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od Days

이인철 회화展   2005_1214 ▶︎ 2005_1223

이인철_source_디지털프린트_120×160cm_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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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5_1205_월요일_06:00pm

덕원갤러리 5층 서울 종로구 인사동 15번지 Tel. 02_723_7771 www.dukwongallery.com

'안녕한 일상'의 권력지도(權力地圖)-이인철의 하이퍼리얼 회화 ● 누군가와 대화하고 있는 사람에게 상대방의 얼굴말고 더 분명한 선명도를 띠고 있는 것은 없다. 즉 그 사람이 입고 있는 의복이나 헤어스타일 그리고 신발 등은 부차적 중요성을 지녀 실제보다 조금 흐릿하게 보이는 식이다. 또 얼굴내부로 국한한다 할지라도 귀나 코 혹은 피부의 건강상태에의 주목은 눈빛과 입 모양에 집중하는 정도보다 더할 수는 없다. 예컨대 하나의 그림으로서 어떤 사물과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허공에 일종의 형상적인 위계를 부여하는 시각이라는 기제는 중요도를 기준으로 순차적으로 부각됨과 물러남의 질서 있는 세계를 구성하는 의지라는 말이다. 많고 많은 그림들에서 우리가 이제껏 보아왔던 그것이 정치적 질서의 다른 이름이었다는 것은 권력의 계보학적 발견에 힘입고 있다. ● 이인철의 '그래픽'은 정치적 질서로서의 시각체계를 흩트린다. 그것은 사진과 같은 아주 사실적인 이미지를 연출할 수가 있는 3D 컴퓨터 프로그램(3차원 영상)을 통해 재구성된 이미지이다. 그렇기에 거기에서는 아무리 세부에서라도 동일한 시각적 밀도와 선명도를 유지하여 마침내 주된 것과 부차적인 것의 구별이 좌절된다. 이는 모든 이미지들이 모두 동일한 중요성을 띠며 동일한 부각됨을 경쟁하는, 제각각 사물들의 독점적인 현존만이 자리하는 만화경적 풍경에 다름 아니게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흔히 삶의 생활세계에서 '주의산만'이라는 병증으로 진단되곤 하는 이것은 정신의학적으론 사물에 자꾸만 마음이 쓰이는 등의 성격적인 특징을 나타내 시각의 분산을 경험하게 되는 신경증적 병리학의 징후로서 진단되는 바이기도 하다.

이인철_연료, 연료_디지털프린트_150×206cm_2005
이인철_연료_디지털프린트_150×93cm_2005

필요 이상의 너무 정밀한 세부를 드러내고 있는 그것들은 왕왕 정보기관들이 눈부시게 밝은 등을 눈앞에 밝혀놓아 고문의 수단으로 악용하곤 했던 피로감이기도 하다. 화면 안의 사물들은 제각각 서로 앞 다투어 경쟁하며 보는 자의 가시장을 피곤으로 무너뜨리며 육박해 온다. 결국 서로는 고립되어있되 제각각은 반짝반짝 빛나는 그것들은 구체성을 잃은 사물들의 세계이다. 르네상스가 정교하게 고안해낸 전체적인 재현공간 안에 주소지를 갖지 못한 그것은 비어있는 기호들이며 텅 빈 공허한 기호들로서 사회적 삶에서의 사물이 아닌 것이다. 그들은 우연한 배열, 환유(換喩)로서의 나열이다. 친숙한 리얼리티라곤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그것은 가벼운 현기증을 유발하며 허무하고 부정적인 즐거움을 준다. ● 이런 부정적인 즐거움은 어디에서 오는가? 제작을 위해 그가 사용하는 매개체는 컴퓨터라는 가상기계이다. 컴퓨팅을 통한 이미지라는 '조작된 이미지'로서의 현실성을 그는 애써 숨기려하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컴퓨터 코드화된 '엔진'을 통한 현실의 산출 과정이란 세계와의 상호작용과정에서 발생하는 인지의 유동성을 기계언어에로 밀어 넣는 과정임을 의미한다. 그는 일단 인지(認知)라는 그 다사다난한 생의 감각을 희생시키는 전략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이 그와 그의 예술에 자리 잡게 된 과정은 괄호로 묶어둘 용의도 있겠다. 걸프전 직후, 허무의 배경 막을 뒤로한 채 "걸프전은 일어나지 않았다"고 쓴 어느 사회학자의 비수 같은 역설에 기댄대서가 아니라, 민족국가 개념을 산산조각 내며 밀고 들어오는 '제국'의 전쟁기계로서의 본성 앞에 무력해졌대서가 아니라, 당분간은 기계의 시대임을 인정하고 들어가는 그의 '와신상담(臥薪嘗膽)'의 전략이라 보아줄 수도 있어 보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단지 그의 이 생의 감각을 희생시키는 행위가 무엇을 얻을 수 있고 무엇을 잃게 할 것인지 궁금해 할 자격은 충분히 있다. 「용사들」을 보자.

이인철_용사들_디지털프린트_150×330cm_2005
이인철_food_디지털프린트_120×160cm_2005

무수한 복제 인간들이 총과 탱크 등의 무기를 앞세우고 전장으로 향하고 있다. 그러나 이 가상적 위협 앞에 선 우리들은 생각만큼 공포스럽지는 않다. 그것은 '부서지기 쉬운' 가상적 이미지라는 이유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이미 그 가상성을 알고 있다. 리니지 게임에 출몰하는 기괴한 형상의 몬스터들이 포탄 몇 발에 제압되리라는, 그리하여 그 다음 출몰할 가상의 적들에 대비해서 실탄을 예비할 (준비적) 이성마저 마비시킬 만큼 공포스럽진 않는 것과 같다. 그러나 정작 우리가 쓰러지는 것은 이것을 실로 대수롭지 않게 보아 넘기고 있다는 것을 자신이 알아차렸을 때이다. 즉 전쟁 전체의 공포라는 그 부피나 체적에 비해 나의 감각의 무딤이라는 얇디얇은 희박의 차이를 감지했을 때라는 것이다. 그 때 우리는 여지없이 예리한 칼에 베인다. 이는 중요한 약속장소를 향해 전철을 타고 가는 중 꾸벅 졸다가 정거장을 지나쳐 아차! 베이는 상처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외상이다. 이 칼베임이 뭘까? ● 그것은 재현의 한계 밖에 있는 폭력과 테러로서의 공포심이 어중간한 평화협상으로 인해 잠재적 불안으로 남아있을 때의 '내파(內破)'이다. 그 평화협상은 '봉합'에 가까운 내재적 한계로부터 온다. 신체 경험의 전체로 결코 표상 되지 못한 공포라는 잔여물이 모조물로서의 전쟁에 대한 '관념'으로 전이(轉移)하는 것이다. 관념은 다치지 않을 표상체계이므로 우리는 그 안에서 평화와 정돈을 구가한다. 그러나 문제는 그 평화와 정돈이 공백을 향한 가역적인 운동을 시작한다는 점에 있다. 뭔가에 빨려 들어가는 블랙홀이나 공백을 향한 질주를 시작하는 '내파'는 진원지도 모르는 폭파의 연쇄이다. 2차대전의 이미지가 3차 대전의 불가능성을 대체한다는 불안한 안도, 전쟁의 이미지가 평화의 가상과 교환되는 음험한 거래의 부담, 때로 산길을 가다 땅인 줄로 착각한 채 발목이 푹 빠져 휘청대는 불균형인 것이다.

이인철_사람_디지털프린트_120×160cm_2005
이인철_두남자_디지털프린트_177×120cm_2005

이는 「두 남자」나 「사람」에서 느끼는 당혹과 곤혹스러움과도 상통한다. 그것은 욕망의 환상이 만들어낸 성(性)의 종착지, 포르노그라피다. ● 사이버 펑키족 남녀에게 있어 근골격계는 이미 강철 근육으로 진화해있다. 그것은 피부 어딘가가 베어도 흰 피가 뚝뚝 묻어날 백색인간, 만져질 수 없는 탐욕이다. 다리는 하이힐로 종아리 근육이 생겨나지 않을 만큼 탄력을 유지할 것, 힙은 쳐지지 않게 허벅지 살과 구분돼 도드라져 보일 것, 허리선은 18세기 패티코트를 입어도 될 만큼 관리될 것, 가슴은 A컵, 여성 참정권, 동등한 재외국민권, 섹스에서의 상위, 계약결혼, 마침내 직립 하여 배설하기... ● 성적 차이를 성적 기관에 등록시키지 않으려는 생식기의 알리바이가 그 알량한 귀결에 이른 '성공한 혁명'이다. 그러나 차마 보지 않았어야 할 그것, 항문기적 퇴행은 강철같은 진화의 그림자치곤 너무도 부끄러운 대결적 여성주의의 내파적 역설이다. "모를 일이다. 이 성적 모멸감 너머에 신체의 상징적 폐허를 먹고사는 신체의 정치경제학이 도사리고 있지는 않은지... 그것은 또 다른 유연하게 진화한 남성적 지배의 포스트포디즘적 방식은 아닌지... 의심해볼 일이다. 그것이 전통적으로 여성을 침묵시킨 그 권력의 체계와 공모하고 있는 건 아닌지 조회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 그러나 이 역설적인 화면 공간 어디에도 그의 결론은 없다. 그는 생식의 질서에 따르는 신체의 기능화는 '해방'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투쟁하는 섹슈얼리티 속에서는 찾아지지 않는다는 것만을 이야기 할 뿐이다. 현대성의 이름으로 대상이나 재현을 파괴하는 '환희'가 미적 환상에 이르게 했다면, 성의 궁극? 성의 투명성? 성의 모호함이나 비밀을 없애버리는 냉혹한 투명성에의 의지로서의 또 하나의 환상, 그것이 포르노그라피가 아니냐는 것이다. 그것은 가장 노출된 형태로 자기 자신을 비웃는 성에게 역설적인 최후의 시선을 보낸다. "너는 무가치하다!" 운명적이게도 「사람」의 탄두의 뇌관은 유두를 닮아있고 포신은 더욱 치명적이게 관리되어야하는 여체의 유체역학적 바디라인에 가까우며, 그것은 불가능한 사랑, 광화사(狂畵師)의 시간(屍姦)으로서의 섹스다.

이인철_한여자_디지털프린트_120×160cm_2005
이인철_선택_디지털프린트_162×120cm_2005

그건 회복될 기미가 없는 상처가 깊은 부상이다. 급기야 「한 여자」는 그 여자의 부조리한 과녁만큼이나 모든 것(자신의 성적 구별, 자아의 확고함, 현실세계에서의 거주함, 입고 있는 의상의 메이커, 한 달의 수입, 지출내역...)의 사라짐의 기호로서 '거기에 존재한다.' 양성을 한 몸에 지닌 UNISEX라는 이 시대의 과잉 욕망의 표상일 테다. 전쟁과 돈과 욕망의 화신인 그것은 숨겨진 궁극성, 교환가치의 역능, 쾌락의 가속력이라는 끝없는 표출본능의 정확한 반복이다. 그 반복의 가속기 안에서 모든 견고한 것은 사라져간다. 환상의 끝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화면으로부터 저만치 멀어져있고 싶어하는 것이다. 정육점에서 고기가 썰리는 느낌으로부터 멀어지고 싶듯이, 그것은 화인(火印)의 상처다. 이 쇠잔하게 패배한 전장, 그곳이 그의 회화가 서성대는 곳이다. ● 어쨌든 우린 그의 그림 앞에서 '즐겁다'. 부정적으로 말이다. 내가 그렇게 사악해진 심성을 가진 건가? 그럴지도 모른다. 결코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가학적? 피학적 음란성처럼... 그렇기에 우리가 파괴의 본능에 얼마만큼 익숙해져있는지, 악의 무리에 한 쪽 발을 첨벙 담그고 있는지 알 수 없다. 달리는 버스에서의 승객은 이미 '속도×체중'의 운동력을 갖고 있듯이 말이다. 우린 이미 진리나 악, 혹은 미나 추도 분유(分有)하고 있는 존재일 것이기 때문이다. ● 우리가 이인철의 회화에 동의하는 점이 있다면 분명 이 분유('그 성질을 나누어 갖고있음')와 관련이 있다. 이는 회화를 그 자체와 싸우고 있고, 그 자체로 파괴될 수 있는 일종의 작품으로 실체화하는 그의 전략 어디쯤에서 그 모습을 드러낸다. 그는 생의 감각을 저당 잡히고, 기계의 추상적인 핵심부품인 모듈(MODULE), 즉 '척도'를 빼내온다. 이제 그 모듈은 기계의 몸을 떠나 유기체에 이식된다. 그런 후에 무슨 일이 일어나겠는가?. 그것이 유전자 변형을 일으키는 건 뒤따라오는 당연한 수순이다. 그것은 사물들의 이상증식, 이상발달 현상이다. 이제 기계도, 유기체도 아닌 그것들은 자기파괴를 서슴지 않는 저 혼자 부셔지는 기계인 것이다. 우리가 그의 그림 앞에서 다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이인철_dog_디지털프린트_150×228cm_2005
이인철_푸른 로~오~즈_디지털프린트_120×160cm_2005

그의 컴퓨터 회화가 태생적으로 위험한 사랑을 시작한 것은 어찌됐건 그의 몫이다. 컴퓨터란 제가 아무리 정교한 소프트웨어를 내장하고 있건, 말 그대로 n개의 '경우의 수' 안에서의 출력물일 뿐이다. 인간의 행동을 협소하게 코드화한 어떤 측면에 대한 '근사치'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 근사치가 "사람(을) 잡는다". 일반적으로 재현적 회화라는 것과 이를 비교해보면 명확해진다. 재현적 회화란 밖으로 나가 그린 풍경화는 물론이거니와 작업실에서 사진을 놓고 그린 회화 혹은 완전한 비구상의 추상화(이를 '심리적 재현 회화'라 부를 수 있다면) 마저도, 작가와 그림 간 (근사치가 아니라) 정확한 측정치로서의 반영물인 것이다. 그 정확성이란 '현상학적 거리감'이 있느냐 없느냐로 그러하다는 말이다. 컴퓨터회화란 기실 그 현상학을 포기하고 들어가는 어법이다. 따라서 그것은 아무리 근사치에 가까워도 어린아이의 풍경화보다도 '정확'하지 않다. 이 '정확하지 않음'은 매우 위험하다. 재현의 뒷 발꿈치만을 모방적으로 따르다가, 이제는 어느 정도 근사치에 최대한 접근했으므로 나의 '육화(肉化)된 풍경'이라고 떼쓸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가 재현이라고 우기는 날 그는 '장난'한 게 된다. ● 어쨌든 그는 컴퓨터에 백기를 들고 투항했다. 왜 그랬을까? 진득한 뚝심으로 진보미술진영을 지켜온 이력의 그가 새삼 시뮬레이션 도구의 고혹적인 현혹에 넘어갔다고 보이지는 않는다. 뭔가가 그를 간지럽힌다.(지금은 추억에서도 지워졌을 얘기겠지만) 내복 재봉선 언저리에 숨어있는 이처럼, 근질거리다, 신경 쓰이다, 미치게 하는 무엇 일는지도 모른다. ● 한 애니메이션 만화가 있다. 동화책을 열면 동화 속 주인공들이 세상 밖으로 튀어나와 그 스토리대로 재잘대다가 책을 덮으면 인물들이 다시금 책 속으로 쏙 들어가는 내용이다. 이인철의 간지러움은 아마 이 때, 책을 덮은 후에 찾아오는 정적의 순간, 참으로 기묘한 '안녕한 일상'의 정체였을는지도 모른다. 윈도우를 열지 않으면 세계와의 교신이 끊겨있는 나락의 경험과 통신을 시작하는 순간 악다구니처럼 달려드는 과도한 리얼리티들이 나를 포위하는 홍수의 경험, 곧 세계의 자아에 대한 전체론적 관계가 허물어져있는 폐허의 경험이다. 여기에서 신체지각적 의식, 즉 불편한 음식을 '시각적으로' 보게 되면 위장(胃腸)이 메스꺼워한다거나, 새빨간 색을 '시각적으로' 보게 되면 가슴이나 볼에서 화상 입은 듯 열기가 느껴지며 고통을 미약하게나마 동반하게 된다는 느낌은 필요 없거나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다. 여기서 나는 세계와의 연결고리를 잃는 것이다. 이제 시각정보들은 나의 감각기관을 경유하지도 않고 직접 신경망 속으로 입력되는 녀석들이 늘어간다. 자아를 피해 가는 직거래인 것이다. 그 '녀석들'이 그의 옷섶에 파고들어 자기증식하며 저희들의 왕국을 이루고 있었던 모양이다.

이인철_美_디지털프린트_150×86cm_2005

그의 기계론적 미메시스는 이 위반 적인 지각, 배반당한 느낌에의 앙갚음의 성격이 짙다. 그는 이 이를 잡고 싶어하는 것이다. ● 그러나, 이? 우습게 보지 말라. 그들은 어떤 무기로도 정복되지 않을 초울트라사이버슈퍼초특급 면역성을 가진 놈들이다. 그들은 이미 어떤 위격(位格)을 부여받았다. 그것은 '권력'이다. 권력은 이미 깊이가 없는, 경계마저 흐릿한 홀로그램의 세계로부터 나오고 있다. 그 스멀스멀한 정체, 한 발짝만 앞으로 내딛어도 발목을 감아 도는 부비트랩의 인계선들, 뭘 시도해도 무가치한 것으로 만드는 거대한 조롱의 귀울림, 자본의 작동으로부터 단 한 사람도 자유로울 수 없는 노예의 시스템이었던 것이다. ● 그는 분명 위험한 사랑을 시작했다. 적과의 동침이다. 분명한 건 그가 패배한다면 이 또한 그는 '장난'한 게 된다. 우리는 그가 살아 돌아오기를 바란다. 비파괴 검사만으로도 완벽한 빌딩해체를 깔끔하게 수행할 수 있는 저강도 검열체계는 결코 만만하지 않을 것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 결국 그는 성공할 수도 실패할 수도 없다. 지극한 재현의 근사치가 당신의 목표가 아닌 한, 적당한 포르노그라피의 보들레르적 감성으로 꺼이꺼이 울다가 돌아오는 것이 당신의 목표가 아닌 한 '어떤 임무'라고 짧게 말할 뿐이다. ● '투입'되는 그를 위해 우리는 그의 무기를 점검해둘 필요가 있겠다. "온 신경망을 마비시켜오는 '하얗게 파괴된 세계'에서 생의 감각, 그 감각의 기억 마저 잊어버리게 되면 어찌하려느냐?" 무기가 너무 소박하지 않느냐는 지적이다. 우리는 그의 무기를 걱정한다. 그가 지구수비대로 자처하는 한 그의 무기는 우리 모두가 따져볼 필요가 있는 무기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것은 람보의 무장이 아닐 것임은 분명하다. 확실히 거대한 자본의 극단으로서의 폭력적 힘은 우리의 상상력을 뛰어넘으며 현기증과 함께 불감증을 동반한다. 모든 가치를 화폐라는 교환 용광로 안으로 밀어 넣는 초자력(超磁力)이 그러하고 현실의 시각체계는 가상의 시뮬라크럼 앞에 무력함을 면치 못한다는 것이 그러하다. 그러나 몸집이 큰 녀석은 확실히 행동은 굼뜨는 법이다. 그 녀석의 언어로 그들의 무기를 탈취하여 시가전을 수행한다면 승산이 있다. ● 그래서 무기는 '투시경' 달랑 하나면 족할지도 모른다. 단, 그들의 통신 음어(陰語)를 알아 내야한다. 그래야 그들의 통신 지휘부를 폭파할 수 있다. 그게 된다면 당신의 승리다. 그의 '정치적 질서를 새로 짜는 수학적인 컴퓨팅'에 기대를 걸어보게 하는 이유다 ■ 박응주

Vol.20051204b | 이인철 회화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