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ien In

김홍식 개인展   2005_1226 ▶︎ 2006_0110

김홍식_Voice_스텐레스 스틸에 음각_40×90cm_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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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5_1227_화요일_05:00pm

아트팩토리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법흥리 1652-134번지 예술마을 헤이리 Tel. 031_957_1504 www.artfactory4u.com

진실의 스펙트럼, 거리두기-견고한 형태에 깃든 불명료한 형상 ● 김홍식의 판화는 일반의 그것과는 명확히 다른 구분점을 지닌다. 화면은 크고 빛나며 견고하다. 기존의 판화에서는 좀처럼 맛볼 수 없는 물질성을, 미니멀리즘 조각에서나 느낄 수 있는 감각을 판화라는 장르에서도 얻을 수 있는 것은 그가 선택한 질료에 기인한다. 스테인리스 스틸을 부식시켜 얻어진 화면은 부식된 금속판을 종이에 얻어 찍어진 형상이 아니라 형상을 입은 판 자체가 작품으로 존재한다. 아주 얕은 부식에 의해 스텐레스판은 흑백사진 같은 작은 입자에 의한 명암으로 형태를 이룬다. 하지만 작가의 붓질에 의해 재조정된 형태들은 선택과 소거의 과정을 거친 회화적인 것이다. 디지털사진의 결과 수많은 도트로 이루어진 작품 속의 이미지들은 형태 자체의 불명료성과 더불어 주변의 광선과 관찰자의 시선에 의해 조정되고 한정되는 상황에 놓인다. 똑 떨어지는 사각형의 차가운 금속판이 벽면에서 점유하는 공간은 불명료한 형태에 의해 화면 밖으로 확장된다. 관객은 화면에 집중할 수밖에 없지만 그 흔들리는 형태 속에서가 아닌 머릿속에서 작가의 이야기를 찾아야 하는 것이다. 프레임 속의 형태를 찾아가는 관객의 시선은 형상의 불명료함에 의해 정당화되지만 그 행위 자체가 관음증적인 것임을 감각적으로 알아차린다. 불명료함, 그 유보적인 형태를 통해 우리는 얼마나 많은 훔쳐보기라는 범죄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던가. 관객을 공범으로 만드는 작가의 의도는 "Alien In"이라는 전시명이나 'An Alien's Trip'이라는 개념에서도 드러난다. 함께할 수밖에 없는 여정은 창밖을 스쳐 지나는 풍경을 낯설어하는 이방인의 시선을 따라가 동참하기라는 행위를 수반한다. 차창밖에 스치는 정경은 버스 속의 관성의 법칙에 의해 조정되는 나의 몸과는 달리 여전히 진행형임을 느낄 때, 익숙하기 마련인 주변이 낯설게 느껴질 때, 아파트 문을 열고 나섰는데 이웃과 맞닥뜨렸지만 그가 멀뚱히 나를 바라볼 때, 나는 여지없이 이방인이 되고 만다. 화면에 등장하는 어린 아이 에밀리를 만난 적도 없고 뚱보 미국 아줌마를 알지도 못하는 제3자인 관객이 작가의 일기같은 하루사가 담긴 화면이 낯설지 않은 것은 우리 모두 이방인이 갖는 그 생경함고도 묘한 감정을 때때로 느끼며 살기 때문이다. 소외와 단절을 연상시키는 이방인이란 영단어는 포괄적인 작가의 사유를 상징하는 용어이기도 하다. "사람들 사이에 있다. 때로 같은 장소에 그들과 내가 있으나 그들과 나는 다른 공간에 있음을 철저히 느끼기도 한다."는 작가의 말은 군중 속의 고독을 의미한다. 인터넷을 켜면 무수히 많은 사람이 있고, 정보가 있고, 수많은 사건이 있지만 여전히 우리는 외롭다. 나와는 아무런 관계없는 것들이 내게 무차별적으로 공격을 감행해오는, 나는 대상을 모르는데 그에게 내가 노출되어 있음을 확인시키는 쏟아져 들어오는 스팸메일 때문에 더 외롭다. 스팸메일의 일방적인 공격은 소통을 목적으로 하지 않은 것이기에 결국 비소통을 택하는 자신의 태도를 확인하게 한다. 이방인이란 과연 타인의 시선에 의한 것인가 내 스스로 이방인이 되는 것인가. 그리하여 이방인에서 시작한 너와 나의 관계는 장자의 나비에 이르게 된다. 내가 나비인가, 나비가 나인가.

김홍식_Alien I&Ⅲ_스테인레스 스틸에 음각_38×38cm_2004
김홍식_Alien in.._스테인레스 스틸에 음각_110×28cm_2005

소통과 비소통의 간극에서 ● 「Alien in..」「Voice」「Non-communication」그리고「Text」라는 일련의 시리즈는 영어 단어로 이루어진 작품명을 택함으로써 문자 자체가 그녀의 또 다른 질료임을 명시한다. 작가는 이방인, 소리, 비소통이라는 단어의 뜻을 생각하기 전에 영단어가 지닌 조합적인 소리의 체계를 인지함으로써 인식되는 문자의 시각화, 의미소가 해체되어 시각화된 소리의 이미지를 나타내려 한다. 대개의 화면에서 이들 문자의 형태는 바코드처럼 보인다. 바코드와 문자, 숫자는 사회적 유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기호라는 공통점이 있다. 하지만 쏟아져 내리는 글자들은 마치 오래된 LP판이 튀거나 늘어져버린 녹음테이프의 재생음악을 듣는 것처럼 더 이상 처음의 그것이 아니어서 폐기되어야 할 유통기한의 종착을 알리는 듯하다. 미세한 표면의 부식으로 인해 마치 소리의 파장이 물체에 새겨져 청각적 요소가 시각화된 이미지로 나타난 듯한 착각에 들게 하기 때문이다. 「Voice」라는 명제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소리, 특히 인간의 목소리에 대한 사유는 유통과 폐기라는 요소와 연결되어 있다. 자신이 소속한 사회에서 느꼈던 자유로움과 인생에서의 가능성이 다른 나라로 장소를 옮겼을 뿐인데, 순전히 언어에 의해 구속되고 좌절하고 그리고 소외되어야 했던 경험으로부터 아직 작가는 자유롭지 못하다. 작가의 언어적인 강박관이 표층화된 것이다. 소통에의 욕구, 하지만 순전히 문자와 소리로 이루어진 사회적 언어에 의해 심각한 장애를 겪었을 때 동반된 좌절의 그 순간이 화면에 동여매져 있다. 그래서 그의 작업은 '전도'라는 코드를 지니고 있다. 실지로 '비소통'이라는 명제는 지독한 소통에의 열망을, 파편화된 소리의 잔상은 내게 통용되는 소리에의 열망이다. 그럼에도 미국이라는 거대한 나라의 거대한 도시 뉴욕이라는 한 공간에서 각기 다른 사건으로 보이는 장면의 병치인「Alien in..」의 시리즈는 이 작가가 단순히 자신의 소통에 집중하고 있는 것은 아님을 보여준다. 세 화면은 한 조를 이루고 있는데 화려한 조명으로 빛나는 타임 스퀘어, 불꽃놀이를 구경하는 작가와 이러한 작가를 흘깃 보는 외국인(그곳에서는 내국인), 그래프처럼 빼곡히 9.11테러 희생자의 이름이 각인되어 있는 평화공원이다. 차가운 금속과 규격화된 이미지들은 작가의 조형어법이 매우 서구적으로 보이게 한다. 하지만 정작 작가는 담담히 9.11테러 희생자의 이름을 코드화함으로써 국가주의 세계에서 만연된 정치적이며 사회적인 문제에 대한 관심을 나름대로 해석해내다. 자연의 비밀인 나비효과 그것은 인간세상에서 작은 분노가 불러오는 재앙과 그 분노를 불러온 욕망 등 동양적 세계관에 의해 이해될 수 있는 자연계와 다름없는 인간사의 작용을 적나라하게 증명한다. 보이는 것과 보여지는 것, 내가 그를 보는 것인가 그가 나를 보는 것인가라는 문제는 작가의 인간사에 대한 성찰이자 작가의 의도된 메시지이다.

김홍식_In the Street_스테인레스 스틸에 음각_90×30cm_2005
김홍식_House sweet house?_캔버스에 디지털 프린트_110×500cm 가변설치_2004

상처와 치유 ● 부엌에서 사용하는 단지 요리 재료에 불과한 식초나 가성소다는 단단하기만 한 금속판위를 부식시키고 마음 속 이미지를 표출할 수 있게 한다. 주변의 것들, 그것을 새로 경험하고 적응하는 것 그게 인생이다. 그래서 좌절을 동반하는 단절이 가장 두렵고 어려운 대상으로 부각된다. 여성으로서 김홍식의 자의식은 바로 이러한 주변의 단절에서 시작한다. 보여지는 나와 내가 생각하는, 세상을 응시하는 나의 사이에 존재하는 간극은 바로 대한민국 대개의 여성작가가 겪는 생활 속에서 요구되는 나와 내가 꿈꾸는 나 사이 그것이다. 꿈 꾸었던 나는 꿈 속에 있고 현실의 나는 여기에 이렇게 있다. 과거의 이상은 현실의 나에게는 상처에 불과한데 그 이상의 상처가 아물지 못하는 것은 주변에 결코 드러낼 수 없는 그 이상에의 열망 때문이다. 주변과 같이 하지만 여전히 다른 공간에 있는 그 현재의 '나'가 보는 것과 내가 남에게 보여지는 것이 결코 합치할 수 없음은 한구 사회에서 여성이 갖는 현실의 일부분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작가에게 그러한 상황은 치명적이어서 치유에의 욕구를 분출하고야 만다. 결국 김홍식의 최근작은 두 경향의 내용으로 나뉘는 듯한데 '단절'과 '보는 것과 보이는 것'이 그것이다. 이 둘은 '차이'라는 공통분모가 있으며 '상처'라는 인과관계 아래서 이해될 것을 요한다. 작가는 소통을 꿈꾸지만 결과는 단절이다. 작가는 사물을 본다고 생각하였지만 어느 순간 자신이 관찰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결국 모두가 환상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그게 진실이다. 하지만 그 진실에는 일정한 거리가 있다. 휘황한 불꽃놀이를 바라보는 나를 빤히 보는 그를 알아차린 나는 이제 더 이상 보여지는 자에 머물지 않는다. 이 모든 상황을 조명하며 기록한다. 작가가 이미지를 판화화하는 과정 자체를 즐기는 것은 바로 이러한 모든 상황을 판단하고 조절하여 자신의 시각으로 만드는 기쁨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작가의 그 기쁨을 응시하는 관객은 사태, 작가, 그를 보는 관찰자, 관찰자를 알아차린 작가, 이 모든 상황을 재현한 작가 그리고 이것을 알고 있는 관객이라는 구조에 의해 철저히 단절되고 각기 다른 생각의 구보를 갖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내가 그리는 주변의 광경이야 말로 자신을 구성하고 있는 세계이며 내 자신과 세계를 연결하고 있는 현실의풍경이기도 한데, 과연 그럴까? '내'가 그 사회, 문화 속에서 존재하고 삶을 영위하고 있다고, 그 속에 존재하는 예술과 개인의 문화적, 사회적 감성과 정체성 등을 표현했다고, 이방인으로써의 고독은 다른 문화와 만났을 때에 생기게 된다고. 타지에서 비로서 지금까지 몰랐던 본연의 자신과 만나게 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에 대한 작가의 고민은 우리 모두에게도 동일하게 작용한다.

김홍식_Inter Spaces_디지털 프린트, 종이에 사진 에칭_각 110×28cm_2005
김홍식_Aien in the street_비디오 영상 스틸_00:01:50_2005

진실의 스펙트럼, 거리두기 ● 최근 작가는 같은 이미지를 색판으로 분리하여 보여준다. 같은 장면을 빨강, 노랑, 파랑, 초록의 화면으로 분해하여 병치하고 있다. 이들 원색분해판을 서로 겹친다면 총천연색 인쇄물의 결과를 얻을 수 있으리라 여기며 역시 판화의 미덕을 생각한다. 하지만 어린 시절 미술시간에 배웠던 색의 혼합원칙을 기억해낸다면 이들 각각의 판을 통합하여 얻어낼 수 있는 결과는 총천연색의 생생한 장면 재현이 아니라, 깊은 어둠의 검은색이나 완전한 밝음의 흰색에 불과함을 알게 된다. 이들 이미지를 규정한 색이 물감의 혼합이라면 검은색이, 빛의 혼합이라면 흰색이 되어 결국 캔버스를 덮어버릴 것이고 어느 쪽이든 색판의 통합은 결국 이미지의 소멸을 가져올 것이다. 이미지의 분리를 시도함으로써 통합이 초래한 무(無), 그 덧없음에 대해 작가는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햇빛은 스펙트럼을 통해 형형한 색의 진실을 드러내지만, 물질적 세계는 스펙트럼을 통과하여 통합의 불가능을 보여준다. 맞닥뜨린 물질적 세계와 거리를 유지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작가가 말하는 '낯설게 하기의 즐거움'이란 바로 이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편지를 읽는 사람은 잉크와 종이야 어떻든지 간에 상관없이 사랑을 느낀다. 종이와 잉크에서 사랑을 찾을 수 없는 데도 말이다. 이것이 진실이다. 같은 형태의 캔버스가 3장, 4장 증식되어도 이들이 판화적인 다량의 '반복'이 아니라 하나의 온전한 메시지로 읽히는 것은, 바로 '분해'라는 방식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하나의 사물을 스펙트럼으로 보기. 예술의 궁극적 목표인 진실에 이르기 위한 긴 여정은 인간사를 하나의 사물로 인식하지 않는 데서 시작한다는 사실을 문득 깨닫는다. ■ 조은정

Vol.20051227a | 김홍식 개인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