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間의 大地

박인우 회화展   2006_0628 ▶︎ 2006_0707

박인우_고호의 빈자리_캔버스에 유채_160×132cm_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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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6_0628_수요일_06:00pm

한전프라자 갤러리 서울 서초구 서초동 1355번지 한전아트센터 전력홍보관 1층 Tel. 02_2055_1192 www.kepco.co.kr/plaza

인간의 대지에 관한 알레고리적 성찰 ● 풍토성을 구성하는 매개물의 총체를 문명 혹은 역사라고 부른다. 인간의 다양한 풍토에 대한 역사학적, 지리학적 연구는 우리가 지금까지 추상적·신화적으로 살펴본 원리를 구체적으로 증명해주고 있다. 어디에서건 실재는 반드시 풍토성과 시간성을 매개로 해서만 존재한다. 하지만 우리가 그 실재에 대해서 알 수 있는 것이라고는 겉모습과 사후 상태뿐이다. 대지(땅)가 이 경우에 속할 것이다. 대지는 인간에게 거주지를 제공했고, 인간은 거기에서 삶을 영위하고 역사를 잉태시켰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과 대지의 표피적 모습만보고 쉽게 감동하거나 또는 절망한다. 그 이유는 대지(풍경)와 인간의 관계에 대한 우리의 의식과 우리 육체의 외양이 표피적 시선 안에서 결합되고 있기 때문이다.

박인우_빈자리_칼_판넬에 유채_60×90cm_2006
박인우_마을_캔버스에 유채_60.6×72.7cm_2006
박인우_황야_캔버스에 유채_60×90cm_2005

시간화 된 공간 ● 박인우의 작품은 이러한 대지와 인간, 그리고 이의 관계에서 비롯한 다양한 상황들에 대한 표피적 인식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존재론적 사유의 산물이다. 그는 인간이 살고 있는 장소로서의 대지, 대지에 살고 있는 존재로서의 인간, 그리고 그 존재자들 간의 관계에서 비롯된 풍토성을 인식론적 사유의 주된 테제로 상정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시선은 겉으로 보이는 형태를 넘어서, 인간과 대지를 부합시키고자 한다. 존재자를 존재에 일치시키고 싶은 것이다. 이를테면 그의 작품 「황야」는 현재는 척박한 땅이지만 한때 문명(인간)의 땅이었을 수도, 향후 문명의 땅이 될지도 모르는 곳을 그린 것이다. '역사성(시간성)'의 지표로 선택된 길(路)이 화면을 대각선으로 가르고 화면의 분할을 방지하기위하여 한그루의 가시나무가 그림의 중앙에 배치되어 있다. 작가가 우스갯소리로 이 땅의 원주민이라고 소개한 이 나무는 화면의 주인공, 즉 존재자이다. 이 나무가 없어지면 이 땅은 그야말로 풀 한포기 없는 사막이 될 것은 물론이다. 작가의 말에 의하면 이 나무는 삶에 대한 의지와 개척정신의 표상으로 그려진 것이기 때문이다. 오른쪽 하단에 문명의 흔적과 무기력해 보이는 인간이 그려져 있다. 아마도 그는 오래전에 이곳에 살다가 세월이라는 필멸의 통로를 지나며 스러져간 인간일 것이다. 박인우가 선호하는 대지는 태초의 곳이기 보다는 '인간의 필연적인 삶의 흔적'이 깃든 곳이기 때문이다. 한편 우리가 필히 주목해야 할 곳이 화면 왼쪽의 나무상자이다. 무릇 상자라는 것은 판도라의 그것에서 보이듯이 인간 호기심의 상징이자 사건의 매개자이기도 하다. 또 김알지의 설화에서 보이듯이 잉태와 탄생을 의미하기도 한다. 결국 작가는 이 척박한 땅에서 다시금 역사와 문명의 싹이 잉태하고 있음을 시사하고자 하는 것이다. 「황야」가 문명의 가능태로서의 대지라면 「마을」은 완성태로서의 대지를 그린 것이다. 우리는 흔히 마을이라면 가족의 웃음소리, 숨바꼭질 하는 어린이들, 저녁연기 피어오르는 굴뚝 등 서정적이고 목가적인 풍정을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우리가 통상적으로 '아름답다'라고 말하기에는 너무 스산한 느낌이 감돈다. 전반적으로 회갈색의 무채색조가 화면을 차지하는 가운데, 인형이랄지 인간이랄지 모를 대상이 화면의 전면부를 차지하고 마을은 대지 저편에 옹색하게 자리 잡고 있다. 이미 누렇게 변한 나무 몇 그루를 제외하면 생명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을 듯 한 풍경에서 작가는 이 마을의 숨은 역사를 본다. 수백 아니 수천년을 지나는 동안 이 마을에서는 재판과 처형, 방화와 살육이 있었을 것이고, 그 가운데 가장을 잃은 미망인과 자식의 절규가 있었을 것이다. 전염병과 전쟁 속에, 가뭄과 기근 속에 수많은 마을사람들이 동구 밖 공동묘지로 실려 갔을 것이다. 이렇게 박인우는 동일한 대상을 보더라도 우리와는 다른 것에 관심을 갖는 데, 이는 가히 편집증적 이다. 이는 아마도 어떤 대상을 대하는 작가적 인식이 우리의 보편적인 그것과는 사뭇 다르게 발육되어 왔기 때문일 것이다. 이를테면 그의 작품에서 대상(풍경)은 하나의 독특한 역사를 공간에 담고 있는 하나의 현상으로 존재한다. 환경에 내재된 역사와 작가의 의식 안에 자리한 기억이 그 풍경 안에서 서로 결합하고 있는 것이다. 두 가지 시간성의 우연적인 합치, 그것이 바로 그의 작품에서 나타난 풍경의 공간성이다. 만약 현재 그가 「마을」을 그리고 있다면 그의 사유는 수백 년을 아우르고 이렇게 잉태된 그의 그림은 초시공간적 성격을 띠게 된다. 즉 우리가 있는 '대지'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풍경'은 그의 작품 공간속에 구현된 시간이라고 할 수 있다. 어찌 보면 그의 작품은 공간 안에 시간을 용해한 것이기도 하지만, 역으로 그것은 공간 자체가 시간화 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박인우_도시의 밤_캔버스에 유채_91×117cm_2006
박인우_명상가_캔버스에 유채_33.5×53cm_2006
박인우_블랙박스-정복자_캔버스에 유채_45.5×53cm_2005

대상의 함축과 형태의 재해석 ● 중국의 화론(畵論)에 언급된 바 있듯이 진정한 화가라면 풍경을 표현하되 외부형태의 심연에 있는 풍경의 진실을 표현 할 줄 알아야 할 것이다. 본래의 자연, 즉 본질적 자연의 가치와 그 이면에 감추어진 풍경의 존재를 그려야 하는 것이다. 박인우의 작업은 이점에 부응한다. 그의 그림을 보면 우선 작가의 시선이 포착하는 것은 외형이다. 그 외형은 곧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생태 상징의 형태다. 생태학적인 동시에 상징적인 우리 세계의 실재인 것이다. 또한 그것은 세계를 가득 채우고 있는 존재자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존재자는 다양한 존재 장소가 구체화된 것이다. 작가는 이러한 형태를 함축하여 어떤 경우에는 거의 기호적인 단계까지 몰고 나간다. 물론 이 가운데서 작가는 회화성마저 포기하지는 않는다. 이를테면 「정복자」의 경우 조각상 형태의 말머리 부분만 그렸음에도 불구하고 말의 표정이 읽힐 정도로 생동감 있게 표현되어 있어 역사를 움직여온 영웅의 지표로서 조금도 손색이 없어 보인다. 여기에 앙상한 들풀과 배경의 하늘이 작가 특유의 화면처리 방식과 어울려 가장 함축적인 표현으로 풍부한 내러티브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문학으로 말하자면 소설적 이라기보다는 시적 표현에 가깝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명상가」의 경우에서도 극도의 단순한 형태에서 사유하는 지성의 지적 풍모와 냉철한 결의가 느껴지는 듯하다. 이는 곧 작가가 분리와 결합을 통해 회화적 완결성을 추구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어서 주목된다.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대상들은 자연을 변형시키기 이전의 상태를 지향하고 있다. 이는 어떤 측면에서 인간이 모태에서 분리되기 이전 상태를 의미하는데, 개인의 차원에서는 모태이지만 문명적 차원에서는 자연 상태라고 볼 수 있다. 「지중해로 부터」의 경우 좌측 끝의 이오니아식 주두와 우측 끝의 가스레인지 부품이 함축적이지만 정확하게 표상되어 있다. 이들은 시간적으로 2천 여 년의 갭이 있으나 공간적으로 동일시되고, 꽃, 대포 등 유형·무형의 형태들에 의해 유기적 연결성을 띠면서 시공간적으로 결합되고 있다. 이러한 분리와 결합은 그가 사물의 의미를 이미 심육으로 체득하고 있다는 점을 시사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실존은 사물의 실존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풍토성에 속해 있으며, 우리 시대의 시대성에 이끌려간다. 그런데 작가는 시공간적으로 전혀 연관될 수 없을 것 같은 이미지를 한 공간에 함축함으로써 예기치 않은 미적 질서를 조장하고 있다. 이는 초현실주의자들이 선호했던 '데페이즈망'과는 사뭇 다른 것으로 고도의 인문적 사유와 지적 통찰의 결과물이다. 작가에 의하면 동일시의 동기가 되는 욕구는 두 가지 차원에 속하는데, 그 하나는 공간적인 차원이고 또 하나는 시간적인 차원이다. 공간적 차원에서는 '우리' 와 '타인' 사이를 구분하게 만드는 정체성의 욕구가 작동한다. 이 과정에서의 분열과 대립의식이 전쟁을 낳고 전쟁은 파괴와 살육으로 이어진다. 이의 반복과 치유의 과정에서 지중해 문명이 이루어졌다. 이런 점에서 보면 역사는 비극도 희극도 아닌 인간의 대지에서 순환적으로 잉태되는 사건들의 연속일 뿐이다. 결국 대지는 인간과 문명, 즉 역사의 모태인 것이다. 우리는 이런 의식을 잃어버렸지만 모태에 대한 향수는 간직하고 있다. 그리하여 작가는 우리 인간이 원초적인 모태로 회귀해서 '대우주적인 일치', 다시 말해 인간을 어머니처럼 감싸고 있는 대지와 '인간의 본성'이 완전한 하나가 되어 다시 녹아들기를 꿈꾸고 있는 지도 모른다. ■ 이경모

Vol.20060628c | 박인우 회화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