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ntastic Hot Story

안두진 개인展   2005_1215 ▶︎ 2005_1227

안두진_Fantastic Hot Story_혼합재료_가변크기_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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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5_1215_목요일_05:00pm

후원_경기문화재단

경기문화재단 2층 전시장 경기 수원시 팔달구 인계동 1116-1번지 Tel. 031_231_7289

자라나는 '오브제-드로잉'과 유머의 차원 ● 언젠가 시카고의 한 서점에서 「그림과 눈물」이라는 눈길을 끄는 책을 발견하였다. 기억컨대, 그 책은 미술이 음악이나 문학과 같은 타 장르 예술보다 사람들로 하여금 눈물을 흘리게 만드는 일이 지독하게 드문 일임을 지적하는 내용으로 시작하고 있었다. 감동은 주지만, 정작 눈물을 자아내게 만드는 일이 없다는 그림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렇다면 반대로 미술은 우리에게 진정한 웃음을 선사할 수 있는 것일까? 웃음과 감동, 유머와 숭고는 얼마나 가까이 있는 것일까? 어쩌면 이것은 현대미술이 가진 하나의 숙제이자 딜레마일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수년 전부터 현대미술은 어둡고 심각한 것을 벗어나 희화화나 유머적 요소를 통한 재미(fun)와 위안(amusement)을 추구하는 일련의 작품들에 주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현대미술이 진지함과 숭고를 담보하기 위해서 어떤 전략을 사용하고 있는가? ● 안두진의 작업을 처음 본 것은 「이야기하는 벽」(talking to the wall: 2004년) 전을 통해서였던 것 같다. 그의 벽화 설치작업은 언뜻 오브제와 회화가 어우러진 작업으로, 현란한 색채와 복잡한 오브제들의 퍼즐게임 같아 보였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늘어지는 형상들은 구체적인 형상을 묘사한 것도, 그렇다고 전혀 이질적인 형상도 아닌, 형상과 비형상, 현재와 미래, 현실과 상상이 혼재하며 경계를 이루고 있는 듯이 보였다. 이런 그의 작업은 정상적인 미술교육을 받아 본 적이 없는 그림처럼 보인다. 어쩌면 그는 세련되고 완성도가 높은 그림보다는 거칠고 생경하고 정돈이 안된 그림을 그리고 싶어했을지도 모르며, 더욱이 어린아이처럼 그리고 싶어했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기성 미술교육이나 선배작가들에 대한 단순한 반감이나 저항과는 좀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오히려 안두진의 작품은 전쟁도, 헐벗음과 굶주림도, 조국으로부터의 추방도 없는 그저 평화롭기만 한 삶의 양태를 받아들여야만 하는 세대, 예컨대 TV 드라마와 광고, 만화와 애니메이션과 같은 폭주하는 대중문화의 이미지를 일상으로 받아들여야만 하는 세대들이 자연스럽게 체득한 이미지와 관련이 깊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팝아이콘 세대의 핵심에 있는 안두진의 작업은 매우 자발적이며, 즉흥적이고, 자의적이며, 합목적적이다. 왜 그런가?

안두진_채플핑크_혼합재료_가변크기_2005
안두진_클래식가든_혼합재료_가변크기_2005

자발성과 몰입의 즐거움 ● 안두진의 대부분의 작업은 오브제-드로잉에 근간한 벽화와 설치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오브제-드로잉은 오브제와 드로잉이 공존한다는 의미 혹은 오브제를 이용한 드로잉이라는 확대된 의미로 해석해도 무방하다. 이런 그의 작업은 두 가지 차원에서 현대적 의미의 퍼블릭 아트의 개념에 속한다. 하나는 지하철 역사라든지, 공장과 같은 공공 장소에 장소-특정성(site-specific)을 띠고 놓여진다는 의미에서 그렇고, 두 번째는 대중(특히 어린아이들)과의 용이한 소통을 모색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 안두진의 작품은 먼저 관자에게 기존의 보는 방식을 잊게 한다. 쉽고, 재미있고, 강렬하며, 가식적이지 않은 그의 작품은 일개 기성 예술이 주는 긴장감이나 위압감과는 거리가 멀다. 그의 작품은 삶을 배우지 않아도 그것을 즐기고 있는 아이들처럼, 배운 대로 작품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가능한 한 배운 것을 잊어버리고자 하는 자발적인 몸짓에 가까워 보인다. 안두진의 작업은 마치 햇빛이 잘 드는 좁은 골목 안에서 하루종일 땅따먹기 놀이로 땅을 확보해나가며 그림을 그리는 지칠 줄 모르는 유년시절의 놀이와 닮아있다. 이런 창조의 놀이를 위해서는 천진난만이 필수이며, 늘 새롭게 시작해야 하며, 그것이 스스로 굴러가도록 만들어야 한다. 스스로 자기 욕망의 주인인 자만이 바로 이 같은 독자적인 유년의 세계로 복귀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안두진은 천진무구할 정도로 자기 세계에 몰입되어 있다. 그는 어린 아이가 자기 욕망에 충실하듯 즉흥적으로 환기되는 환타지 속에서 유희와 창조가 자발적으로 연동되고 있음을 목격하게 된다. 그에게 이런 유희로서의 미적 체험은 다른 어떤 사변적이고 현학적인 철학보다도 훨씬 중요한 덕목이다. ● 이처럼 안두진은 만들고 그리는 작업의 프로세스를 누구보다도 철저하게 즐기는 작가다. 그는 작업이 설치되는 공간의 유동성과 가변성을 즐기며, 거기에서 새롭게 구축되어지는 컨텍스트에 집중한다. 그는 자기만의 공간이 만들어내는 환상성을 자연스럽게 관객에의 참여로 유도한다. 나도 즐겼으니 너도 즐거울 수 있다는 기본적인 메커니즘이 그것이다. 바로 이 점이 그의 작업의 소통의 용이성이다.

안두진_범람_혼합재료_가변크기_2005
안두진_운명의 다리에서 바라본 구름_혼합재료_가변크기_2005

자라나는 자동기술적 드로잉 ● 안두진은 드로잉을 즐겨 그린다. 그의 벽화-설치작업도 스케치와 드로잉이 우선되고 색채가 덧붙여져서 회화적인 미감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때론 실제 설치작업보다 드로잉이 훨씬 인상적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안두진은 과학적 호기심이 많은 젊은 작가답게 물질의 최소단위인 소립자가 존재하는 것처럼 이미지의 최소단위가 무엇인지에 대해 근원적인 질문을 던진다. 그는 이미지의 근원이 도대체 무엇인가에 대한 일종의 도전으로서 수백 장의 드로잉을 미친 듯이 그려내기도 했다. 이로써 탄생한 신조어가 바로 '이마쿼크'(imaquark)이다. 이마쿼크는 이미지와 쿼크(quark: 소립자의 복합모델에서의 기본 구성자)의 합성어로서, 단순히 이미지의 최소단위라기보다는, 분열되고 증식되어 단순한 종합이상의 것이 되는 이미지의 구성요소로 자리매김 된다. ● 안두진의 드로잉과 오브제로 이루어진 벽화작업을 보고 있노라면, 자동기술적인 면모가 확연히 드러남을 알 수 있다. 그가 만들어낸 이마쿼크들이 수평과 수직을 가리지 않고 세포 분열을 하며 자가증식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드로잉과 오브제들은 어디라도 끝없이 리좀적으로 뻗어나갈 것만 같다. 이처럼 오브제-드로잉은 정체되고 밀폐된 공간에서 벗어나 유동하고 생성적인 공간으로 자연스럽게 전이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의 작업은 끝이 없는 것일 수 있으며, 미완을 지향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것은 늘 생성 중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여기에는 작가 특유의 공간에 대한 감각, 즉 특정 공간에 압도당하거나 기죽지 않는, 그 어떤 공간이라도 자신의 놀이터로 상승시킬 준비가 되어있는, 늘 새로운 도전을 야기시키는 공간에 대한 특별한 애정과 관심이 함께 한다. 이제 오브제-드로잉은 더 이상 사적인 놀이나 유희를 벗어난 거대한 조형언어로 탈바꿈한다. 바로 이것이 수집(collection), 그리고 집적(accumulation)과 규모(scale)만으로 충분히 주목받을 수 있다는 현대미술의 전략과 만나는 지점이며, 미학적으로 말하자면 수학적 쾌(快)와 역학적 쾌와 같은 개념으로 규정될 수 있는 항목이기도 하다. 다시 말하면, 안두진의 작업 역시 이마쿼크가 무수히 생성되어, 그것이 드로잉 회화가 되고, 또 다시 커다란 스케일이 담보된 벽화와 설치로 확산된다는 의미에서 앞서 말한 현대미술의 컨텍스트에 부합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안두진_Fantastic Hot Story_혼합재료_가변크기_2005
안두진_은총_혼합재료_가변크기_2005

성과 속, 풍자와 유머 ● 단청 혹은 오방색으로 만들어진 교회가 있다면 어떨까? 안두진의 「채플핑크」(2005), 「숭고한 그림자」(2005)는 팝적이고 키치적인 이미지와 유머러스하고 풍자적인 메시지가 적절하게 결합된 주목할만한 작품이다. 서구의 대표적인 건축물이자 예술품인 교회의 이미지는 불교사찰에나 쓰일법한 오방색의 단청으로 채색되고, 기독교적 도상들은 작가만의 희화적으로 변형된 독특한 도상으로 탈바꿈한다. 특히 제단화 속 예수는 슈퍼맨 같은 망토를 두르고 발레를 하듯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다리를 벌리고 있는가 하면, 천사들은 민화풍 화조도의 길조 같은 모습으로 형상화된다. 이들 작품은 굳이 교회나 예수를 조롱하거나 냉소하려는 의도라기보다는, 종교에 대한 상투적일 정도의 엄숙주의와 사물의 고정관념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꼬집는다고 보는 편이 옳을 것이다. 한편, 사물을 이전과는 다른 맥락에 두는 '낯설게 만들기'를 통한 유머와 풍자는 궁극적으로 탈신성화 혹은 탈숭고화의 과정에 다름 아니다. 이것이 바로 안두진이 성과 속, 현실과 상상력의 세계를 자신만의 유희적 감각으로 접목시키고 소통시키는 방법이다. 여기에는 선악과 같은 윤리적ㆍ도덕적 잣대와 같은 규범들이 들어설 틈이 없다. ● 실상, 예술작품에 있어서 유머와 풍자를 사용하는 문제는 전혀 간단하지 않으며 다양한 차원과 층위에서 정교하게 다루어져야 한다. 이는 그만큼 고도의 지성적인 작업에 속한다는 말이다. 안두진의 작업이 관자로 하여금 경쾌한 마음의 상태를 고무하며, 중압감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예술적 미션을 잘 수행할 수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팝적이고 키치적인 형식미의 작업들이 간과하기 쉬운 내용적 심도의 문제, 성찰과 사유의 중층구조의 문제 등은 안두진의 작업에서도 역시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 다시 말해 그의 작업은 여전히 형식미의 유희적 측면이 부각되어 그 메시지와 의미의 중층구조가 허약해 보일 수 있다는 우려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말이다. 따라서 긍정적인 의미에서 훨씬 더 교묘하게 획책된(?) 유머와 풍자가 담보된다면, 그의 작품은 심층적인 미학적 쾌를 환기하며, 예컨대 유머와 숭고가 경계에서 아슬아슬하게 만나는 장이 마련되지는 않을까? ■ 유경희

Vol.20051218c | 안두진 개인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