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es of a Blind

송은영 개인展   2005_1128 ▶︎ 2005_1206

송은영_Memories of a Blind Ⅰ-창밖_스텐레스 스틸에 유채, 매니큐어, 마카_100×100cm_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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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5_1130_수요일_06:00pm

관훈갤러리 본관2층 서울시 종로구 관훈동 195 Tel. 02_733_6469 www.kwanhoongallery.com

그녀의 화장법, 모든 것은 표면으로 올라온다. ● 그것은 그림자에 가깝다. 우리의 외부, 표피, 피부 혹은 외곽선이라 불리는 세상을 구분 짓거나 경계 짓는 지표들. 실루엣으로 불리는 그것들은 물리적 존재의 허상으로 세상을 이루는 즉, 빛의 반대편, 어두움으로 존재하는 대상들이다. 이미지라 불리는 것들, 이미지의 탄생에는 역설적으로 언제나 죽음이 서려있다. 이미지의 탄생은 이처럼 실재의 반대편의 그늘 혹은 반영이란 신화와 연결되어 있다. 신화란, 현실 너머, 현실을 닮은 그러나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이야기가 아닐까? ● "이제 모든 것은 표면으로 올라온다"라고 들뢰즈는 확언했다. 그는 "시뮬라크르들은 지하에서 형상을 피해 은신하기를 그치고 자기 자리로 올라와 노는 효과"라고 표면성을 은유한다. 그리고 표면 효과란 '환각'(phantasme)이라고 규정한다. ● 송은영의 작업을 읽기 위해 나는 무엇보다 우선 회화의 본성에 대한 질문을 던지게 되었다. 작가가 작업을 통해 관객에게 던지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그녀가 행하는 다양한 매체적 실험과 신체/이미지 사이의 끊임없는 단절을 포획하려는 시도들, 그리고 실재와 그 반영-그림자 사이의 변증적인 관계의 추구에 대해서?

송은영_Memories of a Blind Ⅱ-창쪽 작업실_스텐레스 스틸에 유채, 매니큐어, 마카_100×100cm_2005

송은영의 작업은 다양한 매체적 실험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화가'라고 규정했다. 그녀의 작업과정에서 등장하는 거울이란 재료, 사진성 등은 모두 회화를 원점으로 등장하는 주변성이라고 해석해도 무방할 듯 하다. "모든 것은 표면으로 올라온다"는 들뢰즈의 말을, 회화가 지닌 표면성을 무한대의 생성의 장으로 대입시켜보자. 들뢰즈는 표면효과와 생성을 병치하면서 그것의 시간성과 운동성을 이끌어 낸다. 그리고 시간-운동은 전복과 함께하고 있다고 강조하는데, 다시 말해, 전복이란 원인과 결과라는 일원적 좌표의 시간성과 운동성의 논리의 틀을 탈피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 그녀에게 전복은 무엇보다 우선 거울을 매개체로 실제의 자신과 거울에 비친 환영 사이의 모호한 관계로부터 출발한다. 그것은 '차이'이자 동시에 '자신'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스스로의 모습을 유성펜으로 따라잡으면서 같거나 다른 이 둘의 관계는 분리되기 시작한다. 자신이 바라보고 있는 거울 위해 비친 현재형의 '나'를 자국(mark)으로 남기는 행위를 통해서 말이다. 그녀의 이러한 행위는 나에게 흔적이자 동시에 흠집을 남기는 것처럼 비춰지기도 했다. Mark라는 단어의 사전적 정의는, '사물의 성격을 밖으로 나타내는 행위'라고 규정하고 있다. 언어적 정의를 어원에서 살펴보니, 동사적 의미로는 '걷다', '짓누르다' 혹은 '흔적 또는 기억을 남기다'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명사적 의미로는, '경계' '표식' 또는 '흉터'에서 현재의 의미로 자리잡았다고 한다.

송은영_Memories of a Blind Ⅲ-작업실_스텐레스 스틸에 유채, 매니큐어, 마카_100×100cm_2005

작가가 이름 붙인「따라잡기」란 그녀의 행위와 연결해 해석해보면 작가가 바라보는 형상의 외곽선(contour)을 경계화 또는 표식화 한다고 말할 수 있을 듯 하다. 동시에 경계화 된-그러나 늘 잃어버릴 수 밖에 없는- 그녀의 반영을 통해 끊임없이 지나가는, 다시 한 번 들뢰즈를 인용한다면「'이미'거나 '아직'인」결코 확언할 수 없는 현재라는 잡을 수 없는 시간의 기억을 남기는 것은 아닐까? 나는 여기서 또 다른 질문을 던져야만 했다. 작가는 과연 전복을 의도하였을까? 전복이란, 뒤집힘이란 작가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 거울이란 여러 의미로 뒤집힘을 보여준다. 빛의 반사라는 의미로서, 오른쪽과 왼쪽의 뒤바뀜으로 또 시각적 차단 혹은 되돌림의 재료로서 그 의미는 다양하게 시사된다. 로버트 스미드슨의 작업에 등장하는 거울은 풍경을 담는 재료이자 동시에 대지와 하늘을 연결해주는 매개체이면서, 더불어 하늘과 땅의 뒤집힘을 통해 일종의 보이지 않는 사다리의 역할을 했다면, 다니엘 뷔렌의 보르도 현대미술관의 설치작업에서의 거울은 아래와 위가 뒤집히는, 다시 말해, 천정이 바닥을 향하게 하는 상당히 폭력적인 감상마저 전달하는 거울성을 보여준 바가 있다. 올해 초 미국 뉴욕에서 열린 뷔렌의 회고전에 선보인 새로운 설치「사이클론의 눈」역시 구겐하임 미술관의 구조적 특징인 달팽이 형태의 공간을 반으로 자른 듯 수직의 거대한 거울 벽을 설치해 실제와 허구, 현실과 이미지 사이의 전복을 기념비적으로 제안했던 것도 빼놓을 수 없겠다.

송은영_Memories of a Blind Ⅳ-욕실_스텐레스 스틸에 유채, 매니큐어, 마카_100×100cm_2005

송은영의 작업에서 거울 효과는 초기 작업에서부터 자주 등장했던 요소였다. 마치 벨라스케스의「시녀들」에 나타나듯, 주체와 객체의 전복 혹은 뒤섞임으로 설명해보는 것도 흥미로울 듯 하다. 초기 작업에서 그녀는 자기애적 형상이 회화와 사진이란 두 매체로 뒤섞인다. 작가는 거울을 마주보고 있는 자신을 흑백사진으로 찍은 후, 거울 위에 인화를 한다. 그리고 거울에 비친 상은 다시 '채색'을 하고 실제의 자신은 흑백상태로 남겨두는 과정으로 작업을 완성한다. 실제와 이미지는 사진이란 중간 매개체-이 역시 거울의 전복효과로 만들어지는 빛과 그림자 놀이로 볼 수 있다-를 거친 후 실제였던 자신은 흑백의 사진으로, 반대로 거울의 반영-이미지는 일종의 회화적인 재현으로 탈바꿈 된다. ● 전복 혹은 전치는 정신분석학적 관점으로 읽어보면 그것이 의식적이던, 무의식적이던, 부정에서 출발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그 부정은 늘 역설적으로 애증적인 관계일 수 밖에 없다. 그녀는 자신을 부정하면서 또한 자신을 가장 사랑하는. 결국 그녀는 이미지로 재현된 그녀에게 '립스틱'을 바르지 않았던가. 그래서 그녀의 작업은 신화를 만난다. 자신을 부정하고 반대로 그 허상에 눈이 멀어버렸던... ● 작가의 나르시스적 집착은 시간이 지나면서 외부세계를 만나고 있다. 결국 전복이란 거울 효과를 다른 관점으로 풀어본다면, 내부에 갇혀있던 작가의 시점, 자기애 같은 것들이 외부 즉 표면으로 올라오면서 세상을 만나는 게 아니겠는가. 들뢰즈는 심층 즉 내부에서 외부, 표면으로 드러나는 이러한 이행의 과정을 루이스 캐럴의『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통해 비유했다. 그는 "사건들은 가장자리에 의해서만, 가장자리에서만 생성하고 증식된다. [...] 이전의 심층이 표면의 반대 방향으로 물러가게 함으로써 깊이 들어가는 대신 옆으로 미끄러지는 것."이라고 했다. 곧 이어 "이 미끄러짐 덕분에 다른 편/반대 방향으로 가는 것이 가능해진다."라고 설명했다.

송은영_Following-Landscape_DVD_00:21:07_2005

이번 전시에서 보여주는 비디오 작업에서 그녀가 풍경을 따라잡기 하면서 현실성이 사라지는 즉 부피가 사라져버리는 현상을 목격할 수 있었다. 현실은 사라지고 허상 혹은 환각이 대신 그 자리로 '치고' 들어온다. 하나의 차원이 사라지면서 또 다른 차원으로 대체되는 것 역시 그녀만의 회화성으로 해석할 수 있을 듯 싶다. ● 흥미로운 것은, 순간, 현실-이미지의 관계항은 순수한 이미지로 미끄러져갔다. 다시 들뢰즈의 말을 인용해보자. "물체들로부터 비물체적인 것으로의 이행은 경계선을 따라감으로써, 표면을 따라감으로써 이루어진다."물체들로부터 비물체적인 것으로의 이행이란 바꿔 말해, 실재에서 이미지로의 이행으로 대신할 수 있지 않을까?

송은영_따라잡기-액자에서, Following-at the frame_혼합재료_2005

전복, 전치, 이행, 이상의 단어들은 송은영의 작업을 개념적으로 대신해 준다. 그녀는 매체적으로는 경계를 무너뜨리고 있지만-화면 속에 유입된 액자, 혹은 이미지의 요소로서의 액자- 동시에 화면 안에 다른 경계를 세우는 행위를 통해, 나는 역설이란 개념을 또한 추출할 수 있었다. 그리고 역설의 이론은 들뢰즈의 생성이론을 대변하는 개념이기도 하다. 이전과 이후의 사이, 아직과 이미의 사이에 현재는 놓여있다. 그리고 현재라는 것은 결국 이곳과 저곳 사이에 위치할 뿐, 절대로 포획할 수 없는 대상이다. 내가 지금을 이야기하는 이 순간 '지금'은 '이미'가 되어버리니까 말이다. 작가가 끊임없이 자신과 세상을 거울표면 위에 포획 하려하지만, 그럴수록 현재는 어디론가 사라져버리고 말듯이. 그러나 바로 그 사이에서의 이행을 통해 우리는 일종의 생성을 경험할 수 있다고 들뢰즈는 말했다. ● 그래서 거울을 통한 작가의 전복행위는 늘 실패일 수 밖에 없다. 그런데 그 속에 생성이 있다. 왜냐하면 생성은 전복이 아닌 '자리 바뀜'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생성이란 다소 추상적인 단어는 우리를 압도하는 일종의 깊이에의 강요로 다가올 수도 있다. 그러나 들뢰즈의 생성은 표면에서의 미끄러짐, 이전과 이후 사이의 이행으로 드러나는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그렇다면, 송은영의 생성은 그녀가 끊임없이 포획하려고 하는 그녀의 행위들, 그 시간들, 구체적으로 그 행위의 시작과 끝 사이의 간극에 위치한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신화 속으로 들어가려는 그녀의 의도 속에서 말이다. 그렇게 그녀는 '신화-되기'를 통해 자기전복을 꾀한다. 자기를 부정하고 다른 무엇 인가로의 변신을 꾀하는 행위는 어쩌면 모든 인간이 한 번쯤은 경험했을 욕망일 것이다. 그리고 예술은 그런 부정을 통해 '생성' 혹은 '되기'를 실험하는 장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하지만, 부정의 반대인 긍정에 이르는 것만이 목적은 아닐 것이다.

송은영_퍼포먼스 슬라이드 쇼 중 사진컷들_DVD_00:09:39_2005

크리스티앙 볼탄스키가 올해 초 러시아의 모스코바 비엔날레의 전시를 준비하면서 인터뷰에서 이런 얘기를 했다. "작가의 얼굴이란 일종의 거울이다. 작가는 스스로를 지울 줄 아는 존재여야 한다. 그리고 그 얼굴에 타인들이 들어오게 해야 할 것이다. 끊임없이 자아가 지워지고 타자가 들어오는 장, 그것이 예술이다." 라고 노년의 작가는 눈까지 붉히면서 그런 말을 남겼다. ● 끝을 맺기 전에, 이 거대한 생성의 논리는 반대로 가장 우리 가까이에 있는 표면, 피부에서 일어남을 되짚어볼까 한다. 슬픔, 기쁨, 증오, 쾌락이 단지 가슴과 머리에서만 일어나는 것일까? 프랑스인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극도의 예민함을 말할 때 '바닥에서 표면으로 올라온다'(à fleur de peau)라는 표현을 사용하곤 하는데, 내부에 있던 감정은 피부 위에 '소름'처럼 돋아나는, 그래서 "모든 것은 표면으로 올라"와 깊이는 그 표면 위로 드러나는 것이다. 송은영의 '장님의 기억'은 스스로를 잃어버릴 수 밖에 없는 인생의 진리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그녀의 자기애적 행위가 결과적으로 타자화로 이어지는 해석은 흥미롭다. 하지만, 나를 포획할 수 없음을 그녀는 거울 위에 간헐적인 선들의 흔적으로, 그렇게 그녀는 사라지고 그녀를 찾기 전에 자신이 발견되어버리는 거울의 표면효과는 볼탄스키의 주장을 차치하고서라도 관람자 스스로 확인하는 장면이 될 것이다. ■ 정현

■ 인용된 글들은 질 들뢰즈의『의미의 논리』에서 발췌하였습니다. 크리스티앙 볼탄스키의 인터뷰는 프랑스의 아르테 방송 (ARTE-TV)의 주간예술 매거진 메트로폴리스 METROPOLIS 2005년 10월 15일자에 방송된 러시아 영화감독 파벨 룬긴Pavel Lounguine의 다큐멘터리의 일부에서 요약했습니다.

Vol.20051130d | 송은영 개인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