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개의 개인전

남학현_이상주_임성필_진형주展   2006_0622 ▶︎ 2006_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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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6_0622_목요일_05:00pm

국민아트갤러리 서울 성북구 정릉동 861-1번지 국민대학교 예술관 1층 Tel. 02_910_4465

남학현 [ㅇㅏㄴㄴㅕㅇ?!] ● 나는 선적인 요소(그리기, 드로잉)와 회화적인 요소(칠하기, 색을 올리기)가 서로 양보 없이 같은 힘으로 한 화면위에 존재함을 추구한다. ● '선적 회화-회화적 회화', '희미함-눈부심', '정적인 느낌-율동감'은 대립관계를 형성하며 한 화면 안에 혼존 하게 된다. 위와 같은 대립요소의 병치를 통해 궁극적으로 나타내고자 하는 것은 '사라져 가면서 더욱 강렬해 지는 기억들'이다. 이는 개인적으로 경험한 미술의 유희적 측면의 소멸에서 나온다. 어린시절 그리기의 가장 큰 즐거움은 장난감이나 만화를 그릴 때 느끼는 카타르시스 였다. 지나간 감정을 다시 느낀다는 것이 불가능함을 알면서도 수많은 획을 반복해 장난감을 그리는 행위는 죽은 자의 부활을 기도하는 의식(儀式)이나, 조상에게 음식을 바치는 제사(샤머니즘)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 이미지는 정확한 형태의 묘사 보다는 의식적인 행위의 기록으로서 필선이 강조된다, 이는 비슷한 굵기의 필획의 반복으로서, 행위와 시각적 감각만이 존재하는 추상표현주의 미술이나 ,드로잉과 페인팅을 구별해서 지칭하는 용어 자체가 부재하는 동양화의 개념과도 일치할 수 없는 모호한 지점에 위치한다. ■ 남학현

남학현_Bai My Studio_한지에 채색, 돌가루_240×300cm_2006
남학현_놀음 굿판 The Stage of Joy with dead men_혼합재료_가변설치_2006

이상주 ● 무엇이 우리의 현실을 색다르게 만드는가? ● 하루하루 반복되는 각박한 일상 속에서 언제나 벗어나고자 발버둥 친다. ● 오늘도 다를 것 없는 하루지만 무언가 색다른 것을 찾아 헤매는 나를 발견한다. ● 그런 내게 즐거움과 신선함을 선사해준 완벽하고 환상적인 가상의 파라다이스(인터넷) 를 찾게 된 것이다. 그것을 통해 일상에서 충족하지 못한 일부를 채우려한다. ● 이처럼 나의 현실이 자극적이고 즐거워 질수는 없는가? ● 하지만 그것은 진정한 현실이 아닌 가상의 세계인 것이다. ● 그렇다면 내가 원하는 가장 이상적인 현실세계는 무엇이며 어디에 있는가? ● 나의 작품은 인터넷의 작은 아이콘이나 픽셀로 이루어진 이미지와 실제 존재하는 이미지와 결합하여 새로운 시뮬라크르 형성함에 이루어진다. ● 이것은 가상과 실상의 공존하는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현실을 그리고자한 것이다. ● 이를 통해 무엇이 내게 진정한 현실이며 이상적인 세계인가를 찾고자한다. ■ 이상주

이상주_click_혼합재료_91×116.6cm_2006
이상주_ROOM_혼합재료_112×145.5cm_2006
임성필_구원에 대하여(series)_2006
임성필_구원에 대하여(series)_2006

임성필_구원에 대하여 ● 이번에 그가 내놓는 작업들은 "구원(救援, 九圓)" 연작이다. 작가는 그의 작업에서 그에게 주어진 화면 안에 아홉 개의 원을 집어 넣는 방식으로 자신만의 텍스트를 풀어나가고 있는데, 여기서 그가 말하는 "구원" 이라는 텍스트는 "아홉개의 원" 또는 "축복을 바라는 상태", 그리고 "화폐의 단위" 등의 몇 가지의 뜻으로 풀이 된다. 이 텍스트들은 그의 작업에 표출된 아주 단순한 형태의 아홉개의 원과 맞물려, 관람자가 의도하지 않은 상태의 기의를 관람자에게 부여함으로서 관람자로 하여금 "쾌(快)"를 불러일으키게 되고, 더불어 하나의 기표에서 파생되어지는 기의 들에 대한 확산까지도 가져올 수 있게 되는 것이다. ● 실제로 그의 작업은 그가 이름 붙힌 바대로 그리 녹록치 않다. 그가 붙힌 이름을 제외하고, 작업이라는 텍스트만을 바라보았을 때, 그의 작업은 관람자에게 쉽게 이야기를 풀어주는 동화구현 같은 친절한 텍스트가 아니다. 오히려 작가가 난해하게 뿌려놓은 "원(圓)"들은 관람자가 기존의 "원(圓)"이라는 도형에 대한 사회적인 교육과 경험으로 인해 지니고 있는 상징성과 맞물려 나락의 나락으로 이끈다. 바로 이때 즈음, 작가는 아주 단순한 텍스트 하나를 휙하니 던져놓는데, 그 단순한 하나의 텍스트는 작업되어진 화면 안의 텍스트와 맞물려 그 즉시 명쾌한 해답을 제시해버린다. 텍스트의 해답을 유추하는 과정에서 오는 진지함을 일거에 지워버리는 유쾌한 속임인 것이다. ■ 양재혁

진형주_왜곡_종이에 혼합재료_40×30cm_2006
진형주_운전하는 남자_종이에 혼합재료_47×64cm_2006

진형주_왜상(歪像)바라보기 ● 진형주의 작품에 등장하는 왜상은 우리에게 "삐딱하게 바라보라"라고 말한다. 그것들은 비틀어져 있고, 엉켜있으면서도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견고하게 자신을 구성하고 있다. 그것은 마치 예전에도 그랬었던 것처럼 당당하고, 호흡하는 듯 생명력마저 느껴진다. 성큼 다가가기에 망설여지는 이미지들이 호기심을 자극한다. 캔버스 속 이미지를 본 후 우리는 기괴한 감정에 호흡이 가빠지기도 하고 왠지 모를 편안함으로 그 이미지 속에 안주하고 싶은 기분을 느끼기도 한다. 이러한 반응은 작가가 다루고 있는 형상의 부분들이 실제의 신체에서 벗어나지 않고 있기 때문이고, 그것들이 작가의 표현방식을 통해 임의적이고 조금은 폭력적이기도 한 방식으로 재배열되어 있기 때문이다. 결국, 이미지들은 실제의 공간과 환상(fantasy)의 사이공간에서 자유로이 유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 이 사이공간은 어느 세계에도 편입되지 못하기 때문에 소외감을 느끼게 하지만 어느 곳에도 소속되지 않기에 마음껏 유희할 수 있는 자유로움을 느끼게 해준다. 이 공간에서 유기체(작품 이미지)는 신체를 구성하는 요소들을 다 가지고 있지만 이것이 인간의 육체가 그러한 것처럼 조직적으로 배열되어 있어야 할 의무는 가지지 않는다. 당위성을 잃고서 자유롭게 재배치된 신체의 조각들은 사라지기 위해 해체된 것들이 아니라 새로운 무엇인가가 되기 위해 그리고 이전에도 그랬던 것처럼 존재하고 있다. ● 하지만 이 부분들이 조합된 모습은 몽타쥬(montage)의 기법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몽타쥬는 있는 것들을 절단하고 그것을 다시 재구성하는 방식인데, 작품 속 이미지들은 그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조합된다. 이것은 이미 조직화된 신체가 다시 반죽되어 조직화되기 이전의 상태로 존재방식을 바꾸되 그 안에 이미 조건들은 다 갖추고 있어서 그것이 다시 조직화 될 때에는 그 위치만 바뀔 뿐 요소들은 그대로임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이미지들이 실제의 끈을 놓지 않고 있기에 우리는 더 큰 충격을 느끼기도 하고, 공감을 느끼기도 한다. ■ 차예지

Vol.20060627b | 4개의 개인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