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actually

홍정표 조각展   2006_0523 ▶︎ 2006_0610

홍정표_Art is (MG)_합성수지, 에폭시, 레진_570×200×180cm_2006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www.zooart.net 홈페이지로 갑니다.

초대일시_2006_0523_화요일_05:00pm

표갤러리 서울 강남구 신사동 532-6번지 Tel. 02_543_7337 www.pyoart.com

예술의 정의는 어떻게 가능한가 ● 예술의 정의를 묻다. 홍정표는 300Kg에 이르는 거대한 상어모형의 설치작업「art is」에서 예술의 정의를 묻는다. 사실상 이 질의는 작가의 작업 전체를 관통하는 문제의식이며 주제의식이기도 하다. 보다 구체적으로 언급하자면, 앞서 거론한 작품과 함께「이거 하나면 당신도 예술가」와 「video Killed the radio stars」 등의 작업에서도 이러한 문제의식이 느껴진다. 그런데 왜 하필 상어일까. 상어는 그 자체 자족적이고 즉물적인 오브제로서보다는 현대미술에 대한 어떤 기호처럼 읽힌다. 현대미술의 역사는 그대로 예술에 대한 정의의 역사이며, 재정의의 역사이다. 예술에 대한 물음은 예술에 대한 자기반성적인 사유의 형태로서 나타나며, 이는 그대로 예술의 한 표현으로서 받아들여진다. 그런 점에서 그 자체 메타미술의 형식으로 나타난 개념미술이야말로 지금까지의 오브제미술과는 뚜렷이 구별되는 현대미술의 진정한 분기점이라 할 수 있다. 개념미술에서의 오브제는 그 자체 필요충분조건이기보다는 미술에 대한 사유의 흔적이며, 그 흔적을 기록하고 축적한 아카이브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 자체 물신의 형태로서 제시된 상어는 현대미술에 대한 사유의 흔적이다. 상어는 이중적이다. 유선형의 날렵한 몸매가 매력적이고 유혹적이라면, 날카로운 이빨은 공포와 두려움을 자아낸다. 이는 그대로 현대미술에서의 물신화된 아트를 상징하며, 현대미술과 관련된 모든 논리와 담론과 해석과 정의를 집어삼키는 마치 블랙홀과도 같은 포식성을 상징한다. 예술은 기본적으로 열려진 개념체계다. 따라서 예술에 대한 모든 논리와 담론과 해석과 정의는 임의적이고 자의적이며, 한정적이고 부분적이다. 이 말인즉슨 모든 창작주체가 그 자신의 논리에 따라 예술을 정의하고 제안할 수 있는 주체이며, 담론 생산의 주체일 수 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내가 정의하는 것이 곧 예술일 수 있는 것이다. 의미도 가변적이고(특히 가치론적인 의미가 가변적이며, 예술의 정의는 이에 연동돼 있다), 그 의미를 사용하는 주체도 가변적이고, 그 주체가 대면하고 있는 세계도 가변적이고, 그 주체가 재현해낸 예술도 가변적이다. 「art is」란 이 물음은 예술에 대한 정의가 이처럼 상황논리에 따라서 가변적일 수 있음을 말해주며, 하나의 정의가 다른 정의에 의해 대체되고 갱신될 수 있음을 암시해준다.

홍정표_Artactually-Krispykreme dozen_합성수지, 에폭시, 레진, 아크릴_57×44×7cm_2005
홍정표_色眼鏡_합성수지, 라이트 박스_각 25×25×25cm×3_2006

예술의 정의에 대한 이런 물음은「이거 하나면, 당신도 예술가」와 「video Killed the radio stars」에서 다른 형태로 변주되고 있다. 이들 작품은 예술에 대한 정의를 여러 동료들로부터 채집한 이후, 이를 영문자 형식으로 배열한 것이다. 이때 영문자의 금속 활자본(실제로는 플라스틱 소재의 표면에다가 은색으로 칠한 기성품)을 문장의 형태로 배열하고, 이를 투명 폴리 소재의 사각 박스 형태로 재구성해낸다. 특히「video Killed the radio stars」는 예술에 대한 온갖 정의들이 함축돼 있는 거대한 비문을 상기시키는데, 마치 예술의 죽음을 증거하는 묘비를 보는 듯한 파토스마저 불러일으킨다. '비디오가 라디오 스타들을 죽였다'는 암시적인 제목의 이 묘비 속에는 예술의 정의들, 다른 정의에 의해 대체된 정의들, 미처 의미화를 얻지 못한 채 흘려보낸 정의들, 죽은 정의들이 마치 예술의 주검인 양 떠돌고 있다. 이로써 예술의 종말 혹은 죽음 논의를 떠올리게 하며, 그 죽은 정의들 위에 발 딛고 서 있는 예술가의 자의식을 떠올리게 한다.

홍정표_Artactually-TAMIYA_합성수지, 에폭시, 레진, 아크릴_20×20×10cm_2006
홍정표_Artactually-광어, 오징어_합성수지, 에폭시, 레진, 아크릴, 스테인리스 스틸_150×55×85cm_2006_부분

예술의 편재성. ● 현대미술은 현실에 다가가려는 일상주의와 현실로부터 멀어지려는 이상주의의 경향성, 이렇게 두 부류로 정의내릴 수 있다.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은 이들 중 일상주의의 경향성을 진척시켰으며, 이를 통해서 예술과 삶과의 경계 허물기를 꾀했다. 그럼으로써 삶으로부터 길어 올려진 예술, 삶과 구별되지 않는 예술, 레디메이드와 다를 바 없는 오브제와 함께 마침내 '예술은 어디에나 있다'는 편재성의 논리를 띠게 된다. 이러한 논리에도 불구하고 현대미술이 여전히 혹은 이전보다 더 난해한 것은 난해함 자체로서보다는 일종의 당혹감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까 도대체 삶의 실제와 최소한의 차이마저 함축하고 있지 않은 작업과 행위들이 예술의 이름으로 제시되는 것에 대한. 홍정표는 이처럼 예술의 편재성의 논리로 나타난 아방가르드 정신에 공감한다. 즉 「artactually」(예술은 어디에나 존재한다는 의미의 조어)란 일련의 작업들에서 작가는 도넛(실제로는 알록달록한 캔디처럼 보이는)과 바 형태의 하드, 그리고 각종 어류들을(물고기들) 소재로서 도입한다. 더욱이 이들 소재를 모본(母本) 삼아서 이들을 그대로 캐스팅한 방법과 과정이 형상들로 하여금 현실의 그것과 똑같은 인상을 준다. 그러니까 형상들이 삶의 실제성과 예술적 조작, 레디메이드와 오브제와의 차이를 결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게다가 도넛 형상은 아예 도넛을 포장할 때 사용하는 종이 박스 속에 담겨져 있어서 이러한 차이에 대한 인식 자체를 무색케 한다. 이와 함께「The Flat」에서는 플라스틱 소재의 장난감 로봇(이 역시 또 다른 형태의 기성품인)을 투명 폴리 소재에 가두어, 이를 사각기둥의 형태로 재구성해내기도 하고, 「inferiority complex」에서는 마치 애니메이션에 등장하는 캐릭터나 마네킹을 연상시키는 인공적인 초상을 보여준다. 대중적인 형상과 캐릭터, 일상 속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소재, 그리고 알록달록한 표면채색(폴리로 떠낸 형상의 표면에다가 각종 색채의 래커를 칠하고, 이를 부분적으로 갈아낸)이 마치 실제를 그대로 복제한 듯한 방법론과 어우러져 팝적인 분위기를 불러일으킨다. 이로써 예술은 논리(예술의 편재성)로 무장될 때조차도 그것이 드러나 보이는 형상만큼은 일상적이고 친근하게 어필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주지시킨다. 이는 그 이면에서 상품처럼 보이는 예술, 상품화된 예술, 물신화된 예술에 대한 인식이 깔려 있으며, 예술의 근거로서의 일상성 담론과의 연관성 속에 있다.

홍정표_Artactually-금태, 우럭_합성수지, 에폭시, 레진, 아크릴_150×55×85cm_2006_부분
홍정표_Artactually-숭어, 돔 부분_합성수지, 에폭시, 레진, 아크릴, 스텐레스 스틸_150×55×85cm_2006_부분

예술에서 물신에로. ● 홍정표는 백화점 쇼윈도나 쇼케이스에 착안한 일종의 포장술을 도입해서 일련의 오브제들을 치장한다. 사각 박스 형태의 좌대 위에 놓여진 유리 케이스 속에다가 오브제들을 진열하는 식의 형태를 취하는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부분 조명을 밝힘으로써 오브제들의 상품적 가치를 돋보이게 한다. 여기서 좌대는 상품이 속해 있는 지평과 현실적인 지평을 분리시키는 미적 장치이다(조각에서 좌대가 사라진 것은 이러한 분리를 회복하기 위한 제스처와 무관하지 않다). 이는 상품으로 하여금 일상이 결여하고 있는 욕망을 충족시켜줄 것 같은 환상을 불러일으키며, 더욱이 조명은 상품에다가 신성한 아우라마저 더해준다. 욕망이 존재의 결여와 결핍을 증명해주는 심리적 계기를 넘어 마침내 그 자체 물신이 된 것이다. 자본주의의 욕망에 의해 추동된 물신 즉 페티시즘은 환영으로써 실제를 대신하고, 이미지로써 감각적 현실을 대체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는 그 자체 물질적인 형식은 물론이거니와, 정신과 사유, 감정과 감각의 소산인 모든 비물질적인 형식들마저 물질적인 형식으로 변질시킨다. 모든 불투명한 것들을 계측하고 계량할 수 있는 것으로 전이시키고, 상품화할 수 없는 것들을 상품화하며, 소유할 수 없는 것들을 유통시킨다. 그런 점에서 장식성을 '사적 소유욕을 자극하기 위한 장치이며, 세계를 영원히 소유하고자 하는 부르주아적 가치체계의 미적 상징물'로 본 존 버거의 진단은 의미심장하다. 저작거리나 어물전에 있어야 할 물고기들이 마치 백화점에서의 귀금속류처럼 진열돼 있는 것에서도 일말의 아이러니가 느껴지지만, 특히 「재능을 이루는 것들」에서 이러한 물신 현상은 더욱 두드러져 보인다. 그 유리 케이스 속에는 사람의 골과 심장, 그리고 손과 그 의미를 알 수 없는 구슬 모양의 형상이 부분 조명 아래 빛을 발하고 있다(모든 형상은 투명 폴리로 돼 있어서 그 자체 빛을 투과하며, 마치 소재 자체가 그 속에 빛을 머금고 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 아마도 골은 정신을, 심장은 감정(혹은 감각)을 그리고 손은 이념이나 느낌에다가 형상을 부여하는 형성력(혹은 구상능력)을 의미하며, 구슬은 이러한 구체적 계기 이외의 우연성을 의미한 것이 아닐까 싶다. 이로써 작가는 그 자체 물질적 형상을 빌려 비물질적 현상을 가시화하고 있는 것이다.

홍정표_Artactually展_표갤러리_2006

홍정표의 이러한 작업들에서는 예술과 일상적인 삶과의 관계변수에 대한 인식이 읽혀지고, 창작주체와 향수주체간의 소통방법에 대한 고민이 느껴진다. 예술을 상품화하는 자본주의의 욕망과, 이를 지지해주는 미적 장치들에 대한 자기반성이 느껴진다. 더불어「art is」에서의 예술의 정의에 대한 물음은 여전히 답이 주어지지 않은 채 열려 있다. 아마도 그 답은 그 자체 임의적이고 한정적이며 불완전한 것이 될 것이다. 만약 궁극적인 답이 주어진다면 그것은 곧 예술의 종결을 뜻하고, 이는 더 이상 예술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 고충환

Vol.20060606d | 홍정표 조각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