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어린시절에 격려를 보냅니다

송원진 조각展   2006_0623 ▶︎ 2006_0713

송원진_당신의 어린시절에 격려를 보냅니다_합성수지_220×60×55cm_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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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6_0623_금요일_6:00pm

송은갤러리 서울 강남구 대치동 947-7번지 삼탄빌딩 1층 Tel. 02_527_6282 www.songeun.or.kr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당신, 행복하길 바래요. ● 송원진의 작업은 잘 보이지 않는 삶의 이면으로 우리의 시선을 끌어다 놓는다. 그리고 그 이면이 실은 우리 삶의 또 다른 축과 연결 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석고캐스팅과 테라코타 연작들이 수행했던 이러한 예술적 기능들은 이번 개인전을 통해서 새로운 medium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기도하는 왼손과 오른손의 만남', '눈과 안경 사이', '레즈비언의 가슴과 의 등', 과 같이 두 가지 다른 세계가 조응하는 방식과 목적이 비교적 분명한 의도로 드러난 이전의 작업과는 달리 이번 전시의 연작들은 보다 보편적 토대에서 모양새를 갖춘다. 이러한 의도는 전시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보편적 타인에 대한 관심을 거름 삼고 있다. 작품의 구성요소들은 특정한 이름을 부르는 대신에 들을 준비가 되어있는 귀 기울인 모두의 이름을 불러준다.

송원진_당신의 어린시절에 격려를 보냅니다_합성수지_220×60×55cm_2006

식물 형 인간. 송원진은 스스로를 식물적인 인간형이라 부른다. 그에 따르면 식물형인간은 뿌리를 땅에 내려야 안정과 생명을 유지하는 인간형이다. 흔들리는 바람에 무력하게 자신을 내어 맞기고 동물처럼 울어 자신을 표현하지 못하지만, 그러나 그 뿌리만큼은 안주 할 곳이 있어 충만하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모두가 같은 양으로 고르지 않다. 우리에게 정착하지 못하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면 우리를 위한 "움직이는 땅"이 있어야 한다. 비록 작품상의 외형이 화분이라는 특정한 대상을 재현하고 있지만 우리는 이를 대상을 초월한 표상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과 같이, "움직이는 땅"은 '땅'이라는 물리적인 사물의 상태를 지칭하고 있지만 이 또한 역시나 고도의 정신적인 '초월 상태' 혹은 저마다 삶의 찰나를 인식할 수 있는 '철학적 순간'이라 이해해야 옳다. 범상한 조건의 조합을 비튼 사이로 지혜를 얻는 것이 예술이다. 따라서 작가의 작품에서 식물_화분이라는 기호의 결합은 정신적으로 안정하고자하는 보편적인간의 감정 기저에 있는 의지의 집합체인 것 이다. 그러나 이상하게 식물형인간인 작가가 주목하는 것은 '아무 것이 없어 보이는 빈 공간'이다. 장피에르 레이노의 콘크리트로 가득 채워진 대형 화분이 더 이상의 삶과 죽음을 거부한 무중력의 닫힌 공간이라면 작가는 희망의 가능성이 존재하는 자리로서 '빈_화분'을 발견한 것으로 보인다. 작품의 조형적 명랑함 이면의 조심스런 손 내밈은 인간심리의 원형이 외부 대상과 동화되려는 속성을 지녔음을 암시한다. 이러한 내적복합성은 심은 것이 없는 화분이 자신의 소임을 거부한 것이 아니라 누군가를 위해 항상 자리를 마련해 놓고 있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화분은 타인의 자리를 인정하려는 인간의 근원적인 갈망을 대변한다. 동시에 작품에서 무형의 공간과 함께 또 한 가지 우리가 보아야 하는 것은 음성 없이 들리는 육체의 수고로운 노동이다. 소리 없이 전해지는. 차가운 테크놀러지가 없는 '수공적 노고를 통해' 우주적 질서는 다시 일상의 층위 사이로 우리의 삶의 풍경을 풍부함으로 바꾼다. 흙으로 빚고 석고로 모형을 떠 다시 FRP로 형태를 고정해 깎고 다듬어 색을 칠하는 길고 긴 과정 동안 작가가 마음의 정원에 심고 또 심었을 진심이 보이는 것 같다. 「'심다'는 행위는 모든 것의 근원이자 결말이라 생각한다. 씨앗을 심고 초목을 심고 우리의 육신 또한 언젠가는 심는다.」작가 노트 中

송원진_당신의 어린시절에 격려를 보냅니다_합성수지_220×60×55cm_2006

'움직이는 땅'인 화분 안의 공간에서 어떤 희망을 심을지는 보는 이의 의지에 달려있다. 그리고 의지가 닿는 순간에 우리의 자리가 그 안에 있다. 딱 화분만큼의 자리일지라도 분명한 것은 우리 안에 그 자리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작가의 말처럼 "'너'와 '나'사이에 일어나는 근원적인 관계 작용"에 대한 이야기이다. 소통을 위해 극작가 브레히트가 도입했던 '거리를 두기_소외효과' 보다는 접촉을 위해 거리를 좁히는 방법을 택한 것이다. 그 방식은 능동적이다. 마치 시인 김춘수가 부르는 꽃의 이름처럼. ● 작가의 설명에 의하면 '나'를 제외한 모든 세상의 대상은 '너'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잠재적 '나'이다. 결국 작가가 보여주는 작업은 조화와 역학적 안정이 포함된 물질적 여러 단위의 공간적 배치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조화를 유지하는 아름다움은 정적이고 온화한 미적 효과를 지니지만, 그것만으로는 단조로워서 변화가 결핍된다. 이것을 깨는 동적인 효과로서 콘트라스트 즉 대조. 대비가 필요하다. 그 동적인 효과의 대조가 모순되지 않는 것이 또한 조화이다. 미학의 근본 과제인 '다양의 통일', '변화의 조화' 는 끊임없이 예술에 요구되는 것이다. 그 것을 위해 작가가 마련해 놓은 장치는 '음의 영역'에 대한 환기를 유도하는 작품 각각의 제목들이다. 영국출신 조각가 레이첼 화이트리드도 버려진 아파트의 내부에 시멘트나 석고를 채워 넣어 내부의 공간을 캐스팅하는 방식으로 '음의 영역'에 대한 잠재적 기억을 환기 시킨 바 있다. 그러나 음의 영역은 '공간'이라는 한정된 대상을 제외하고도 역시 무수히 존재한다. 그리고 이제 송원진의 작업에서 보이지 않는 부분에 대한 '관심과 배려'의 차원으로까지 한걸음 더 나아간다. 일면식이 없는 타인에게, 게다가 그의 어린 시절에게 격려를 보내는 작가의 메시지는 당신을 포함한 세상의 모든 것이 여기 나를 있게 한다는 경견하고 진실한 감사의 마음이다. 이는 인간 세상의 모든 사물과 현상은 세상의 그 나머지 대상과 더불어 완전한 하나가 된다는 깨달음일 것이다. 왜, 인류의 미학적 근원이라 불리는 그리스의 캐논 중의 하나도 '균제미' 즉 시메트리(symmetry_대칭)이지 않은가. 서로 다른 두 요소 사이의 조화로운 관계가 서로 다른 것들이 순간순간 규형을 잡아가는 가운데 생성되는 질서라면 물질의 내부에 나머지를 찾아 나를 채우려는 질서_의지는 이미 있다.

송원진_심장의 정원사_합성수지_110×100×60cm_2006

사물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어쩐지 그것이 말을 하고 있다고 느낄 때가 있다. 본디 사물의 속성이란 이름 붙이고 의미를 얹기 나름이다. 말을 걸어온다고 느껴지는 것은 나로부터 대화의 의지가 먼저 발화하기 때문이다. 작가 송원진이 오늘도 채워 넣고 있는 것은 바로 그것이다. 이제 작가는 마음을 다룬다. 스스로의 잣대로 취할 것과 놓을 것을 가르니 어쩌면 그의 작업은 마음의 가치판단에 대한 이론이다. 이제 왜 작가는 하고 많은 사물 중에서 '화분'이라는 대상을 선택했을까를 묻지 말라. 예술작품의 의무는 사유의 결과가 아니라 단서를 제공하는 것이다. 사실 어떤 매개물로도 찰나에 정수(挺秀)에까지 이를 수 있다. 조급함은 행복하고자하는 사람이 가져야할 별로 좋은 수용자의 덕목이 아니다. ■ 안현숙

Vol.20060626b | 송원진 조각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