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요한 그리기;내면적 사유

2006 경기문화재단 기획   2006_0720 ▶︎ 2006_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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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6_0720_목요일_06:00pm

김성룡_김을_유승호_윤석만_이재삼_임만혁_전민경_정경희_정용성

경기문화재단 전시장 경기 수원시 팔달구 인계동 1116-1번지 Tel. 031_231_7289

육체적 서사 혹은 실추된 삶의 승화로서의 회화갈망된 시선은 눈꺼풀을 반쯤 내린다. 나는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의 그림들을, 그 놀란 듯한 정중함을 좋아했다. 오직 이곳만을 보고 있지 않은 눈. 예전 세계에 중독된 얼굴들. 두 눈으로 바라보는 것과 동시대가 아닌 눈. 반쯤 감은 눈. 포식한 사자의 눈. M과 함께 우리는 1997년 여름 동안 반쯤 감은 이 놀라운 눈꺼풀들을 조사하러 갔다. 그것들은 마치 보이는 것을 가리기 주저하는 동시에 드러내지도 않으려고 주저하는 베일, 인간의 두꺼운 피부에 씌워진 매끄럽고 희미한 베일들 같았다. (파스칼 키냐르) ● 오늘 왜, 미술계는 다시 '그리기'에 대한 집요한 관심으로 뜨거운가? 회화는 여러 차례의 사망 선고에도 불구하고 한번도 미술계에서 퇴출당한 적도 자발적으로 떠난 적도 없었다. 주지하듯 1839년 다게레오-타이프 사진의 발명과 더불어 유명해진 폴 들라로쉬의 "오늘부터 회화가 죽었다"는 선언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더니즘 시기 내내 주기적으로 회화에 대한 사형집행서가 재발행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누구도 그것을 집행하려고 하지 않았다. 아서 단토(Arther C. Danto)는 회화의 종말에 대해 언급하면서 사형집행이 계속 꾸물대는 바람에 사형집행대에 세워진 생명이 결국 장수하게 된 셈이라고 말했지만, 그것보다는 미술계가 본질적으로 회화의 죽음을 원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미술사적 패러다임 내에서 회화의 자성(自省)을 촉구하는 자발적이고 자생적인 발전적 사건으로 전환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실질적으로 이런 선고의 배경에는 회화가 과거 수세기 동안 자신을 내맡겼던 그런 유형의 진보적 발전을 허용할만한 여지가 거의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회화가 아닌 다른 장르의 미술이 그 대안의 열쇠를 거머쥐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바도 아니다. 어쩌면 이는 회화가 더 이상 역사 발전의 주된 운반체가 아니라는 것과, 따라서 회화는 미술계를 정의하는 여러 매체들과 실천들의 개방적인 연접성 속의 하나의 개체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의미로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이처럼 회화는 아주 오랫동안 지배적인 미술양식이었다가 이제는 다양한 미술양식 중 하나가 되었지만, 현재는 분명 집중적인 관심의 대상이 된 것만큼은 사실이다. 젊은 작가들의 회화가 대형화랑의 기획전에 초대되고, 하이퍼리얼리즘류의 구상미술이 국공립미술관에서 개최되는 등 가히 회화의 춘추전국시대라도 된 느낌이 들 정도니 말이다. 그것도 형상성 혹은 구상성이 강한 회화가 대세를 이루고 있으니, 벌써부터 젊은 작가들의 새로운(?) 추상회화가 머지 않아 등장할 것이라는 예측이 회자되고 있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어쨌거나 오늘날의 회화는 하이테크놀로지와 미디어 아트의 등장과 범람이라는 시대적 추이로 인해 이전 시대와는 변별되는 새로운 위기에 직면한 감이 없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새로운 시기에 진입했음을 자각한 회화들은 다시 한번 자신의 존재 근거를 되짚어보고 기존의 양식과는 다른 새로운 조형언어를 주조해내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정작 오늘의 회화가 갖는 그 이전의 회화와의 변별성은 무엇이고, 그것이 시대정신(zeitgeist)과 연동되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공하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 투성이로 남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술을 구원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장르가 회화라는, 거부할 수 없는 암시(?)의 근원은 대체 어디로부터 오는 것일까?

김을_종이에 볼펜, 수채_50×50cm_2004
김성룡_무제_판화지에 볼펜, 색연필, 아크릴채색_155×106cm_2005
윤석만_벌거벗은 임금님_종이에 펜_71×100cm_2006

오늘날의 회화는 그 자체의 본질인 '그리기' 중에서도 형태적인 동시에 물질적이며, 물질적인 동시에 행위적인 '드로잉'(drawing)에 천착하는 방향으로 선회하고 있다는 느낌마저 든다. 뿐만 아니라, 드로잉 혹은 그리기라는 근원적이고 함축적인 장르에 따라붙는 원초적 질료들, 예컨대 목탄, 콘테, 연필, 수채 등의 재료적 특성에 근간한 작업에 대한 집중 혹은 관심은 미술이 다시 '원초적 그리기'라는 회화적 본질로 돌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어쩌면 이것은 그리기를 통해 이 시대에 화가로 사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며, 왜 하필 이 시대에 화가가 되기를 원하는가라는, 당연하지만 절박한 질문과 맞닿아 있다. 그러니까 근대를 전후한 예술가의 패러다임이 환기하는 모범적인(?) 예술가적 전형이라는, 그 전설적 신화가 요구하는 무명과 궁핍과 고통의 시기를 겪을 필요가 없을뿐더러, 즉각적인 인정과 물질적 행복을 기대할 수도 있는 이 시대적 상황에서 화가가 되는 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냐는 질문이 그것이다. ● 원초적 질료의 사용과 원초적 감각의 소유자로서의 화가는 어떤 상관관계가 있단 말인가? "화가는 눈에서 손놀림을 통해 붓에 이르는 긴 과정 동안에 얼마나 많은 것을 잃어버리는가?"라는 폴 발레리의 언급대로라면, 이들 작가들은 이 괴리감을 최소화하기 위한 방편으로 원초적 재료에 집중하는지도 모르겠다. 이는 곧 회화가 다시 감각의 문제로 환원될 수밖에 없음을 천명해주는데, 실재적으로는 회화가 사유와 감각의 일치라는, 즉 '체화된 의식'으로서의 몸의 사용이라는 문제와 맞물려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된다. 20세기 현대회화는 지적이고 존재론적인 회화와 정적(情的)이고 실존론적인 회화라는 양대 산맥의 패러다임으로부터 그다지 자유롭지 못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더군다나 지난 십 수년간 미술은 '그린다'는 원초적 행위로부터 떨어져 나와, 카메라와 컴퓨터와 비디오가 대신하는 단일하고 기계적인 메커니즘에 몸을 맡기고, 그로부터 파생되는 육체의 심각한 정체와 둔감함을 느껴야만 했다. 몸의 심각한 위기라는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문제에 당면한 것이다. 이때, 원초적 질료를 통한 '그리기'는 세계와 주체와의 생태론적 친화성을 위한 가장 원초적 훈련의 일환이며, 신체적 역능의 잠재력을 치유하는 복원기능을 지닌 최적의 장르가 아닐 수 없었다. 주지하듯 근대 이후의 미술은 장르와 양식, 사조와 코드들로 무장한 채 그리기에 내포된 이런 야생적 의미를 외면함으로써 스스로의 회화의 종말을 초래한 면이 없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 회복되어야 할 것은 단순히 '회화의 회복'이 아니라, '신체적 사건'으로서의 회화의 진정성을 회복하는 일일 것이다.

이재삼_저너머_캔버스에 목탄_181×681cm_2004
임만혁_현대인06-1_한지에 목탄_210×181cm_2006

실상 이런 회화의 역사적 연원의 시초는 메를로-퐁티로 거슬러 올라간다. 신체적 사건으로서 회화를 강조한 메를로-퐁티에 따르면, 회화는 우리의 신체 속에서 일어나는 사물의 비밀스러운 발생, 즉 존재의 얼개다. 화가는 감각적?지각적 요소들을 통해서 존재를 회화화하는데, 이때 몸의 떨림으로부터 발생하는 야생적 행위로서의 감각과, 사고와 판단과 같은 인식적 행위로서의 지각이 공감각적으로 결합하게 되는 것이다. 이로서 회화는 신체적 사건의 공감각적 기록이라는 인간학적 역능을 일깨우고 성장시키는 임무를 새롭게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지금까지의 전통적인 시각개념에 근간한 회화는 폐기되고 새로운 '육화된 시각'을 필요로 하는 회화가 등장하게 된 것이다. 이 '육화된 시각'은 이미 회화의 존재론적 사건으로서의 메를로-퐁티가 주목한 세잔느로부터 태동하여 들뢰즈가 선택한 베이컨의 '회화의 외침 혹은 히스테리'로 진화하게 되었다. 어쨌거나 감각과 사유의 통합, 예컨대 화가의 원초적이며 야생적인 행위와 대상을 사고하고 판단하는 인식적 행위 사이의 역동성에 관한 회화적 표현을 구가하는 작품들은 여전히 하나의 대안적이면서도 본질적인 회화로서 유효한 것일 수 있다. 다시 말해 회화가 여전히 살의 외침을 그리고 있으면서도 고도의 사유를 매개할 수 있다는 통합적 모색의 가능성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과 같이 영상 이미지가 범람하는 시대, 미적인 것과 비미적인 것이 변별성을 잃어버린 시대, 예술이 더 이상 없기 때문에 예술이 죽는 게 아니라, 예술이 너무 많기 때문에 예술의 종언을 고하는 시대, 이 시대를 성찰할 수 있는 미술이 바로 이런 기초적 질료를 통한 몸의 원초적 사용과 더불어 생장한 회화가 아닐까? 『집요한 그리기-내면적 사유』전은 지난해부터 올 상반기에 걸쳐, 경기문화재단이 발행하는 『기전문화예술』의 기획물의 일환으로의 '작가 대 작가'라는 컬럼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기획은 흔히 미술의 기초 재료라 일컫는 연필, 목탄, 펜, 콘테, 수채를 주재료로 작업하는 작가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재삼·임만혁(목탄), 유승호·윤석만(먹과 펜), 정경희·최용석(목탄, 펜) 김을·전민경(수채, 펜), 정용성·김성룡(목탄, 볼펜)이 서로 짝을 이뤄 다루어졌다(전시의 구성조차 이런 그루핑(grouping)의 유기적 연동 속에 이루어졌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전시에는 최용석이 제외되어 있다). 기획자의 변에 따르면, 소위 이런 작업들이 "미술장르에서 하위 생산품이라는 식으로 천대를 받으며 작품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수난을 받아왔다"고 지적하면서, 애당초 하위적 범주라는 인식의 문제를 넘어서 단색조의 회화만의 소박과 투명성, 그리고 내밀한 진정성을 보여주고자 한다고 밝히고 있다. 어쩌면 이런 작품들이 미술시장에서의 홀대가 있을지언정, 회화의 자기지시성 혹은 진정성이라는 측면에서는 암묵적으로 긍정적인 평가가 존재했을 것이다.

전민경_neverending story_롤에 펜_2004
정경희_기억을 날리다_캔버스에 한지, 목탄, 펜, 오일_80.5×130cm_2005
집요한 그리기;내면적 사유展_경기문화재단 전시장_2006

그렇다면 이들이 그리기 혹은 쓰기에 유달리 집중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실상 그리기 혹은 쓰기는 일종의 행위이며, 감각의 연장이며, 사물을 보는 시선에 다름 아니다. 이는 작가의 내적 충동을 가장 잘 반영하는 동시에 회화 자체의 육체성을 담보하기에 가장 적합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욱 절실한 것은 선정된 작가들이 원초적 의미에서 화가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태생적 존재가 아닐까하는 생각이다. 이들 회화적 작업이 돋보이는 것은 실추된 삶을 회복하고자 하는 예술가적 자의식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점, 이것이 작업실에서의 지난한 시간과의 고투와 인내로부터 생산된다는 점, 따라서 여전히 진지한 존재론적 고민을 담고 있는 밀도 있는 인간적인 행위라는 점 때문이다. 예컨대 이들 작품들은 흐물흐물한 점액질의 상상력이 분비해낸 이미지들로 가득 찬 회화적 파토스로 표현되거나, 새로운 재현의 코드로 만들어지거나, 언어와 사물의 관계가 메타언어적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그러나 어딘지 클리셰(Cliche)적 혐의를 부인하기 어려워 보이는 까닭은 무엇인가. 예술이 관자의 발걸음을 오랫동안 붙잡아두는 까닭은, 보통 그 표현기법이 새롭거나 기발한 경우 혹은 그 의미가 쉽사리 해독되지 않아 관자의 지적 호기심을 유발하는 경우일 것이다. 이들 작업에서 아쉬운 점들 중 하나는 더 이상 새롭지 않은 진부한 질료지만, 독특하고 독창적인 표현기법으로 가시화되었으면 하는, 늘 까다로울 수밖에 없는 관자로서의 바램이고, 다른 하나는 질료라는 형식의 문제를 떠나 내용적으로 중층적 의미의 결여를 수사학적으로 해결하는 문제이다. 어쨌거나 상징적인 의미의 그물망에 포섭되지 않는 실재계적 요소인 '응시'라는 것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인데, 이것이 예술의 본질로부터 동떨어져 있다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결국 '응시' 혹은 '물자체'를 상정하는 회화야말로 쉽사리 해독을 허용하지 않는 'non-sense'의 세계인 동시에 'para-doxa'의 세계로 관자를 초대하는 것이다. 이런 회화야말로 긍정적인 의미에서 낯설고 불편하게 만드는 회화, 기존의 패러다임에 지속적으로 의문을 제기하는 회화일 것이다. 이런 회화야말로 절대적으로 필요할 뿐만 아니라, 이 시대에 지속 가능한 회화가 아닐까? ■ 유경희

Vol.20060724b | 집요한 그리기;내면적 사유展