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유적 경계

강혁 영상·설치展   2005_1217 ▶︎ 2005_1222

강혁_디지털 무지개[Digital Rainbow]_스크린, 빔프로젝트_200×300cm_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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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05_1217_토요일_04:00pm

인천종합문화예술회관 소전시실 인천 남동구 문화회관길 80번지 Tel. +82.(0)32.427.8401

문명과 자연, 물질성과 생명성의 조우 ● 1990년대의 한국미술계는 민중미술과 모더니즘이라는 특수한 이분법이 여전히 맹위를 떨치고 포스트모더니즘의 풍향계가 방향타의 역할을 하지 못하는 가운데, 전위와 실험, 영상과 설치, 개념과 행위, 순수와 참여, 구상과 추상 등이 저마다의 정당성을 호소하며 존재가치를 드러내고 있을 때였다. 이때 미술대학을 다닌 작가 지망생들은 급변하는 미디어 환경과 이미지의 범람, 그리고 이에 따른 미술의 개념변화에 대응하기 위하여 부단히 자기 자신을 단련시키곤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좌표를 잃고 표류하다보면 결국 뒤쳐질 수밖에 없다는 '조바심'과 무궁무진한 매체환경에 대한 '호기심'이 교차된 신세대들의 당시 반응은 오늘날 한국미술의 폭과 깊이의 확장에 기여하는 힘으로 작용하고 있다.

강혁_죽음 그리고 민감[Death & Sensibility]_빔프로젝트, 오브제, 모니터_170×300×130cm_2001
강혁_붉은 징후[A Red Symptom]_빔프로젝트, 오브제, 모니터_90×180×30cm_2001

강혁은 이러한 90년대 매체환경의 변화를 능동적으로 받아들이고 즐겁게 수용한 신세대 작가다. 물론 그는 학창시절 평면은 물론 입체, 영상, 설치, 사진 등 시각예술 전반에 대하여 시행착오를 수반한 기본적 기술과 개념습득의 과정을 겪었고, 이는 그가 졸업직후 몇몇의 중요한 기획전과 공모전에서 세속적 성취를 맛볼 수 있는 기틀로 작용했을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그가 작가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표현의지를 실현할 수 있는 매체적 수단으로 삼은 것이 캠코더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는 이미 대학 졸업전에 몇 편의 싱글채널 영상작업을 출품함으로써 향후 자신의 거취를 천명한 바 있고 이후 지속적으로 영상작업을 선보이고 있다. 사실 영상미술은 비디오라는 포스트모던 대중매체를 사용하고 모더니즘 미술과는 다르게 형식보다는 내용, 미학보다는 삶의 의미를 강조하는 까닭에 서사적 스토리텔링의 유혹에 빠지기 쉽다. 그러다보니 영화의 형식을 차용한 시각예술로 전락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내용의 짜임새나 이미지의 전개방식 등 기술적 측면에서 오히려 단편영화가 주는 스펙터클한 감동에 못 미칠 수밖에 없다. 영상작가들도 이미지를 선택하고 전개시킨다는 점에서 영화의 카메라감독과 유사하나 스토리의 전개방식에서는 그들과 필적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왜냐하면 영상작가들은 본질적으로 연출보다는 정지된 이미지를 만들어 가는데 익숙한 '미술가'들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하여 이들은 미술가 특유의 미적 감성으로 선택한 이미지를 추상화 또는 단편화시킴으로써 의미를 모호하게 하거나, 설치 또는 조각적 형식으로 작품을 전개시킴으로써 영상을 미술의 영역 안으로 확고히 정착시키고자 노력한다. ● 강혁이 대학졸업 후 발표한 일련의 작품들이 이 경우에 속하는데, 이를테면 그가 테크노마트 전에 출품했던「바벨탑」은 이전의 싱글채널에서 영상설치로 형식을 확장하고 이미지의 전개도 서사적 방식에서 단편적인 컷편집의 몽타주기법을 사용하고 있다. 형식적 측면에서 조각적 특성을 강조하고 내용의 전개방식도 신화적 직유법에서 우화적 은유법으로 바꾼 것이다. 이는 그가 대학시절 발표한 바 있는 평면작업「문명」, 그리고 같은 제목의 설치작업을 기술적·논리적으로 확장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그가 인간 삶의 다양한 편린들을 문명의 파생물로 간주하고 이를 평면(콜라주) 또는 설치형식으로 재현(제시)함으로써 시대적 등가물로써의 물질이 시간의 추이에 따라 인간의 삶과 역사에서 갖는 의미망을 탐색했다면, 「바벨탑」에서는 신기술과 전자매체들이 제공하는 문명적 이미지와 메시지들이 서로 상충되고 불연속을 이루기 때문에 전언으로써 보다는 물자체로써의 성격에 주목하고 그 표현적 가능성을 탐색하고 있는 것이다. "녹슬고 쓸모를 다해 사그러들고 있는 철판을 다시 일으키며 인간문명의 징후를 감지한다. 그것은 문명이었고 인간이었으며 개인에 있어서는 삶의 효용가치를 아우르는 그 무엇이었다. 자연에 반하는 물성이었고 보다 철학적 냄새를 풍겨본다면 유물론에 대한 언급이었다."(작가노트)

강혁_붉음[Red]_페인팅, 빔프로젝트_250×250×10cm_2003
강혁_치유[Healing]_거울, 철판보드, 빔프로젝트_25×270×25cm_2003

강혁은 이렇듯 문명세계와 비판적 긴장관계를 유지하는 가운데, 예술의 자율성을 끊임없이 추구하며 스스로를 모더니스트로 환원시키고 여전히 추상미술에서 그 논리적 귀결점을 찾고자하는 집착을 보여주기도 한다. 주지하다시피 이번에 출품한 강혁의 영상작업은 영상이미지를 강조한 영상분야와 공간과의 관계를 고려한 영상설치분야로 대별된다. 그 가운데「도시의 몽상」과「디지털 무지개」, 그리고「Wind Tree」등은 영상작업에서 미디어가 아닌 '이미지가 메시지'라는 현대적 공리(公理)를 확인시켜주는 단적인 예가 된다. 이중「도시의 몽상」은 작가가 심야에 자동차를 타고 다니며 촬영한 도시의 모습을 간단한 기술적 조작을 통하여 추상화 한 것이고,「디지털무지개 」는 줌(zoom)을 이용한 클로즈업 효과로 이미지 조작을 시도한 것이다. 이에 반해「Wind Tree」는 동일한 대상이 4계절의 추이에 따라 달라지는 이미지의 변화와 이에 따른 시간성의 문제를 거론하는 일종의 기록 작업이다. 물론 여기에서 시간성이라 함은 움직임을 수반하는 영상미술이 여타의 시각예술과 구분될 수 있는 전거로서의 개념이 아니라 '역사성'과 비슷한 개념일 것이다. 이러한 그의 영상 이미지들은 마치 화화의 자동기술법에서 얻어진 표현효과를 나타내면서 칸딘스키의 투명수채화를 보는 것 같은 영롱한 빛을 발한다. 이를 볼 때 작가는 서사성을 배제하고 즉흥성을 개입시킴으로써 예기치 않은 이미지의 반전을 유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작업방식은 이미지를 탐구하고 추적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마치 표범이 나무 위에서 지나가는 먹잇감을 덮치는 것과 같은 동물적 제스처와 장악력에서 비롯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작가는 대상물에 대한 과학적 기술(記述)보다는 이에 떨어져 내리는 빛의 즉물성(卽物性)과 이의 운동변화과정을 집약하고 추상화하면서 자신의 세계관을 나타내 보이는 것이다. "빗속에서 자연스럽게 움직이거나 흘러내리는 물방울들과 어우러져 흔들리는 인공조명 빛들의 번짐과 흐름이 귀에 익은 클래식 선율과 함께 흘러간다. 물이 잉태시킨 생명과 그 생명이 일궈낸 문명을 상징하는 빛의 일렁임, 이 물의 또 다른 자연적 형상인 빗속에서 그들 간의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물과 빛이라는 매질(媒質)의 만남을 주선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자연의 매질들이 만나서 부서지는 어떤 지점에 대한 경험은 무지개를 발견하는 즐거움에 견줄 만하다"「디지털무지개」작업 중 메모 ● 전술한 강혁의 영상작업은 촬영과 편집을 통하여 시적이고 환상적인 영상미를 창조하는 '이미지 작업'과 기존 이미지를 합성, 변형시키거나 기계적인 방법을 통해 순수전자이미지를 창출해 내는 '프로세싱 작업'이었다. 그러나 시간예술과 공간예술, 기록적 다큐멘터리와 표현적 전자이미지 사이를 종횡하는 그의 영상작업은 이미지의 장악과 발산으로만 완결되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가 영상설치 형식으로 선보이는「붉은 징후」나「가지다 또는 먹다」등의 작업은 기계, 인간, 문명을 실험하는 환경실험이자, 인간의 지각방식에 시비를 거는 영상 실험으로써 환경적 매체공간의 창출과 관객과의 새로운 관계설정을 염두에 둔 기록물이다. 그런데 이 작업은 선택, 왜곡, 제시라는 모더니즘의 방법론을 통하여 그로테스크하면서 쉼 없이 유동하는 전자이미지, 단속적 움직임이 생성시키는 해체적 도상, 그리고 뇌파를 자극하는 색채 등 포스트모더니즘의 속성을 함유한다. 작은 모니터에는 피가 흥건하고 그 안에서 꿈틀대는 생명, 이미 수명을 다한 철판(문명), 썩어가는 물질과 생명성의 힘겨운 조우, 결국 호기심에서 해방된 우리가 다시 시선을 고정시킬 곳은 공간 속에 설치된 미디어 그 자체뿐일 것이다. 그린버그(C. Greenberg)가 제기한 '원근법적 재현을 파기한 현대회화가 화면의 평면성과 물감의 물질성에 스스로 귀속시킴으로써 모더니즘을 실천했다'는 명제틀에 강혁을 대입하면 '그의 영상작업은 물질의 해체를 통하여 스스로를 매체에 귀속시킴으로써 포스트모더니즘을 실천'한 것이 된다.

강혁_치유 2004[Healing 2004]_모니터, 철판보드, 인공 풀_280×90×90cm_2004
강혁_가지다 또는 먹다[Having]_박스, 빔프로젝트_150×100×80cm_2004

한편 강혁이 철판과 거울, 그리고 빔 프로젝터를 이용하여 무한공간을 설정하고 이미지의 확장을 시도한「치유」라는 작품은 아날로그 매체와 디지털 매체의 성공적 매칭이라고 보아도 좋을 듯하다. 4개의 거울로 만들어진 긴 사각통의 거울 한쪽 끝에서 프로젝트에 의한 이미지가 투사되고 이것이 4각의 거울에 투영되면서 무한대의 이미지로 확장된다. 작가에 의하면 이는 복수성을 통해 인간 내면에 자리하는 수많은 욕망들과 자연성들이 어느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닌 인류 공통의 이야기라는 인식을 가능케 하는 장치이며, 아울러 개인들이 만나 서로 동일시되는 가운데 제반의 문화적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상황에 대한 메타포이기도 하다. 이는 각자의 정체성을 상실한 대중소비시대의 인간의 모습이자 아도르노(T. Adorno)가 말한 '관리되는 사회'에서 조작된 인간상에 대한 환기이기도 한 것이다. 결국 작가는 싱글영상을 통해 인간의 본성을, 다면적 복제이미지를 통해 이러한 인간본성에 의해 야기되어지는 사회적 제반현상들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고자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이미지들은 욕망으로 점철된 피폐한 인간상과 이에 대한 치유로 존재할 수 있는 자연성에 대한 문제점들을 말하고 있는 듯하다. 이는 설명적이거나 내러티브적인 요소를 배제하면서도 이미지들이 스스로 말하게 하는 작가적 기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러한 점은 그가 매체를 다루는 방식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는 영상작업을 하면서 과도한 필터링이나 화면전환기법을 피하고, 단지 컷편집이나 중간중간 영상을 연결할 수 있도록 오버랩을 해주는 정도를 즐긴다. 이는 예술가에게 있어 중요한 덕목이라 여겨진다. 미술사를 보더라도 예술가의 과도한 표현적 욕구와 기량의 과시가 작품을 상품으로 전락시킨 예를 무수히 보아왔기 때문이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 하지 않았던가. 이번 강혁의 첫 개인전을 통해 필자가 그에게 습득한 덕목이자 초심을 계속 견지할 것을 권하는 제안이기도 한 것이다. ■ 이경모

Vol.20051217a | 강혁 영상·설치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