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정형 구축

정직성 회화展   2006_0609 ▶︎ 2006_0620 / 일,공휴일 휴관

정직성_주거기계_캔버스에 유채_182×227cm_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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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6_0609_금요일_05:00pm

후원_신한은행_한국문화예술위원회

신한갤러리(구 조흥갤러리) 서울 중구 태평로 1가 62-12번지 신한은행 광화문지점 4층 Tel. 02_722_8493 www.chohungmuseum.co.kr

무정형 구축 ● 도시의 구조물들은 정말 흥미롭다. 특히 내가 주목하고 있는 도시의 구조물들은 주택가 골목에 있는 것들이다. 한 건축가가 설계한 대단지 아파트와 달리 주택가 골목에 형성되어 있는 다양한 형태의 구조물들은, 건축법의 제한을 받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 법의 망으로 포획되지 않는 무수한 틈새에 존재하고 있는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구조물들은 놀라운 합리성과 자율생장적인 질서를 지니고 있다. 나는 이렇게 정형화되지 않은 다양한 구조들을 발견하고 그 의미를 추리해보는 것이 너무나 재밌다. 걸어서 돌아다니면 돌아다닐수록 서울은 정말 무궁무진한 형태들을 펼쳐서 보여준다. ● 나는 그 다양한 공간의 질서를 발과 손으로 더듬으며 몸으로 경험한다. 그리고 캔버스에 마주 서서 그 공간의 감각을 상기하며 형태들을 재조립한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나는 '무정형 구축'이라 칭한다. ■ 정직성

정직성_신림동-연립주택 4_캔버스에 유채_194×260cm_2006

그는 걷는다, 고로 존재한다.-대량생산에 포획된 도시 ● 한 때 거리(도시)는 노골적인 파시즘의 공세에 저항하는 이념의 표정들이 자리했었다. 그러나 지금의 거리(도시)는 새롭게 등장한 그것을 뒤덮을 만한 또 다른 거대한 표정이 차지하고 있다. '유행'이라는 대중의 거대한 수요에 부응하기 위해 상품은 천편일률적으로 대량생산되었으며, 도시 곳곳은 이러한 대량생산의 산물들로 범람한다. 그러기에 도시에서 감지되는 것은 개별적 양식의 부재에서 오는 무기력과 공허, 권태로 가득 찬 일상의 나른함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삶 자체를 억압하는 이러한 일상의 나른함을 지겨워하면서도 동시에 그것에서 이탈하게 되지 않을까 걱정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일상의 패턴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 자체가 사회적 존재 기반에서 이탈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적당히, 그러면서도 집착적으로 일상에 매달려 살아간다. ● 소비 논리에 기반한 대량생산은 사람들에게서 자신의 얼굴을 빼앗아 갔다. 그들은 단지, 소비 논리가 제공하는 기호-이미지의 가면을 쓰고 살아갈 뿐이다. 비단 이것은 사람들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그들이 살아가고 있는 도시의 모든 구성요소들은 이러한 가면을 쓰고 있다. 다시 말해 사람들은 소비 논리가 제공하는 가면을 쓰고, 가면을 소비하며, 가면의 체계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도시 곳곳에서 쉽게 마주할 수 있는 주거환경에서도 이러한 소비 논리가 감지된다. 그것이 화려한 장식과 물질적 세련됨으로 포장되어 있다 해도, 중층적으로 밀집되어 있는 주거공간들은 개별적 양식에서 벗어나 대량생산된 상품의 형태를 보인다. 이것은 자본주의 발전 과정에서 자본의 모순과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제시 된 것이다. 그러나 이쯤에서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일상성이 똑같은 생활 패턴의 기계적 반복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아무리 유사한 형태로 도시를 구성하고 있다 한들 그곳에는 도시를 살아가는 개별자들의 삶의 질감이 녹아 있기 마련이다. 그것들은 그곳에 항상 존재하고 있었지만, 전체적 구조에 수렴되면서 우리의 인식 체계에서 상쇄된 것이다.

정직성_삼청동-주택 3_캔버스에 유채_194×260cm_2006

'점적 이동'에서 '선적 이동'으로 ● 정직성은 얼핏 보면 비슷비슷해 보이는 도시의 외관을 형상화하고 있다. 신림동, 후암동, 삼청동 모두 비슷비슷하다. 비슷한 형태의 연립주택들이 겹겹이 그의 화면에 자리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주목하는 것은 이렇게 반복 재생산되는 것처럼 보이는 공간이 아니다. 정직성은 그곳에서 거주자에 의해 자율적으로 변형되는 도시의 모습을 보고자 한다. 이것은 법이나 제도에 의해 규격화 되지 않는 도시의 또 다른 단면이다. 도시에 대한 전체적 조망은 '걷기'라는 선적인 이동을 통해서 획득된다. 그러나 앞에서도 이야기 했듯이 현대인들은 일상에 매달려 산다. 그러기에 빠르게 변해가는 현대 사회의 패러다임에 편승하기 위해 사람들은 걷기라는 '선적 이동'보다는 점(목적)에서 점(목적)으로 이동하는 '점적 이동'을 하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공간 속에서 자신의 행동에 의미부여 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할 뿐만 아니라, 공간에 대한 총체적인 인식을 차단하는 요소이다. 그들에게 총체적인 공간은 없다. 도시의 새로운 차원을 보고자 하는 정직성은 이들에 반하여 도시를 '걷는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행보로 얻어진 공간에 대한 다층적 공간 경험을 바탕으로 새로운 차원의 도시를 기록한다.

정직성_신림동-주차장_캔버스에 유채_45×90cm_2006

어긋난 원근법에 의해 가시화된 도시의 '내적 복합성' ● 지금까지도 종종 과학적 공간지각의 형식으로 간주되는 공간적 표상형식으로서의 원근법은 브루넬레스키의 대중적인 실험과 알베르티에 의한 이론화를 통해 자리 잡았다. 그러나 정직성은 선적인 이동을 통해 이것에 균열을 내고 있다. 선적인 이동을 통해 얻어진 그의 시각은 하나의 소실점으로 수렴되지 않는다. 그러기에 그가 형상화한 도시는 계단이 지붕이 되기도 하고 장독대가 되기도 하며, 주차장이 되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화면을 가로지르는 계단은 난간이 되고 난간은 벽이 되며, 파이프는 다시 계단이 되고, 계단은 다시 옆으로 흐른다. 먼저 그려진 아래쪽 난간이 계단으로 연결되고, 계단이 다시 건물의 몸체로 연결되기도 한다. 그 어떠한 것이 중심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투시점, 소실점 그리고 모이는 소실선들을 통해 화면에서 새롭게 배열된다. 이러한 배열은 시간의 순차성에 기반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화면의 효율성에 기반하고 있다. 마치 그것은 한정된 공간에 효율을 극대화 시키는 방향으로 변화하는 도시의 성립 과정과 유사하다. 그러기에 정직성의 화면은 도시의 일부분(삼청동, 후암동, 신림동)을 지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도시 전체를 조망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구성된 화면은 하나의 소실점으로 수렴되지 않는 어긋난 원근법의 방식은 큐비즘 회화에서도 찾을 수 있다. 큐비즘 화가들은 시각의 위치 변화에 의한 공간개념을 발전시켜 파편화된 공간을 형상화 했다. 그러나 정직성은 '걷기'를 통해 경험한 반복적 구조 속에서 자율적 생성을 원근법의 어긋난 형태로 화면에서 배열하고 있는 것이다. 정직성은 그곳(정해진 크기의 캔버스)에서 정해진 경계 안에서 내부의 효율을 고도화시키는 방식으로 움직였던 도시의 '내적 복합성'을 가시화 하고 있다. 그의 이러한 발걸음은 멈추지 않고 지속되기를 바란다. "보행자는 도시의 실천가다." ■ 이대범(미술평론가)

정직성_용문동-연립주택2_캔버스에 유채_112×163cm_2006

제압된 풍경-삶의 자리 ● 정직성의 작업은 풍경을 다룬다. 그의 풍경들은, 서울처럼 큰 도시에서 살아 본 사람은 익히 알고 있는, 다닥다닥 붙어지어진 집을 낯설어하지 않는다. 우리 사는 자리를, 그 주변을 포획하고 있는 또 하나의 삶의 자리들로서 집과 건물들은 잇대어 있고 서로를 좁혀 공간을 남김없이 빠듯하게 먹어치운다. 그 익숙한 낯섦을 화가는 소재로 삼아 그림으로 만든다. ● 화가의 눈과 손은 완전하게 새로운 세계를 열어 보여주는 장인의 도구다. 이 도구는, 눈과 손은 항상 화가에 의해 이미 익숙해진 터라 작품을 제작해내는데 있어 단순한 도구적 기능만 수행하지 않는다. 오히려 작가의 도구로서 눈과 손은 사고하고 사유한다. 이 도구의 근원적 기능으로 말미암아 화가는 언제나 완전하게 새로운 의미를 거두어들일 수 있는 것이다. 정직성의 작업에서는 기분만으로도 이 새로운 의미들을 감 잡을 수 있다. 그것이 무엇인지 작가는 밝혀 설명할 아무런 이유를 스스로 가지고 있지 않다. 우리는 볼멘소리로 불만을 제기할 수 있다. 아니 왜 이렇게 그림이 어렵냐고. 하지만 화가의 눈과 손은 이미 그 불만을 잠식시킬만한, 할 만큼의 배려를 가지고 있다. 이 글은 작가의 이 배려함을 드러내고 밝혀보려는 속셈에서 비롯된다.

정직성_용문동-연립주택_캔버스에 유채_112×163cm_2006

그림은 집이거나 건물, 골목이거나 길-길의 연장으로서 계단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소재의 구성은 보는 이로 하여금 친숙한 경험 안에서 이미 발견하고 있었거나 알고 있는 것들이다. 다만 작가가 그것을 집중적으로 몰아 보여줌으로써 우리는 낯설어 할 뿐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밝힘의 전제가 필요하다. 왜 작가는 하고 많은 풍경 중에서 그 소재들을 선택했을까, 하는 것이고(물론 이 질문은 작가와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 밀도 있는 조합으로 구성해내고 있는가 하는 문제다. 두 가지 모두 작품형식에 의해 보여 지는 그것 그 자체다. 그것으로부터 자연스럽게 질문이 이어지고, 질문되는 것이다. 그럼으로 형식-도상을 풀어내어 설명할 이유는 없다. ● 소재를 구성하고 있는 것은 자리를 보여줌에 있어 마땅한 것들이다. '자리'로 보여 지는 것은 집이나 건물이라는 대상에 대한 아주 넓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어 선택할 만한 용어다. 연상을 피할 수 있다면, 우리는 '자리'에 걸어두는, 기대어 생각할 수 있는 '여러 가지 것'들의 상념을 가질 수 있다. 무엇보다도 '자리'가 가지는 '유의미함'에서 바라보자. 사람이 사람답게라는 조건을 충족시키기에는 사람이 있을만한 '자리'의 정직함을 우리는 간과하지 않는다. 사람이 '사람답게'를 보다 넓혀 생각할 때 따라 나오는 여러 연상들은 '자리'를 보다 강고하고 구체적으로 몰아세운다. 그 '유의미' 안에 '자리'는 집-건물이라는 형식으로 구성되어진다. 따라서 여러 사회적 가치를 적용시키지 않고도, 개인적인 욕망을 적용시키지 않고도 우리는 '집-건물-자리'가 하나 되어 있는 이미지의 연상을 받아들일 수 있다. 만일 우리가 "집은 안식처"라는 상투적이고 낭만적인 자의적 해석을 물리칠 수 있다면, '삶의 자리'로서 집은 새로운 의미를 가지기 시작한다. 굳이 '삶'을 잡아 댕겨 붙이고자 하는 이유는 정직성의 작품에 등장하는 소재들이 가지는 의미함축이 사회적인 속성으로서 '집'에 먼저 닿아 있기 때문이다. 만일 그가 선택한 소재가 고급빌라라든지, 대저택의 소소한 풍광이었다면 이 단어의 끌어 당겨씀은 억제되었어야 옳다. 그러나 정직성의 작품에서 드러나는 소재들의 공통점은 주변을 둘러봄으로써 파악되는 '터전'으로서 분명한 삶의 자리를 쉽게 떠올리게 한다. 그렇다면 이 작품들이 무엇을 가능한 상상력으로 무장되고 있는지 가늠하게 허락하고 있음을 파악하게 된다. 작가는 여러 가능성들 중 사람이 전제되어 있는, 그러나 작품에서는 감추어져 있는, 그 존재의 자리로서 '집'을 발견한 것으로 보인다. 자신의 주변을 둘러봄으로써 발견된 그 사실은 곧 작가에게만 고유하게 적용된 이미 그렇게 있는 세계인 것이다. 세계 안에서 분명하고도 완전하게 있는 '자리'는 드디어 작가의 눈과 손이 사유하는 방식으로 새롭게 드러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와 같은 작가의 세계 이해방식이 만들어 낸 것이 마치 사진을 편집해서 붙여 놓은 듯한 작품의 마지막 현상이다. 그 다닥다닥 거리는 건물과 집들의 연이은 '붙어 있음'은 사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삶의 형식, 삶의 방식과 너무나 닮아 있어 놀랍기까지 하다. '자리'로서 의미 연관된 집-풍경은 그래서 결국 작가가 조형적으로만 결과지어둔 작품에서 조차 삶의 냄새를 풀풀 풍기게 만드는 것이다.

정직성_거리가구2-종로3가_캔버스에 유채_60×170cm_2006

작가는 이미 자신이 둘러본다는 행위를 통해, 그리고 단순히 둘러봄으로써 그치지 않고 구성해낸다는 적극적인 행위의 이차적인 작동방식을 통해 세계를 드러내는 사람이다. 과장하자면 그런 상황의 가장 앞선 자리에서 힘겨워하는 존재다. 우리는 이 일관적인 행위들이 마치 하늘에서 뚝 떨어진 창조적인 '어떤 능력'으로 치부하곤 하는데, 사실 자신을 성찰할 수 있는 힘-이것은 스스로 자신을 닦아내는 수행의 방식과 오히려 일치 한다 -에서만 가능한 능력이다. 그 능력을 눈앞에 보이게 하는 것이 바로 화가의 눈과 손인 셈이다. 따라서 화가는 눈과 손으로 사유한다. 이 화가의 사유방식에는 언제나, 작가들 자신이 먼저, 자신의 도구가-눈과 손이- '적합성'에 기인하는지에 대해 질문되고 있다. 그 질문에 늘 정당한 대답은 화가의 둘러봄으로서 발견하는 세계의 정당성에 가 닿아 있다. 이 세계의 발견은 그래서 두드러지게 분명해지는 과정을 보이는데, 이 과정을 통해 작가는 드디어 새로운 세계를 밝혀 보일 수 있는 것이다. 정직성의 작품에는 이 과정의 드러남이 출중한 미술적 기능들-그림을 잘 그린다고 하는 소위 객관화된 평가들과 무관하게 펼쳐 보이고 있다. 그것은 작가가 주변을 둘러봄으로 건저 낸 세계의 당당함을 확신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이와 같은 표현방식을 선호하거나 선택하게 되는 배경에는, 화장이 필요하지 않는 여러 이유 중에 가장 확실한 근거로써 '이유'가 된다.)

정직성_거리가구-종로3가_캔버스에 유채_170×60cm_2006
정직성_한강로1가-옥상정원_캔버스에 유채_130×162cm_2006

모든 사물들은 '사람'과의 연관에서만 유의미하다. 예술마저 그 연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 사실은 곧 의미생산에서 가장 배려되어야 할 것이 사람의 자리라는 뜻과 직접적으로 맞닿아 있음을 지적하게 만든다. 정직성의 작품을 이 방식으로 바라보지 않는다면 그의 회화적 장점들, 비이성적이고 동시에 비감성적인 표현들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형식접근, 대상파악이 거칠게 다듬어진 모순율에 의거해 드러나는 회화적 실체들, 고전적인 회화형식 안에 감추어진 '지금, 여기에'의 둘러봄을 설명할 수 없다. 따라서 정직성의 작품이 만들어내는 '의미'들은 사람을 배려함을 통해서 가능한 의미가 되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정직성의 그림에 '삶의 자리'라 명명하게 하는 근본적인 이유이기도 하다. 작가는 풍경으로 대상화된, 주변의 둘러 포획되어져 있는 것들-지금 작품에서는 집이나 건물들-을 바라보면서 그 풍경 속에 담겨져 있는 사람의 연관을 이해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들고 난 자리로서 텅 빈 공간은 공간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들고 난 이후에 사람이 없어 '텅 비어버린' 것에 의미가 생산되고 있듯이, 그의 작품에는 꼼꼼하게 자리하고 있는 사람들의 존재방식들이 분명하게 터 잡고 있다. 그래서 작가는 탄탄한 뼈대(사람의 사는 이야기)를 굳이 드러내지 않고도 삶의 자리로서 풍경을 재해석해내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접근방식과 이해는, 작가와의 간단한 인터뷰를 통해 찾아낸 것이지만, 그림만을 봄으로써 발견하기는 쉽지 않다. 이미 현대라고 한다면 '현대성' 안에서 그것을 이용하여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단서나 빌미 없이 실체를 바로 이해하지 못함은 익숙한 삶의 언저리가 되어 있다. 회화가 예전과 달리 자꾸만 어렵다고들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하지만 작가가 자신의 주변을 이해함으로써 세계를 드러내듯이 작품 밖의 모든 사람들 또한 작품을 둘러보는 행위를 게을리 하지 않음으로써 작품이라는 새로운 세계를 이해하기 시작할 수 있다. 정직성의 작품은 그 좋은 단초를 제공하고 있는데 회화적 감성이 자유롭게 펼쳐지고 있으되 단순하게 협소한 미술적 용재로서 회화에 갇혀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또한 작가가 바라본 풍경들이 사람이 그곳에 깊이 박혀 있는 '삶의 자리'로서 드러나게 함으로 작가에 의해 의미가 제압되어 있는 형태로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 이섭

Vol.20060609b | 정직성 회화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