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화, 길을 묻다

송창展 / SONGCHANG / 宋昌 / painting   2005_1129 ▶︎ 2005_1206

송창_이포나루_캔버스에 유채_162×454.6cm_2005

초대일시_2005_1129_화요일_05:00pm

책임기획_이섭_갤러리 스케이프

갤러리 스케이프 서울 마포구 서교동 400-10 MJ 빌딩 3층 Tel. 02_3143_4675

송창의 회화는 너무 낮익어 이젠 낮선 회화다. 그는 오랜 회화의 도구적 사고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그래서 그의 작품 안에 남겨진 흔적은 이미지를 연상함으로써 하나의 간략한 서술기호를 체득한다. 송 창의 그림은 두 가지 요소로 구성되고 이 두 가지 요소의 무한 변주로 완성된다. 따라서 우리는 그의 작품에서 항시적인 요소로 작동하는 것이 과연 미술로 정당한지 물어봐야 하고, 한 편으로 그 정당성이 '우리, 지금'에 어떻게 결부될 수 있는지 따져봐야 한다.

송창_남한강_캔버스에 유채_454.6×1818cm_2001~5
송창_복사꽃_장지에 유채_72×137cm_2005

하나, 그의 작품은 작가가 무엇을 소재로 삼든 작가의 심상적 대응이다. 그리고 이 대응방식은 대상을 그려놓고 해체하는 방식으로 완성된다. 이 방식은 생각보다 많은 작가들이 애호하는 그리기 방식이다. 현대미술이 거둔 성과 중 하나가 대상의 실체를 미술적 언어로 언술할 수 있다는 신념일 것이다. 일찍이 동양화론이 주창한 이와같은 심상주의는 최소한 한 가지 관점에서 늘 유효하다. 철저한 관자의 입장을 유지하는 것이다. 여기서 관자란 관찰자이면서 곧 개입자다. 그래서 대상을 철저하게 자기만의 방식으로 해체할 수 있엇던 것이다. 물론 기본적인 해체의 틀은 미술적으로 공유한다. 송 창은 처음에 서구적 관찰방식을 도입하다 언제부터인지 이 관찰자의 입장을 온전하게 이해한다. 철저한 미술 내부적 입장이 도드라지게 드러난 것인데, 그 때부터 그는 완전하게 개입할 수 있는 자연을 지표로 삼는다. 그의 작품 대개가 자연인 까닭은 이 때문이다. 처음에는 대상이 지닌 고유 색(물성)을 근거로 강한 붓의 형태들-길게 미는 붓질, 짧게 끊는 붓 질 등과 물감을 붙이는 방법 등으로 단순한 형태의 해체를 시도했다. 그러다가 심상의 실체인 대상의 물성을 의심한다. 여기부터 작가는 간단한 그림의 구성요소들을 해체하기 시작한다. 그렇다고 추상으로 가지 않는 것은 그가 관자의 입장을 이해했기 때문이다. 그가 그리는 행위에서 점점더 즉흥성을 가지려고 하는 것은, 최소한 우리는 그림 표면에서 그의 작난을 찾을 수 있는데, 물성을 해체하려다 보니 물성의 온전한 특성까지 다다르지 못하기 때문이다. 알고도 표현하지 못할 때 우리가 몸 짓을 비려 표현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럼에도 이 모든 것은 미술의 도구적 이해안에 머문다. 미술을 일정정도 이해하는 사람끼리 알아들을 수 있는 고민이라는 점이다. 언제가부터 송 창은 그래서 대중적 이해와 거리를 둔다. 다만 대중들은 그의 고민 넘어 그림이 가지는 서정성에 지지를 보낸다. 관자에게는 이 또한 애닳지 않다.

송창_물안개_캔버스에 유채_80×280cm_2005
송창_남한강(여주)_캔버스에 유채_126.5×191.5cm_2005

둘, 작가는 화면 안에서 벌어지는, 실재하는 자신의 작업과정과 싸운다. 그것이 송 창에게는 곧 그림이다. 많은 작가들이 이런 싸움을 즐기고 그 안에서 자족한다. 그 또한 그렇다. 그러나 송 창의 이런 부분이 거론되어야 하는 것은 앞서 이야기 한 관자의 입장과 결부되어 하나의 세계를 만들기 때문이다. 마치 장인의 칼 다듬든 것과 같이 자기 완결성은 처음 실용적 가치의 확인에서 출발하지만 다음 과정에서 자신의 질서가 용납하는 미적체험안에서 완성된다. 우리는 경험적으로 또는 감성적으로 두 가지 경로를 통해 이와같은 절정을 지지한다. 동양사람의 미의식일까? 사람은 무릇 세상의 이치를 이해하거나 다다를 때 두 가지 경로를 통해 균형감을 가지게 되고 그 균형감을 통해 완성의 의미를 알아차린다. 경험을 통한 이해와 감성을 통한 지지가 그것이다. 작가에게 이 둘은 늘 하나처럼 작동할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에 치우쳐 늘 하나가 모자르기 마련이다. 오히려 장인들의 세계에서는 균형감 없이 경지에 오르지 못함으로 염려가 없다. 송 창은 자신의 작업에서 장인의 경지를 설정해 놓았다. 그의 그림은 그것을 증명하는 느린 기록인 것이다. 90년 초반 작업에서 그는 확실히 대상을 소재삼아 표현의 극한 점을 실험하고 있었다. 그의 그림은 그래서 기술된 수많은 이야기를 담아내지 못했다. 그리고 그림을 기술할 수 있는 제한 된 폭만을 고집했었다. 물론 그 당시 적확한 기술조차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지금의 송 창은 굳이 자신의 그림을 기술하지 않는다. 당연히 서사도 닫아 놓았다. 이 점은 옳지 않다. 그러나 그가 어느덧 관자의 입장을 칼 벼리는 장인과 동일시하면서 얻어낸 작풍은 미술의 도구석 이해를 넘어 미술 자체로 완결성을 가지는 궁극의 회화에 많이 닮아 있다. 이제 그는 자신이 개입하여 얻어낸 그리고자 했던 대상의 실체를 보여주어야 한다. 완결은 그래서 관자에세 영원한 것이다.

송창_들봄_캔버스에 유채_70×140cm_2005

작가가 개입하지 못한는 부분은 그림으로 남지 않는다. 그럼에도 관자의 입장에서 개입되지 않는 부분도 없다. 모든 세상의 실체는 그렇게 완성되어간다. 그런데 개입은 무엇을 전제하는가? 과거에 개입할 수 없으며 미래에 대한 개입은 어불성설이다. 당연히 개입이라함은 현재의 나와 실체인 대상이며 그 관계다. 관자의 미덕은, 관자의 의미는 그래서 현실을 떠나지 못한다. 현실을 떠나지 못함으로 우리는 '완결성'에 대해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송 창의 작업은 작가 스스로 '우리, 지금'을 줄기차게 껴안고 있어야할 어떤 숙명같은 것이 관계하게 된다. 그가 보여주는 이 지경의 풍경들은 그의 심상으로부터 나오지 않고 있다. 대상을 해체하여 실체를 찾아보고, 알았지만 뚜렷하게 말하지 못하니 즉흥성이 크게 드러난다. 이 과정에서 이미 작가는 '지금'을 너무 완벽하게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알고 말하지 않으면 결국 알지 못한 바와 다를 바 없다. 그는 끝까지 관자의 입장을 견지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곧 그가 개입한 부분에 대해 또 한번의 작업들을 들고 나올게다. ■ 이섭

Vol.20051203d | 송창展 / SONGCHANG / 宋昌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