전히 실현되기 위해서는 보여지는 것만으로는 충분할 수 없고, 화면에서 보이지 않는 것들과 연결이 되어야 한다. 좀더 좁혀서 말해 작가가 작업을 하면서 구체적으로 떠올린 사유의 단상들과 연결이 되어야 좀더 그 느낌이 분명해진다. 이런 면에서 그녀의 구체적인 생각의 편린들이기 한 작업노트, 혹은 그 짧은 버전이라 할 수 있는 작품의 제목들은 작업을 단순히 호명하는 것 이상으로 작업의 느낌을 공명하고 확산하게 하는 기제로 작동한다는 면에서 마찬가지로 눈여겨봐야 할 것이다. 그리고 또 얼마간은 작업이 갖는 이미지를 모호한 방식이긴 하지만 암시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부드럽고 아늑한 거기」의 텍스트는 기억하지 못하면서 존재하는, 그러나 영원히 돌이가길 희구하는 근원적인 존재감을 서술하고 있는데, 화면에서의 이미지의 형태는 자궁을 연상케 하는 식이던가「필요충분조건」의 경우 여성의 행복과 불행이라는 현실적인 존재감을 서술한 텍스트가 여성의 가정을 의미화하고 있는 테이블, 곧 겹겹이 층 지워진 테이블의 표면 형태를 연상케 하는 식이다. 때로는 아주 구체적인 정황을 드러내기도 하는데, 삭스핀 요리를 위해 무참히 잘려져야 했던 상어지느러미 다큐멘타리를 보고 작업한「지느러미가 잘린 채 물속에 잠기다」의 경우 형태적 유사성이 연상되면서 아울러 이런 정황을 인간의 불안한 실존적인 문제로 확장시킨 텍스트와 결합시키고 있다. 이러한 삶에 관한 철학적인 단상은「그럼에도 불구하고...시간은 흐른다」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 겹쳐지듯 펼쳐지고 있는 시간의 누적된 흐름을 표현한 형태와 작업노트에서의 사유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마찬가지로「내 먼 그림자속에 네가 있다」의 경우도 잊으려 할수록 더 진해지는 그리움의 느낌을 담은 텍스트와 화면의 가시적인 면이 서로 조응할 수 있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점들을 고려할 때 작가의 작업은 온전한 비구상, 추상으로 작동하지만은 않는다. 그리고 그 방식이 재현의 논리와 구별된다는 점에서도 분명히 구상적이지도 않다. 다양한 생각의 편린들을 전하려 한다는 면에서 일반적인 표현의 문제 역시 비껴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작가의 그림과 혹은 단상들을 보면서 어떤 심리적인 움직임을 느낀다는 것은, 다소 분명하지 않음이라는 단서를 달아야겠지만, 작가의 의도와 그림의 형상이 어떤 식으로든 연결 지워질 수 있다는 것이고 그런 이미지를 바라보면서 우리의 정서 역시 움직이고 있다는 점이 적시가 되어야 할 것이다. 똑같지는 않지만 어떤 식으로든 닮아 있긴 하다는 것이다. 이를

라유슬_필요, 충분조건_캔버스에 유채_130×162cm_2005
라유슬_2005. 10. 31_캔버스에 유채_117×91cm_2005

마음을 전하다. ● 마음만큼이나 전달되기 어려우면서 많은 것들을 전할 수 있는 것이 있을까. 보이지 않으면서도 때로는 볼 수도 있는 그런 마음의 이미지는 그만큼이나 모호하고 때로는 그런 이유로 매혹적이기도 하다. 어쩌면 전부는 아닐지라도 그림의 존재라는 것들도 아직도 얼마간은 이런 공간에서 서성이고 있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새삼스레 해보게 된다. 그 지속적인 머뭇거림의 태도 가 얼마간은 그림이 존재하고 있음의 어떤 이미지가 아닐까 하는데, 그림의 이런 오래된 존재감을 신뢰하고 있는 작가의 그림에 태도가 여기서 자연스럽게 궁금해진다. 작가의 그림에 대한 태도를「혼자일 때 알 수 있는 것들-자화상」에서 엿볼 수 있도록 하자. 여기서 작가는 자신의 존재, 곧 살아온 때만큼이나 겹겹이 쌓여가는 날 들 속의 자신의 존재감과 아무것도 담고 싶지 않고 드러내고 싶지 않은 속내를 엇갈리듯 내비친다. 이렇게 역설적인 논리로 형상화된 이 이미지는, 다시 말해 (존재의) 비어있음을 채워가는 그녀의 그림은 그런 면에서 삶에 대한 자신의 모습, 그 태도와 닮아있는 것이라 해야 할 것이다. 구체적인 고민의 편린들과 사유의 단상들을 반복적인 그리기의 행위를 통해 끊임없이 이어가고 있다는 것인데, 특히 고루 섞이지 않은 테러핀유를 계속 펴가며 덧입혀서 얇은 막들을 만들고, 다시 그 막들이 겹겹이 쌓일 때까지 기다리는 작업의 기법은 그리기의 행위에 삶의 시간의 흐름을 덧입혀가는 모습과 유난히 비슷한 것들이기도 하다. 어디 시간의 흐름만 덧입혀질까, 삶에서 묻어 나오는 흔적들과 그 때들이 겹겹이 쌓여가는 것이겠고, 다시 그 막들과 막들 사이, 색과 색, 형과 형 사이를 가필을 통해 세심하게 경계를 짓는 그리기의 방식은 시간의 흐름을 겹겹이 주름 짓게 하는 행위와도 같은 것들이다. 인생에 대한 비유로 시간의 흐름을 주름 짓다라는 것만큼 그럴듯한 말이 또 어디 있을까. 겹겹이 쌓여가고 퍼지는 층들만큼이나 그녀의 빈 것과 같은 날들이 채워지고 혹은 넓어지는 것들이겠고 그런 행위 속에 그녀의 마음, 그녀의 삶에 대한 지속적인 태도가 슬쩍 내비쳐지는 것이 아니었을까를 생각해본다. 다시 말해 잊으려 할수록 더욱 진해지는 추억이나 삶처럼, 아무것도 담아내고 싶지 않지만 결국은 겹겹이 쌓여가는 자신의 존재처럼, 다소 내향적이고 반성적인 그러나 삶에 대해 조심스럽게 긍정해 가고 있는 어떤 태도를 우리는 불현듯 엿보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화면을 채우고 있는 색채와 형태의 그렇게 과하지 않은 리듬감이 혹은 그 떨림의 방식마저도 마치 작가의 삶의 빛깔(혹은 그 태도)과 닮아있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해보게 되는 것이다. 어쩌면 그런 모습이 아주 똑같은 것은 아닐지라도 우리 자신의 모습과도 얼마간은 닮아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보면서, 그런 맥락에서 그녀의 그림을 다시 한번 천천히 응시해보길 권유해 본다. ■ 민병직

Vol.20051129a | 라유슬 회화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