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화, 길을 묻다

이흥덕 회화展   2005_1121 ▶︎ 2005_1128

이흥덕_L氏의 하루_화포에 유채_91×116.8cm_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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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5_1121_월요일_05:00pm

책임기획_이섭_갤러리 스케이프

갤러리 스케이프 서울 마포구 서교동 400-10 MJ 빌딩 3층 Tel. 02_3143_4675

이흥덕의 작품은, 최근까지 그 변모를 보자면 크게 세가지 문제설정이 가능하다. 첫째는 작가가 다루려는 우리 사회의 단면성이 곧 우리 내부적 사회문제의 보편성과 일치하는 가 하는 것이다. 둘째는 그가 사용하는 작화방식이 상당히 대중기호를 의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통적인 회화형식에 치중하는 이율배반적인 성격을 지닌다는 점이다. 세 번째는 그가 반복적으로 사용하는 기호에 가까운 도상들이 과연 도해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이 유효하다는 점이다. 이 세가지 문제를 이해하는 것은 바로 이흥덕 작품세계를 이해하는 첩경이 될 것이다.

이흥덕_비상구_화포에 유채_31.8×40.9cm_2004

이흥덕은 곧 잘 도시를 은유하는 환경을 다루고 그 안에서 일어나는 군상들의 모습을 소재로 사용하곤 한다. 물론 옛 우리 춘화에서 볼 수 있을 법한 여성을 소재로 하기도 하고 때로 에로티시즘적 소재를 다루기도 했다. 그러나 크게 도시 속의 군상(술집, 카페, 지하철, 가두의 모습들)을 다루는 작품이 양적으로 월등히 많고 질적으로 상당한 수준을 유지함으로 이야기의 초점을 이러한 소재에 맞추어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것이 옳다고 본다. 그가 다루었던 성적 풍경까지도 어찌보면 이와 같은 동류의식 안에서 이해해도 무방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에로티시즘 소재 모두 도시인의 삶이라는 하나의 카테고리 안에서 설정하고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 도시 속 군상을 통해 작가가 다루려는 우리 사회의 단면성이 곧 우리 내부적 사회문제의 보편성과 일치하는가 하는 문제는 심각한 이의를 제기할 수 있다. 우선 그가 다루는 소재는 늘 불명확한 정황을 전제한 채 그 안에서 여러 가지 에피소드를 모아 놓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치 여러 가지 사회학 이론에서 맞추어진 현상들을 등장인물들이 하나의 특징적인 기호로 보여주는 결과를 초래한다. 그런 문제 의식은 언제나, 어디서나 '정답'처럼 보이고 마치 '우리'의 문제처럼 공유할 수는 있으나 진작 절실한 현실성을 결여하는 위험에 봉착하기 마련이다. 또한 자신의 문제의식으로부터 출발한다는 것이 곧 자신의 현실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문제를 이해하는 데서 시작하는 것이라면 작가는 늘 근대 프로젝트의 봉착점이었던 일반론 안에서 자신의 문제를 사전에 보편화 시키고 그것을 소재로 삼았기에 자신의 한계를 작품의 출발점에서 이미 노출시키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런 이유는 곧 작가 또한 이 지점에서 늘 고민하게 만들지만 결국 자신의 어법으로까지 확산시키기 보다 유사한 사례로서 이미지 복제를 차용할 수 밖에 없었던 결과를 낳게 된다. 물론 이흥덕의 관찰로 생생하게 살어난 도심의 풍경들은 거꾸로 매우 귀한 작품의 소재가 되기도 한다. 중산층의 욕망이 묻어나는 사람들이 등장하고, 이들의 치장되고 과장된 움직임들을 포착하고, 그것을 한국에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주택가에 배치하거나 자신이 직접 가 보앗던 카페에 몰아넣음으로써 만들어지는 생경함은 이흥덕 작품의 시각적 즐거움에 분명하다. 그러나 이 서사 기술은 작품의 진정성을 담보하기 보다 작가 스스로가 위안을 삼아버리는 소극적인 완결성으로 보인다.

이흥덕_효순이, 미선이_화포에 유채_91×116.8cm_2002
이흥덕_서성대는 사람들_화포에 유채_91×116.8cm_2003

이흥덕 작품에서 우리가 놓치기 쉬운 것은 그의 그림 그리는 방식에 대한 이해이다. 그는 매우 전통적인 작화방식을 고집한다. 어떤 재료를 사용하든 상관없이, 어떤 소재를 다루던 그의 제작방식은 전통적인 회화제작 방식에 머문다. 그럼에도 그가 선택한 회화 형식은 늘 대중 기호에 맞추어져 있다. 이와 같은 이율배반적인 요소들은 서구 팝계열 작가들이 거둔 상업적 성공과 미술적 권위에 의에 우리가 반성하지 못한 결과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대중기호가 전통적 화법으로 둔갑하는 순간 고유의 미술가치로 환원은 미술제도 안에서 결정지워진다. 가령 화랑이나 미술관 그리고 수장가들의 취향이 개입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대중기호의 미적 가치는 소통의 원활함이나 자극적인 언술행위처럼 도상의 쉬운 이해, 자극적인 색 대비 효과, 쉬운 기호들의 집합을 통해 적확한 메시지의 공유를 하는 것이지 환원시켜 가치를 드높이는데 있지 않다. 그러나 회화는 그런 미묘한 기교를 통해 살아남기를 제도안에서 획득한 바 있다. 이흥덕의 작품이 가지는 어눌함은 바로 이런 복잡한 가치 증폭의 사이클에서 벗어나 있다는 점에서 시작해 결과적으로 대중기호의 오해를 통해 보다 간결한 메시지를 공유하는데 성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에 그의 작품에서 풀어낸 자유로움은 이제, 드디어 작화방식이 곧 미술적 언어로서 완결성을 가지게 된다는 확증적 결과를 보여준다. 따라서 작가는 자신이 선택한 미술적 가치와(성공한 시장가치가 아닌) 작가로서 지닌 메시지의 공유를 상당기간 고심하며 맞추어봐야 할 것이다. 그는 사실, 일찍이 팝계열의 작가들이 실패했던 것을 거울삼아 회화형식에 대한 기본적인 배반을 받아들여야 했었다. (지금도 그 문제에서는 작가의 변화에 추이를 따라 지켜볼 뿐이지만.)

이흥덕_기다리는 사람들_화포에 유채_30×70cm_2004
이흥덕_폭력_화포에 유채_230×900cm_2004

그의 작품을 보면 기호에 가까운 도상들이 자주 등장한다. 개와 사람의 관계, 달리는 사람의 뒷 모습, 작가의 등장, 살짝 보이는 팬티 등은 과연 도해될 수 있는가? 그가 다루는 이 도상들이 해석될 수 없는 것이고, 작가가 임기응변에 따라 조형성 때문에 사용했다면, 맥락없이 그런 도상들이 화면에 머문다면 우리는 감상에 완벽한 실패를 맛볼 것이다. 이흥덕은 곤궁할 정도의 생활도덕을 중요시 한다. 그에게 있어 어떤 사회적 이슈도 자신이 용납하는 실천가능한 도덕 안에 머물지 못한다면 공허함의 대상이거나 아예 그림의 소재로 등장하지 못한다. 그는 자신의 주변 사람들이, 자신고 비슷한 삶의 유형을 지켜내는 사람들이 매일 실천하는 도덕을 세상의 중심으로 여김으로써 그림의 도상들을 생활에서 발견하곤 한다. 그 해석은 이론적인 것이 아니라 그래서 생활감각에서 비롯되어야 한다. 우선 달려드는 개와 사람은 생활에서 불현듯 닥치는 공포에 닿아있다. 마치 누구라도 텅 빈 거리에서 개 한 마리와 맞부딪칠 때의 석연찮은 공포감을 느껴보았을 것이다. 이것은 지극히 소시민적인 성품이기도 하거니와 사람이 크건 작건 공포에 대응하는 가장 진솔한 마음이다. 이런 마음은 아직 유려한 이론으로 실체를 밝힌 바 없지만(이런 사소한 인간유형의 현상들은 거대 담론에서 곧 잘 제외되었다. 아니면 거창한 이론을 통해 그 존재의 근거였던 생활이 휘발되었거나.) 자신을 지나쳐 멀어져 가는 사람(달리는 사람으로 극화된 도상)또한 '아련함' 정도의 시적 어구에서 이미지를 만들 뿐 생활 속에서 만나는 '마음'의 해석과는 동떨어졌던 대상이기도 하다. 이처럼 이흥덕은 소소한 생활에서 자신이 직접 경험한,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그런 경험을 이미지화 하는데 성공하고 있다. 그런 이미지들은 반복적인 도상으로 그림에서 하나의 맥락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치마 밑의 팬티는 에로티시즘의 가장 위대한 발견일 터이니 더 이상 분별없는 해석은 말아야 겠다. ■ 이섭

Vol.20051202d | 이흥덕 회화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