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 MUR

이종철 사진·영상展   2006_0621 ▶︎ 2006_0627

이종철_6nipples_디지털 프린트_80×180cm_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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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6_0621_수요일_05:00pm

갤러리 토포하우스 서울 종로구 관훈동 184번지 Tel. 02_734_7555 www.topohaus.com

벽 위의 구멍 혹은 평면 위의 점, 그것의 시간과 공간에 대하여 ● 1. 이종철은 벽 위로 시선을 모아 일종의 평면 위에 찍힌 점을 발견하듯, 그 곳에 파인 구멍을 찾아간다. 구멍은 대체로 벽에 박힌 못으로 인해 생긴 것이지만, 물론 간혹 송곳이나 정, 드릴 등과 같은 뾰족한 도구들일 수 있지만, 그 자체는 여러 시간대와 환경의 조건을 거쳐 손상된 정도의 표정을 다양하게 드러내 주고 있다. 구멍 주위로 벽이 조각으로 예리하게 들춰지거나 깨지면서 마치 총탄이 벽을 관통하고 지나간 것과 같은 흔적으로, 때로는 구멍 아래로 길게 핏자국이 드리운 듯 녹물이 늘어뜨린 모습으로, 때로는 철판으로 된 벽 자체가 전체적으로 부식되면서 마치 화상을 입은 피부처럼 번져가는 균열의 모습으로, 채색된 벽면 속으로 너무도 명료하게 찍힌 검은 점처럼, 혹은 표적처럼 드러나 있다. 벽은 하나의 공간이 되고, 그 위로 난 구멍은 하나의 시간이 된다. 벽은 공간으로 말하고, 구멍은 시간으로 말한다. 그러나 벽은 시간에 의해 다시 자기 존재를 드러내고, 구멍 역시 공간에 의해 자신의 표정을 만들어낸다. 구멍은 실제로 벽을 예리한 것이나 어떤 각(角)을 통해서 가해진 공격성의 결과이다. 그것은 공간에 대한 시간의 공격이다. 벽이라는 밋밋한 중성적인 공간에 시간이 남긴 처절함과 예리함의 흔적이라는 것이다. 그 흔적 없이 처음의 모습으로 있는 벽은, 즉 벽의 근본적인 성격은 표정이 없는 형태일 뿐이다. 그래서 구멍은 벽에 대해 말을 걸어 시간을 만들고 흔적을 만든다. 그 구멍을 통해 벽의 숨통이 트일 수도 있고, 어쩌면 그 곳으로 물이 흐르거나, 아니면 저 너머로부터 들려오는 무슨 말소리라도 들을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공간 위로 벽을 뚫어, 그 피부를 찢어 이처럼 공격적으로 시간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벽 위로 구멍을 내는 일은 대상을 뚫어져라 응시할 때의 표정과도 같다. 벽 속으로 만들어진 구멍은 무언가를 말하고 싶은 것이 있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설명하기는 쉽지 않다. 벽이란 대체로 시멘트와 같은 무기질로 만들어진 것이고, 그 자체로 생명을 갖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란 그 흔적을 남긴다는 점에서, 그리고 지속적으로 축적된 흔적의 켜를 드러낸다는 점에서 일종의 생명의 원리를 갖는 법이다. 최소한 벽 위로 흔적을 남긴다는 행위는 생성의 의미를 일구는 염원일 수도 있다. 그래서 푸른기를 띤 어두운 구멍의 표정과 묶여져서 벽은 하나의 생명을 가진 전체가 된다. 벽 위로 만들어진 구멍은 자신의 입자감을 결핍과 충족의 반어법을 동시에 사용하면서 표현하는 것이다.

이종철_Signal City-Holes_디지털 프린트_가변크기(각 60×40cm)_2006
이종철_City of Mandala-Bird_단채널 비디오, 사운드_00:01:60_2006
이종철_Crying Hole_단채널 비디오, 사운드_00:02:08_2006

2. 그러나 전반적으로 이종철의 작업은 디지털 사진의 감수성이 그러하듯 쿨하다. 벽 위로 가해진 시간의 흔적이 벽을 뚫어 찢겨내는 듯한 처절한 관계로 설정하고 있지만, 쉽게 감정 이입을 허용하지 않는다. 오히려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그는 시간과 공간의 관계를 바라본다. 그래서 그의 사진에서 벽은 평면으로, 구멍은 점으로, 그러니까 일종의 형식적 구조로 읽히는 부분이 있다. 하지만 벽은 가장자리 없이 무한대로 넓이를 확장해 가는 형태가 아니라, 면의 일부를 잘라낸 것으로, 또 조각으로 나뉘어진, 즉 경계를 갖는 공간으로 제한되어 있다. 벽은 정확히 디지털 카메라의 앵글에 잡힌 프레임으로 잘려 있다. 우리가 눈으로 보는 사각의 프레임으로 늘 경계를 설정하는 것이다. 그 경계지움으로 그는 우리의 현실을 하나의 유한성으로, 그러니까 전체가 아닌 공간의 단편, 면의 일부 혹은 조각들로 구성한다. 벽 위의 구멍은, 그러니까 평면 위의 점은 때로는 반복적으로 구성되기도 한다. 옆으로 길게 수평으로 반복되거나, 위아래 수직으로, 그리고 좌우 정렬한 방식으로 반복되어 정사각형의 틀을 만들어내는 경우, 그것은 멀리서 바라보는 시점을 만들어낸다. 그래서 위 아래로 반복되어 배치된 구멍난 벽은 점들의 연속으로 비쳐지기도 한다. 아니 때로는 배꼽 같기도 하고, 동전을 모아낸 것처럼 보이기도 하며, 또 어떤 때는 벌레 먹은 사과의 표면 같기도 하다. 그것이 반복됨으로써 점은 어떤 강한 집중력을 자신의 적극적인 성질의 하나로 부여하는 듯하다. 이와 함께 형식의 근원적 대비, 양극의 절대적 대립관계를 말할 수 있다. 구멍은 벽에 대해 확장(원심적)과 수축(구심적)을 말한다. 즉 무한과 유한의 대립이 그것이다. 절대적 무한함과 절대적 유한함, 이것이 공간과 점의 최후의 결론이다.

이종철_Bleeding Sun_단채널 비디오, 사운드_00:02:45_2006
이종철_Bleeding Monument_디지털 프린트_270×60cm(각 60×40cm)_2006
이종철_Signal City-I / RMIT Faculty갤러리(멜버른)

3. 구멍으로 표현된 점은 한계성의 총괄이다. 점은 무엇인가 끝나는 곳과 시작하는 곳, 무엇인가 존재하는 곳을 다른 어떤 형식요소보다도 명확하게 규정한다. 하나의 점은 시작을, 또 하나의 점은 끝을 나타낸다. 이종철의 영상작업은 일관된 어조로 이러한 관계를 녹여낸다. 짧은 시간에 명료하고도 단순하게 표현하고 있는 그의 작업은 한편으로 표현주의적으로, 한편으로는 냉냉한 사실주의적 어법으로 이를 불러일으킨다. 바닥에 버려진 작은 새의 주검(, 싱글채널 비디오, 1분 16초)을 보여줌으로써 시작을 말하는 점을 들이대고, 울부짖는 구멍(, 싱글채널 비디오, 2분 8초)과 디지털 붓다(, 싱글채널 비디오, 1분 23초)의 표정 변화를 좇아가면서 끝을 말하는 점을 들이댄다. 아니 어쩌면 시작과 끝은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순환하는 원의 형태로 만나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다른 작업, 벽이되 벽에 가한 상처와 상흔의 맥락이 아닌, 그러니까 다소 세속적 어조를 걷어낸 색면구조로서의 벽으로 화사하게 변하는 작업이 남아있다. 이 작업은 이종철의 호주 유학생활을 해피 엔딩으로 마무리짓게 되는 시나리오로 읽히는 대목이기도 하다. 앞서 제안된 벽 위의 구멍과는 달리 벽 자체가 붉은 색과 파랑색과 같이 명쾌하고도 자신있게 생동감을 발산하는 분위기로 기운을 만들어내고 있다. 벽에 구멍을 낸 조건과 달리, 색채를 드리운 벽은 평면의 조건을 보다 분명하게 드러냄으로써 순수하게 자신의 속성을 드러내는 듯하다. 벽이 엄밀하게 평평한 상태로 있을 때 가장 순수하게 되는 것처럼, 이종철은 벽 위로 환한 색조를 드리워 그 일탈이나 불규칙함이 없는 평평한 면을 말하는 것이다. 벽은 유일성과 단순성, 독립성으로 남아 스스로를 가장 훌륭하게 표현하고 있다. 인간의 모든 경험은 면에 사각이라는 형을 필연적으로 동반시킨다. 이종철은 벽으로, 바닥의 한 면으로 사각형을 말한다. 그것은 사진기의 사각 프레임과 동일한 원칙을 갖는다. 그것은 우리가 확인하는 현실과 세계의 솔직한 부분이다. 어쩌면 그렇게 구분되는 사각형은 처음의 평면, 즉 본래적인 공간을 말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자신의 디지털 사진작업을 통해 그 공간에 시간을 부여한다. 그래서 구멍난 벽을 찍고, 바닥에 버려진 물건들을 마치 시간의 흐름을 점지하는 점처럼 접근하는 것이다. 그것들은 존재하는 가장 단순한 형식이다. 즉 전형적으로 으뜸이 되는 형식이다. 그것을 놓고 작가는 시간과 공간의 의미를 사유한다. 아주 쿨하게, 그리고 건조하게, 그러나 지적 게임의 의미를 가지고 우리에게 보여준다. ■ 박신의

Vol.20060622c | 이종철 사진·영상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