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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6_0614_수요일_06:00pm
양희아_임상빈_이소영_백기은
갤러리175 서울 종로구 안국동 175-87번지 안국빌딩 B1(참여연대 옆) Tel. 02_720_9282
그 집 지붕 위 - 넘을 수 없는 문턱에서 만나는 공허 혹은 충만 ● 이번 전시는 '지붕'이라는 공간이 화두이다. 작가들은 이 공간을 '다른 세계', '일탈의 지점', '동경의 장소', '현실과 동떨어진 고독의 공간', '경계', '위' 등으로 부른다. 이곳은 자기 동일성을 확인하는 장소도 아니고, 타자성에 의해 주체가 분리되고 중단되는 영역도 아니다. 여기는 의미화의 차원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는, 그러나 늘 같은 자리로 돌아오는 바로 그곳이다. '그 집 지붕 위'는 언어와 같은 공적인 기호들로 구축되어 있는 '지금 여기'의 너머에 존재하는 공간이다. 그리고 같은 이름의 이 전시는 말에 의해 짓눌려 왔던 '지금 여기'를 뚫고 미술이 닿으려고 부단히도 애써왔던 바로 그곳에 이르기 위한 시도이며, 그곳에 대한 이야기이다.
00동 능금나무길 박봉식 할아버지댁 옥상에 있는 의자에 앉아서 그동안 지쳐있던 몸과 마음을 편안히 하고 말도 되지 않는 상상들, 내가 꿈꿔왔던 세상과 길을 펼쳐본다. 경험해 보고 싶은 가장 아름다운 순간들을 꿈꾸는 것이다. 목청껏 노래도 부른다. 이 의자에 앉아있는 순간만은 자유롭고 행복해 질 것이다. 책도 읽고, 별도 보고, 그곳에서 우주선을 기다려도 좋다.
양희아는 현실이 반영되지 않는 상상의 장소를 만들어줄 물건들을 선보인다. 「○○동 능금나무길 박봉식 할아버지댁 옥상에 있는 의자와 천매트」는 현실과 이상 세계를 연결하는 매개물이다. 작가는 의자와 천 매트로 '여기'와 구분되는 공간을 만들고, 의자로 '지금' 너머에 있는 시간으로 인도한다. 이 오브제들은 박봉식 할아버지 댁 옥상 위에 펼쳐짐으로써 '지금 여기'를 뛰어넘어 진공의 시간 속에 놓인 '거기'를 만들어냈다. 작가는 '거기'가 현실에서 번번이 좌절되는 꿈이 실현되는 가능성의 장소이며, 현실에서 그것을 끝내는 이루게 할 힘을 주는 장소라고 한다. ● 이 공간에서의 휴식과 상상은 지속되지 않는 순간에만 이루어지는, 그러나 늘 그곳에 있는 이상과 같은 것이다. 상상에 환각제 더하기, 이성을 해방시키기 혹은 해체하기, 오류를 철석같이 믿게 만들기. 이것들을 가능하게 하는 장소가 양희아의 물건들에 의해 만들어진다.
옮겨진 정원_집집마다 옥상으로 올라간 화분들과 채소를 키우는 풍경을 본다. 이 식물들은 바닥의 땅으로부터 이탈한 것 혹은 지표를 상실한 것이다. 이러한 심리는 아마도 가까이 두고 싶은 소유욕이라기보다는 잃어버린 것에 대한 애착과 욕망의 표현으로 읽힌다. 이로부터 일말의 위안을 삼는 것이다. 잃어버린 자연을 인공자연으로 대체하면서. 사물에 깃든 자연물의 도상은 아마도 이런 과정에서 생산되고 소비되는지도 모른다. 토템적 신앙심이 현대에는 상품으로 투영된 것은 아닐까...
47개의 하늘 그리고 비행물체들_쇼핑하면서 만나는 상품들 중에는 서로 유비적 성격이 있으면서 특수한 상징을 내포하는 것들이 있다. 그것은 소비자들에게 소유할 수 없는 것들의 이름과 이미지를 판다. 여기 구입한 목록을 열거해 보면, 자일리톨 레인보우-껌, 파티 스노우-분사기, 120구 은하수-트리 장식, 번개표-백열전구 등이다. 놀라운 것은 어떻게 하늘에 있는 크기를 잴 수 없는 것들을 사물에 가둘 수 있느냐 하는 점이다. 그리고 그것들의 의미를 팔 수 있는 것으로 대체했다는 점이다. 이것은 우리들의 문화를 구성하는 가치들에 대하여 무언가를 말해주고 있다. 새삼스러운 얘기들이지만, 이것은 광고의 문법이다. 거대한 자연물이 작은 상품으로 투영되고 우리가 그것들을 소비하면서 정신적 만족과 심리적 안락함을 꿈꾸게 한다. 관광산업은 이 법칙으로 움직이는 표본이라 볼 수 있다. 이점이 우리가 만족해하는 해방기제로 교묘히 작동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남아있는 문제, 즉 소유할 수 없는 것이 어떻게 매매되고 있느냐하는 점이다. 현대판 '봉이 김선달의 이야기'가 끊임없이 만들어지고 있다.
임상빈은 일상의 작은 애착의 대상들과 소비되는 상품들에서 '거기'에 대한 동경과 '거기'에 닿으려는 부질없는 노력을 발견한다. 「옮겨진 정원」은 일상의 기성품들을 쌓아 올려서, 화분 정원을 만들고 간이 텃밭을 가꾸는 옥상의 풍경을 보여주고자 한다. 작가는 자연을 잃어버린 우리의 일상을 언급하고, 인공물로 위안을 구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이런 행위 속에 숨어 있는 애착과 욕망을 읽는다. 사라져 버린 것과 도달할 수 없는 것을 인공물을 통해서라도 얻겠다는 부질없는 노력. 이것은 인간에게 주어진 삶의 숙명이다. ● 임상빈의 다른 작품 「47개의 하늘 그리고 비행물체들」은 잃어버린 세계에 대한 대안을 공적인 장의 물건들에서 발견하고자 하는 시도를 보다 선명하게 드러낸다. 여기서 작가는, 각 상품의 브랜드명과 기능 사이의 유비관계, 그리고 거기에서 비롯되는 통속적이면서도 독특한 의미관계에 주목하고 있다. "자일리톨 레인보우"[껌], "파티 스노우"[분사기], "120구 은하수"[트리 장식], "번개표"[전구] 등과 같은 이름은 상품의 상상적인 대상과 그것이 지향하는 가치를 보여준다. 상품의 기능 너머에 있는 가치들은 제품의 이름 혹은 그 기능의 벌어진 틈 사이를 비집고 그 실체를 드러내려 한다. 작가는 그것을 포착하려 하지만 그것은 '지금 여기'의 기호로는 잡을 수 없다. 그래서 작가는 그것을 47개의 색상을 슬라이드 영상으로 쏜다. 공허하게 빈 것 같지만 빛으로 충만한 슬라이드 영상은 '거기'의 가치에 대한 기표가 된다.
이소영은 만날 수 없는 두 세계를 두 개의 이야기를 통해 보여준다. 「꿈꾸는 자들의 연인」은 두 개의 채널로 구성된 비디오 작품이다. 두 개의 이야기가 순차적으로 보여 진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선적인 시간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하나의 이야기를 구성하는 두 주체가 별개의 화면으로 제시되기 때문에 병렬의 구조도 가지고 있다. 두 화면의 두 주인공은 짧은 순간 지붕 위에서 스쳐갈 뿐 어떤 매듭도 만들지 못하고, 작품은 수직과 수평의 평행선 구조를 띤다. 이것은 이야기의 주인공들의 운명이기도 하다. ● 첫 번째 이야기의 초로롱새와 블링크새는 서로 다른 두 시간, 즉 과거가 반복되는 시간과 과거는 흔적 없이 사라져 버리는 시간을 산다. 이들은 시간이 멈춰진 곳, 지붕 위를 향한다. 그러나 긴 여정에 비해 지붕에 머무는 시간은 순간일 뿐이다. 그들은 서로 만나지만 찰나의 시간에 스쳐갈 뿐이다. 두 번째 이야기의 그랑이와 엘스는 자기의 정체성으로 고민한다. 한 뼘 키의 사람들 속에서 큰 키로 고민하는 그랑이와 온갖 종류의 가면을 가졌지만 늘 우울한 엘스는 자기가 속할 세상을 찾아 떠난다. 그리고 그들은 지붕 위에서 만난다. 부정하고자 했던 각자의 정체성은 서로에 의해 더욱 뚜렷해진다. 첫 번째 주인공들은 지붕 위로의 여행을 반복하고, 두 번째 주인공들은 더 큰 상실감에 돌아선다. 이 작업에서 지붕 위는 화해할 수 없는 시간이 정면으로 만나고, 부정할 수 없는 정체성이 확인되는 곳이다. 이소영에게 '거기'는 반복과 상실의 장소이다. 그렇지만 이곳은 다시 돌아갈 마지막 희망의 장소이기도 하다.
옥상 위에 올라가면 어김없이 돌아가고 있는 환풍기의 프로펠러가 있다. 바람이 부는 방향으로 빙빙 돌며 스르르 움직인다. 때로는 바람 한 점 없이 조용한데도 혼자 막 돌고 있는 이상한 환풍기들도 간혹 있다. 건축물의 가장 높은 이곳에서 아래의 수많은 공간들과 깊은 땅을 이으며 공기를 순환시킨다. 이런 환풍기들을 보노라면 과연 이곳은 어떤 모양으로 어떻게 얽혀서 있을지 궁금하기만 하다. 어쩌면 아무도 모르는 거대한 몸집을 숨긴 생물이 사는 게 아닌가하는 상상마저 들게 한다. 신화 속에 나오는 거대한 용처럼 꿈틀거리며 이 곳 속에 숨어있을지도 모른다. 각각의 공간들을 연결하지만 여지없이 그 실체를 드러내지 않는 수줍은 동물 같다. 조용히 숨을 쉬며 자신의 일부이자 전체인 이 건물 속에 기생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하나의 거대한 몸이지만 수많은 공간을 이으면서 여러 가지의 다른 모습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프로펠러 머리 아래로 가진 긴 촌충 같은 몸은 건물 속에서 날마다 조금씩 커가며 살지도 모른다.
백기은은 지붕 위에 불쑥 튀어나와 스르르 돌아가는 환풍기의 프로펠러에 생명을 부여한다. 「환풍기 괴물이야기」는 이러한 상상이 만들어낸 괴물을 보여준다. 빙빙 돌아가는 돌출된 프로펠러는 그 아래에 거대한 용을 숨기고 있었다. 작가는 철사를 구부리고 매듭짓기를 반복하여 미로 같은 환기구에 기생하는 이 생물체를 만들었다. 몸의 연장인 거주 공간, 그것의 물질적인 실체인 건물은 내부에 생물의 내장과도 같은 미로들을 품고, 그것은 살아서 꿈틀거린다. 기괴한 상상력으로 내 몸은 환풍기의 괴물과 동일시된다. 천연덕스럽게 환기통 안을 꿈틀꿈틀 돌아다니는 괴물을 상상하는 것만으로 몸은 신기함에 간질간질하다. 백기은에게 지붕 위는 일상에서 조금 비껴나 공상하게 하는 공간이 된다. ● 네 명의 작가들은 '거기'로 가기 위해 이성을 넘어서는 이성, 흔히 '환상'이라고도 불리는 것의 방법론을 작품에 끌어들이고 교묘하게 '정상(正常)'과 '이상(異常)'의 경계에 선다. 그들의 작품들에는 쉽게 눈치 채지 못할, 어긋난 상상과 환각, 착란 등의 기미가 서려있다. 미술은 어떤 언어로 무엇을 말해야 하는가? 현대 작가들을 계속해서 괴롭히고 있는 이 문제에 대해 이들은 비이성의 언어, '환상'의 언어로, '거기'를 말해야 한다고 답한다. 그런데, 환상의 언어는 일상의 언어 속에 이미 내재해 있고, '거기'는 '지금 여기'에 숨어있다. 여기! 여기! 보이지 않는가! ■ 이임수
Vol.20060704a | 너 어제 그거 봤니?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