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EW CITYⅡ

사유를 위한 집展   2006_0616 ▶︎ 2006_0705 / 일요일 휴관

박종민×정상현_죽음의 한 공간_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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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6_0616_금요일_06:00pm

박종민×정상현_서승모×한정림_신기운×윤근주

기획_이재준×홍영인

주관_디자인연구소 PREGRAM 주최_경기문화재단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일요일 휴관

경기문화재단 전시장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인계동 1116-1번지 Tel. 031_231_7289

6명의 젊은 예술가와 건축가의 매우 개별적인 삶과 사유(思惟)들이 수원 경기문화재단 전시실에서 만나 또 다른 가치의 담론을 나누었다. 이들의 공동작업과정과 결과물을 소개하게 될 이번전시는 지난 2월 아르코 미술관에서 있었던 ANEW CITY-집에관한사유전에 이어 더욱 밀접한 관점으로 미술과 건축의 공유점을 모색해 보고자 한다. 서로 다른 두 장르, 즉 미술과 건축의 표피적인 문화교류방식을 지양하기 위해 집을 근거로 한 공통된 사유를 가지고 있는 한명의 미술가, 한명의 건축가가 만나 세 개의 팀을 이루고 이들이 함께 오랜 시간 동안 긴밀하게 교류하며 서로를 탐구하는 과정을 통해 두 작가의 의식이 공존하게 된 작품과 서로의 가치가 교환되어진 작품, 그리고 합의를 통해 전혀 다른 새로운 가치를 담아 낸 작품이 전시장에 구축되게 될 것이다. 이들의 새로운 사유는 전시장이라는 공적 공간과 수원이라는 도시를 매개로 관객과의 유기적인 대화를 통해 새로운 예술적 가치의 창출을 이루어냄으로써 보다 적극적이며 고무적인 파장을 일으키게 될 것이다. 집은 내 삶을 만들어가는 의미있는 공간이다. 그 안의 삶은 끊임없는 사유의 순간들을 통해 상상하며 성장하고 확장해 나가는 것이다. 삶의 공간과 인간의 의식은 복잡하고도 즉각적인 투사의 관계에 있다는 이해에서 기획되어진 이 전시는 집이라는 상징적인 의미를 통해 삶의 공간과 인간의 삶에 대한 풍요롭고 가치있는 경험을 관객들에게 던져 주리라 기대해 본다. 일상의 도시, 그 리듬을 찾아서 ● 도시의 일상 안에서 살고 있는 '나'를 구체적으로 인식하지 못하거나, 일상에서 한 발자국 떨어져 외부적 시각에서 '나'를 바라보지 않는다면, '나'는 삶의 공간을 막연하게 추상화시키면서 사는 실수를 범하고 있는지 모른다. 이번 전시는 우리들이 사는 공간에의 막연하고도 관습적인 이해를 적극적으로 시각화, 구체화시키고자 시도한 예라고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전시 '사유를 위한 집'은, 건축가와 미술가 세 그룹이 수원이라는 도시를 대상으로 일정 기간 동안의 밀도 높은 교류를 통해 공동 제작한 결과물을 소개하는 전시이다. 건축과 미술이라는 다른 방식의 언어가 충돌 내지는 소통을 하는 과정에서 나온 결과물들은, 이제 전시라는 형식을 빌어 관객을 만나고자 한다. 건축과 미술 간의 적극적인 교류가 60년대 이후 현재까지, 특히 이태리, 파리를 기점으로 한 유럽에서부터 활성화되어져 왔다고 하지만, 건축가와 미술가가 함께 작품을 제작한 공동작업의 실례는 드물다. 급진적인 건축가 개인이나 그룹들 혹은 비토 아콘치, 고든 마타 클락, 제임스 터렐 등의 미술가들이 급진적인 건축, 건축적인 미술을 실행하긴 하였으나, 그것이 영상 미디어와 미술이 만나는 경우에서처럼 매체를 통한 합일점을 찾을 수 없었던 이유는, 형식적인 스케일, 그것의 실행 방식과 기능, 비판체계, 자본에의 의탁 방식이 현저히 다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거리로 나가보자. 길을 거닐다가 마주치는, 건물 앞, 공원 등 공공장소에 설치된 조각품들은, 건축가와 작가의 직접적인 교류를 거친 결과물들이 아닐 뿐이지 말 그대로 반영구적인 공동 작업이 아닌가. 왜 우리는 이 공동작업들을 공동작업이라 부르지 않게 되었을까. 이들은 건축과(혹은 사이트와) 미술의 공동작업이라 불려지는 대신, 어느 장소에 놓여지는 '공공미술'이라는 이름으로, 도시 공간을 채워왔다. 건축가와 미술가의 교류는 없었던 일이 아니라 오히려 다른 구분의 방식으로 아주 오래전부터 지속되어져 온 일이며, 단지 이전에 행해졌던 방식이 아닌, 새로운 형식과 내용의 교류를 시급히 필요로 할 뿐이다. 비판적인 시각에서 볼 때, 대부분의 현대 도시는 역사적 과거를 각인하고 있는 실패작이라고 말해질 수 있을 것 같다. 이념과 국가, 자본과 가치가 거의 투쟁하다시피 만들어 온 도시들은, 다양한 시간의 집합인 이유로, 어느 한 시점에서 바라보았을 때는 항상 모순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는 한국의 도시들 역시 지난날들의 적나라한 흔적으로서, 이에 대한 예외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런 문맥에서, 수원이라는 도시를 기점으로 만난 여섯 명의 건축가와 미술가의 공동 작업은, 우리가 사는 도시가 '실패작'이 될 수밖에 없다고 하는 현대 도시들의 회의적인 전제를 조금 더 긍정적인 방향으로 움직이기 위한 사유의 실마리를 찾는 것으로 보여 진다. 이들의 작업들이 '내'가 사는 공간이 '나'에게 어떤 만족과 즐거움을 주는지 반추하는 지점에서 동시에 출발하고 있다는 사실은 우연이 아닌 것 같아 보인다. ● 세 그룹의 작업들이 가지는 공통적인 특수성은 이 외에 두 가지가 더 엿보이는데, 첫째는, 이들이 매체의 활용 내용과 성격은 달리 하지만, 게임, 편지 우송, 블록 쌓기, 공간 안에서의 경험 등의 행위적 요소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부분이 이 전시 전반에 걸쳐 활기와 실천적인 성격을 불어넣어 주면서, '공동작업'의 장점을 충분히 발휘하는 지점으로 보여진다. 둘째로는, 작품이 그 자체로서의 물리적 완결성을 추구하기 보다는, 포스터 배부, '공간 블록'을 집으로 가져가기, 전시된 '단편 조각' 판매와 구입 등을 통해 작품의 일부가 배포된다는 점이다. 작품들이 드러내는 일시성과 물리적 사라짐, 불특정 다수에의 확산은 이들이 추구하는 소통이 궁극적으로 사회를 향해 열려있는 사회적 소통이라는 점을 인지하게 한다. 전시 참여자들은 타 장르에서 종사하는 상대편 작가와 공동 작업을 하는 동안, 각자에게 익숙한 표현수단을 때로는 포기하거나 과감히 변형을 시도한다. 익숙하지 않은 상대방의 사유 방식과의 긍정적인 타협점을 찾기 위한 노력이 각 그룹에서 뚜렷한 변별성을 가지면서 드러난다는 점은 고무적으로 보인다. 윤근주×신기운의 작업을 보면 '건축가와 미술가의 공동작업'이라는 전시의 형식을 이해하는 첫 걸음을 내디딜 수 있을 것 같다. 이들의 작품, '협작(協作)'은 사물을 가루상태로 갈아서 환원시켜버리는 신기운의 영상 작업과 윤근주의 공간 측정을 위한 단위자의 개념(talk to the house (2006))이, 축소된 공간을 상징하는 듯 열린 육면체("블록")를 매개로 매끈한 협동 작업을 시도한 것이다. 건축가의 개념인 '단위 공간'이 미술가에게 갈아 낼 수 있는 소재로 제공 되고, 역으로 미술가의 영상 작품이 건축가가 제시하는 단위 공간, 곧 '공간 블록'이 된다. 이 공동 작업은 개념과 형식을 공유한 공동작업의 방식을 보여주면서 타 장르간의 협업의 가능성 자체를 즐겁게 명제화 시키고 있다. LCD화면 안에서 가루가 되어 서서히 없어지는 공간은, 관객이 집으로 가져가는 공간들에 의해 오히려 확산되어지고 상상되어질 것이다. 이 단위 공간들은 약 천 명에 달하는 수원 시민들에 의해 갤러리 밖으로 이동이 되고, 그 안에는 무언가가 담겨지거나 혹은 빼어지곤 할 것이다. 상상을 통해 내가 살고픈 집이 되기도 할 것이며, 학교가 될 수도 있고, 사물을 담아두는 사물함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이 최종적으로 무엇이 되던, 그것을 가져가는 사람의 감성과 취향을 드러내는 기능적인, 혹은 상상이 가득한 공간이 되어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나머지 그룹들은 좀 더 실제적인 도시 공간에서 작업의 동기를 찾고 있다. 박종민×정상현의 "죽음의 한 공간"은 이 사회에서 죽음을 기리는 영안실, 장례식 등의 공간들마저 지나치게 프로그램화 되어져 버렸다고하는 씁쓸한 사실에 기인하여, '죽음을 기릴 수 있는 특별한 장소를 설계해 보면 어떨까'라고 상상하는 건축가의 도면 한 장에서 출발한다. 서승모×한정림의 "수원의 行間을 읽다"는 수도권에 위치한 수원이라는 도시를 심리적, 지형적으로 접근하면서, 새로운 도시 공간 이해의 방법론을 제시하고 있다. 이 그룹은 수원을 시민들의 사적인 이야기×구획된 지도로 바라보는 병행구조를 설정해 '토지라는 공적인 공간×시민들의 이야기가 담긴 사적인 공간' 들의 집합이라는 새로운 방식의 도시구조를 설정해본다. 이 도시의 구조를 이루는 기본 요소라고 할 수 있는 사각형태의 얇은 판, "단편/ 短篇×斷片"들이 그들이 개발한 새로운 유통구조에 대입되어 우연적 관객의 참여에 의해 이 도시 구조 안을 순환하도록 유도된다. 우편시스템, 관객이 읽는 도시민의 이야기, 수원地價 비례로 판매되는 단편이라는 작업의 삼단계 구성은 존재하는 시스템을 적극적으로 응용한 가상의 유통 시스템을 이루는 것이다. 관객은 수집된 도시민들의 꿈이 기록된 이야기들을 하나씩 읽다가 갤러리를 나오면서 문득 생각하게 된다. 내가 구입한 이 작가의 '작품'이, 결국은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로 만들어졌고, 그 중 마음에 드는 이야기가 있어 구입하려 했더니 가격은 그 지역 수원 지가의 천 분의 일이라니... 예술작품의 가치, 노동의 진정성, 작가의 저작권, 자본주의 구조의 불합리에 대한 질문들이 관객이 들고 있는 한 조각의 단편을 통해 꾸준히 일어나고 있다. 그렇다면, 이번 전시에서 만나게 되는 이 작품들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급진적인 건축물인가? 아니면, 건축적인 미술품인가? 두 경우가 다 아니라면 단적으로 무엇인가? 작가들 간의 공동작업이라고 하기엔, 미술과 건축이 만나는 지점에서 발생하는 시각의 특수성을 놓치게 되며, 미술가와 건축가의 공동작업이라고 부르기엔 그 앞을 가리는 선입견이 많다. 이번 전시에서 소개되는 작업들-미술가의 추상적인 미감과 건축가의 구체적인 감각이 만나는 지점-을 미술작품을 보는 관점에서 보려 하거나, 건축가의 조형작품으로 이해하려 든다면 안 될 것 같다. 그러는 동안 이들이 어렵게 이룬 소통의 영역이 간과될 수 있기 때문이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신호등의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다가 문득 늘 지나다니는 길이 무척 생소하게 느껴지는 경험을 했다. 귀가 멍해질 만큼 소음이 가득한 큰 길가에 서서 이 '도시'를 바라보았다. 이 순간 들려오는 차 소리, 이 도시 어딘가에서 크게 웃거나 대화하고 있을 사람들, 어린아이가 울어대는 소리, 초등학교에서 울려 퍼지는 종소리, 지하철 역내의 안내 방송, 깜빡이는 신호등, 교통 체증에 서 버린 차들, 새로 신축하는 거대한 빌딩... 이 모든 것들이 감히 상상 할 수 없을 만큼 치밀하게 짜여져 우리가 사는 이 공간의 리듬을 구성하고 있다. 이 리듬의 공간은 우리로 하여금 내일이 오면 또 다시 깨어나 일하러 가게 하고, 사람을 만나거나, 사무실에 앉아 컴퓨터를 켜게 한다. 도시는 사람들의 반복적인 일상의 리듬들이 우연히 섞이고, 조율되고 움직여가는 거대한 흐름과도 같다. 치밀한 리듬은, 그것으로 구성된 음악은 몸과 마음을 감흥시키는 일종의 정화 작용을 일으킨다. 정화작용을 일으키는 리듬을 가지는 도시는 단지 상상에서만 가능한 이상일 뿐일까. 박종민이 그린 도면을 건네받은 미술가 정상현이 이를 '이미지'로 바라보고 재해석한 "죽음의 한 공간"은 관객을 재현된 공간 안으로 초대하여 바깥 풍경을 바라보게 한다. 미술가에 의해 재현된 도면은 더 이상 도면이 아니며, 건축가가 생각하던 죽음을 기리는 공간도 더 이상 아니다. 바닥에 프린트된 불규칙한 배열의 이미지만큼이나 눈앞에 펼쳐지는 영상 이미지 역시 불규칙하고 거칠게 바뀐다. 이 공간은, 건축가와 미술가의 죽음의 공간에의 다른 이해가 교차되는 곳이며, 우리의 공감각이 교차되는 곳이다. 완결성을 지향하지만, 이미지에 불과한 하나의 세트 같은 공간이다. 어쩌면 우리의 눈과 몸이 미술과 건축을 통념적으로 이해하는 동안에는 깊이 느낄 수 없을, 생소하면서도 무척이나 매혹적인, 리듬이 살아있는 공간이다. 우리는 종종 일상적인 도시를 생소하게 느끼는 경험 안에서 중요한 것들을 비로소 볼 수 있는 것 같다. 일상이 죽음의 문제를 마치 영원히 나의 일이 아닌 것처럼 여겨지게 하는 도시에서... ■ 홍영인

박종민×정상현_여행자의 집_Caravanserai 포스터_42×42cm_2006

박종민×정상현 ● 죽음의 한 공간 Caravanserai _ 여행자의 집 ● '여행자의 집'은 건축가의 상상력으로 빚어진 한 장의 도면을 미술가의 감성으로 재해석하는 작업이다. 도면이란 작가의 생각을 점과 선으로 표시한 과학적 해석을 바탕으로 한 그림이다. 건축가에게는 그것이 실제 건물을 만드는 기본 설계도안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면 미술가에게는 추상화된 그림의 일부분으로 인지되기도 한다. 건축가와 미술가는 감각의 영역이 다른 듯이 보인다. 공간을 인식하는 시선이나 색깔을 선택하는 주관, 과정과 결과를 만들어내는 방식의 다름은 두 사람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공부의 성격을 잘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여행자의 집'을 지으면서 그것을 경험하고 있다. 두 작가의 공통된 관심사는 죽음의 한 장소이다. 정상현은 죽음을 맞이하는 공간에 대한 관심에서 이번 작업을 출발했다. 이제는 현대인의 일상이 되어버린 낯선 공간에서의 죽음, 누군지 모를 사람들이 누워있던 차가운 침대에서 초조히 맞이하는 죽음이 아닌 내가 살던 공간, 사적이며 따듯하고 정감어린 장소에서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는 절박함을 작업에서 표현한다. 박종민에게 죽음은 삶의 어느 순간 떠올려 볼 수 있는 기억의 공간이다. 그의 건축적 장치에서 보여주는 이 상징적 공간은 닫혀있는 공간이 아닌 어디론가 출발할 수 있는 사방이 열려있는 신성한 공간으로 인식된다. 그곳은 이곳과 저곳을 이어주는 연장선에 있으며 스치듯이 지나칠 수 있는 삶의 교차로와 같은 장소이다. 이 한 장의 도면의 공간은 건축가가 말하듯이 어느 장소, 즉 가로세로가 12mx12m가 허락되는 모든 장소에 위치 할 수 있는 공간을 보여주고 있다. 도시의 빌딩 사이 또는 넓은 평원의 한 지점, 어느 섬의 높다란 절벽위에도 이 공간은 세워 질 수 있다. 도면은 현실적인 장소를 넘어선 자리에 위치 할 수 있는 공간이기에 설계자가 느끼는 장소의 영역을 이미 포함하고 있다. 미술가는 이 낯선 공간을 하나의 이미지로 인식한다. 이미 우리들의 집에는 많은 이미지들이 입혀져 있다. 구조의 내부는 시멘트임에 반해서 그것을 싸고 있는 재료들은 벽지, 장판, 페인트와 같은 유사 이미지들이다. 재료의 실용적인 특징을 넘어서 인간의 시각적 입장에서 생산된 죽은 이미지들은 도심의 아파트 안에 단풍나무의 마루를 깔고 있는 듯한, 마치 그것을 밟고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도면에 표시된 치수를 바탕으로 유사 이미지가 프린트된 여러 종류의 시트지가 전시장 바닥을 포장한다. 관람객들은 공간 내부로 들어가서 건축적 이미지들 위를 걷게 되고 실제 공간을 상상해 볼 수도 있다. (이곳에서 관람객들은 상상의 공간 속을 들여다 볼 수도 있으며 거대한 그림 위를 걷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이 이미지 공간은 실제로 느낄 수 있는 크기를 표현하고 있다. 이것은 볼 수 있는 공간이자 들어가는 공간, 지나칠 수 있는 공간을 의미한다. 이 부분은 건축과 미술의 경계이자 전체 작업의 규모를 결정하는 중요한 지점이다. 도면의 내부 공간과 외부 공간을 이어주는 지점에서는 외부의 풍경을 보여준다. 프로젝터를 이용한 이 장치는 '여행자의 집'이 서있을 장소의 풍경을 내부 공간에서 바라보는 시점으로 투사하게 된다. 이 동영상은 부유하는 작은 꽃씨와 길가에 핀 노란 들꽃, 시골의 얕은 개울가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죽음의 단상으로 찾아가는 '여행자의 집'은 우리가 살고 있는 바로 이 곳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다. 우리에게 집은 삶의 지점과 죽음의 순간이 마주하고 있는 공간이자 언젠가는 떠나야할 여행자의 숙소와도 같다. 일상의 공간에서 벗어나 '여행자의 집'을 거닐고 있는 자신의 얼굴에서 마치 문 앞에선 여행자의 모습을 발견하기를 희망한다. 포스터 ● 미술가가 세트로 만든 한 공간을 사진 촬영한 후 반투명 종이의 앞면에 인쇄하고 그 뒷면에 비춰진 이미지를 바탕으로 건축가가 바라보는 또 다른 공간을 얇은 선으로 표현한다. 앞뒷면으로 포개어진 층층의 결합은 두 공간을 하나의 공간으로 인식하게 하는 이미지다. 이 곳에는 총 세 개의 공간이 공존하고 있는데 세트로 지어진 앞면 공간, 선으로 표현된 뒷면 공간, 뚫린 문 사이로 보이는 일상의 벽면 공간이다.공간의 중앙지점에 뚫린 사각의 틀은 포스터가 걸릴 벽면의 표면을 노출시키며 세 개의 공간을 시각화 시키는 과정상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 포스터는 서로 다른 장소에 걸리게 되며 그에 따라 보이는 공간의 이미지도 달라진다.) 우리에게 죽음의 지점이란 삶과 비교해 전혀 다른 공간이라기보다 잠시 밀려서 흔들린, 약간의 차이를 보이는, 그래서 그 엇나감을 인정하기 어려운 지점이다. 그곳은 유사하나 동일하지 않은 세계이며 서로를 향해있는 두 관계가 맞닿아 있는 지점이다. 포스터는 이러한 세계를 바라보는 작은 통로이자 우리가 살고 있는 공간의 단편이다.

서승모×한정림_短篇X斷片_2006

서승모x한정림 [短篇X斷片] ; 수원의 行間을 읽다. ● [斷片X短篇] : 미디어 지도는 수원의 미디어 / 편지는 사유의 미디어 / 지도의 단편, 편지의 단편[斷片X短篇]은 한정림, 서승모, 그리고 관객소통을 위한 미디어 ● [短篇X斷片] : 작가. 건축가. 관객 서승모는 지가와 행정구역 변화를 반영한 3,000X3,000(mm)크기, 수원의 정치-경제지형을 제작한다. 한정림은 이를 200X200(mm) 크기의 225개의 斷片으로 재단한다. 그리고, 수원과 타 지역을 돌아다니며, 배포하고, 短篇을 담는다. 관객은 그들의 기억과 이야기를 기술한다. 장소성은 땅에 집을 짓고 살아가는 이들의 기억과 이야기(실제, 실제를 근거로 한 허구)로 규정되는 것이다. 이처럼, 短篇의 기술은 기억과 이야기를 통해 자신만의 고유한 사유의 집을 구축하는 행위이다. 이제 斷片은 斷片이 아니다. 어엿한 기억과 이야기가 충만한 집이며, 땅이다. 이렇게 수원성은 발현한다. ● [斷片X短篇] : 너와 나 사이, 그리고 기다림을 기억한다. 225명의 관객은 수원의 각 지역, 수원 외의 타 지역에서 단편을 기술하고, 지역 해당 우체국으로부터 경기문화재단 전시실로 우송한다. 그리고, 운송수단, 집배원아저씨의 손을 거쳐 2-3일 후에 도착한다. 한정림X서승모는 전시실에서 기다린다. 마치, 멀리 떠난 친구의 편지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斷片X短篇]은 언제 도착할까? 어떤 단편과 풍경이 담겨있을까? 225개의 [斷片X短篇]은 어떠한 형태로 조합될까? 단편 그리고, 전달을 위한 노고의 흔적, 집배원 아저씨의 손때, 운송시의 파손 흔적, 우표와 발신일, 우편 시스템의 흔적 등, 아울러 예기치 못한 사건 또한 함께 할 것이다. ● [短篇X斷片] : 수원의 行間 읽기 [수원의 행간을 읽다]. 전시 오픈과 함께 게임은 시작한다. 관객은 [斷片X短篇]의 초기위치를 바꾸고 지형의 단편을 뒤집어 이야기와 기억을 중심으로 수원지형을 재편한다. 그려간다. 써나간다. 반면, 한정림X서승모는 캠코더와 사진으로, 관객의 참여과정과 장소성이 반영된 새로운 수원지형을 기록한다. 관객은 퍼포먼스의 주체로, 작가는 퍼포먼스를 기록하는 객체로 변화한다. 즉, 게임을 통해 벌어지는 건축가, 작가, 관객의 입장변화는 고정관념적인 인식차이를 넘어 새로운 수원의 행간을 생산한다. ● [斷片X短篇] : 價値의 전환 [斷片X短篇]의 작품가치는 수원실제지가의 1/1,000로 환원된다. 그러므로, 단편의 가치는 해당지역의 지가기준에 따라 달리 평가된다. 예를 들어, 팔달구의 A지역의 평당지가가 1000만원이라면 A지역의 단편의 가치는 1만원이다. B지역의 지가가 800만원이라면 B지역의 단편가치는 8천원이다. 이와 같은 가치평가는 한정림X서승모의 작가적 역량이나 관객이 참여한 단편 내용과는 무관하다. 관객은 개인적 기호를 기준으로 [斷片X短篇]을 평가하고, 구입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실제지가와 관객의 평가차이를 인식함으로써 자본주의의 단일적 가치의 폭력성에 대해 재고한다. ● [斷片X短篇] : 에필로그 한정림X서승모는 두 가지의 병치된 중층구조를 설정한다. 이는 한정림과 서승모, 건축가와 작가, 작가와 관객, 수원과 사유로서의 집, 전시실과 외부, 공간과 장소, 경제와 미술, 또는 새로운 관계항일 수 있다. 두 가지 구조상에 [斷片X短篇]은 존재한다. 순환한다. 그렇다. 한정림X서승모는 사고의 바다에서 캐치볼을 즐기고 있다.

신기운×윤근주_협작(協作)_2006
신기운×윤근주_협작(協作)02_2006

신기운x윤근주 ● 협작(協作) 서로 함께 작품을 만들어 내는 과정. 그것은 '개념'부터 '결과물'까지 수많은 교류와 공명을 통해 이루어 질 것이다. ● 갈아 냄. 사물을 갈아낸다는 것은 그 목적에 따라 대상에 따라 무한한 이야기를 만들수 있다. 하지만, 공통적으로 갈아내면 회색빛의 가루가 되어버린다. 모든 사물이 가진 기능과 상징성등이 하나의 기계앞에서 공평해지는것이다. 또한, 사물의 사라짐과 재생시키는 영상은 실존에 대한 의문, 각각의 사물이 은유하는 것에 대한 관념들에 대해 되새김질 해보는 과정이다. 이번 작업에 시도되는 투명의 사각프레임은 사실은 하나의 플라스틱 조각일 뿐이다. 그게 사실이다. 하지만, 은유가 일어나는 전시장의 현장위에 사각프레임은 사각프레임이 아니다. 작가가 부여할수 있는 어떤의미 이외에 보는 사람 각 각의 공간에 대한 사유가 발생될 수 있는 물질이 된다. 사각의 투명 프레임의 공간에서의 존재와 사라짐과 물질화 되는 과정이 LCD 화면속에서 만들어 지면서, 관객의 공간에 대한 사유의 촉매가 되길바란다. ● LCD블록 - 공간갈기 건축을 구성하는 기본 단위 중에 하나인 '공간'을 갈아 낸다. 이 행위는 일상에서 인지 하기 힘든 공간의 존재를 알리는 효과를 획득한다. 미술작가의 개념을 이용하여 건축 읽기를 제안한다. 최종적으로 이 영상은 LCD화면을 가지고 있는 일종의 블록으로 제작되어 현장에 놓여 질 것이다. ● 공간 블록 갈아낼 공간은 일반적이지만 개인적인 경험이 담겨있는 것을 대상으로 한다. 예를 들어 초등학교 교실, 국민주택규모 아파트 등이 그 것이다. 공간의 규모를 알아채면 그 프로그램까지 상상할 수 있는 단위를 공간 블록으로 만들어 낸다. ● 쌓기 다른 팀의 작업이 전시장 내에 위치를 잡을 때까지 기다린다. 그리고, 방점을 찍듯 LCD블록을 위치시킨 후 여백의 공간에 채워내듯 또는 비워내듯 공간 블록을 쌓아 간다. 도시를 만들어가는 과정이기도 하고, 공간의 균형을 작가의 감성으로 형성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누군가의 쌓기가 마땅치 않다고 생각하면, 상대방은 그 부분을 허물어 낼 수 있다. 이는 철저히 작가 간에 공명으로 이루어 질 것이다. ● 허물기 또는 소멸시키기 전시장에 입장한 관객은 적극적으로 작품에 동참할 수 있다.' LCD블록'을 제외한 '천개의 공간블록'의 위치를 바꿀 수 있으며, 심지어 가져갈 수 있다. 이 과정은 동일한 위치에서 전시기간 동안 촬영되고 즉석으로 프린트되어, 함께 전시될 것이다. 관객이 모든 과정을 함께 하지 않더라도, 이 전시가 작가와 관객의 공명까지 펼쳐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함에 일차적인 목표가 있으며, 관객이 공간블록을 가지고 가는 행위가 결국에는 작품을 소멸시켜 갈아 없애는 개념으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 기록은 공간 갈기 영상을 만들어 내는 스냅 촬영 방식과 개념적으로 유사한 방식이다. ● 다시 공간 블록 가지고간 공간 블록은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프로그램을 담고 있는 일반적인 공간이다.관객은 전시장에서 얻게 된 공간 블록을 기준으로 그보다 작거나 큰 공간에 대해 상상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이 공간 블록은 건축을 읽을 수 있는 하나의 '자ruler'가 되는 것이다. 결국에 이 작업은, 미술을 통해 관객에게 건축 읽기가 번져나가도록 하는 의도에서 출발한 것이고, 끝없는 순환 고리를 형성하여 미술과 건축의 구별 없이 개별적 감상자들에게 새로운 의미가 파생되기를 기대한다.

Vol.20060626c | ANEW CITYⅡ_사유를 위한 집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