耳鳴, ear cries

송영규 회화展   2006_0614 ▶︎ 2006_0704

송영규_ear cries Ⅰ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72.7×60.3cm_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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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6_0614_수요일_05:00pm

문화일보 갤러리 서울 중구 충정로 1가 68번지 Tel. 02_3701_5760

耳鳴,ear cries ● 흐린 날 어둠 짙은 밤에 피곤한 몸을 누이고 잠을 청한다. 그날따라 개 짖는 소리도, 취객의 서툰 발걸음 소리도 없는 날이면 어김없이 귀가 운다. 질환의 예후(豫後)일 수도 있음을 알고 잠시 걱정한 적도 있으나, 잦은 울음은 아니어서 그저 두고 넘겨온 바다. ● 까만 천장을 보며 귀 울음을 듣고 있을 때면, 문득 신기하고 또 조금 안쓰럽다. 귀는 아주 가끔 이렇게 스스로 소리를 내고, 스스로의 소리를 듣곤 하는데, 나의 경우로 한정시키자면, 부산하게 말을 걸어오던 세계가, 이윽고 지쳐 잠잠해진 무렵에야, 그제서야 조심스럽게 자기소리를 듣는 것이다. 신기하지 않은가. 세계로 나 있는 조그만 창에 불과하다 여겼던 귀가, 그래서 가장 수동적이고 내향적인 감관(感官)이라 치부했던 귀가, 어느 날 자신이 만든 소리를 호젓이 듣고 있었던 것이다. 귀는 창문이며 동시에 거울이었다. ● 눈은 이미지를 그리지 않고, 코는 냄새를 피우지 않으며, 혀는 맛을 만들지 않지만, 나의 귀는 소리를 낸다. 하지만 장하다 여김도 잠시, 이내 안쓰러워진 것은 그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이 오직 나의 귀 뿐이기 때문이었다. 그 소리의 파장이 아무리 넓고 높은들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을 것이며, 그 소리의 향기가 아무리 짙고 강해도 걸음을 멈출 이 없을 것이니, 세계와 타인으로부터 이토록 철저히 고립되고 소외된 울음이 또 있을까 싶다.

송영규_위로의 자화상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33×45cm_2004
송영규_자화상의 발견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90×116cm_2005

이 울고 있는 귀 이야기는 타인과 세계를 지향하고 의식함으로써 스스로의 존재를 결정짓고 확인할 수 있다고 믿었던, 나 자신에 대한 우화(偶話)다. 많은 경우 사람은, 타인들 속에서만 온전히 존재한다. 물리적으로 고립된 절해고도에서 조차도, 아마 나는 타인에 대한 부질없는 자긍과 근거 없는 모멸 따위의 피로한 상상을 통해서만 남은 생을 채워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세계를 향한 수줍은 창문이라고 완고하게 결정 지워져 있던 울기전의 내 귀처럼, 나는 타인을 바라보고, 반응하며, 상처받거나, 고무됨으로써만 내 존재의 선명함을 보장 받을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내가 나의 욕망이라 믿었던 것은 결국 내게 드리워져 있는 타인의 음영이었으며, 나는 타인의 규범과 의무와 요구와 금지들로 촘촘히 엮인 관계의 그물 안에서만 나의 존재를 확인하고 안도할 수 있었다. ● 스스로 만들어낸 소리를 외부세계와 공유하지 않으며 호젓이 듣고 있던 '우는 귀'의 발견은, 관계의 연쇄로부터 이탈해 있는 나를 확인하고 긍정하고자 하는 나의 작업에 요긴하게 쓰일 은유가 될 것이다. 아울러, '울고있는 귀'는 내게 엮여있는 무수한 관계의 망을 하나하나 지워나감으로써, '관계'로부터 온전히 자유롭게 된 나의 페르소나가 되어 많은 것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 이 전시를 위해 제작된 작품들은 대부분 '자화상'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 전시가 맥을 대고 있는 앞선 두 번의 개인전은, 타인의 존재에 대한 발견과 만남, 그들과의 관계로부터 비롯되는 상처와 불안에 대한 고백이었다. 이제 이 전시에 등장하는 자화상들은 혼자남음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고자 하게 될 것이다. 타인은 결코 들을 수 없는 이명(耳鳴)이 그러하듯, 타인으로부터 분리된 자화상들은 오직 자신만이 번역 할 수 있는 낯선 언어로 자아에 대한 새로운 이야기를 들려줄지도 모르겠다. ● 이 전시 "耳鳴,ear cries"는 타인의 감옥으로부터 벗어나 자신의 존재를 확인해 보려는 누군가의 여정이다. 그림 앞에 선 관객은, 그림과 자신 사이에 또 하나의 '관계'를 덧붙이고 말수도 있을 것이며, 혹은 타인과 자아 사이를 깊은 심연으로 갈라놓은 후 자신만이 들을 수 있는 어떤 소리를 찾아 나서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아울러 이 전시는 그들에게, 사소하든 치명적이든 혹은 어떤 정도로든, 자신만이 확인 할 수 있는 작은 흔적으로 남게 되기를 바랄 것이다. ■ 송영규

송영규_耳鳴 Ⅰ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40.5×27cm_2005
송영규_lean on me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72.7×90.9cm_2005

귀 울음 - 내 안의 나를 듣다. 보다. ● 이 세상 속 타인은 나 자신을 투영하는 거울 같은 존재이다. 인간은 탯줄로 생명을 유지할 때부터 즉, 스스로의 자각과 의지가 없던 시기부터 타인과의 관계를 형성한다. 타인과의 '관계 맺기'는 인간 삶의 근원이며, '자아'의 존재를 인식하는 중요한 방식 중 하나이다. 때때로, 일부 극단적인 자아들은 관계 맺기의 치명적인 고통과 상처를 피하기 위해 타인과의 단절과 고립을 선택함으로써, 폐인(廢人) 혹은, 번뇌를 초월한 도인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범부(凡夫)들은 시간의 흐름과 망각이라는 '신의 선물'에 의지한 채 이러한 고통을 감내하며 살아간다. ● 송영규의 작품은 타인과 자아의 관계에 대한 깊은 사색과 관찰의 결과물이다. 즉, 타인의 시선에 대한 두려움과 고통, 부담과 거부의 몸짓으로부터 화해와 소통, 자아의 회복 단계로 나아가는 여정인 것이다. 작가의 고백에서 알 수 있듯, 이번 자화상 연작은 "전작들에 등장했던 '그들'로부터 시선을 거두고 그림을 그리는 내 앞에 거울을 놓는 일"로 시작된 것이다. 전시 제목인 '이명(耳鳴)'은 세상의 소음이 모두 사라진 깊은 저녁, 문득 듣게 된 자신의 '귀 울음(환청에 가까운)'에 대한 작가의 각성(覺醒)에서 비롯된 것이다. 타인을 향하던 시선을 자아로 돌렸을 때 비로소 깨닫게 된 것은, 이전까지 그 존재감이 미약했던 '내 안의 또 다른 나'에 대한 자각과, 이를 인식한 자아가 타자로 변환되는 분열적인 경험이었을 것이다. ● 「이명」과「이명II」에서 작가는 자기 육체의 한 부분이자, 파편화된 자아인 '커다란 귀(耳)'를 조심스럽게 보여준다. 자신과 분리되어 새로운 관계가 형성된 독립된 자아를 화면 밖 타인에게 노출시키는 행위는, 또 다른 복합적인 관계 맺기를 유도하는 긍정의 제스처로 보인다. 이번 전시에 새롭게 선보인「해바라기」시리즈는 타자를 통해 자신의 존재가 확인되는 대표적인 소재를 묘사한 것이다. 해바라기에게 타자(해)의 부재는 물리적인 죽음과 함께 존재 자체의 근거가 소멸됨을 의미한다. 작가는 타자와 해바라기의 운명적인 관계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반영하며, 연민과 위로의 시선을 거두지 못한다.

송영규_해바라기 Ⅱ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72.7×90.5cm_2006
송영규_해바라기 Ⅲ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72.7×60.3cm_2006

작가의 풍부한 문학적 상상력과 예민한 감수성, 간결하고 선명하게 표현된 고백의 글들, 치밀한 화면 구성과 빛의 효과, 주제를 묘사하는 완벽한 기술 등은 개개 작품들의 완성도를 높여준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러한 완결성이 지나친 강박과 경직된 형태로 나타나는 점은 작품의 매력 요소를 반감시키는 원인이 된다. 「자화상」시리즈는 작가의 연약한 감수성과 상처를 너무 직설적으로 드러낸다. 타인의 시선에 의해 발가벗겨진 인물, 텅 빈 공간 속에 홀로 웅크린 인물, 타인들의 대화로부터 소외되어 얼굴을 가린 인물들은 '고립된 자아'에 대한 과장되고 도식적이며, 진부한 포즈의 수준을 크게 넘어서지 않는다. 주제의 메시지와 표현 방식의 명확성이 마치 단편소설의 삽화나 연극의 한 장면처럼 보이는 점도 작품의 완결성과는 상관없이 작품 자체의 회화적 매력을 중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이런 현상들은 주로 완벽하게 자신만의 기법과 표현방식을 추구하는 작가들이 흔히 겪게 되는 실수 중 하나이다. ● 송영규가 세 번의 개인전을 통해서 보여준 주제에 대한 진지한 접근과 해석방식, 화면을 구성하고 완결시키는 능력은 이미 수준 이상을 넘어섰다. 이제 남은 것은 그의 깊은 사고의 폭을 자유롭게 확장시키는 것이다. 이는 몇몇 작품에서 보이는 감정의 과잉과 표현 방식의 도식화를 경계하는 것으로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주제에 대한 유연한 사고와 다양한 접근 방식은 작품의 표현력을 풍부하게 해준다. 흔히, '그 작가의 그 작품'으로 알려지는 양식화된 작업들은 작가의 운신의 폭을 좁히며, 다음 작품에 대한 기대감을 빼앗아 버린다. ● 필자는 학창시절부터 10여 년 동안 작가의 곁에서 타인의 존재로 관계 맺기를 이어왔다. 사적인 친분 관계를 가진 입장에서 작품을 비평한다는 것은 당연하면서도,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이러한 친분이 도리어 아는 이들에겐 '격려성 소개의 글', 흔히 말하는 '주례 비평'으로 비치지 않을까하는 염려와, 지극히 주관적인 나의 비평이 도리어 작가와의 일상적인 친분 관계에 치명적인 영향을 줄 수 있지 않을까하는 걱정에서였다. 어쨌건, 결코 호의적이지 않은 '타인의 시선'이 자의식이 강한 젊은 작가에게 또 하나의 '깊은 상처'가 될 수 있음을 인정하며, 자신의 몸 속 신체의 일부분이 새로운 의미로 발견되어진 것처럼, 이 글이 또 다른 고민과 숙고의 계기가 되길 진심으로 바란다. ■ 이추영

Vol.20060614c | 송영규 회화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